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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IS 바로가기大韓造船學會誌 = Bulletin of the society of naval architects of korea, v.56 no.2, 2019년, pp.55 - 60
송준태 ((전)국방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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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어 | 질문 | 논문에서 추출한 답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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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Boat이란? | 진해 해군공창에서 수중익선 개발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때, 실전배치 운용을 목표로 하는 또 다른 고속정 개발건조사업이 추진되고 있었다. 당시 국내 유일한 연구기관이었던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김훈철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국내 최초로 40노트 고속을 목표로 하는 100톤급 전후 고속정에 대한 기본설계 용역 계약을 1970년 7월 한국해군과 체결하였다. 그전에 박정희 대통령은 고위 관료들을 배석시킨 가운데 김훈철 박사와 직접 대담을 해가며 개발사양과 개발완료 시한을 결정짓고 소요예산까지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 |
어로지도선의 건조공작이 진해 해군공창에서 수행된 이유는? | 강행군 끝에 어로지도선 기본설계는 1970년 12월에 완료되었고, 어로지도선의 건조공작은 1971년 2월부터 진해 해군공창에서 수행하게 되었다. 표면상 이유는 보안유지 차원이었지만, 당시 방산(防産) 전문조선소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없었고, 이미 앞 회 기고문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진해 해군공창은 강재(鋼材) 고속정을 건조 공작할 수 있는 충분한 설비와 우수한 기술인력을 갖춘 유일한 기관이었다. | |
40노트를 공식적으로 돌파한 고속정을 설계할 수 있었던 이유는? | 엄 제독님의 글에 나와 있는 것처럼, 당시 높은 벽이었던 40노트를 공식적으로 돌파한 고속정을 설계할 수 있었던 것은 변변한 기술자료 하나 없는 황무지와 같은 기술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엄 소령을 비롯해 김국호 중위, 신영섭 중위 등 설계 요원들이 자신들의 머리와 가슴으로 고속정을 개발한다는 높은 자긍심을 토대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1971년 10월 설계가 완료된 고속정은 당시 국내 유일한 강재(鋼材) 선박 조선소였던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에서 상세설계 및 건조 공작을 수행하였고, 1972년 11월 드디어 진수식을 가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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