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남종화의 상징적 거목이자 호남문화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의재 허백련(1891~1977)은 진도출신으로 소치 허련의 방계이며, 미산 허형의 제자이다. 전통 남종화 정신과 그 기법에 충실한 화격(畫格)을 자득(自得)·자화(自化)하였다. 의재(毅齋)는 광주에서 '연진회(鍊眞會)'를 발족시켜 후진양성을 도모하였고, 해방 후 무등산 아래 산장을 짓고 다도인으로서, 그리고 민족정신을 강조하고 실천했던 사회교육자로서의 또 다른 면모도 보였다. 그는 한시와 화론에 조예가 깊었고, 서예에 있어서 독특한 심미경지를 구현하는 등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의 전형적 서화가였다. 의재(毅齋)는 특히 산수화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의 화풍은 예황풍(倪黃風)의 갈필(渴筆)로써 기존 화법을 준수하면서도 문기(文氣)를 중요시 여겼으며, 탈진습기(脫盡習氣)하여 새로운 실험정신으로 끊임없이 도전했다. 의재(毅齋)의 작품세계는 화풍이나 추구하는 관점의 변화를 작품에 사용한 낙관(落款)을 기준으로, 고법(古法)과 사의간원(寫意簡遠)의 숙련기였던 '의재(毅齋)'시대, 실경(實景)과 남화(南畵)의 융합 화풍으로 절정기를 보였던 '의재산인(毅齋散人)'시대, 청담평안(淸談平安)한 신품경지(神品境地) 구현으로 독자적 화풍을 이룬 '의도인(毅道人)'시대 등 총 3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의재(毅齋)의 공헌은 동양회화의 지류인 한국회화문화의 정통 남종화에 대한 한 축을 이어왔다는 미술사적인 평가를 넘어 남도화의 보편적 정신과 지역적 특성을 바탕한 실경과 정서를 살린 창의적 계승을 통하여 현대를 잇는 조종(祖宗)이었음을 인식하고, 그의 예술정신과 전통에 대한 열정과 실험정신을 계승해야 할 것이다.
호남 남종화의 상징적 거목이자 호남문화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의재 허백련(1891~1977)은 진도출신으로 소치 허련의 방계이며, 미산 허형의 제자이다. 전통 남종화 정신과 그 기법에 충실한 화격(畫格)을 자득(自得)·자화(自化)하였다. 의재(毅齋)는 광주에서 '연진회(鍊眞會)'를 발족시켜 후진양성을 도모하였고, 해방 후 무등산 아래 산장을 짓고 다도인으로서, 그리고 민족정신을 강조하고 실천했던 사회교육자로서의 또 다른 면모도 보였다. 그는 한시와 화론에 조예가 깊었고, 서예에 있어서 독특한 심미경지를 구현하는 등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의 전형적 서화가였다. 의재(毅齋)는 특히 산수화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의 화풍은 예황풍(倪黃風)의 갈필(渴筆)로써 기존 화법을 준수하면서도 문기(文氣)를 중요시 여겼으며, 탈진습기(脫盡習氣)하여 새로운 실험정신으로 끊임없이 도전했다. 의재(毅齋)의 작품세계는 화풍이나 추구하는 관점의 변화를 작품에 사용한 낙관(落款)을 기준으로, 고법(古法)과 사의간원(寫意簡遠)의 숙련기였던 '의재(毅齋)'시대, 실경(實景)과 남화(南畵)의 융합 화풍으로 절정기를 보였던 '의재산인(毅齋散人)'시대, 청담평안(淸談平安)한 신품경지(神品境地) 구현으로 독자적 화풍을 이룬 '의도인(毅道人)'시대 등 총 3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의재(毅齋)의 공헌은 동양회화의 지류인 한국회화문화의 정통 남종화에 대한 한 축을 이어왔다는 미술사적인 평가를 넘어 남도화의 보편적 정신과 지역적 특성을 바탕한 실경과 정서를 살린 창의적 계승을 통하여 현대를 잇는 조종(祖宗)이었음을 인식하고, 그의 예술정신과 전통에 대한 열정과 실험정신을 계승해야 할 것이다.
EuiJae Hu BaekRyun is a symbol of Honam Namjonghwa and is respected as a teacher of Honam culture. He is from JinDo and is a relative of Sochi Heo Ryun and a disciple of Misan Heo Hyeong. The spirit of traditional Namjongghwa and the dignity of painting faithful to its technique have been obtained b...
EuiJae Hu BaekRyun is a symbol of Honam Namjonghwa and is respected as a teacher of Honam culture. He is from JinDo and is a relative of Sochi Heo Ryun and a disciple of Misan Heo Hyeong. The spirit of traditional Namjongghwa and the dignity of painting faithful to its technique have been obtained by themselves, and have made it his own. EuiJae organized a 'Yeonjinhoe' in Gwangju to raise his students. After liberation, a house was built under Mudeungsan Mountain. And showed another aspect as a social educator who emphasized and practiced national spirit while being a tea ceremony man. He excelled in Chinese poetry and painting theory, and expressed a unique field in calligraphy. especially worked as an artist good at poetry, caligraphy, and painting. EuiJae showed exceptional talent, especially in landscape painting. His tendency to paint was to follow Ye Chan's technique of drawing with a dry brush, placing importance on the energy of learning, and constantly trying new experiments with the technique of gisaeng. The world of EuiJae's works can be divided into three periods, based on the signature using the trend of painting or the change of perspective pursued, the era of EuiJae, the era of EuiJaeSanin, and the era of EuiDoin, which had a tendency of independent painting. EuiJae's contribution surpassed the artistic historical assessment that he had formed a big stem for the authentic Namjongghwa of Korean painting culture, which was part of Oriental painting. And recognizing that he was a fundamental teacher connecting modern times through the actual scenery based on NamDohwa's universal spirit and regional characteristics and the creative succession of emotions, he should inherit his passion for artistic spirit and tradition and experimental spirit.
EuiJae Hu BaekRyun is a symbol of Honam Namjonghwa and is respected as a teacher of Honam culture. He is from JinDo and is a relative of Sochi Heo Ryun and a disciple of Misan Heo Hyeong. The spirit of traditional Namjongghwa and the dignity of painting faithful to its technique have been obtained by themselves, and have made it his own. EuiJae organized a 'Yeonjinhoe' in Gwangju to raise his students. After liberation, a house was built under Mudeungsan Mountain. And showed another aspect as a social educator who emphasized and practiced national spirit while being a tea ceremony man. He excelled in Chinese poetry and painting theory, and expressed a unique field in calligraphy. especially worked as an artist good at poetry, caligraphy, and painting. EuiJae showed exceptional talent, especially in landscape painting. His tendency to paint was to follow Ye Chan's technique of drawing with a dry brush, placing importance on the energy of learning, and constantly trying new experiments with the technique of gisaeng. The world of EuiJae's works can be divided into three periods, based on the signature using the trend of painting or the change of perspective pursued, the era of EuiJae, the era of EuiJaeSanin, and the era of EuiDoin, which had a tendency of independent painting. EuiJae's contribution surpassed the artistic historical assessment that he had formed a big stem for the authentic Namjongghwa of Korean painting culture, which was part of Oriental painting. And recognizing that he was a fundamental teacher connecting modern times through the actual scenery based on NamDohwa's universal spirit and regional characteristics and the creative succession of emotions, he should inherit his passion for artistic spirit and tradition and experimental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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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정의
1912년(21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리츠메이칸 대학(立命館大學)법학과 입학, 이듬해 도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과에 청강생이 되어 인삼장사를 하며 주경야독하였으나 학자금을 낼 수 없어 중퇴하였다. 당시 일본화단의 활발한 움직임에 자극을 받아 화가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고 일본 각지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견학하면서 중국의 서화를 감상하고 일본화단의 대가들 작품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1915년(24 세) 남종산수화의 거목인 고무로·스이운(小室翠雲)의 門下生이 되어 2년여 동안 본격적인 화가 수업을 받았다.
이에 본 고는 근대와 현대에 걸쳐 이어지는 毅齋 許百鍊 남종화의 연원과 예술관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발현된 毅齋의 작품세계를 款識에 따라 3가지 시기별로 구분하여 각각의 시기에 드러난 심미경지와 그 특징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제안 방법
유연한 필치의 담채 또는 수묵을 사용한 寫意的 화풍과 시·서·화를 아울러 녹여내는 종합예술이다. 米山은 毅 齋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붓끝을 세워 필력을 얻게 하였으며, 文氣를 위주로 하는 남종화의 터전을 닦도록 하였다.(朴鎭柱, 『韓國의 繪畵 毅齋 許百鍊』, 藝耕産業 社, 1980, p.
마지막 ‘毅道人’시대는 자신의 확고한 예술철학으로 원숙한 경지를 이루었는데 향토적 감성이 농후하고, 관념적 산수에도 전원풍경의 실경을 혼용하여 순수자연의목가적 감성을 담아내었다. 米法 양식을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자기화한 手藝的 기량과 狂狷的 예술심미를 보여주면서 淸談平安한 신품경지를 구현하였다.
경물은 남도지방 산야의 이미지가 결합된 여유로운 사계절의 풍경과 花鳥·翎毛畵를 牧歌的으로 묘사하였다.
이 시기는 자연에 은거하여 茶道에 심취하고 도사처럼 풍류를 즐겼던 만년의 삶이 자연스럽게 투영된 ‘농경산수도’ 제작이 두드러졌다. 작품세계는 안정된 구도와 필치, 淸談 한 設彩가 조화롭고 자유자재한 운필로써 신묘함이 표출된 화풍을 구현하였다.
그리고상단 여백에는 화제시를 썼는데, 이는 毅齋 산수화 대부분에서 보이는 전형적 구도이다. 필법은 남부지방의 土山을 부드러운 필선을 활용한 鉤勒法으로 형태를 잡은후 약간 구불거리는 실 같은 선들을 엮어놓은 듯한 披麻 皴과 米點皴을 사용하여 다소 거친 질감이 느껴지는 산세를 표현하였다.
필법구사에 있어서 「芥子園畫譜」에 충실하여 고법을 준수하였는데, 수목이나 산수를 그릴 때 點을 가로로 찍어 표현하는 방법인 ‘米點山水’의 기법을 적용하였다. 화려한 색을 절제하고,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필치와 농담 운영으로 바위나 산의 처리는 가늘고 섬세한 피마준을 사용하였고, 가까운 산에서 먼 산을 바라보는 부감시(俯瞰視)의 구도로 화면을 형성하였다. 좌측 상단에 쓴 화제시는 그의 회화관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대상 데이터
毅齋는 진도에 유배를 왔던 戊亭 鄭萬朝에게서 한학을 배웠으며, 米山 許瀅에게서 서화의 기초를 익혔다. 1911년(20세) 상경하여 畿湖學校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11월, 다시 낙향하여 雲林山房에서 米山에게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1912년(21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리츠메이칸 대학(立命館大學)법학과 입학, 이듬해 도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과에 청강생이 되어 인삼장사를 하며 주경야독하였으나 학자금을 낼 수 없어 중퇴하였다.
1911년(20세) 상경하여 畿湖學校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11월, 다시 낙향하여 雲林山房에서 米山에게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1912년(21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리츠메이칸 대학(立命館大學)법학과 입학, 이듬해 도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과에 청강생이 되어 인삼장사를 하며 주경야독하였으나 학자금을 낼 수 없어 중퇴하였다. 당시 일본화단의 활발한 움직임에 자극을 받아 화가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고 일본 각지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견학하면서 중국의 서화를 감상하고 일본화단의 대가들 작품을 연구하였다.
1932년(41세) 7월 18일에는 三越百貨店 화랑에서 以堂 金殷鎬 (1892~1979)와 2인 작품전을 가졌던 것이 언론의 많은 주목을 이끌었다. 1936년(45세)에 서울 종로구 중학동에 조선미술원이 창설될 때 金殷鎬, 朴廣鎭, 金復鎭과 함께 지도교수로 참여하였다. 1938년(47세) 광주 금동에 정착하고 東岡 鄭雲葂(1906~1948), 九堂 李範載 (1910~1994), 槿園 具哲祐(1904~l989) 등의 화가들 그리고 서화에 관심있는 지역 유지들과 함께 鍊眞會를 발족시켰다.
1936년(45세)에 서울 종로구 중학동에 조선미술원이 창설될 때 金殷鎬, 朴廣鎭, 金復鎭과 함께 지도교수로 참여하였다. 1938년(47세) 광주 금동에 정착하고 東岡 鄭雲葂(1906~1948), 九堂 李範載 (1910~1994), 槿園 具哲祐(1904~l989) 등의 화가들 그리고 서화에 관심있는 지역 유지들과 함께 鍊眞會를 발족시켰다. 1939년(48세) 鍊眞會館 건립을 위해 ‘연진회원전’을 개최하였다.
1939년(48세) 鍊眞會館 건립을 위해 ‘연진회원전’을 개최하였다.
1940년(49세) 광주에서 제2회 연진회원전이 열렸고 5월에 朝鮮美術館에서 에 참가하였는데, 이때부터 ‘毅齋散人’이라는 낙관을 사용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이하 ‘國展’)가 출범하자 추천작가로 추대되었고, 國展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1951년(60세) 회갑을 맞이하여 ‘毅道人’이라 호를 명명하였다.
노년에는 민족사상으로서의 단군신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1969년(78세)에는 무등산 천제당 유적지에 단군신전 건립을 추진하였으며 건립기금 모금을 위한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1973년(82세)에 동아일보사 주최 『허백련 회고전』이 열렸으며, 이 해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하였다. 1977년(86세) 자택에서 심장병으로 별세하였는데, 광주공원에서 社會葬으로 거행되어 한국화단의 거장이었던 그의 마지막 길을 애도하였다.
1973년(82세)에 동아일보사 주최 『허백련 회고전』이 열렸으며, 이 해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하였다. 1977년(86세) 자택에서 심장병으로 별세하였는데, 광주공원에서 社會葬으로 거행되어 한국화단의 거장이었던 그의 마지막 길을 애도하였다.
이후 광주에 정착하며 창작활동을 하던 중, 1922년 (31세)에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이하 ‘鮮展’) 동양화부에서 「秋景山水圖」로 1등 없는 2등상을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등단하였다.
제자들로는 정운면·구철우·허행면·이범재·허규·김옥진·이상재 등을 배출하였다.
한국 근·현대 화단의 대가이자 남도의 다도문화를 이어 온 毅齋 許百鍊은 1891년 전남 진도군에서 許京彦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론/모형
필법구사에 있어서 「芥子園畫譜」에 충실하여 고법을 준수하였는데, 수목이나 산수를 그릴 때 點을 가로로 찍어 표현하는 방법인 ‘米點山水’의 기법을 적용하였다.
성능/효과
毅齋는 광주에서 ‘鍊眞會’를 발족시켜 <연진회관>을 건립하고 호남 지역의 서화 전통과 정신을 더욱 발전시켰다. 해방 후 무등산 아래 산장을 짓고 다원과 축산농장을 가꿔 차문화를 보급하였고, 농업고등기술학교를 세워 기술 입국을 꾀하는 등 다도인으로서 그리고 민족정신을 강조하고 실천했던 사회 교육자로서의 또 다른 면모도 보였다. 그는 한시와 화론에 조예가 깊었고, 서예에 있어서 독특한 심미경지를 구현하는 등 詩·書·畵 三絶의 전형적 서화가로서 호남 남종화의 상징적 거목으로 추앙받는 호남문화의 스승이다.
질의응답
핵심어
질문
논문에서 추출한 답변
허백련이 도쿄에 6년간 유학하면서 남종화를 수학한 스승은 누구였는가?
이러한 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변혁기 속에서 호남의 궁벽진 섬인 珍島의 향반 집안 출신이었던 毅齋 許百鍊은 戊亭 鄭萬朝(1858~1936)과 米山 許瀅에게서 한학과 화법을 익혔고, 이후 도쿄에 유학하여 약 6년간 머무르며 당시 일본의 대표적 남종화가였던 고무로·스이운(小室翠雲, 1874~1945)에게서 정통 남종화를 수학하였다. 귀국 후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전통적인 산수화를 출품하여 입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나 이후 광주에 정착하여 독자적 화필 활동과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19세기 말 개화기의 우리나라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19세기 말 개화기의 우리나라는 西勢東漸한 외세들의 개입 속에서 開化와 守舊의 갈등, 그리고 변혁을 꿈꾸는 농민혁명 등으로 인해 혼란의 시기였고, 전통과 근대가 충돌했던 격변기였다. 이 시기는 정치·사상·문화예술 활동 등 다양한 측면에서 多元主義의 양상을 보였다.
19세기 말 개화기 회화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 시기는 정치·사상·문화예술 활동 등 다양한 측면에서 多元主義의 양상을 보였다. 당시 회화의 특징은 元末 黃公望(1269~1354)을 스승으로 삼은 淸朝 南宗畫風의 자극을 받아 간일한 묘사와 적절한 濃淡의 운용으로 장엄한 자연의 골격을 강조한 세밀한 표현이 두드러졌다. 또한, 秋史 金正喜(1786~1856)를 중심으로 又峰 趙熙龍(1797~1895), 小痴 許鍊(1808~1893) 등은 寫意를 존중하고 形似를 경시하는 경향과 “文字香, 書卷氣”를 숭상하는 文人畵風이 성행하였다. 이들 중 小痴許鍊은 남종화풍을 호남지방에 고착시키는데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한 호남 화단의 실질적 宗祖라 일컫는 대화백이다.
참고문헌 (6)
Jo InHo(2001), The Breath of Namdo Art, Tajiri Publisher.
Park JinJoo(1980), Korean Painting EuiJae Huh BaekRyun, Yekyung Industrial Company.
Heo YoungHwan(1991), Art of 'ubulchulgobeob-ogujioe' (又不出古法吾手之外), EuiJae Huh BaekRyun, Samae Society.
Yang TaeSeog(2008), ART KOREA Monthly Seoul Art Korea Webzine article, uidoin Huh BaekRyun sansudo
Kim YooHeung(2016), The Study of the Painting Style by Euijae Heo, Baek-ryeon, Suwon University Master's The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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