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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천왕사(新羅四天王寺) 건립과정(建立過程) 재고(再考)
Reconsideration on the construction process of the Sacheonwangsa Temple in Silla 원문보기

건축역사연구 : 한국건축역사학회논문집 = Journal of architectural history, v.28 no.2, 2019년, pp.77 - 90  

이정민 (와세다대학 이공학술원) ,  미조구치 아키노리 (와세다대학 연구원)

Abstract AI-Helper 아이콘AI-Helper

The Sacheonwangsa temple in Silla was completed in 679, just after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In recent years, we have been critically considering the history of the chronology based on the existence of 'Geumdang of the previous generation', which has emerged through the research repo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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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정의

  • 본 연구는, 근년 사천왕사지 발굴조사보고서 등을 통해 대두된, ‘선대금당’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제 편년관을 건축사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나아가 새로 확인된 금당지 내 선축기단유구의 축조시기와 성격에 대한 재해석을 기초로 사천왕사 건립과정을 재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여기까지 ‘선대금당’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제 편년관에 대해 건축사적 관점에서 재검토해 왔는데, 이하, 여기에 금당 차양칸 증설의 경위에 대해 약간의 고찰을 더해두고자 한다.
  • 이상의 고찰 내용을 바탕으로 사천왕사 건립과정을 재구성해 제시하는 것으로써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 32) 전술한 대로, 금당지 내 선축기단유구와 후축기단부에 관해서는 기단축조단계에서 설계변경이 있었다고 보일 뿐, 前身건물 즉 ‘선대금당’이 존재했다는 확실한 건축·고고학적 근거는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논점은, 사천왕사 창건과 관련해 문호왕법민조와 선덕왕지기삼사조의 기사 내용이 정합하지 않는다는 점, 즉 사료간 부정합의 문제로 옮겨지는 바,33) 이어 양자와 타 사료와의 관계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우선, 『三國遺事』 문호왕법민조 기사는 동의상전교조34) “以咸享元年…命神印大徳明朗假設宻壇法禳之 國乃免”, 동혜통항룡조35) “…有髙僧明朗入龍宫得神印(梵云文豆婁此云神印) 祖創神逰林(今天王寺) 屢欀隣國之冦”의 기사와 정합하는 반면, 동 선덕왕지기삼사조의 기사 내용에 대응되는 사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 이제 왜 차양칸 증설이 필요하게 되었을까 하는 문제가 남는데, 이하, 구조·기능의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한 바를 적어보고자 한다.
  • 사료는 한정되어 있어, 현재로서는 유구 자체로부터 단서를 찾아내고 이를 문헌사료에 비추어 가며 윤곽을 파악해 가는 방법 밖에 없을 듯하다. 이하 선축기단유구와 금당지, 그리고 부지 간의 관계로부터 상기 문제에 대해 재고해 보고자 한다.
  • 선축기단유구의 위치는 부지조성 후, 측량을 거쳐 정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하 선축기단유구와 부지와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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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응답

핵심어 질문 논문에서 추출한 답변
지금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사천왕사 창건에 관한 일반적 견해는 무엇인가? 三國史記직관지에는 관부 조직인 성전이 설치된 7곳의 사원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사천왕사는, 수록된 순서나 관원 구성 등으로부터 수위의 사격을 지녔던 것으로 평가된다.1)  종래 사천왕사 창건에 관련해서는, 『三國遺事』 문호왕법민조2) 및 『三國史記』 문무왕 19년조3)에 의거해, 670년 당 침공에 대한 방어책으로서 明朗법사에 의해 신유림에의 사천왕사 창건이 건의되었고, 긴박한 상황하에 우선 明朗의 교시에 따라 彩帛으로써 절을 짓고 문두루비법을 행하여 당군을 수몰시킨 후, 절을 고쳐 지어 문무왕 19년(679)에 낙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런데, 근년 사천왕사지 발굴조사를 통해 금당지 내 선축기단유구4)가 확인되었고 이것이 선대금당지로 간주되면서, ‘선대금당’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나당전쟁발발 이전 창건설5), 통일신라후기 금당증축·익랑설치설6) 등이 대두, 사천왕사 건립과정에 관한 제설은 착종·병립하기에 이르렀다.
신라사천왕사는 언제 낙성된 사원인가? 신라사천왕사는 삼국통일 직후인 문무왕 19년(679)에 낙성된 사원으로서, 경주 낭산남록에 그 유지가 전하고 있다. 三國史記직관지에는 관부 조직인 성전이 설치된 7곳의 사원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사천왕사는, 수록된 순서나 관원 구성 등으로부터 수위의 사격을 지녔던 것으로 평가된다.
금당지 내 선축기단유구가 확인됨으로서, 발생한 사원건립과정에 관한 문제는 무엇인가? 그런데, 근년 사천왕사지 발굴조사를 통해 금당지 내 선축기단유구4)가 확인되었고 이것이 선대금당지로 간주되면서, ‘선대금당’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나당전쟁발발 이전 창건설5), 통일신라후기 금당증축·익랑설치설6) 등이 대두, 사천왕사 건립과정에 관한 제설은 착종·병립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원건립과정에 관한 문제는, 사지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일련의 유구를, 동시대 일원적 계획 하에 조영된 사원건축의 잔존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시대와 구상을 달리하는 둘 이상의 조영계획 즉, 이원적 혹은 다원적 계획에 의해 점진적으로 완성되어간 사원의 그것으로 볼 것인지에 직결된다. 藤島亥治郎의 연구7) 등을 비롯하여, 지표조사 결과에 기초해 제시되었던 건축사학 분야에서의 사천왕사 관련 제설을, 근년의 발굴조사 성과에 비추어 검증하고, 여전히 유의미한 지적만을 가려, 이를 발판 삼아 연구를 한층 진전시키는 일은 목전의 과제로 남아 있지만, 그러한 작업 어느 것도 건축 유구의 편년에 기초하게 되는 바, 그 선결과제로서 상기 문제는 재검토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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