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성만찬의식이 예배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를 언급함으로써 문제제기를 시작하였다. 더불어 성만찬은 합당하게 진행되어야 하고,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하고 참여할 것을 말하였다. 성만찬은 신약성서 안에서 그 명칭이 다양하게 불리워졌다. 주의 만찬, 주의 상, 떡을 떼다, 축복과 축사 등이 그것이다. 주의 만찬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이것이 저녁식사 중에 제정되었기 때문이고, 주의 상은 고린도전서 10장 21절에 나오는데, "상"이라는 의미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뜻한다. 떡을 뗀다는 용어는 성찬뿐만 아니라 애찬까지도 가리키며, 축복과 축사는 고린도전서 10장 16절과 11장 24절에 나오는데 그 의미는 상호 교대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초대교회에서 불리워졌던 명칭들도 있는데 최후의 만찬, 성체 성서, 성찬, 희생의 봉헌 등이다.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 만찬과 같은 의미로써, 예수가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가지셨던 만찬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성체 성사는 축복과 감사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최고의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한 감사하는 뜻에서 사용되어지는 명칭이다. 성찬은 성만찬을 통해서 예수와 참여자들 그리고 참여자들 스스로가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는 것을 뜻한다. 희생의 봉헌은 예수의 희생에 초점을 맞추는데서 비롯되었다. 성만찬의 배경으로는 유월절 식사와 엣세네파 식사, 키두쉬, 챠브라가 있다. 예수의 마지막 만찬의 기원을 유월절 식사로 보는 것은 공관복음에서의 기록들이 유월절 성격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의 의견도 있어서 최후의 만찬 기록이 유월절 의식과 불일치 한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엣세네파 식사가 성만찬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근거는 ...
우리는 성만찬의식이 예배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를 언급함으로써 문제제기를 시작하였다. 더불어 성만찬은 합당하게 진행되어야 하고,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하고 참여할 것을 말하였다. 성만찬은 신약성서 안에서 그 명칭이 다양하게 불리워졌다. 주의 만찬, 주의 상, 떡을 떼다, 축복과 축사 등이 그것이다. 주의 만찬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이것이 저녁식사 중에 제정되었기 때문이고, 주의 상은 고린도전서 10장 21절에 나오는데, "상"이라는 의미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뜻한다. 떡을 뗀다는 용어는 성찬뿐만 아니라 애찬까지도 가리키며, 축복과 축사는 고린도전서 10장 16절과 11장 24절에 나오는데 그 의미는 상호 교대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초대교회에서 불리워졌던 명칭들도 있는데 최후의 만찬, 성체 성서, 성찬, 희생의 봉헌 등이다.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 만찬과 같은 의미로써, 예수가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가지셨던 만찬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성체 성사는 축복과 감사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최고의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한 감사하는 뜻에서 사용되어지는 명칭이다. 성찬은 성만찬을 통해서 예수와 참여자들 그리고 참여자들 스스로가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는 것을 뜻한다. 희생의 봉헌은 예수의 희생에 초점을 맞추는데서 비롯되었다. 성만찬의 배경으로는 유월절 식사와 엣세네파 식사, 키두쉬, 챠브라가 있다. 예수의 마지막 만찬의 기원을 유월절 식사로 보는 것은 공관복음에서의 기록들이 유월절 성격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의 의견도 있어서 최후의 만찬 기록이 유월절 의식과 불일치 한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엣세네파 식사가 성만찬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근거는 쿰란 공동체의 식사가 초대기독교인들의 식사 형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의 식사 의식이 축복의 순서에서뿐만 아니라 의식 전체의 진행 절차에 있어서 엣세네파의 식사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들어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키두쉬는 원래 랍비와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이나 특별한 명절을 종교적 차원에서 준비하기 위하여 식탁에 함께 모여 식사를 나누던 관습이었으며,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행하였을 것이라는 장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성만찬의 기원이 형식적으로는 키두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의미상으로는 멀기에 키두쉬라고 단정짓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챠브라는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모임인데,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하나의 챠브라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며, 공동의 식사를 하였을 것이라는 추측 가운데 주장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챠브라는 최후의 만찬과는 달리 회비를 지불하는 식사였기에 성만찬의 기원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성만찬에 대한 기사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고린도전서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요한복음에도 암시적으로 성만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에서 나타나는 성만찬은, 수난기사 속에 성찬제정의 기사를 포함시키고 있으며, 시기적으로 최후의 만찬이 유월절 만찬을 할 때 이루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성만찬에 관한 마태의 기록을 살펴보면, 마가의 기록보다 더 정교화된 의식적 형태를 취한 것으로 보이기에, 많은 학자들이 성찬에 관한 마태의 기록은 마가의 기록에 의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마가와 마태의 기록을 살펴볼 때, 성만찬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갖게 될 종말론적 잔치의 선취행위라는 사실과 예수께서는 새로운 언약을 위해서 희생하셨다는 사실이다. 누가는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메시아 향연의 예형으로서의 성만찬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또한 성만찬에 대한 회상과 반복을 당부함으로 그리스도의 새 언약으로서의 성만찬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복음에는 최후의 만찬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이 없기에, 성찬식에 대해서 가장 적게 취급하고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가장 성례전적이라는 주장이 늘어나고 있는데, 그 이유는 5천명을 먹일 때 감사의 기도를 행한 것이나, 생명의 떡에 관한 언급 등이 성만찬에 대하여 강한 암시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만찬에 관한 가장 초기의 기록은 고린도전서로서, 고린도진서에서의 성만찬은 주의 만찬과 애찬이 결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성만찬의 다양한 신학적 의미를 보면, 먼저 성만찬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을 의미한다. 성만찬이 감사의 의미를 가졌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막 14:23). 또한 성만찬은 희생의 의미가 있다(눅 22:19). 예수께서 친히 당신의 몸을 깨뜨려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한 새로운 계약의 희생이 되신 것이다. 그리고 성만찬은 연합의 의미가 있다. 사도 바울은 성만찬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고,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라고 말하며 성만찬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했다. 예수는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바로 전에 성만찬을 제정하시고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여 계속 시행할 것을 명령하셨다. 이것이 성만찬에 있어서 기념으로서의 의미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유일회적 희생을 기념하는데 그 의미가 있으며, 그 기념을 통해 그리스도의 희생은 반복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구원은 현실적으로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성만찬은 행하는 그 자체로서 선포의 의미를 가진다(고전 11:26). 그리고 성만찬을 통하여 참여자들은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소망을 가지게 된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서 신자들과 같이 마실 때까지는 다시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성만찬은 분명 예수께서 제정하셨고, 우리에게 시행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예수의 명령을 따라 성만찬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의 예식이나 행사로만 생각하여 참여한다면, 성만찬의 진정한 의미를 통한 신령한 경험들은 우리에게 없을 것이다.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21세를 살아가는 교회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예수의 일생의 의미가 담긴 성만찬의 회복이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신자들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희생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만찬의 참된 의미를 신자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성만찬의 올바른 참여를 통해, 거룩한 믿음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감사와 감격의 성만찬이 되기 위해서는 참된 의미를 부여한 성만찬을 어떻게 실제적으로 진행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실천적인 문제로서 실천분야의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우리는 성만찬의식이 예배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를 언급함으로써 문제제기를 시작하였다. 더불어 성만찬은 합당하게 진행되어야 하고,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하고 참여할 것을 말하였다. 성만찬은 신약성서 안에서 그 명칭이 다양하게 불리워졌다. 주의 만찬, 주의 상, 떡을 떼다, 축복과 축사 등이 그것이다. 주의 만찬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이것이 저녁식사 중에 제정되었기 때문이고, 주의 상은 고린도전서 10장 21절에 나오는데, "상"이라는 의미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뜻한다. 떡을 뗀다는 용어는 성찬뿐만 아니라 애찬까지도 가리키며, 축복과 축사는 고린도전서 10장 16절과 11장 24절에 나오는데 그 의미는 상호 교대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초대교회에서 불리워졌던 명칭들도 있는데 최후의 만찬, 성체 성서, 성찬, 희생의 봉헌 등이다.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 만찬과 같은 의미로써, 예수가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가지셨던 만찬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성체 성사는 축복과 감사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최고의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한 감사하는 뜻에서 사용되어지는 명칭이다. 성찬은 성만찬을 통해서 예수와 참여자들 그리고 참여자들 스스로가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는 것을 뜻한다. 희생의 봉헌은 예수의 희생에 초점을 맞추는데서 비롯되었다. 성만찬의 배경으로는 유월절 식사와 엣세네파 식사, 키두쉬, 챠브라가 있다. 예수의 마지막 만찬의 기원을 유월절 식사로 보는 것은 공관복음에서의 기록들이 유월절 성격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의 의견도 있어서 최후의 만찬 기록이 유월절 의식과 불일치 한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엣세네파 식사가 성만찬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근거는 쿰란 공동체의 식사가 초대기독교인들의 식사 형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의 식사 의식이 축복의 순서에서뿐만 아니라 의식 전체의 진행 절차에 있어서 엣세네파의 식사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들어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키두쉬는 원래 랍비와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이나 특별한 명절을 종교적 차원에서 준비하기 위하여 식탁에 함께 모여 식사를 나누던 관습이었으며,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행하였을 것이라는 장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성만찬의 기원이 형식적으로는 키두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의미상으로는 멀기에 키두쉬라고 단정짓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챠브라는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모임인데,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하나의 챠브라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며, 공동의 식사를 하였을 것이라는 추측 가운데 주장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챠브라는 최후의 만찬과는 달리 회비를 지불하는 식사였기에 성만찬의 기원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성만찬에 대한 기사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고린도전서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요한복음에도 암시적으로 성만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에서 나타나는 성만찬은, 수난기사 속에 성찬제정의 기사를 포함시키고 있으며, 시기적으로 최후의 만찬이 유월절 만찬을 할 때 이루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성만찬에 관한 마태의 기록을 살펴보면, 마가의 기록보다 더 정교화된 의식적 형태를 취한 것으로 보이기에, 많은 학자들이 성찬에 관한 마태의 기록은 마가의 기록에 의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마가와 마태의 기록을 살펴볼 때, 성만찬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갖게 될 종말론적 잔치의 선취행위라는 사실과 예수께서는 새로운 언약을 위해서 희생하셨다는 사실이다. 누가는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메시아 향연의 예형으로서의 성만찬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또한 성만찬에 대한 회상과 반복을 당부함으로 그리스도의 새 언약으로서의 성만찬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복음에는 최후의 만찬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이 없기에, 성찬식에 대해서 가장 적게 취급하고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가장 성례전적이라는 주장이 늘어나고 있는데, 그 이유는 5천명을 먹일 때 감사의 기도를 행한 것이나, 생명의 떡에 관한 언급 등이 성만찬에 대하여 강한 암시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만찬에 관한 가장 초기의 기록은 고린도전서로서, 고린도진서에서의 성만찬은 주의 만찬과 애찬이 결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성만찬의 다양한 신학적 의미를 보면, 먼저 성만찬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을 의미한다. 성만찬이 감사의 의미를 가졌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막 14:23). 또한 성만찬은 희생의 의미가 있다(눅 22:19). 예수께서 친히 당신의 몸을 깨뜨려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한 새로운 계약의 희생이 되신 것이다. 그리고 성만찬은 연합의 의미가 있다. 사도 바울은 성만찬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고,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라고 말하며 성만찬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했다. 예수는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바로 전에 성만찬을 제정하시고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여 계속 시행할 것을 명령하셨다. 이것이 성만찬에 있어서 기념으로서의 의미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유일회적 희생을 기념하는데 그 의미가 있으며, 그 기념을 통해 그리스도의 희생은 반복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구원은 현실적으로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성만찬은 행하는 그 자체로서 선포의 의미를 가진다(고전 11:26). 그리고 성만찬을 통하여 참여자들은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소망을 가지게 된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서 신자들과 같이 마실 때까지는 다시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성만찬은 분명 예수께서 제정하셨고, 우리에게 시행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예수의 명령을 따라 성만찬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의 예식이나 행사로만 생각하여 참여한다면, 성만찬의 진정한 의미를 통한 신령한 경험들은 우리에게 없을 것이다.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21세를 살아가는 교회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예수의 일생의 의미가 담긴 성만찬의 회복이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신자들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희생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만찬의 참된 의미를 신자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성만찬의 올바른 참여를 통해, 거룩한 믿음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감사와 감격의 성만찬이 되기 위해서는 참된 의미를 부여한 성만찬을 어떻게 실제적으로 진행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실천적인 문제로서 실천분야의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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