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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논문] 알렉산드로스 모자이크
Alexander Mosaik

미술사학보 = Reviews on the history, 2004 no.21 = no.21, 2004년, pp.117 - 144  

홍진경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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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알렉산더 모자이크는 BC 333년에 일어난 이소스 전쟁의 한 장면을 재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전고고학자들은 재현된 알렉산더 모자이크의 전투장면이 알렉산더와 다리우스 3세 사이에 벌어진 최후의 전투로, BC 331년 가우가멜라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해설하고 있다. 폼페이의 모자이크는 사실 원래 헬레니즘 시대에 제작된 원작을 복사한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에 제작된 회화라든지, 로마 시대의 복사물이라든지, 알렉산더와 다리우스의 전투장면을 담고 있는 두 작품은 역사화에 속한다. 페르시아 국왕인 다리우스 3세에 대한 알렉산더의 승리는 분명 정치적 권력에 대한 프로파간다의 특성을 지닌다. 알렉산더와 다리우스 사이의 전투장면을 재현한 그림에 대해 언급된 것으로는 대(大) 플리니우스의『박물지Naturalis Historia』35서 10절의 내용을 들 수 있다. 플리니우스는 에레트리아 출신의 필록세노스가 카산드로스 왕을 위해 그 어떤 그림에도 뒤지지 않은 출중한 그림을 그렸다고 하면서, 그 그림의 내용은 다리우스와 싸우는 알렉산드로스 왕에 대한 것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알렉산더는 정치적 안목이 부족하며 무모하고 경박한 카산드로스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카산드로스에게는 알렉산더가 두려운 존재였다. 알렉산더가 사망한 이후, 카산드로스는 알렉산더가 정복한 영토 일부를 통치하는 정권을 낚아챘다. 카산드로스는 자신이 알렉산드로스를 두려워했다는 점을 절대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의 이름과 얼굴이 새겨진 금화와 은화를 찍어내었으며, 알렉산드로스와 배다른 동생 테살로니키를 처로 맞아들였으며, 자신의 아들에게 알렉산드로스라는 이름을 주었고, 알렉산드로스를 전설화시켰다. 그는 마치 자신이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처럼 보이게 하면서 왕권에 대한 자신의 합법성을 내보이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카산드로스는 당대의 최고 화가를 불러 <알렉산드로스 모자이크>를 제작토록 했다. 수많은 라이벌이나 국민에게는 자신이 알렉산드로스의 적대자가아닌, 숭배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알렉산더와 다리우스 사이의 전투장면에 대한 모자이크 복사품이 왜 폼페이의 한 개인주택에 만들어졌을까? 그 바닥모자이크는 5.82×3.13 m 의 크기를 지니고 있으며, 오푸스 베르미쿨라툼(opus vermiculatum)으로 불려지고, 약 4만개의 테세라(tessera)로 만들어졌다. 한편 작품이 놓여있던 소위“목신의 집”대지는 총 2940㎡에 해당한다. 알렉산더 모자이크는 목신의 집, 엑세드라(exedra, 접견실)에 놓여 있었으며, 이는 바로 꽤 큰 규모의 그리스식 주랑정원(perystilium) 바로 앞부분에 해당한다. 집주인은 그리스의 영웅을 묘사한 모자이크로 무엇을 의도했을까? 알렉산더 모자이크는 폼페이 벽화의 제1양식에 속한다. 제1양식에는 벽화가 없기 때문에 그 시대에는 바닥모자이크나 대리석 겉면을 모방한 덧칠이 유행했다. 목신의 집은 알렉산더 모자이크 이외에도 다른 모자이크들이 침실과 기타 방, 식당 등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자이크들의 주제들은 서로 공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목신의 집에 놓인 모자이크들은 서로간에 그 어떤 도상학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한 무엇인가 기념할만한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스의 원작에서 영웅의 이야기는 정치적 정권 찬탈의 합리화에 대한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폼페이의 개인 주택에 놓인 알렉산더 모자이크는 오직 개인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모자이크가 놓인 장소는 엑세드라였다. 목신의 집에 설치된 모자이크들은 분명 공간 장식의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 외에도 목신의 집 대문은 초인적인 높이로 세워져 오늘날까지 보전되어 있다. 목신의 집은 거대하며, 화려하고, 호화로운 규모이다. 그 중에서도 알렉산더 모자이크는 가장 큰 규모의 장식물이었다. 집주인을 그러한 작품으로 엑세드라 바닥을 장식하게 했으며, 그 곳에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집주인은 손님들에게 미술품에 대한 자신의 취향과 재력, 부(富) 그리고 주택의 화려함을 과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폼페이의 알렉산더 모자이크는 정치적 권력의 과시와는 거리가 있다. 물론 로마인들은 알렉산더 대왕을 그들의 존경하는 모범, 또 세계의 정복자로서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다. 금권과 재력은 권위와 영향력을 의미한다. ‘목신의 집’집주인은 알렉산더 모자이크로 자신을 과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알렉산더 모자이크는 로마적 의미에 있어서 개인적 부유함의 과시와 연관되는 미술작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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