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 譯官은 대외 관계에서 通譯을 비롯하여 각종 外交 實務를 담당했던 技術官員이다. 역관은 외국 사신 및 수행원 영접·使行 隨行 등을 통해 외국인과의 실제 접촉은 물론 정보활동까지 수행하였고, 經濟·文化的으로는 公貿易을 담당하고 先進 文物 導入의 통로 역할을 하였다. 역관에 대한 기존 연구는 주로 朝鮮時代 中人과 관련된 身分 硏究의 일환으로 진행되어 왔다. 역관이 上級 技術官員으로서 양반에 못지 않은 知識과 經濟的 實力을 축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사회적 差別待遇를 받으며 技術職 中人으로 고정되었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역관이 이를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으로서의 정치·경제·문화 활동에 대해 주목해 왔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역관을 연구하는 목적이 사회 신분제도 규명에 모아진 결과, 정작 역관 자체에는 별다른 관심이 기울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도 朝鮮 後期에 연구가 집중되어 있어서, 역관에 대한 전체적인 歷史像을 그려낼 수 없었다. 특히 譯科榜目이나 完薦記, 譯官 家門 연구를 통해 職役의 세습 경향을 밝히고, 이를 근거로 身分의 固着化 혹은 신분의 閉鎖性을 주장하는 것은, 통계 해석에 恣意性이 있으며 세습의 기준 설정이 모호하여 문제를 안고 있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朝鮮 前期 譯官을 연구 대상으로 하였다. 우선은 역관 이해를 위한 기초적인 작업으로서, 조선 전기의 역관에 대해 客觀的이고 綜合的인 고찰을 시도하였다. 역관에 관련된 제도의 변화는 물론, 조선 전기 약 100여년간 활동한 역관의 官職과 활동내용 등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역관직의 구조, 역관의 선발·임기·관직 진출, 활동 내용 등을 상세하게 밝히고자 하였다. 두 번째로는 위의 결과를 토대로 조선 전기 사회에서 譯官의 性格과 位相은 어떠하였는가 하는 점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國家 統治 體制 하에서의 譯官 업무의 특성과 그 世傳性 여부, 역관에 대한 差別 여부를 고찰하는 작업으로 구체화되었다. 본 연구는 譯官이 中人身分으로 존재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것으로서, 역관 더 나아가 중인 이해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조선 전기 역관은 高麗末 朝鮮初를 거치면서 기술관으로서의 位相을 확보하였다. 고려말 조선초 對外關係의 多元化와 明의 留學生 파견 금지 조치는 譯官 養成의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富國强兵을 추진하는 가운데, 明의 선진 기술을 도입해오기 위해서는 역관의 활동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조선 건국 직후부터 역대 국왕은 역관 양성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 결과 역관을 문무 관료체계 속에 編制하는 한편, 역관의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 관서의 설립이 시행되었다. 역관의 敎育과 選拔 제도가 성립되었고, 역관의 전문성 강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이 실시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역관은 司譯院 官職과 軍職에 진출할 수 있었던 中央 譯官, 지방에서 직접적인 對外 交涉을 수행했던 外任 譯官이 있었고, 그 외 鄕通事라는 이름의 지방 通譯人도 있었다. 이들은 上下의 연결 구조 속에서 국가의 대외관계 업무를 수행해 나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역관의 충원대상은 良家子弟 혹은 鄕校生徒, 鄕吏 三丁一子, 鄕吏, 庶孼, 歸化人이었다. 일부 文武 官僚 및 그 子弟들이 국가의 역학 장려정책에 따라 習讀官이나 講隸官으로 진출한 예는 있으나, 실제 역관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역관은 일반적으로 生徒로 入屬한 뒤 譯科 혹은 取才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역과나 취재는 능력 위주의 선발 방식으로서, 역관의 자질 함양에 기여하였다. 역관은 司譯院 官職과 軍職에 진출할 수 있었다. 사역원 관직은 세종대 遞兒職으로 정비되면서 6개월마다 교체 제수되어야 하고, 最高位가 정3품으로 한정되어 그 이상의 진출이 사실상 제한되어 있었다. 뿐만이 아니라 역관에게는 일반 문신과는 다른 人事規定이 적용되고 있었다. 역관은 仍任制로 인해 역관으로서의 職任을 벗어날 수 없었고, 取才 성적에 의해 관직의 陞黜이 좌우되었다. 이러한 인사규정은 업무의 지속성과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만약 취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勤務年限이 아무리 오래되어도 승진하지 못하고 祿俸도 받지 못한 채 역관의 업에 종사하도록 강제되었다. 역관의 활동은 매우 다양하였는데, 특히 外交 부문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신 영접과 使行 隨行 등을 통해 직접적인 外交 實務를 담당하면서, 일부 역관은 외교관으로서의 뛰어난 업적을 이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상대국에 국가의 기밀을 누설하는 등 逆機能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반면, 조선 초기 역관의 정치·경제·문화 활동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지위 상승 욕구를 표출하거나, 문화적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集團的 수준에서 표현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도 권세가나 富商大賈의 대리 무역 수준이었고, 獨自的인 무역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점차 집단적인 상언의 형태로 처우 개선을 요구하거나, 선진 기술 수용에도 적극적이고 유교적인 소양을 갖춘 역관들이 文人과 교류하는 등 의미있는 변화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조선전기 사회에서 이러한 역관의 性格과 位相은 역관이 담당하고 있는 업무의 특성, 역관에 대한 差別의 實在 與否, 역관 職役의 世傳 與否를 기준으로 고찰될 수 있다. 역관의 주업무인 통역은 쌍방의 의사 소통에 도움을 주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사실상 ...
朝鮮時代 譯官은 대외 관계에서 通譯을 비롯하여 각종 外交 實務를 담당했던 技術官員이다. 역관은 외국 사신 및 수행원 영접·使行 隨行 등을 통해 외국인과의 실제 접촉은 물론 정보활동까지 수행하였고, 經濟·文化的으로는 公貿易을 담당하고 先進 文物 導入의 통로 역할을 하였다. 역관에 대한 기존 연구는 주로 朝鮮時代 中人과 관련된 身分 硏究의 일환으로 진행되어 왔다. 역관이 上級 技術官員으로서 양반에 못지 않은 知識과 經濟的 實力을 축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사회적 差別待遇를 받으며 技術職 中人으로 고정되었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역관이 이를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으로서의 정치·경제·문화 활동에 대해 주목해 왔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역관을 연구하는 목적이 사회 신분제도 규명에 모아진 결과, 정작 역관 자체에는 별다른 관심이 기울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도 朝鮮 後期에 연구가 집중되어 있어서, 역관에 대한 전체적인 歷史像을 그려낼 수 없었다. 특히 譯科榜目이나 完薦記, 譯官 家門 연구를 통해 職役의 세습 경향을 밝히고, 이를 근거로 身分의 固着化 혹은 신분의 閉鎖性을 주장하는 것은, 통계 해석에 恣意性이 있으며 세습의 기준 설정이 모호하여 문제를 안고 있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朝鮮 前期 譯官을 연구 대상으로 하였다. 우선은 역관 이해를 위한 기초적인 작업으로서, 조선 전기의 역관에 대해 客觀的이고 綜合的인 고찰을 시도하였다. 역관에 관련된 제도의 변화는 물론, 조선 전기 약 100여년간 활동한 역관의 官職과 활동내용 등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역관직의 구조, 역관의 선발·임기·관직 진출, 활동 내용 등을 상세하게 밝히고자 하였다. 두 번째로는 위의 결과를 토대로 조선 전기 사회에서 譯官의 性格과 位相은 어떠하였는가 하는 점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國家 統治 體制 하에서의 譯官 업무의 특성과 그 世傳性 여부, 역관에 대한 差別 여부를 고찰하는 작업으로 구체화되었다. 본 연구는 譯官이 中人身分으로 존재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것으로서, 역관 더 나아가 중인 이해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조선 전기 역관은 高麗末 朝鮮初를 거치면서 기술관으로서의 位相을 확보하였다. 고려말 조선초 對外關係의 多元化와 明의 留學生 파견 금지 조치는 譯官 養成의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富國强兵을 추진하는 가운데, 明의 선진 기술을 도입해오기 위해서는 역관의 활동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조선 건국 직후부터 역대 국왕은 역관 양성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 결과 역관을 문무 관료체계 속에 編制하는 한편, 역관의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 관서의 설립이 시행되었다. 역관의 敎育과 選拔 제도가 성립되었고, 역관의 전문성 강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이 실시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역관은 司譯院 官職과 軍職에 진출할 수 있었던 中央 譯官, 지방에서 직접적인 對外 交涉을 수행했던 外任 譯官이 있었고, 그 외 鄕通事라는 이름의 지방 通譯人도 있었다. 이들은 上下의 연결 구조 속에서 국가의 대외관계 업무를 수행해 나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역관의 충원대상은 良家子弟 혹은 鄕校生徒, 鄕吏 三丁一子, 鄕吏, 庶孼, 歸化人이었다. 일부 文武 官僚 및 그 子弟들이 국가의 역학 장려정책에 따라 習讀官이나 講隸官으로 진출한 예는 있으나, 실제 역관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역관은 일반적으로 生徒로 入屬한 뒤 譯科 혹은 取才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역과나 취재는 능력 위주의 선발 방식으로서, 역관의 자질 함양에 기여하였다. 역관은 司譯院 官職과 軍職에 진출할 수 있었다. 사역원 관직은 세종대 遞兒職으로 정비되면서 6개월마다 교체 제수되어야 하고, 最高位가 정3품으로 한정되어 그 이상의 진출이 사실상 제한되어 있었다. 뿐만이 아니라 역관에게는 일반 문신과는 다른 人事規定이 적용되고 있었다. 역관은 仍任制로 인해 역관으로서의 職任을 벗어날 수 없었고, 取才 성적에 의해 관직의 陞黜이 좌우되었다. 이러한 인사규정은 업무의 지속성과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만약 취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勤務年限이 아무리 오래되어도 승진하지 못하고 祿俸도 받지 못한 채 역관의 업에 종사하도록 강제되었다. 역관의 활동은 매우 다양하였는데, 특히 外交 부문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신 영접과 使行 隨行 등을 통해 직접적인 外交 實務를 담당하면서, 일부 역관은 외교관으로서의 뛰어난 업적을 이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상대국에 국가의 기밀을 누설하는 등 逆機能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반면, 조선 초기 역관의 정치·경제·문화 활동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지위 상승 욕구를 표출하거나, 문화적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集團的 수준에서 표현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도 권세가나 富商大賈의 대리 무역 수준이었고, 獨自的인 무역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점차 집단적인 상언의 형태로 처우 개선을 요구하거나, 선진 기술 수용에도 적극적이고 유교적인 소양을 갖춘 역관들이 文人과 교류하는 등 의미있는 변화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조선전기 사회에서 이러한 역관의 性格과 位相은 역관이 담당하고 있는 업무의 특성, 역관에 대한 差別의 實在 與否, 역관 職役의 世傳 與否를 기준으로 고찰될 수 있다. 역관의 주업무인 통역은 쌍방의 의사 소통에 도움을 주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사실상 외교 정책의 수립이나 결정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고, 기능적인 역할에 국한되는 면이 있다. 즉, 역관의 업무는 외교관계에서 보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역관에 대해서는 사회적·제도적 차별이 가해지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역관을 일반 문무 관료와는 구별하고 천시하는 의식이 존재하였고, 제도적으로는 人事規定의 차별적 적용, 堂上官으로의 진출 제한 등이 가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도 역시 차별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에 의거해 볼 때, 이러한 차별의 연원은 조선 시대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었다. 그리고 譯官 職役은 일반 민이 대행할 수 없는 전문 지식과 기능의 숙달을 요하기 때문에 世傳의 경향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父의 직역을 그 자손이 자동적으로 계승하도록 강제하는 조항을 명시하거나 시사해주는 사례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시험을 통해 능력을 검증받은 자들을 임용하려 함으로써, 능력이 역관 진출에 결정적 척도가 됨을 볼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역관의 후손이 아무런 장애 없이 문관으로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는 것도, 세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증거로 들 수 있다. 결국, 조선 전기의 역관은 전문적인 기술관원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해가면서도, 상대적으로 특권에서 배제되거나 규제받으면서 하급 지배층으로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하급 관료로서 상급 지배층을 보조하면서 지배층의 일원으로서 체제유지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職役의 專門性 때문에 世傳의 경향이 강하였지만, 또한 능력 위주의 충원 방법과 다른 직역으로의 이동 가능성에 의해 고정된 신분으로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조선 전기의 경우, 職役을 곧 신분으로 置換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朝鮮時代 譯官은 대외 관계에서 通譯을 비롯하여 각종 外交 實務를 담당했던 技術官員이다. 역관은 외국 사신 및 수행원 영접·使行 隨行 등을 통해 외국인과의 실제 접촉은 물론 정보활동까지 수행하였고, 經濟·文化的으로는 公貿易을 담당하고 先進 文物 導入의 통로 역할을 하였다. 역관에 대한 기존 연구는 주로 朝鮮時代 中人과 관련된 身分 硏究의 일환으로 진행되어 왔다. 역관이 上級 技術官員으로서 양반에 못지 않은 知識과 經濟的 實力을 축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사회적 差別待遇를 받으며 技術職 中人으로 고정되었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역관이 이를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으로서의 정치·경제·문화 활동에 대해 주목해 왔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역관을 연구하는 목적이 사회 신분제도 규명에 모아진 결과, 정작 역관 자체에는 별다른 관심이 기울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도 朝鮮 後期에 연구가 집중되어 있어서, 역관에 대한 전체적인 歷史像을 그려낼 수 없었다. 특히 譯科榜目이나 完薦記, 譯官 家門 연구를 통해 職役의 세습 경향을 밝히고, 이를 근거로 身分의 固着化 혹은 신분의 閉鎖性을 주장하는 것은, 통계 해석에 恣意性이 있으며 세습의 기준 설정이 모호하여 문제를 안고 있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朝鮮 前期 譯官을 연구 대상으로 하였다. 우선은 역관 이해를 위한 기초적인 작업으로서, 조선 전기의 역관에 대해 客觀的이고 綜合的인 고찰을 시도하였다. 역관에 관련된 제도의 변화는 물론, 조선 전기 약 100여년간 활동한 역관의 官職과 활동내용 등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역관직의 구조, 역관의 선발·임기·관직 진출, 활동 내용 등을 상세하게 밝히고자 하였다. 두 번째로는 위의 결과를 토대로 조선 전기 사회에서 譯官의 性格과 位相은 어떠하였는가 하는 점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國家 統治 體制 하에서의 譯官 업무의 특성과 그 世傳性 여부, 역관에 대한 差別 여부를 고찰하는 작업으로 구체화되었다. 본 연구는 譯官이 中人身分으로 존재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것으로서, 역관 더 나아가 중인 이해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조선 전기 역관은 高麗末 朝鮮初를 거치면서 기술관으로서의 位相을 확보하였다. 고려말 조선초 對外關係의 多元化와 明의 留學生 파견 금지 조치는 譯官 養成의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富國强兵을 추진하는 가운데, 明의 선진 기술을 도입해오기 위해서는 역관의 활동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조선 건국 직후부터 역대 국왕은 역관 양성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 결과 역관을 문무 관료체계 속에 編制하는 한편, 역관의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 관서의 설립이 시행되었다. 역관의 敎育과 選拔 제도가 성립되었고, 역관의 전문성 강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이 실시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역관은 司譯院 官職과 軍職에 진출할 수 있었던 中央 譯官, 지방에서 직접적인 對外 交涉을 수행했던 外任 譯官이 있었고, 그 외 鄕通事라는 이름의 지방 通譯人도 있었다. 이들은 上下의 연결 구조 속에서 국가의 대외관계 업무를 수행해 나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역관의 충원대상은 良家子弟 혹은 鄕校生徒, 鄕吏 三丁一子, 鄕吏, 庶孼, 歸化人이었다. 일부 文武 官僚 및 그 子弟들이 국가의 역학 장려정책에 따라 習讀官이나 講隸官으로 진출한 예는 있으나, 실제 역관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역관은 일반적으로 生徒로 入屬한 뒤 譯科 혹은 取才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역과나 취재는 능력 위주의 선발 방식으로서, 역관의 자질 함양에 기여하였다. 역관은 司譯院 官職과 軍職에 진출할 수 있었다. 사역원 관직은 세종대 遞兒職으로 정비되면서 6개월마다 교체 제수되어야 하고, 最高位가 정3품으로 한정되어 그 이상의 진출이 사실상 제한되어 있었다. 뿐만이 아니라 역관에게는 일반 문신과는 다른 人事規定이 적용되고 있었다. 역관은 仍任制로 인해 역관으로서의 職任을 벗어날 수 없었고, 取才 성적에 의해 관직의 陞黜이 좌우되었다. 이러한 인사규정은 업무의 지속성과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만약 취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勤務年限이 아무리 오래되어도 승진하지 못하고 祿俸도 받지 못한 채 역관의 업에 종사하도록 강제되었다. 역관의 활동은 매우 다양하였는데, 특히 外交 부문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신 영접과 使行 隨行 등을 통해 직접적인 外交 實務를 담당하면서, 일부 역관은 외교관으로서의 뛰어난 업적을 이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상대국에 국가의 기밀을 누설하는 등 逆機能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반면, 조선 초기 역관의 정치·경제·문화 활동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지위 상승 욕구를 표출하거나, 문화적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集團的 수준에서 표현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도 권세가나 富商大賈의 대리 무역 수준이었고, 獨自的인 무역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점차 집단적인 상언의 형태로 처우 개선을 요구하거나, 선진 기술 수용에도 적극적이고 유교적인 소양을 갖춘 역관들이 文人과 교류하는 등 의미있는 변화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조선전기 사회에서 이러한 역관의 性格과 位相은 역관이 담당하고 있는 업무의 특성, 역관에 대한 差別의 實在 與否, 역관 職役의 世傳 與否를 기준으로 고찰될 수 있다. 역관의 주업무인 통역은 쌍방의 의사 소통에 도움을 주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사실상 외교 정책의 수립이나 결정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고, 기능적인 역할에 국한되는 면이 있다. 즉, 역관의 업무는 외교관계에서 보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역관에 대해서는 사회적·제도적 차별이 가해지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역관을 일반 문무 관료와는 구별하고 천시하는 의식이 존재하였고, 제도적으로는 人事規定의 차별적 적용, 堂上官으로의 진출 제한 등이 가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도 역시 차별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에 의거해 볼 때, 이러한 차별의 연원은 조선 시대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었다. 그리고 譯官 職役은 일반 민이 대행할 수 없는 전문 지식과 기능의 숙달을 요하기 때문에 世傳의 경향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父의 직역을 그 자손이 자동적으로 계승하도록 강제하는 조항을 명시하거나 시사해주는 사례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시험을 통해 능력을 검증받은 자들을 임용하려 함으로써, 능력이 역관 진출에 결정적 척도가 됨을 볼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역관의 후손이 아무런 장애 없이 문관으로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는 것도, 세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증거로 들 수 있다. 결국, 조선 전기의 역관은 전문적인 기술관원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해가면서도, 상대적으로 특권에서 배제되거나 규제받으면서 하급 지배층으로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하급 관료로서 상급 지배층을 보조하면서 지배층의 일원으로서 체제유지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職役의 專門性 때문에 世傳의 경향이 강하였지만, 또한 능력 위주의 충원 방법과 다른 직역으로의 이동 가능성에 의해 고정된 신분으로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조선 전기의 경우, 職役을 곧 신분으로 置換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Translators in the early Chosun Dynasty were techno-officers who had worked for translating and diplomacy. They had contacts with foreigners and collected the information during their meeting, played an important role as the pipeline of public trading and introducing the advanced foreign culture. Th...
Translators in the early Chosun Dynasty were techno-officers who had worked for translating and diplomacy. They had contacts with foreigners and collected the information during their meeting, played an important role as the pipeline of public trading and introducing the advanced foreign culture. The exiting studies of translators were mainly focused on the class which was relating to the middle class of Chosun Dynasty. It was studied that Translators were always discriminated by a techno-officers with the ruling class who were called as Yangban socially, though they had knowledge and fortune no more than the ruling group did. The studies had been paid attention to the politic, economic and cultural activities which they had tried to overcome this discrimination. But until now the studies have been made of the system of social class, hadnt paid an attention to the role and activities of translators. And there is no big picture on the translator because they have been studied mainly about the later of Chosun Dynasty. Specially studies which have been worked on transferring translator class with the items of test and the translator family, which have problems about the arbitrary meaning statistically and the vague criteria of transferring. Therefore I have studied translators in the early Chosun Dynasty ,with that limits. First of all, I tried to analyze the translators of that times in order to understand their profession objectively and on the whole. The analysis was done with 224 techno-officers and activities during about 100 years of early Chosun Dynasty as well as the change of system relating to translators. Then I tried to define their jobs, selecting method, their tenure, their process of nominating as a techno-officer, and their activities in details. Second, I tried to define the characteristic and status of translators in the early Chosun Dynasty on the base of their results. It was developed to consider their jobs, whether or not to transfer their profession, discriminating their status under the control of Chosun Dynasty which was a monarchy. This study tried to contribute to decide what kinds of class translators was and to understand the middle class as a translator. Translators of the earlier Chosun Dynasty had earned their status as a techno-officer from the later Koryeo Dynasty to the early Chosun Dynasty. During those times, the Dynasty had had the multi-relationship with nearby countries and banned students from going aboard for study to China which was called Myeong Dynasty . that policy made Chosun Dynasty train the translators. Moreover they needed translators in order to introduce the advanced technology of Myeong, because Chosun Dynasty had driven to become a wealthy country and to make a powerful army at those times. So the Chosun kings had tried to train translators immediately after founding his country. It was resulted that translators had been organized into the system of civil and military officials. In addition to, an administrative which took charge of jobs for translators was established. Then the system of education and selection was made, the various policies which the specialty of translators had been made an emphasis were enforced. There were different kinds of translators who had been a central officer to be able to get a civil jobs(Sayeokueon) and a military jobs, who had been a diplomat taking charge of foreign relationships, who had been a local officer taking charge of simple translation. They had been controlled under the government. The qualifications for recruiting as a translator was given to a son of Yangban class, student of Hyangkeo, Hyangri who was a local lower officer, a child born of concubine and a naturalized person. Some son of the ruling group who had been called Yangban also became a academic researcher who had been called Sbdokkdan or Kangyeokoan. But they didnt worked for translators. Generally translators entered to the institute as a student and became a officer through test which was called Yaokka or Chuijai. That kinds of testing method, which selected person with his ability was contributed to improve the quality of translator. Translator had been able to become an officer of Sayeokueon and to get a military jobs. The position in his job should be changed in every 6 months with setting job as a Hoagik in Seoisongs and he would have a limit of promotion to the Jeong Sam Pum even if he had been promoted into the highest positions. Besides there were the other regulation which was governed to translators different from general officers. They should take charge of translation. They didnt have the freedom of changing their job under the control of Naimje, positions were influenced by their results of test which were called Chuijai. It was the reason that rules of personnel management were means to get the professional specialty and consistence. But if anyone hadnt gotten a good credit, even though he had worked for a long time, he couldnt have been promoted and forced to work for job without his salary. Their activities were very various, among them diplomatic activities were outstanding. Some of them greeted with foreign representatives directly and performed an excellent contribution as a diplomat. on the other side, they had also done bad activities revealing the top secret of country. But in the early Chosun Dynasty, there were a few activities which translators had made on the politic, economic and cultural field. Even if they had waned to raise their status or to express their thought, there were no freedom to express their needs within the group of class. In the economic side, they had little economic importance with their trading activities because people with power or the rich and large merchant mainly played the important role in the agent trade. But gradually meaningful changes happened which they wanted to improve their status with the same group of them, received the advanced technology aggressively, came in contact with Yangban class. The characteristics and status of translators in the earlier Chosun Dynasty could be considered as criteria whether or not to be the discrimination of them, whether or not to transfer the status of them. Translating had been the key role of them and means to communicate with foreigners. Their role was limited to only the functional thing different from decision-making in diplomacy. That is, their job was an assistant in diplomatic relationship. Those days there were atmosphere to discriminate against translators and despise them socially, unfair treatment not to go into Dangsangkoan and the discrimination in personnel management. When we find also discrimination in the Koryeo Dynasty , so I can believe that this custom could be before Chosun Dynasty. The job of translators should have been transferred to require specific knowledge and master of their function. But there were no evidence to be able to find out regulations which their jobs was transferred from father to son automatically. On the contrary we can find that ability was measures to go into the officer of translators when competent people being appointed with test. Moreover when descendent of translators could enter into Mungoan without obstacle, it is evidence not to transfer their jobs Finally I can find translators of those days were the lower ruling class, gaining their status as professional techno-officer and receiving unfair treatment. They played the role of supporting the higher ruling class and contributed to maintain the system of Chosun Dynasty. Though they were likely to transfer their jobs with their professional specialty, their status wasnt fixed after we found evidences to recruit people with competence and to be able to move into the other jobs and status. At least, in earlier Chosun Dynasty, I conclude that translator couldnt be replaced by status
Translators in the early Chosun Dynasty were techno-officers who had worked for translating and diplomacy. They had contacts with foreigners and collected the information during their meeting, played an important role as the pipeline of public trading and introducing the advanced foreign culture. The exiting studies of translators were mainly focused on the class which was relating to the middle class of Chosun Dynasty. It was studied that Translators were always discriminated by a techno-officers with the ruling class who were called as Yangban socially, though they had knowledge and fortune no more than the ruling group did. The studies had been paid attention to the politic, economic and cultural activities which they had tried to overcome this discrimination. But until now the studies have been made of the system of social class, hadnt paid an attention to the role and activities of translators. And there is no big picture on the translator because they have been studied mainly about the later of Chosun Dynasty. Specially studies which have been worked on transferring translator class with the items of test and the translator family, which have problems about the arbitrary meaning statistically and the vague criteria of transferring. Therefore I have studied translators in the early Chosun Dynasty ,with that limits. First of all, I tried to analyze the translators of that times in order to understand their profession objectively and on the whole. The analysis was done with 224 techno-officers and activities during about 100 years of early Chosun Dynasty as well as the change of system relating to translators. Then I tried to define their jobs, selecting method, their tenure, their process of nominating as a techno-officer, and their activities in details. Second, I tried to define the characteristic and status of translators in the early Chosun Dynasty on the base of their results. It was developed to consider their jobs, whether or not to transfer their profession, discriminating their status under the control of Chosun Dynasty which was a monarchy. This study tried to contribute to decide what kinds of class translators was and to understand the middle class as a translator. Translators of the earlier Chosun Dynasty had earned their status as a techno-officer from the later Koryeo Dynasty to the early Chosun Dynasty. During those times, the Dynasty had had the multi-relationship with nearby countries and banned students from going aboard for study to China which was called Myeong Dynasty . that policy made Chosun Dynasty train the translators. Moreover they needed translators in order to introduce the advanced technology of Myeong, because Chosun Dynasty had driven to become a wealthy country and to make a powerful army at those times. So the Chosun kings had tried to train translators immediately after founding his country. It was resulted that translators had been organized into the system of civil and military officials. In addition to, an administrative which took charge of jobs for translators was established. Then the system of education and selection was made, the various policies which the specialty of translators had been made an emphasis were enforced. There were different kinds of translators who had been a central officer to be able to get a civil jobs(Sayeokueon) and a military jobs, who had been a diplomat taking charge of foreign relationships, who had been a local officer taking charge of simple translation. They had been controlled under the government. The qualifications for recruiting as a translator was given to a son of Yangban class, student of Hyangkeo, Hyangri who was a local lower officer, a child born of concubine and a naturalized person. Some son of the ruling group who had been called Yangban also became a academic researcher who had been called Sbdokkdan or Kangyeokoan. But they didnt worked for translators. Generally translators entered to the institute as a student and became a officer through test which was called Yaokka or Chuijai. That kinds of testing method, which selected person with his ability was contributed to improve the quality of translator. Translator had been able to become an officer of Sayeokueon and to get a military jobs. The position in his job should be changed in every 6 months with setting job as a Hoagik in Seoisongs and he would have a limit of promotion to the Jeong Sam Pum even if he had been promoted into the highest positions. Besides there were the other regulation which was governed to translators different from general officers. They should take charge of translation. They didnt have the freedom of changing their job under the control of Naimje, positions were influenced by their results of test which were called Chuijai. It was the reason that rules of personnel management were means to get the professional specialty and consistence. But if anyone hadnt gotten a good credit, even though he had worked for a long time, he couldnt have been promoted and forced to work for job without his salary. Their activities were very various, among them diplomatic activities were outstanding. Some of them greeted with foreign representatives directly and performed an excellent contribution as a diplomat. on the other side, they had also done bad activities revealing the top secret of country. But in the early Chosun Dynasty, there were a few activities which translators had made on the politic, economic and cultural field. Even if they had waned to raise their status or to express their thought, there were no freedom to express their needs within the group of class. In the economic side, they had little economic importance with their trading activities because people with power or the rich and large merchant mainly played the important role in the agent trade. But gradually meaningful changes happened which they wanted to improve their status with the same group of them, received the advanced technology aggressively, came in contact with Yangban class. The characteristics and status of translators in the earlier Chosun Dynasty could be considered as criteria whether or not to be the discrimination of them, whether or not to transfer the status of them. Translating had been the key role of them and means to communicate with foreigners. Their role was limited to only the functional thing different from decision-making in diplomacy. That is, their job was an assistant in diplomatic relationship. Those days there were atmosphere to discriminate against translators and despise them socially, unfair treatment not to go into Dangsangkoan and the discrimination in personnel management. When we find also discrimination in the Koryeo Dynasty , so I can believe that this custom could be before Chosun Dynasty. The job of translators should have been transferred to require specific knowledge and master of their function. But there were no evidence to be able to find out regulations which their jobs was transferred from father to son automatically. On the contrary we can find that ability was measures to go into the officer of translators when competent people being appointed with test. Moreover when descendent of translators could enter into Mungoan without obstacle, it is evidence not to transfer their jobs Finally I can find translators of those days were the lower ruling class, gaining their status as professional techno-officer and receiving unfair treatment. They played the role of supporting the higher ruling class and contributed to maintain the system of Chosun Dynasty. Though they were likely to transfer their jobs with their professional specialty, their status wasnt fixed after we found evidences to recruit people with competence and to be able to move into the other jobs and status. At least, in earlier Chosun Dynasty, I conclude that translator couldnt be replaced by st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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