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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IS 바로가기동양정치사상사, v.2 no.2, 2003년, pp.209 - 227
米原謙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論吉)와 나카에 효민(中江兆民)은, 서양문명과 일본의 근대화에 대해서 대조적인 자세를 취했다. 자유주의자로서 출발한 후쿠자와는 공동체론자로서의 측면을 강화한 반면에, 쵸민은 공동체론자로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독특한 자유개념을 전개해서 자유주의자의 일면을 갖기에 이르렀다.
후쿠자와는 『학문의 권장』에서 개인의 독립이 국민국가 창출의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875년의 『문명론의 개략』에서는 개인의 독립보다는 바람직한 사회조직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서양문명은 가치다원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후쿠자와는 이를 저해하는 일본사회를 「권력의 편중」이라는 말로써 비판하고 있다.
정교분리에 의한 다원주의를 주장한 후쿠자와와는 반대로, 초기의 쵸민은 루소의 공화주의 정치이념에 영향을 받아 시민적인 공동성을 보장하는 어떤 정교일치체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유교도덕에 의한 국민교화와 그 이념에 따른 정치의 실현을 희망했다. 이것은 신도(神道) 이념에 입각한 초기 명치정부의 제정일치체제와는 명백하게 다르지만, 후쿠자와가 정교일치를 넌센스라고 비판한 것과도 현저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1870년대 말까지 유행한 자유민권운동에 직면해서 양자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된다. 쵸민이 자유민권파의 특색 있는 논객이 된 반면, 후쿠자와는 자유민권파를 「엉터리 민권」이라고 비판하면서 관민의 조화를 주장했다. 양자의 입장이 전환되는 것은 자유민권 운동이 가장 유행했던 1880년말에서 1881년이었다.
1881년은 양인에게 있어 큰 전환의 해였다. 후쿠자와에게 있어서 그것은 황통신화를 기축으로 하는 국체론(國體論) 구축에의 길이며, 쵸민에게 있어서는 君民共治 체제로의 일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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