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성종 · 연산군 · 중종대 정국운영의 과정과 주요 사건의 의미를 왕권의 작용에 일차적인 초점을 맞추고 대신과 삼사의 관계를 함께 고려하면서 살펴본 것이다. 조선의 역사에서 이 시기는 건국 이후 한 세기를 거치면서 국가의 기본적 운영원리인 經國大典을 최종적으로 頒布함으로써 왕조의 제반 체제를 일단 완성했지만 그 직후 士禍와 反正으로 상징되는 치열한 정치적 갈등과 변화가 이어졌던, 매우 복잡하고 상반된 모습을 가졌던 국면이었다. 이런 과정은 일단 완성된 체제가 현실에도 확고히 정착되기까지는 ...
이 논문은 성종 · 연산군 · 중종대 정국운영의 과정과 주요 사건의 의미를 왕권의 작용에 일차적인 초점을 맞추고 대신과 삼사의 관계를 함께 고려하면서 살펴본 것이다. 조선의 역사에서 이 시기는 건국 이후 한 세기를 거치면서 국가의 기본적 운영원리인 經國大典을 최종적으로 頒布함으로써 왕조의 제반 체제를 일단 완성했지만 그 직후 士禍와 反正으로 상징되는 치열한 정치적 갈등과 변화가 이어졌던, 매우 복잡하고 상반된 모습을 가졌던 국면이었다. 이런 과정은 일단 완성된 체제가 현실에도 확고히 정착되기까지는 상당한 시행착오와 조정이 필요했음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가졌던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정치사적 의미는 삼사의 기능이 확립되어 실제 정치에서도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기본적으로 국왕 · 대신 · 삼사가 서로 비판과 견제에 기반한 정국운영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판단된다. 즉 국왕에 대한 간쟁과 신하들에 대한 탄핵이라는, 國政에 대한 포괄적인 감찰과 비평의 임무를 부여받은 삼사가 성종 중반 이후 그 기능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게 됨으로써 조선의 중앙정치는 어느 한 정치세력의 독주보다는 그들 사이의 합의와 균형이 중시되는, 이른바 ‘政治的 鼎立構圖’라고 표현할 수 있을 방식으로 운영된 것이다. 이러한 정국운영 방식의 변화는 왕정체제의 가장 중요한 권력인 왕권의 위상에도 주목할만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는 국왕이 어떤 전제적 · 초월적 권력자라기보다는 대신과 삼사로 대표되는 신하들과의 관계를 충분히 고려하면서 그들과의 합의를 도출해 정국을 운영하는 조정자로서의 성격을 좀더 많이 갖게 되었다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국왕이 최종적이며 가장 강력한 결정권자라는 왕정의 원리는 조선왕조 내내 거의 훼손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중국의 황제권처럼 어떤 전제적 형태의 권력이 아니라 ‘君臣共治’라고 표현할 수 있을 수준높은 유교정치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은 조선 왕정의 중요한 특징이며, 그런 특징의 대체적인 얼개는 앞서 살펴본대로 성종 중반 이후 많은 정치적 갈등과 절충과 모색을 거치면서 갖추어졌다고 여겨진다. 신하들과의 관계를 무시한 채 극단적 형태의 전제적 왕권을 추구하고 행사했던 연산군의 통치는 바로 이런 조선 왕정의 특징을 전면적으로 變改시키려는 폭력적 시도였지만, 그가 반정이라는 또 하나의 극단적인 방법으로 폐위된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君臣共治’의 이념에 입각한 유교정치를 지향한 조선 왕정의 특징은 이제 그런 폭력적 시도로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확고해졌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정치적 발전과 함께, 삼사의 기능 확립에는 일정한 부정적 요소도 개재되었다고 생각된다. 대표적으로 삼사의 기능 확립은 각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을 점차 격화시킨 측면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정치세력간의 갈등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반적 현상이지만, 탄핵과 간쟁의 임무를 본원적으로 부여받은 삼사의 기능 확립은 그것을 구조적으로 좀더 심각하게 만든 부분이 있었다고 판단된다. 정치세력 사이의 전면적인 충돌인 士禍가 삼사의 기능이 확립된 이 시기 이후 연속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은 그런 판단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방증이 될 것이다. 또한, 중종 후반 김안로 집권기에 전형적으로 나타났듯이, 언론기관은 공평하고 객관적인 비판자라는 순기능과 함께 그 본질적 속성상 권력자의 어용언론으로 전락할 역기능도 가진 것이었다는 사실 또한 이후 정치상황의 전개와 관련해 깊이 생각해볼 문제라고 여겨진다. 요컨대 성종 · 연산군 · 중종대의 정치사적 의미는 전체적인 체제의 완성을 이룩한 뒤 전면적인 파탄의 경험을 극복하면서 체제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더욱 살리기 위한 다양하고 적극적인 모색이 진행되었던 기간이었다고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시행착오와 일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색의 구체적인 성과는 중종대 이후 점차 구체화된 士林政治의 전개와 ‘士族層’의 대두, 性理學 이해의 심화, 書院과 鄕約의 도입과 같은 여러 변화와 발전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런 제도들이 정착되는 과정에서도 많은 어려움과 시련이 있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모색과 시도의 과정은 이후 거기에 상응하는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 논문은 성종 · 연산군 · 중종대 정국운영의 과정과 주요 사건의 의미를 왕권의 작용에 일차적인 초점을 맞추고 대신과 삼사의 관계를 함께 고려하면서 살펴본 것이다. 조선의 역사에서 이 시기는 건국 이후 한 세기를 거치면서 국가의 기본적 운영원리인 經國大典을 최종적으로 頒布함으로써 왕조의 제반 체제를 일단 완성했지만 그 직후 士禍와 反正으로 상징되는 치열한 정치적 갈등과 변화가 이어졌던, 매우 복잡하고 상반된 모습을 가졌던 국면이었다. 이런 과정은 일단 완성된 체제가 현실에도 확고히 정착되기까지는 상당한 시행착오와 조정이 필요했음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가졌던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정치사적 의미는 삼사의 기능이 확립되어 실제 정치에서도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기본적으로 국왕 · 대신 · 삼사가 서로 비판과 견제에 기반한 정국운영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판단된다. 즉 국왕에 대한 간쟁과 신하들에 대한 탄핵이라는, 國政에 대한 포괄적인 감찰과 비평의 임무를 부여받은 삼사가 성종 중반 이후 그 기능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게 됨으로써 조선의 중앙정치는 어느 한 정치세력의 독주보다는 그들 사이의 합의와 균형이 중시되는, 이른바 ‘政治的 鼎立構圖’라고 표현할 수 있을 방식으로 운영된 것이다. 이러한 정국운영 방식의 변화는 왕정체제의 가장 중요한 권력인 왕권의 위상에도 주목할만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는 국왕이 어떤 전제적 · 초월적 권력자라기보다는 대신과 삼사로 대표되는 신하들과의 관계를 충분히 고려하면서 그들과의 합의를 도출해 정국을 운영하는 조정자로서의 성격을 좀더 많이 갖게 되었다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국왕이 최종적이며 가장 강력한 결정권자라는 왕정의 원리는 조선왕조 내내 거의 훼손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중국의 황제권처럼 어떤 전제적 형태의 권력이 아니라 ‘君臣共治’라고 표현할 수 있을 수준높은 유교정치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은 조선 왕정의 중요한 특징이며, 그런 특징의 대체적인 얼개는 앞서 살펴본대로 성종 중반 이후 많은 정치적 갈등과 절충과 모색을 거치면서 갖추어졌다고 여겨진다. 신하들과의 관계를 무시한 채 극단적 형태의 전제적 왕권을 추구하고 행사했던 연산군의 통치는 바로 이런 조선 왕정의 특징을 전면적으로 變改시키려는 폭력적 시도였지만, 그가 반정이라는 또 하나의 극단적인 방법으로 폐위된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君臣共治’의 이념에 입각한 유교정치를 지향한 조선 왕정의 특징은 이제 그런 폭력적 시도로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확고해졌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정치적 발전과 함께, 삼사의 기능 확립에는 일정한 부정적 요소도 개재되었다고 생각된다. 대표적으로 삼사의 기능 확립은 각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을 점차 격화시킨 측면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정치세력간의 갈등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반적 현상이지만, 탄핵과 간쟁의 임무를 본원적으로 부여받은 삼사의 기능 확립은 그것을 구조적으로 좀더 심각하게 만든 부분이 있었다고 판단된다. 정치세력 사이의 전면적인 충돌인 士禍가 삼사의 기능이 확립된 이 시기 이후 연속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은 그런 판단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방증이 될 것이다. 또한, 중종 후반 김안로 집권기에 전형적으로 나타났듯이, 언론기관은 공평하고 객관적인 비판자라는 순기능과 함께 그 본질적 속성상 권력자의 어용언론으로 전락할 역기능도 가진 것이었다는 사실 또한 이후 정치상황의 전개와 관련해 깊이 생각해볼 문제라고 여겨진다. 요컨대 성종 · 연산군 · 중종대의 정치사적 의미는 전체적인 체제의 완성을 이룩한 뒤 전면적인 파탄의 경험을 극복하면서 체제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더욱 살리기 위한 다양하고 적극적인 모색이 진행되었던 기간이었다고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시행착오와 일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색의 구체적인 성과는 중종대 이후 점차 구체화된 士林政治의 전개와 ‘士族層’의 대두, 性理學 이해의 심화, 書院과 鄕約의 도입과 같은 여러 변화와 발전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런 제도들이 정착되는 과정에서도 많은 어려움과 시련이 있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모색과 시도의 과정은 이후 거기에 상응하는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한다.
This dissertation researched on process of operation of political situations and meanings of major political issues mainly focused on royal authority(王權), ministers(大臣) and Samsa(三司) from King Seongjong(成宗)’s reign to King Jungjong(中宗)’s one. This period was very complicated and contrary historical ...
This dissertation researched on process of operation of political situations and meanings of major political issues mainly focused on royal authority(王權), ministers(大臣) and Samsa(三司) from King Seongjong(成宗)’s reign to King Jungjong(中宗)’s one. This period was very complicated and contrary historical phase. Because Choson Dynasty(朝鮮王朝) eventually completed basic operation process of the nation called National Code(經國大典), but fierce political conflicts and changes represented by Literati Purges(士禍) and Restoration(反正) followed shortly after. This process represent that completed operation system needed quite trial and error, adjustment to settled stably in real political situation. In my opinion, the most important political change of this period was that process of operation of political situations have a check and balance structure between royal authority, ministers and Samsa. By this important political change, politics in Choson Dynasty was operated in a system that not by one political power’s monopoly but those three powers consultation. The changes of process of operation of political situations delivered remarkable change in phase of royal authority that most important political power. The change was that king of Choson Dynasty have a character that not an absolute monarch but a coordinator who made a consultations in political powers. As I emphasized already, the principle of monarchy that king is the most power ruler in a nation did not change in the term of Choson Dynasty. But it is a very important character that the political power of king in Choson Dynasty was not an absolute one but a confucian political power that can be described sovereign and subject ruled together. But, we pay attention to the fact that political conflicts among powers became much fierce also after functions of Samsa is settled as a solid system. Despite the political conflicts among powers are general phenomena, but establishment of Samsa’s function made it more serious one in a structure. The fact that literati purges followed continuously after prove this judgement. And, Samsa revealed a reverse function that played an unfair role for a powerful minister. In summary, the political meaning of these period was that diverse and positive groping was made to overcome of absolute deconstruction in Yeonsangun’s rule and to find a new political development. The concrete fruit of those groping was that unfold of Literati politics, deepning of Neo-confucian philosophy and introduction of a private school of famous scholar(書院) and a local order(鄕約). There was many obstacles in that process also, but it gave much positive effect on developement of Choson Dynasty afterward.
This dissertation researched on process of operation of political situations and meanings of major political issues mainly focused on royal authority(王權), ministers(大臣) and Samsa(三司) from King Seongjong(成宗)’s reign to King Jungjong(中宗)’s one. This period was very complicated and contrary historical phase. Because Choson Dynasty(朝鮮王朝) eventually completed basic operation process of the nation called National Code(經國大典), but fierce political conflicts and changes represented by Literati Purges(士禍) and Restoration(反正) followed shortly after. This process represent that completed operation system needed quite trial and error, adjustment to settled stably in real political situation. In my opinion, the most important political change of this period was that process of operation of political situations have a check and balance structure between royal authority, ministers and Samsa. By this important political change, politics in Choson Dynasty was operated in a system that not by one political power’s monopoly but those three powers consultation. The changes of process of operation of political situations delivered remarkable change in phase of royal authority that most important political power. The change was that king of Choson Dynasty have a character that not an absolute monarch but a coordinator who made a consultations in political powers. As I emphasized already, the principle of monarchy that king is the most power ruler in a nation did not change in the term of Choson Dynasty. But it is a very important character that the political power of king in Choson Dynasty was not an absolute one but a confucian political power that can be described sovereign and subject ruled together. But, we pay attention to the fact that political conflicts among powers became much fierce also after functions of Samsa is settled as a solid system. Despite the political conflicts among powers are general phenomena, but establishment of Samsa’s function made it more serious one in a structure. The fact that literati purges followed continuously after prove this judgement. And, Samsa revealed a reverse function that played an unfair role for a powerful minister. In summary, the political meaning of these period was that diverse and positive groping was made to overcome of absolute deconstruction in Yeonsangun’s rule and to find a new political development. The concrete fruit of those groping was that unfold of Literati politics, deepning of Neo-confucian philosophy and introduction of a private school of famous scholar(書院) and a local order(鄕約). There was many obstacles in that process also, but it gave much positive effect on developement of Choson Dynasty after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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