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노동세계는 큰 위기에 처한 것 같다. 현대사회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풍요로움과 기술의 혜택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런 외면상의 눈부신 모습 이면에 무수히 많은 문제들을 가득 안고 있는 것이 또한 현대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기술의 발전으로 현대 사회는 부와 그 외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 이것은 현대 사회에 급속도로 수많은 문제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노동은 지금까지 인간의 사회를 지탱해온 중요한 동력이요,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제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점차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실업은 이미 현대 사회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현실이다. 노동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있는 인간들은 무가치한 자로 취급되어 철저한 상실감 가운데 버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겨우 노동이 남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더 인상 자신의 노동에서 의미나 가치를 찾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이는 자본과 기술이 비약적으로 축적되면서 육체노동은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노동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는 많은 사람들이 노동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고용없는 성장과 “20대 80의 사회”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노동을 통해 생계를 꾸려야 할 사람들은 실업의 위협에 직면해 있고, 인간의 존엄성과 생활의 안정을 위협하는 돈벌이 노동에 내몰리고 있다. 돈벌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행위의 주체로 인정받기는커녕 지배와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일쑤이다. 거기에 더해서 자본과 기술에 의해 조직되는 노동과정과 생산과정은 생태계의 건강성과 안정성을 ...
오늘의 노동세계는 큰 위기에 처한 것 같다. 현대사회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풍요로움과 기술의 혜택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런 외면상의 눈부신 모습 이면에 무수히 많은 문제들을 가득 안고 있는 것이 또한 현대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기술의 발전으로 현대 사회는 부와 그 외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 이것은 현대 사회에 급속도로 수많은 문제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노동은 지금까지 인간의 사회를 지탱해온 중요한 동력이요,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제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점차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실업은 이미 현대 사회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현실이다. 노동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있는 인간들은 무가치한 자로 취급되어 철저한 상실감 가운데 버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겨우 노동이 남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더 인상 자신의 노동에서 의미나 가치를 찾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이는 자본과 기술이 비약적으로 축적되면서 육체노동은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노동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는 많은 사람들이 노동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고용없는 성장과 “20대 80의 사회”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노동을 통해 생계를 꾸려야 할 사람들은 실업의 위협에 직면해 있고, 인간의 존엄성과 생활의 안정을 위협하는 돈벌이 노동에 내몰리고 있다. 돈벌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행위의 주체로 인정받기는커녕 지배와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일쑤이다. 거기에 더해서 자본과 기술에 의해 조직되는 노동과정과 생산과정은 생태계의 건강성과 안정성을 해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노동세계의 위기를 바라보면서 노동이 인간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사회적 연대감을 가지게 하고, 자연친화적인 방향으로 형성될 수 있는 방안을 기독교 윤리의 관점에서 모색해 보려고 한다. 이러한 방안을 제대로 제시하기 위해서는 물론 매우 방대한 연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이른바 “노동사회”가 형성되어 온 역사적 과정을 규명하고 노동사회를 움직이는 논리들과 제도들을 분석하고 그 성과와 폐단을 비판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사회 이후의 노동세계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원칙들과 그 제도적 구현 방법들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관한 연구가 기독교 윤리학의 관점에서 수행된다고 한다면, 노동사회의 문제들을 인식하고 평가할 뿐만 아니라, 노동사회 이후의 노동세계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윤리적 판단과 행동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그 성서적 윤리적 근거들을 밝혀야 할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기독교 노동윤리의 성서적 근거와 그에 따른 윤리적 의미를 밝혀보려고 한다. 이 논문의 연구방법은 “문헌 연구 방법”에 의존할 것이다. 문헌의 선택순위에 있어서는 성서를 우선으로 하고, 그 외 기독교윤리신학과 관련된 문헌들을 다룰 것이다. 이는 노동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고찰을 해나감에 있어, 그 어떤 문헌 연구 자료보다 성서를 능가하는 전거(典據)는 없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어 있는 성서 중에서『공동번역성서』를 선정하여 성서적 노동관을 제시해나가고 그에 따른 윤리적 의미를 제시해나갈 것이다. 논자가 수많은 성서번역본 중에서『공동번역성서』를 선택한 이유는『공동번역성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성서신학자들이 공동으로 번역작업에 참여하고 국문학자들이 감수하여 비교적 원어에 가깝게 번역되었다는 것과 우리말 어법에 가장 적합한 번역 성서라는 것과 그리고 현재 모든 가톨릭 성당과 개신교 여러 교단에서 사용하는 유일한 번역 성서라는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앞으로 전개되는 모든 성서 구절은 이『공동번역성서』로 할 것임을 밝혀둔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는 기독교의 신명(神名)도 직접인용의 경우를 제외하고는『공동번역 성서』구절에 따라 “하느님”과 “야훼”로 제한하여 사용할 것이다. 이 논문은 성서적인 노동관을 주의 깊게 고찰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성서가 제시하는 노동에 집중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노동에 대한 성서의 구절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그것에 대한 원어적인 분석 또는 주석의 작업을 수행하지는 않을 것임을 밝혀두려는 것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성서가 전체적으로 말하는 노동의 개념을 찾고, 그것에 근거해 기독교 노동윤리의 의미를 제시하는 작업까지를 연구의 한계로 설정한다. 노동의 위기에 대해 기독교윤리가 지니는 의의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윤리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를 실현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의 노동현실은 이러한 자기표현을 저해하고 있다. 기독교윤리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실업과 임노동의 착취 구조가 얼마나 인간의 자기표현을 통한 자기정체성을 훼손하는지 드러낼 수 있고, 이를 극복해야하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노동의 기독교 윤리적 입장은 무엇보다도 신을 노동하는 존재로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 신의 모습을 따라 인간은 창조의 동참자로서, 새로운 창조신앙인으로서, 화해를 추구하고, 자기를 표현하고, 사회적 실천을 위한 사랑의 노동자로 이해하는 것이다. 구약성서 창조신화에서 “인간이 신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신의 모습에 따라 사랑의 마음으로 노동하는 능력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창조는 신의 독점영역이 아니다. 인간도 창조적인 노동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과 관계맺는 모든 것들을 갱신하고 치유하는 사랑의 노동에 의해서 창조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이 피조된 존재라는 사실의 윤리적 의미는 노동을 통해 신의 모습을 회복하여 사랑으로 노동하는 신의 파트너요, 공동창조자라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윤리는 공동체윤리의 정립을 제시한다. 예수가 가르친 기도문으로 모든 기독교인의 기도문의 모델인 주기도문을 보면 “나”라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우리”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온다. 이는 신에게 기도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이 “나”를 넘어서는 우리라는 공동체 속에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노동과 노동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논제는 “인간”이다. 기독교윤리는 노동하는 인간존재의 인간성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노동하는 인간은 신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 신의 소명에 따른 책임적 존재, 공동체의 관계지향적인 존재, 사회와 자연과 화해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노동의 기독교 윤리적 이해는 노동세계의 위기를 바라보면서 노동이 인간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사회적 연대감을 가지게 하고, 자연친화적인 방향으로 형성될 수 있는 방안을 통해, 노동하는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는 보다 근원적인 의미와 해석의 틀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논문초록 오늘의 노동세계는 큰 위기에 처한 것 같다. 현대사회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풍요로움과 기술의 혜택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런 외면상의 눈부신 모습 이면에 무수히 많은 문제들을 가득 안고 있는 것이 또한 현대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기술의 전으로 현대 사회는 부와 그 외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 이것은 현대 사회에 급속도로 수많은 문제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노동은 지금까지 인간의 사회를 지탱해온 중요한 동력이요,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제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점차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실업은 이미 현대 사회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현실이다. 노동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있는 인간들은 무가치한 자로 취급되어 철저한 상실감 가운데 버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겨우 노동이 남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더 인상 자신의 노동에서 의미나 가치를 찾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이는 자본과 기술이 비약적으로 축적되면서 육체노동은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노동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는 많은 사람들이 노동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고용없는 성장과 “20대 80의 사회”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노동을 통해 생계를 꾸려야 할 사람들은 실업의 위협에 직면해 있고, 인간의 존엄성과 생활의 안정을 위협하는 돈벌이 노동에 내몰리고 있다. 돈벌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행위의 주체로 인정받기는커녕 지배와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일쑤이다. 거기에 더해서 자본과 기술에 의해 조직되는 노동과정과 생산과정은 생태계의 건강성과 안정성을 해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노동세계의 위기를 바라보면서 노동이 인간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사회적 연대감을 가지게 하고, 자연친화적인 방향으로 형성될 수 있는 방안을 기독교 윤리의 관점에서 모색해 보려고 한다. 이러한 방안을 제대로 제시하기 위해서는 물론 매우 방대한 연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이른바 “노동사회”가 형성되어 온 역사적 과정을 규명하고 노동사회를 움직이는 논리들과 제도들을 분석하고 그 성과와 폐단을 비판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사회 이후의 노동세계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원칙들과 그 제도적 구현 방법들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관한 연구가 기독교 윤리학의 관점에서 수행된다고 한다면, 노동사회의 문제들을 인식하고 평가할 뿐만 아니라, 노동사회 이후의 노동세계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윤리적 판단과 행동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그 성서적 윤리적 근거들을 밝혀야 할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기독교 노동윤리의 성서적 근거와 그에 따른 윤리적 의미를 밝혀보려고 한다. 이 논문의 연구방법은 “문헌 연구 방법”에 의존할 것이다. 문헌의 선택순위에 있어서는 성서를 우선으로 하고, 그 외 기독교윤리신학과 관련된 문헌들을 다룰 것이다. 이는 노동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고찰을 해나감에 있어, 그 어떤 문헌 연구 자료보다 성서를 능가하는 전거(典據)는 없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어 있는 성서 중에서『공동번역성서』를 선정하여 성서적 노동관을 제시해나가고 그에 따른 윤리적 의미를 제시해나갈 것이다. 논자가 수많은 성서번역본 중에서『공동번역성서』를 선택한 이유는『공동번역성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성서신학자들이 공동으로 번역작업에 참여하고 국문학자들이 감수하여 비교적 원어에 가깝게 번역되었다는 것과 우리말 어법에 가장 적합한 번역 성서라는 것과 그리고 현재 모든 가톨릭 성당과 개신교 여러 교단에서 사용하는 유일한 번역 성서라는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앞으로 전개되는 모든 성서 구절은 이『공동번역성서』로 할 것임을 밝혀둔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는 기독교의 신명(神名)도 직접인용의 경우를 제외하고는『공동번역 성서』구절에 따라 “하느님”과 “야훼”로 제한하여 사용할 것이다. 이 논문은 성서적인 노동관을 주의 깊게 고찰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성서가 제시하는 노동에 집중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노동에 대한 성서의 구절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그것에 대한 원어적인 분석 또는 주석의 작업을 수행하지는 않을 것임을 밝혀두려는 것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성서가 전체적으로 말하는 노동의 개념을 찾고, 그것에 근거해 기독교 노동윤리의 의미를 제시하는 작업까지를 연구의 한계로 설정한다. 노동의 위기에 대해 기독교윤리가 지니는 의의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윤리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를 실현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의 노동현실은 이러한 자기표현을 저해하고 있다. 기독교윤리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실업과 임노동의 착취 구조가 얼마나 인간의 자기표현을 통한 자기정체성을 훼손하는지 드러낼 수 있고, 이를 극복해야하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노동의 기독교 윤리적 입장은 무엇보다도 신을 노동하는 존재로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 신의 모습을 따라 인간은 창조의 동참자로서, 새로운 창조신앙인으로서, 화해를 추구하고, 자기를 표현하고, 사회적 실천을 위한 사랑의 노동자로 이해하는 것이다. 구약성서 창조신화에서 “인간이 신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신의 모습에 따라 사랑의 마음으로 노동하는 능력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창조는 신의 독점영역이 아니다. 인간도 창조적인 노동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과 관계맺는 모든 것들을 갱신하고 치유하는 사랑의 노동에 의해서 창조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이 피조된 존재라는 사실의 윤리적 의미는 노동을 통해 신의 모습을 회복하여 사랑으로 노동하는 신의 파트너요, 공동창조자라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윤리는 공동체윤리의 정립을 제시한다. 예수가 가르친 기도문으로 모든 기독교인의 기도문의 모델인 주기도문을 보면 “나”라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우리”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온다. 이는 신에게 기도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이 “나”를 넘어서는 우리라는 공동체 속에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노동과 노동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논제는 “인간”이다. 기독교윤리는 노동하는 인간존재의 인간성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노동하는 인간은 신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 신의 소명에 따른 책임적 존재, 공동체의 관계지향적인 존재, 사회와 자연과 화해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노동의 기독교 윤리적 이해는 노동세계의 위기를 바라보면서 노동이 인간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사회적 연대감을 가지게 하고, 자연친화적인 방향으로 형성될 수 있는 방안을 통해, 노동하는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는 보다 근원적인 의미와 해석의 틀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논문초록 오늘의 노동세계는 큰 위기에 처한 것 같다. 현대사회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풍요로움과 기술의 혜택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런 외면상의 눈부신 모습 이면에 무수히 많은 문제들을 가득 안고 있는 것이 또한 현대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기술의 발전으로 현대 사회는 부와 그 외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 이것은 현대 사회에 급속도로 수많은 문제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노동은 지금까지 인간의 사회를 지탱해온 중요한 동력이요,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제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점차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실업은 이미 현대 사회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현실이다. 노동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있는 인간들은 무가치한 자로 취급되어 철저한 상실감 가운데 버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겨우 노동이 남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더 인상 자신의 노동에서 의미나 가치를 찾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이는 자본과 기술이 비약적으로 축적되면서 육체노동은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노동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는 많은 사람들이 노동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고용없는 성장과 “20대 80의 사회”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노동을 통해 생계를 꾸려야 할 사람들은 실업의 위협에 직면해 있고, 인간의 존엄성과 생활의 안정을 위협하는 돈벌이 노동에 내몰리고 있다. 돈벌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행위의 주체로 인정받기는커녕 지배와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일쑤이다. 거기에 더해서 자본과 기술에 의해 조직되는 노동과정과 생산과정은 생태계의 건강성과 안정성을 해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노동세계의 위기를 바라보면서 노동이 인간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사회적 연대감을 가지게 하고, 자연친화적인 방향으로 형성될 수 있는 방안을 기독교 윤리의 관점에서 모색해 보려고 한다. 이러한 방안을 제대로 제시하기 위해서는 물론 매우 방대한 연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이른바 “노동사회”가 형성되어 온 역사적 과정을 규명하고 노동사회를 움직이는 논리들과 제도들을 분석하고 그 성과와 폐단을 비판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사회 이후의 노동세계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원칙들과 그 제도적 구현 방법들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관한 연구가 기독교 윤리학의 관점에서 수행된다고 한다면, 노동사회의 문제들을 인식하고 평가할 뿐만 아니라, 노동사회 이후의 노동세계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윤리적 판단과 행동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그 성서적 윤리적 근거들을 밝혀야 할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기독교 노동윤리의 성서적 근거와 그에 따른 윤리적 의미를 밝혀보려고 한다. 이 논문의 연구방법은 “문헌 연구 방법”에 의존할 것이다. 문헌의 선택순위에 있어서는 성서를 우선으로 하고, 그 외 기독교윤리신학과 관련된 문헌들을 다룰 것이다. 이는 노동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고찰을 해나감에 있어, 그 어떤 문헌 연구 자료보다 성서를 능가하는 전거(典據)는 없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어 있는 성서 중에서『공동번역성서』를 선정하여 성서적 노동관을 제시해나가고 그에 따른 윤리적 의미를 제시해나갈 것이다. 논자가 수많은 성서번역본 중에서『공동번역성서』를 선택한 이유는『공동번역성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성서신학자들이 공동으로 번역작업에 참여하고 국문학자들이 감수하여 비교적 원어에 가깝게 번역되었다는 것과 우리말 어법에 가장 적합한 번역 성서라는 것과 그리고 현재 모든 가톨릭 성당과 개신교 여러 교단에서 사용하는 유일한 번역 성서라는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앞으로 전개되는 모든 성서 구절은 이『공동번역성서』로 할 것임을 밝혀둔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는 기독교의 신명(神名)도 직접인용의 경우를 제외하고는『공동번역 성서』구절에 따라 “하느님”과 “야훼”로 제한하여 사용할 것이다. 이 논문은 성서적인 노동관을 주의 깊게 고찰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성서가 제시하는 노동에 집중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노동에 대한 성서의 구절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그것에 대한 원어적인 분석 또는 주석의 작업을 수행하지는 않을 것임을 밝혀두려는 것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성서가 전체적으로 말하는 노동의 개념을 찾고, 그것에 근거해 기독교 노동윤리의 의미를 제시하는 작업까지를 연구의 한계로 설정한다. 노동의 위기에 대해 기독교윤리가 지니는 의의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윤리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를 실현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의 노동현실은 이러한 자기표현을 저해하고 있다. 기독교윤리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실업과 임노동의 착취 구조가 얼마나 인간의 자기표현을 통한 자기정체성을 훼손하는지 드러낼 수 있고, 이를 극복해야하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노동의 기독교 윤리적 입장은 무엇보다도 신을 노동하는 존재로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 신의 모습을 따라 인간은 창조의 동참자로서, 새로운 창조신앙인으로서, 화해를 추구하고, 자기를 표현하고, 사회적 실천을 위한 사랑의 노동자로 이해하는 것이다. 구약성서 창조신화에서 “인간이 신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신의 모습에 따라 사랑의 마음으로 노동하는 능력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창조는 신의 독점영역이 아니다. 인간도 창조적인 노동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과 관계맺는 모든 것들을 갱신하고 치유하는 사랑의 노동에 의해서 창조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이 피조된 존재라는 사실의 윤리적 의미는 노동을 통해 신의 모습을 회복하여 사랑으로 노동하는 신의 파트너요, 공동창조자라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윤리는 공동체윤리의 정립을 제시한다. 예수가 가르친 기도문으로 모든 기독교인의 기도문의 모델인 주기도문을 보면 “나”라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우리”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온다. 이는 신에게 기도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이 “나”를 넘어서는 우리라는 공동체 속에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노동과 노동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논제는 “인간”이다. 기독교윤리는 노동하는 인간존재의 인간성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노동하는 인간은 신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 신의 소명에 따른 책임적 존재, 공동체의 관계지향적인 존재, 사회와 자연과 화해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노동의 기독교 윤리적 이해는 노동세계의 위기를 바라보면서 노동이 인간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사회적 연대감을 가지게 하고, 자연친화적인 방향으로 형성될 수 있는 방안을 통해, 노동하는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는 보다 근원적인 의미와 해석의 틀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논문초록 오늘의 노동세계는 큰 위기에 처한 것 같다. 현대사회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풍요로움과 기술의 혜택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런 외면상의 눈부신 모습 이면에 무수히 많은 문제들을 가득 안고 있는 것이 또한 현대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기술의 발전으로 현대 사회는 부와 그 외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 이것은 현대 사회에 급속도로 수많은 문제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노동은 지금까지 인간의 사회를 지탱해온 중요한 동력이요,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제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점차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실업은 이미 현대 사회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현실이다. 노동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있는 인간들은 무가치한 자로 취급되어 철저한 상실감 가운데 버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겨우 노동이 남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더 인상 자신의 동에서 의미나 가치를 찾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이는 자본과 기술이 비약적으로 축적되면서 육체노동은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노동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는 많은 사람들이 노동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고용없는 성장과 “20대 80의 사회”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노동을 통해 생계를 꾸려야 할 사람들은 실업의 위협에 직면해 있고, 인간의 존엄성과 생활의 안정을 위협하는 돈벌이 노동에 내몰리고 있다. 돈벌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행위의 주체로 인정받기는커녕 지배와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일쑤이다. 거기에 더해서 자본과 기술에 의해 조직되는 노동과정과 생산과정은 생태계의 건강성과 안정성을 해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노동세계의 위기를 바라보면서 노동이 인간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사회적 연대감을 가지게 하고, 자연친화적인 방향으로 형성될 수 있는 방안을 기독교 윤리의 관점에서 모색해 보려고 한다. 이러한 방안을 제대로 제시하기 위해서는 물론 매우 방대한 연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이른바 “노동사회”가 형성되어 온 역사적 과정을 규명하고 노동사회를 움직이는 논리들과 제도들을 분석하고 그 성과와 폐단을 비판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사회 이후의 노동세계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원칙들과 그 제도적 구현 방법들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관한 연구가 기독교 윤리학의 관점에서 수행된다고 한다면, 노동사회의 문제들을 인식하고 평가할 뿐만 아니라, 노동사회 이후의 노동세계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윤리적 판단과 행동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그 성서적 윤리적 근거들을 밝혀야 할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기독교 노동윤리의 성서적 근거와 그에 따른 윤리적 의미를 밝혀보려고 한다. 이 논문의 연구방법은 “문헌 연구 방법”에 의존할 것이다. 문헌의 선택순위에 있어서는 성서를 우선으로 하고, 그 외 기독교윤리신학과 관련된 문헌들을 다룰 것이다. 이는 노동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고찰을 해나감에 있어, 그 어떤 문헌 연구 자료보다 성서를 능가하는 전거(典據)는 없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어 있는 성서 중에서『공동번역성서』를 선정하여 성서적 노동관을 제시해나가고 그에 따른 윤리적 의미를 제시해나갈 것이다. 논자가 수많은 성서번역본 중에서『공동번역성서』를 선택한 이유는『공동번역성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성서신학자들이 공동으로 번역작업에 참여하고 국문학자들이 감수하여 비교적 원어에 가깝게 번역되었다는 것과 우리말 어법에 가장 적합한 번역 성서라는 것과 그리고 현재 모든 가톨릭 성당과 개신교 여러 교단에서 사용하는 유일한 번역 성서라는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앞으로 전개되는 모든 성서 구절은 이『공동번역성서』로 할 것임을 밝혀둔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는 기독교의 신명(神名)도 직접인용의 경우를 제외하고는『공동번역 성서』구절에 따라 “하느님”과 “야훼”로 제한하여 사용할 것이다. 이 논문은 성서적인 노동관을 주의 깊게 고찰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성서가 제시하는 노동에 집중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노동에 대한 성서의 구절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그것에 대한 원어적인 분석 또는 주석의 작업을 수행하지는 않을 것임을 밝혀두려는 것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성서가 전체적으로 말하는 노동의 개념을 찾고, 그것에 근거해 기독교 노동윤리의 의미를 제시하는 작업까지를 연구의 한계로 설정한다. 노동의 위기에 대해 기독교윤리가 지니는 의의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윤리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를 실현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의 노동현실은 이러한 자기표현을 저해하고 있다. 기독교윤리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실업과 임노동의 착취 구조가 얼마나 인간의 자기표현을 통한 자기정체성을 훼손하는지 드러낼 수 있고, 이를 극복해야하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노동의 기독교 윤리적 입장은 무엇보다도 신을 노동하는 존재로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 신의 모습을 따라 인간은 창조의 동참자로서, 새로운 창조신앙인으로서, 화해를 추구하고, 자기를 표현하고, 사회적 실천을 위한 사랑의 노동자로 이해하는 것이다. 구약성서 창조신화에서 “인간이 신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신의 모습에 따라 사랑의 마음으로 노동하는 능력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창조는 신의 독점영역이 아니다. 인간도 창조적인 노동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과 관계맺는 모든 것들을 갱신하고 치유하는 사랑의 노동에 의해서 창조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이 피조된 존재라는 사실의 윤리적 의미는 노동을 통해 신의 모습을 회복하여 사랑으로 노동하는 신의 파트너요, 공동창조자라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윤리는 공동체윤리의 정립을 제시한다. 예수가 가르친 기도문으로 모든 기독교인의 기도문의 모델인 주기도문을 보면 “나”라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우리”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온다. 이는 신에게 기도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이 “나”를 넘어서는 우리라는 공동체 속에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노동과 노동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논제는 “인간”이다. 기독교윤리는 노동하는 인간존재의 인간성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노동하는 인간은 신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 신의 소명에 따른 책임적 존재, 공동체의 관계지향적인 존재, 사회와 자연과 화해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노동의 기독교 윤리적 이해는 노동세계의 위기를 바라보면서 노동이 인간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사회적 연대감을 가지게 하고, 자연친화적인 방향으로 형성될 수 있는 방안을 통해, 노동하는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는 보다 근원적인 의미와 해석의 틀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오늘의 노동세계는 큰 위기에 처한 것 같다. 현대사회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풍요로움과 기술의 혜택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런 외면상의 눈부신 모습 이면에 무수히 많은 문제들을 가득 안고 있는 것이 또한 현대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기술의 발전으로 현대 사회는 부와 그 외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 이것은 현대 사회에 급속도로 수많은 문제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노동은 지금까지 인간의 사회를 지탱해온 중요한 동력이요,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제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점차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실업은 이미 현대 사회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현실이다. 노동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있는 인간들은 무가치한 자로 취급되어 철저한 상실감 가운데 버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겨우 노동이 남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더 인상 자신의 노동에서 의미나 가치를 찾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이는 자본과 기술이 비약적으로 축적되면서 육체노동은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노동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는 많은 사람들이 노동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고용없는 성장과 “20대 80의 사회”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노동을 통해 생계를 꾸려야 할 사람들은 실업의 위협에 직면해 있고, 인간의 존엄성과 생활의 안정을 위협하는 돈벌이 노동에 내몰리고 있다. 돈벌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행위의 주체로 인정받기는커녕 지배와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일쑤이다. 거기에 더해서 자본과 기술에 의해 조직되는 노동과정과 생산과정은 생태계의 건강성과 안정성을 해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노동세계의 위기를 바라보면서 노동이 인간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사회적 연대감을 가지게 하고, 자연친화적인 방향으로 형성될 수 있는 방안을 기독교 윤리의 관점에서 모색해 보려고 한다. 이러한 방안을 제대로 제시하기 위해서는 물론 매우 방대한 연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이른바 “노동사회”가 형성되어 온 역사적 과정을 규명하고 노동사회를 움직이는 논리들과 제도들을 분석하고 그 성과와 폐단을 비판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사회 이후의 노동세계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원칙들과 그 제도적 구현 방법들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관한 연구가 기독교 윤리학의 관점에서 수행된다고 한다면, 노동사회의 문제들을 인식하고 평가할 뿐만 아니라, 노동사회 이후의 노동세계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윤리적 판단과 행동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그 성서적 윤리적 근거들을 밝혀야 할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기독교 노동윤리의 성서적 근거와 그에 따른 윤리적 의미를 밝혀보려고 한다. 이 논문의 연구방법은 “문헌 연구 방법”에 의존할 것이다. 문헌의 선택순위에 있어서는 성서를 우선으로 하고, 그 외 기독교윤리신학과 관련된 문헌들을 다룰 것이다. 이는 노동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고찰을 해나감에 있어, 그 어떤 문헌 연구 자료보다 성서를 능가하는 전거(典據)는 없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어 있는 성서 중에서『공동번역성서』를 선정하여 성서적 노동관을 제시해나가고 그에 따른 윤리적 의미를 제시해나갈 것이다. 논자가 수많은 성서번역본 중에서『공동번역성서』를 선택한 이유는『공동번역성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성서신학자들이 공동으로 번역작업에 참여하고 국문학자들이 감수하여 비교적 원어에 가깝게 번역되었다는 것과 우리말 어법에 가장 적합한 번역 성서라는 것과 그리고 현재 모든 가톨릭 성당과 개신교 여러 교단에서 사용하는 유일한 번역 성서라는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앞으로 전개되는 모든 성서 구절은 이『공동번역성서』로 할 것임을 밝혀둔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는 기독교의 신명(神名)도 직접인용의 경우를 제외하고는『공동번역 성서』구절에 따라 “하느님”과 “야훼”로 제한하여 사용할 것이다. 이 논문은 성서적인 노동관을 주의 깊게 고찰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성서가 제시하는 노동에 집중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노동에 대한 성서의 구절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그것에 대한 원어적인 분석 또는 주석의 작업을 수행하지는 않을 것임을 밝혀두려는 것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성서가 전체적으로 말하는 노동의 개념을 찾고, 그것에 근거해 기독교 노동윤리의 의미를 제시하는 작업까지를 연구의 한계로 설정한다. 노동의 위기에 대해 기독교윤리가 지니는 의의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윤리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를 실현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의 노동현실은 이러한 자기표현을 저해하고 있다. 기독교윤리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실업과 임노동의 착취 구조가 얼마나 인간의 자기표현을 통한 자기정체성을 훼손하는지 드러낼 수 있고, 이를 극복해야하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노동의 기독교 윤리적 입장은 무엇보다도 신을 노동하는 존재로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 신의 모습을 따라 인간은 창조의 동참자로서, 새로운 창조신앙인으로서, 화해를 추구하고, 자기를 표현하고, 사회적 실천을 위한 사랑의 노동자로 이해하는 것이다. 구약성서 창조신화에서 “인간이 신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신의 모습에 따라 사랑의 마음으로 노동하는 능력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창조는 신의 독점영역이 아니다. 인간도 창조적인 노동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과 관계맺는 모든 것들을 갱신하고 치유하는 사랑의 노동에 의해서 창조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이 피조된 존재라는 사실의 윤리적 의미는 노동을 통해 신의 모습을 회복하여 사랑으로 노동하는 신의 파트너요, 공동창조자라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윤리는 공동체윤리의 정립을 제시한다. 예수가 가르친 기도문으로 모든 기독교인의 기도문의 모델인 주기도문을 보면 “나”라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우리”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온다. 이는 신에게 기도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이 “나”를 넘어서는 우리라는 공동체 속에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노동과 노동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논제는 “인간”이다. 기독교윤리는 노동하는 인간존재의 인간성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노동하는 인간은 신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 신의 소명에 따른 책임적 존재, 공동체의 관계지향적인 존재, 사회와 자연과 화해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노동의 기독교 윤리적 이해는 노동세계의 위기를 바라보면서 노동이 인간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사회적 연대감을 가지게 하고, 자연친화적인 방향으로 형성될 수 있는 방안을 통해, 노동하는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는 보다 근원적인 의미와 해석의 틀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논문초록 오늘의 노동세계는 큰 위기에 처한 것 같다. 현대사회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풍요로움과 기술의 혜택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런 외면상의 눈부신 모습 이면에 무수히 많은 문제들을 가득 안고 있는 것이 또한 현대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기술의 전으로 현대 사회는 부와 그 외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 이것은 현대 사회에 급속도로 수많은 문제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노동은 지금까지 인간의 사회를 지탱해온 중요한 동력이요,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제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점차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실업은 이미 현대 사회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현실이다. 노동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있는 인간들은 무가치한 자로 취급되어 철저한 상실감 가운데 버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겨우 노동이 남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더 인상 자신의 노동에서 의미나 가치를 찾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이는 자본과 기술이 비약적으로 축적되면서 육체노동은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노동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는 많은 사람들이 노동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고용없는 성장과 “20대 80의 사회”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노동을 통해 생계를 꾸려야 할 사람들은 실업의 위협에 직면해 있고, 인간의 존엄성과 생활의 안정을 위협하는 돈벌이 노동에 내몰리고 있다. 돈벌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행위의 주체로 인정받기는커녕 지배와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일쑤이다. 거기에 더해서 자본과 기술에 의해 조직되는 노동과정과 생산과정은 생태계의 건강성과 안정성을 해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노동세계의 위기를 바라보면서 노동이 인간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사회적 연대감을 가지게 하고, 자연친화적인 방향으로 형성될 수 있는 방안을 기독교 윤리의 관점에서 모색해 보려고 한다. 이러한 방안을 제대로 제시하기 위해서는 물론 매우 방대한 연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이른바 “노동사회”가 형성되어 온 역사적 과정을 규명하고 노동사회를 움직이는 논리들과 제도들을 분석하고 그 성과와 폐단을 비판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사회 이후의 노동세계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원칙들과 그 제도적 구현 방법들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관한 연구가 기독교 윤리학의 관점에서 수행된다고 한다면, 노동사회의 문제들을 인식하고 평가할 뿐만 아니라, 노동사회 이후의 노동세계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윤리적 판단과 행동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그 성서적 윤리적 근거들을 밝혀야 할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기독교 노동윤리의 성서적 근거와 그에 따른 윤리적 의미를 밝혀보려고 한다. 이 논문의 연구방법은 “문헌 연구 방법”에 의존할 것이다. 문헌의 선택순위에 있어서는 성서를 우선으로 하고, 그 외 기독교윤리신학과 관련된 문헌들을 다룰 것이다. 이는 노동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고찰을 해나감에 있어, 그 어떤 문헌 연구 자료보다 성서를 능가하는 전거(典據)는 없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어 있는 성서 중에서『공동번역성서』를 선정하여 성서적 노동관을 제시해나가고 그에 따른 윤리적 의미를 제시해나갈 것이다. 논자가 수많은 성서번역본 중에서『공동번역성서』를 선택한 이유는『공동번역성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성서신학자들이 공동으로 번역작업에 참여하고 국문학자들이 감수하여 비교적 원어에 가깝게 번역되었다는 것과 우리말 어법에 가장 적합한 번역 성서라는 것과 그리고 현재 모든 가톨릭 성당과 개신교 여러 교단에서 사용하는 유일한 번역 성서라는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앞으로 전개되는 모든 성서 구절은 이『공동번역성서』로 할 것임을 밝혀둔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는 기독교의 신명(神名)도 직접인용의 경우를 제외하고는『공동번역 성서』구절에 따라 “하느님”과 “야훼”로 제한하여 사용할 것이다. 이 논문은 성서적인 노동관을 주의 깊게 고찰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성서가 제시하는 노동에 집중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노동에 대한 성서의 구절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그것에 대한 원어적인 분석 또는 주석의 작업을 수행하지는 않을 것임을 밝혀두려는 것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성서가 전체적으로 말하는 노동의 개념을 찾고, 그것에 근거해 기독교 노동윤리의 의미를 제시하는 작업까지를 연구의 한계로 설정한다. 노동의 위기에 대해 기독교윤리가 지니는 의의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윤리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를 실현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의 노동현실은 이러한 자기표현을 저해하고 있다. 기독교윤리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실업과 임노동의 착취 구조가 얼마나 인간의 자기표현을 통한 자기정체성을 훼손하는지 드러낼 수 있고, 이를 극복해야하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노동의 기독교 윤리적 입장은 무엇보다도 신을 노동하는 존재로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 신의 모습을 따라 인간은 창조의 동참자로서, 새로운 창조신앙인으로서, 화해를 추구하고, 자기를 표현하고, 사회적 실천을 위한 사랑의 노동자로 이해하는 것이다. 구약성서 창조신화에서 “인간이 신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신의 모습에 따라 사랑의 마음으로 노동하는 능력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창조는 신의 독점영역이 아니다. 인간도 창조적인 노동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과 관계맺는 모든 것들을 갱신하고 치유하는 사랑의 노동에 의해서 창조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이 피조된 존재라는 사실의 윤리적 의미는 노동을 통해 신의 모습을 회복하여 사랑으로 노동하는 신의 파트너요, 공동창조자라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윤리는 공동체윤리의 정립을 제시한다. 예수가 가르친 기도문으로 모든 기독교인의 기도문의 모델인 주기도문을 보면 “나”라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우리”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온다. 이는 신에게 기도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이 “나”를 넘어서는 우리라는 공동체 속에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노동과 노동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논제는 “인간”이다. 기독교윤리는 노동하는 인간존재의 인간성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노동하는 인간은 신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 신의 소명에 따른 책임적 존재, 공동체의 관계지향적인 존재, 사회와 자연과 화해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노동의 기독교 윤리적 이해는 노동세계의 위기를 바라보면서 노동이 인간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사회적 연대감을 가지게 하고, 자연친화적인 방향으로 형성될 수 있는 방안을 통해, 노동하는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는 보다 근원적인 의미와 해석의 틀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논문초록 오늘의 노동세계는 큰 위기에 처한 것 같다. 현대사회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풍요로움과 기술의 혜택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런 외면상의 눈부신 모습 이면에 무수히 많은 문제들을 가득 안고 있는 것이 또한 현대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기술의 발전으로 현대 사회는 부와 그 외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 이것은 현대 사회에 급속도로 수많은 문제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노동은 지금까지 인간의 사회를 지탱해온 중요한 동력이요,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제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점차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실업은 이미 현대 사회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현실이다. 노동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있는 인간들은 무가치한 자로 취급되어 철저한 상실감 가운데 버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겨우 노동이 남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더 인상 자신의 노동에서 의미나 가치를 찾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이는 자본과 기술이 비약적으로 축적되면서 육체노동은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노동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는 많은 사람들이 노동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고용없는 성장과 “20대 80의 사회”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노동을 통해 생계를 꾸려야 할 사람들은 실업의 위협에 직면해 있고, 인간의 존엄성과 생활의 안정을 위협하는 돈벌이 노동에 내몰리고 있다. 돈벌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행위의 주체로 인정받기는커녕 지배와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일쑤이다. 거기에 더해서 자본과 기술에 의해 조직되는 노동과정과 생산과정은 생태계의 건강성과 안정성을 해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노동세계의 위기를 바라보면서 노동이 인간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사회적 연대감을 가지게 하고, 자연친화적인 방향으로 형성될 수 있는 방안을 기독교 윤리의 관점에서 모색해 보려고 한다. 이러한 방안을 제대로 제시하기 위해서는 물론 매우 방대한 연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이른바 “노동사회”가 형성되어 온 역사적 과정을 규명하고 노동사회를 움직이는 논리들과 제도들을 분석하고 그 성과와 폐단을 비판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사회 이후의 노동세계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원칙들과 그 제도적 구현 방법들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관한 연구가 기독교 윤리학의 관점에서 수행된다고 한다면, 노동사회의 문제들을 인식하고 평가할 뿐만 아니라, 노동사회 이후의 노동세계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윤리적 판단과 행동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그 성서적 윤리적 근거들을 밝혀야 할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기독교 노동윤리의 성서적 근거와 그에 따른 윤리적 의미를 밝혀보려고 한다. 이 논문의 연구방법은 “문헌 연구 방법”에 의존할 것이다. 문헌의 선택순위에 있어서는 성서를 우선으로 하고, 그 외 기독교윤리신학과 관련된 문헌들을 다룰 것이다. 이는 노동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고찰을 해나감에 있어, 그 어떤 문헌 연구 자료보다 성서를 능가하는 전거(典據)는 없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어 있는 성서 중에서『공동번역성서』를 선정하여 성서적 노동관을 제시해나가고 그에 따른 윤리적 의미를 제시해나갈 것이다. 논자가 수많은 성서번역본 중에서『공동번역성서』를 선택한 이유는『공동번역성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성서신학자들이 공동으로 번역작업에 참여하고 국문학자들이 감수하여 비교적 원어에 가깝게 번역되었다는 것과 우리말 어법에 가장 적합한 번역 성서라는 것과 그리고 현재 모든 가톨릭 성당과 개신교 여러 교단에서 사용하는 유일한 번역 성서라는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앞으로 전개되는 모든 성서 구절은 이『공동번역성서』로 할 것임을 밝혀둔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는 기독교의 신명(神名)도 직접인용의 경우를 제외하고는『공동번역 성서』구절에 따라 “하느님”과 “야훼”로 제한하여 사용할 것이다. 이 논문은 성서적인 노동관을 주의 깊게 고찰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성서가 제시하는 노동에 집중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노동에 대한 성서의 구절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그것에 대한 원어적인 분석 또는 주석의 작업을 수행하지는 않을 것임을 밝혀두려는 것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성서가 전체적으로 말하는 노동의 개념을 찾고, 그것에 근거해 기독교 노동윤리의 의미를 제시하는 작업까지를 연구의 한계로 설정한다. 노동의 위기에 대해 기독교윤리가 지니는 의의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윤리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를 실현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의 노동현실은 이러한 자기표현을 저해하고 있다. 기독교윤리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실업과 임노동의 착취 구조가 얼마나 인간의 자기표현을 통한 자기정체성을 훼손하는지 드러낼 수 있고, 이를 극복해야하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노동의 기독교 윤리적 입장은 무엇보다도 신을 노동하는 존재로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 신의 모습을 따라 인간은 창조의 동참자로서, 새로운 창조신앙인으로서, 화해를 추구하고, 자기를 표현하고, 사회적 실천을 위한 사랑의 노동자로 이해하는 것이다. 구약성서 창조신화에서 “인간이 신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신의 모습에 따라 사랑의 마음으로 노동하는 능력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창조는 신의 독점영역이 아니다. 인간도 창조적인 노동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과 관계맺는 모든 것들을 갱신하고 치유하는 사랑의 노동에 의해서 창조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이 피조된 존재라는 사실의 윤리적 의미는 노동을 통해 신의 모습을 회복하여 사랑으로 노동하는 신의 파트너요, 공동창조자라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윤리는 공동체윤리의 정립을 제시한다. 예수가 가르친 기도문으로 모든 기독교인의 기도문의 모델인 주기도문을 보면 “나”라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우리”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온다. 이는 신에게 기도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이 “나”를 넘어서는 우리라는 공동체 속에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노동과 노동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논제는 “인간”이다. 기독교윤리는 노동하는 인간존재의 인간성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노동하는 인간은 신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 신의 소명에 따른 책임적 존재, 공동체의 관계지향적인 존재, 사회와 자연과 화해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노동의 기독교 윤리적 이해는 노동세계의 위기를 바라보면서 노동이 인간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사회적 연대감을 가지게 하고, 자연친화적인 방향으로 형성될 수 있는 방안을 통해, 노동하는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는 보다 근원적인 의미와 해석의 틀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논문초록 오늘의 노동세계는 큰 위기에 처한 것 같다. 현대사회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풍요로움과 기술의 혜택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런 외면상의 눈부신 모습 이면에 무수히 많은 문제들을 가득 안고 있는 것이 또한 현대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기술의 발전으로 현대 사회는 부와 그 외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 이것은 현대 사회에 급속도로 수많은 문제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노동은 지금까지 인간의 사회를 지탱해온 중요한 동력이요,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제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점차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실업은 이미 현대 사회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현실이다. 노동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있는 인간들은 무가치한 자로 취급되어 철저한 상실감 가운데 버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겨우 노동이 남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더 인상 자신의 동에서 의미나 가치를 찾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이는 자본과 기술이 비약적으로 축적되면서 육체노동은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노동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는 많은 사람들이 노동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고용없는 성장과 “20대 80의 사회”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노동을 통해 생계를 꾸려야 할 사람들은 실업의 위협에 직면해 있고, 인간의 존엄성과 생활의 안정을 위협하는 돈벌이 노동에 내몰리고 있다. 돈벌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행위의 주체로 인정받기는커녕 지배와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일쑤이다. 거기에 더해서 자본과 기술에 의해 조직되는 노동과정과 생산과정은 생태계의 건강성과 안정성을 해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노동세계의 위기를 바라보면서 노동이 인간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사회적 연대감을 가지게 하고, 자연친화적인 방향으로 형성될 수 있는 방안을 기독교 윤리의 관점에서 모색해 보려고 한다. 이러한 방안을 제대로 제시하기 위해서는 물론 매우 방대한 연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이른바 “노동사회”가 형성되어 온 역사적 과정을 규명하고 노동사회를 움직이는 논리들과 제도들을 분석하고 그 성과와 폐단을 비판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사회 이후의 노동세계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원칙들과 그 제도적 구현 방법들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관한 연구가 기독교 윤리학의 관점에서 수행된다고 한다면, 노동사회의 문제들을 인식하고 평가할 뿐만 아니라, 노동사회 이후의 노동세계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윤리적 판단과 행동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그 성서적 윤리적 근거들을 밝혀야 할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기독교 노동윤리의 성서적 근거와 그에 따른 윤리적 의미를 밝혀보려고 한다. 이 논문의 연구방법은 “문헌 연구 방법”에 의존할 것이다. 문헌의 선택순위에 있어서는 성서를 우선으로 하고, 그 외 기독교윤리신학과 관련된 문헌들을 다룰 것이다. 이는 노동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고찰을 해나감에 있어, 그 어떤 문헌 연구 자료보다 성서를 능가하는 전거(典據)는 없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어 있는 성서 중에서『공동번역성서』를 선정하여 성서적 노동관을 제시해나가고 그에 따른 윤리적 의미를 제시해나갈 것이다. 논자가 수많은 성서번역본 중에서『공동번역성서』를 선택한 이유는『공동번역성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성서신학자들이 공동으로 번역작업에 참여하고 국문학자들이 감수하여 비교적 원어에 가깝게 번역되었다는 것과 우리말 어법에 가장 적합한 번역 성서라는 것과 그리고 현재 모든 가톨릭 성당과 개신교 여러 교단에서 사용하는 유일한 번역 성서라는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앞으로 전개되는 모든 성서 구절은 이『공동번역성서』로 할 것임을 밝혀둔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는 기독교의 신명(神名)도 직접인용의 경우를 제외하고는『공동번역 성서』구절에 따라 “하느님”과 “야훼”로 제한하여 사용할 것이다. 이 논문은 성서적인 노동관을 주의 깊게 고찰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성서가 제시하는 노동에 집중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노동에 대한 성서의 구절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그것에 대한 원어적인 분석 또는 주석의 작업을 수행하지는 않을 것임을 밝혀두려는 것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성서가 전체적으로 말하는 노동의 개념을 찾고, 그것에 근거해 기독교 노동윤리의 의미를 제시하는 작업까지를 연구의 한계로 설정한다. 노동의 위기에 대해 기독교윤리가 지니는 의의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윤리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를 실현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의 노동현실은 이러한 자기표현을 저해하고 있다. 기독교윤리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실업과 임노동의 착취 구조가 얼마나 인간의 자기표현을 통한 자기정체성을 훼손하는지 드러낼 수 있고, 이를 극복해야하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노동의 기독교 윤리적 입장은 무엇보다도 신을 노동하는 존재로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 신의 모습을 따라 인간은 창조의 동참자로서, 새로운 창조신앙인으로서, 화해를 추구하고, 자기를 표현하고, 사회적 실천을 위한 사랑의 노동자로 이해하는 것이다. 구약성서 창조신화에서 “인간이 신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신의 모습에 따라 사랑의 마음으로 노동하는 능력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창조는 신의 독점영역이 아니다. 인간도 창조적인 노동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과 관계맺는 모든 것들을 갱신하고 치유하는 사랑의 노동에 의해서 창조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이 피조된 존재라는 사실의 윤리적 의미는 노동을 통해 신의 모습을 회복하여 사랑으로 노동하는 신의 파트너요, 공동창조자라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윤리는 공동체윤리의 정립을 제시한다. 예수가 가르친 기도문으로 모든 기독교인의 기도문의 모델인 주기도문을 보면 “나”라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우리”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온다. 이는 신에게 기도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이 “나”를 넘어서는 우리라는 공동체 속에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노동과 노동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논제는 “인간”이다. 기독교윤리는 노동하는 인간존재의 인간성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노동하는 인간은 신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 신의 소명에 따른 책임적 존재, 공동체의 관계지향적인 존재, 사회와 자연과 화해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노동의 기독교 윤리적 이해는 노동세계의 위기를 바라보면서 노동이 인간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사회적 연대감을 가지게 하고, 자연친화적인 방향으로 형성될 수 있는 방안을 통해, 노동하는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는 보다 근원적인 의미와 해석의 틀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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