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은 그의 교회론에 있어서 교부들과 어거스틴 그리고 루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교부 키푸리안은 그의 서신에서 교회안에 있어야 함의 중요성을 말했고, 터틀리안은 교회를 ‘동일한 종교적 고백과 신성한 훈련과, 같은 소망을 가지고 결속된 하나의 몸인데, 이 몸은 하나의 조직된 힘으로서의 회합이며 회중’이라고 표현하였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부들의 교회관은 ‘불가견적’ 또는 내면적인 통일에 중심을 두었다. 다음으로 칼빈은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았는데, 어거스틴은 교회의 신성은 교회성원에 의존치 않고 오직 교회의 머리와 성화의 기능에 직접 연결된다고 말하면서 가견적 교회는 ...
칼빈은 그의 교회론에 있어서 교부들과 어거스틴 그리고 루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교부 키푸리안은 그의 서신에서 교회안에 있어야 함의 중요성을 말했고, 터틀리안은 교회를 ‘동일한 종교적 고백과 신성한 훈련과, 같은 소망을 가지고 결속된 하나의 몸인데, 이 몸은 하나의 조직된 힘으로서의 회합이며 회중’이라고 표현하였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부들의 교회관은 ‘불가견적’ 또는 내면적인 통일에 중심을 두었다. 다음으로 칼빈은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았는데, 어거스틴은 교회의 신성은 교회성원에 의존치 않고 오직 교회의 머리와 성화의 기능에 직접 연결된다고 말하면서 가견적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 즉 예정된자와 예정되지 못한자들로 썩여 있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가견적 교회밖에도 예정된 자가 없지 않으며, 예정된자만이 불가견적인 신성한 교회의 성원이 된다고 하엿다. 이 견해는 후에 칼빈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칼빈은 루터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데, 루터는「교회는 본질적으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했으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그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서 이기에 믿음을 생기게 하는 말씀의 선포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표지이며, 그리고 성례전을 통하여 그 믿음이 확인되므로 성례전 역시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루터는 말한다. 칼빈은 로마 교회가 성경의 진리를 벗어나서 교황의 권위를 앞세워 말씀에 의거하지 않는 교리적(敎理的) 무오성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회복시키는 개혁(改革)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역사적인 면에서 볼 때 칼빈은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는 상황에 살았던 사람이다. 교회와 세상의 구분이 뚜렷치 않았고, 세속의 권력보다 교회의 권위가 우선시 되던시대(時代)였다. 그러므로 교회의 부패는 극에 달하여 세상에 고통을 안겨주었고, 세상을 억압하는 결과를 초래하엿다. 특히 칼빈 당시의 상황은 신학적인 오류로 세상을 억압하는 상황에서 그의 교회에 대한 자신의 신학적(神學的) 입장을 정리했으므로 말씀에 근거한 바른교회, 즉 유형교회 보다는 무형교회를 강조하게 되었고, 역사적이고 동적이라기 보다는 영적이고 정적인 면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칼빈의 교회론의 강조점은 하나님 중심적이 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표지로서 강조되었다. 이에 반해 몰트만은 신학에 영향을 준 것은 2차 세계대전과 그 상황 가운데 발생했던 고백교회운동이다. 2차대전을 겪었던 몰트만은 전쟁으로 인해 고난받은 현실 속에서「하나님은 어디있느냐?」,「전능의 하나님이여! 어디계시나이까?」하고 물었다. 그러나 하늘은 침묵할 뿐이었다.「하나님이여! 살아계실진대 어떻게 이러한 참극이 하나님 목전에서 자행 될 수 있나이까?」,「하나님은 죽었구나! 사신신학에서 말하듯이 과연 하나님은 죽었구나! 옛날 하나님은 죽었다. 아브라함 시대 이삭, 야곱시대 그때 살아있던 하나님은 지금은 죽었다」는 신정론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당시 세상의 일에 무관심했던 독일의 루터교회 속에 살고있던 몰트만은 고백교회운동과 바르멘선언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그로 하여금 ‘인간’에게 관심을 갖게 했고, 교회의 역동성에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그는 행동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말한다. 교회는 외형적으로 그 시대속에서 영향력을 발휘해야만 진정한 교회라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에 있어서 칼빈은 교회를「신자들의 어머니로서」양육하고 교육하는 기능에 대해서 말하면서 무엇보다도 신실한 말씀의 선포와 가르침을 강조하였다. 나아가「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에서는 무엇보다도 그한 몸으로서의「성도의 교통」을 증시한다. 반면에 몰트만은 교회를「신앙(信仰)과 희망(希望) 사이의 긴장을 새로게 창조(創造)하는 성령의 역사」로 이해한다.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친교는 성령의 체험에 근거하고 있고, 하나님나라 안에서 교회의 친교도 교회를 진리(眞理)와 자유로 인도하는 성령의 능력안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하여 교회에서의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는 세례에 있어서는 칼빈의 견해와는 전혀 다르다. 칼빈은 세례는 봉헌의 징표로서, 세례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우리는 교회의 일원으로 영접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헤아림을 받게되며, 사람들 앞에서 신앙 고백을 하도록 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세례는 하나님 나라를 보증해주는 것으로,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소명을 받게 되는데 그 소명은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해방(解放)이라는 것은 영적으로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해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으러 눌린자를 의미한다. 그 사실은 주의 만찬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 곧 드러난다. 그는 주의 만찬에 참가하는 자들은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가난한 모든 사람들과 유대를 가지고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평화와 의를 위한 공적이고, 공개적인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몰트만은「출애굽 공동체로서의 교회」에서 교회의 메시야적 사명으로서 인간 해방을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십자가의 교회에서 십자가에 달린 분과의 친교는 결국 가난한 자, 불구자, 밖으로 쫒겨난자, 갇힌자, 박해받는 자들과의 친교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참된교회는「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방된 교회이고, 또한 해방하는 교회」라고 말한다. 그리고 공동생활에서는 신적인 법이 실천되어야 하므로 어떠한 인종적, 계급적 구별을 용납할수 없고, 국가나 사회가 그런 구별을 필요로 한다고 해도 용납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몰트만은 여기에서 성경의 입각한 교회의 본질에 의해서 상황을 보는것이 아니라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교회론을 적립하는, 다시 말하면 위로부터의 교회론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교회론을 정립하고 말았기에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교회의 표지」에서 칼빈은 교회의 표지로서 신실한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의 시행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지하게 전해지고 그리고 그것이 들려지는 곳 또 성례전이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그대로 집행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하나님의 교회는 존재하는 곳이라고 말하였다. 칼빈은 이와같이 말씀의 사역과 성례의 사역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으로 참된교회와 거짓된 교회를 식별하는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여러번 강조하였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수단의 하나로서 성례전을 언급하면서 성례전에서 그리스도를 계시하여 준다고 말한다. 설교의 말씀의 중심이 예수그리스도이듯이 성례전의 본체역시 예수 그리스도 이시라고 설명하면서 신자들이 이 성례전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더욱 풍성히 받게 된다고 밝혔다. 교회의 의무에는 성화의 생활을 해 나가도록 회원들을 지도하고 도와야 할 일이있는데, 교회의 설교가 헛되지않고 성례가 신자들의 신앙을 충분히 강화할수 있기를 바란다면 교회는 오류에서 피하기 위하여 끓임없는 자아 반성과 함께 신자에 관한 권징을 집행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칼빈의 말씀에 대한 강조와 성례의 중요성, 그리고 성찬을 자주 시행할 것에 대하여 깊이 새겨야 한다. 개혁주의에 있어서 말씀의 중요성은 인식 하지만 말씀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설교자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몰트만은 교회의 표지에 있어서 교회의 현실 참여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다. 교회가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을 끝난다면 단지 자신에게 환상적인 종교로 끝나고 말것이라고 하였다. 몰트만은 만일 교회가 자신의 사회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삶의 정황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포기하는 것이 될것이며 다만 자신에게만 종사하는 환상적인 교회로 변하게 될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표지들을 말씀과 성례전으로부터 이해하거나 내적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이해할수만은 없고, 같은 정도로 외적방향을 제시해야 하며, 세상성을 고려하면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될 때 교회의 표지들은 오늘날 인간을 분산시키고 분리시키고 있는 갈등속에서 신앙고백적인 표징들이 될것이라고 주장하며, 교회의 표지와 세상과의 관계를 말한다. 몰트만은 교회의 일치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일치를 말하고「그리스도의 일치는 그의 제자들과 믿는 자들의 친교와의 일치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에 기초를 둔 억압당하고 굴욕당하고 버림받은 사람들과의 친교이며 일치」라고 주장한다. 몰트만은 교회의 거룩함은 교회의 가난함 속에서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비천함과 무력함과 가난과 고난에 참여하는 곳에서 거룩하게 된다고 말한다. 몰트만은 교회의 표지와 세상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였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교회의 역할을 찾는 시도는 좋았지만 그는 작업에 있어서 교회의 본질적(本質的)인 요소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세상을 향한 교회의 역할이 말씀에근거하지 않은 윤리나 도덕에 머물고 말았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改革主義神學)에서는 몰트만이 시도하여 실패한 것에 대해서 비판만 할것이 아니라 올바른 성경적 원리에 충실한 밖으로의 교회에 대한 본질이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의 요청이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명에 대해 칼빈은 좀 소홀히 다루었다. 우리는 지금그가 살던 시대와는 전혀 다른시대에 살기에, 오늘날 이 시대에 부응하는 교회들을 정립해야만 한다. 무턱대고 자유주의 자들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성경적 원리에 입각한 교회의 사명으로서, 정치에, 사회에, 환경적 문제에 어떻게 관리해야 할것인지에 대해서 개혁주의적인 입장을 정립해야만 한다. 몰트만은 교회에 대해서「모든시대에 교회의 위임과 상황과 목표를 분명하게 해야하며, 하나님과 사람과 미래 앞에서 각각 자신에게 맡겨진 위임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해 감으로써 보다 믿을 만한 형태로의 혁신을 위한 출발점을 제공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고 하였다.」 이어서 몰트만은 기독교는 다른 세계 종교에 대해서 어떤 관계를 가진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신앙을 일깨우고, 세례를 베풀며, 교회를 세우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주권아래있는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것이 선교(宣敎)의 목표라고 말한다. 이 선교는 지리학적으로 전 세계까지이며, 영적으로 교회성장을 위한 전략도 전개해야 하지만 이것 뿐만 아니라 역시 다른 목표를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신뢰, 감정, 사유, 그리고 행위라는 삶의 분위기의 집적 변화란, 굶주림,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지배, 이념적 제국주의, 원자전쟁 그리고 환경파괴등 오늘날 세계사에서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도움이 되는 삶의 분위기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선교의 개념에 있어서 영혼에 대한 관심이 결여된 것에 대해서는 비판(批判)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진정한 선교는 긂주리고 억눌린 자들에게 영혼을 구원하고 치유하는 말씀과 함께 그들 생활(生活)의 질적변화(質的變化)를 위해서도 노력해야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한국의 개혁(改革) 교회에서 배울점이 있다고 본다. 이제까지 칼빈과 몰트만의 교회관에 대해서 살펴보고 개혁신학적(改革神學的) 입장에서 평가를 시도해 보았다. 칼빈이 교회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성경에 입각한 본질적 요소에 충실한 반면에, 몰트만은 교회의 본질을 성경적으로 풀려고 하기보다는 지나치게 시대상황에 교회를 끌어드려서 세상을 향한 교회의 역할만을 강조한 나머지 교회의 본질을 흐리고 말았다. 반면에 칼빈의 교회관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하나의 중심점으로 좋은 위치를 주지만 세상을 향하여 빛과 소금으로 나아가는 측면에서는 좀 약하다는 느낌을 갖게한다. 오늘날 국제적으로 환경이 오염되고, 기아에 허덕이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을 뿐만아니라 인권을 유린당하는 근로자들이 많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등 여러측면에서 문제를 안고있는 오늘날 원리에 충실한 칼빈의 교회론 더하여 교회의 기능이 잘 조화를 이루어 하겠기에 여기에서는 개혁주의(改革主義) 입장에서 몇가지 제언을 하고자한다. 첫째, 두 신학자가 다른시대적 배경하에서 다른 교회론이 나왔듯이 오늘날 우리시대에 맞는 교회론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교회론은 반드시 성경적이어야 한다. 성경에는 사회를 향하여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할것인지에 나타나 있다. 이것을 토대로 해서 다시금 교회론을 정리해야 한다. 이것은 몰트만처럼 주어진 환경에 교회의 역할을 물어서 교회론을 정립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밀라드 J.에릭슨은 그의 책, 「복음주의 조직신학」교회론에서 교회의 기능을 설명하면서 교회는 신자들과 비기독인들 모두를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연민의 행위들을 수행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는 곤궁한자와 고난당하는 자의 문제들을 염려하셨고, 병든자를 치료하셨고, 심지어 때로는 죽은자들도 일으키셨다. 만약 교회가 그의 사역을 수행하려 한다면, 교회는 곤궁한 자와 고난당하는 자에 대한 어떤 형태의 사역에 종사하게 될 것이다. 예수가 신자들에게 이러한 기대를 가지고 계셨다는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명백하다(눅 10:25-37). 예수는 사람이 전 존재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의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함으로써 영생을 유업으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누가 그의 이웃이냐고 물었던 율법사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율법에 의하면 이웃사랑은 하나님사랑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위들과 같은 행위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교회는 세상의 상하고 궁핍한자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실제로 마태복음 25:31-46에, 참된 신자들이 공허한 고백들을 일삼는 사람들과 구별 될 수 있는 한가지 표지(標識)는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또한 그를 본받는 사랑의 행위들임을 암시하고 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는 일은 스스로 그런 배려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하다(신 10:17-19). 그는 계속해서 사회에 대한 관심이 서신서에도 강조되고 있다고 밝힌다. 야고보서는 특별히 실천적인 기독교를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야고보서에 나타나는 경건의 정의를 언급한다.「하나님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이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에릭슨은 행함에 대한 강조를 야고보서를 인용해서 계속 강조한다.「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하라, 배부르게 하라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5-17). 요한 사도도 똑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이,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7-18). 에릭슨은 사회적 관심은 불의를 비난하는 일도 포함한다고 성경의 실례를 들어서 지적하였다. 아모스와 몇몇 다른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그 당시의 악과 부패에 맞서서 거리낌 없이 강하게 말하였다. 세례요한도 역시 이 일이 그의 자유를 아갔고(눅 3:19-20), 결국은 그의 목숨까지도 앗아갔지만(막6:17-29), 당시의 통치자인 헤롯의 죄를 비난하였다. 교회는 곤궁에 처하거나, 상하거나, 혹은 악한자를 볼 때마다, 관심을 보이고 행동을 취해야한다. 채택되어야 할 전략과 전술에 대해서는 상이한 선택의 길이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교회는 단순히 상한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즉 문제의 결과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일할 것이다. 다른 경우에, 교회는 그 문제를 산출한 상황을 변경하기 위해 행동할 것이다.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교회가 개별적으로 행동하는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는 때도 있을 것이다. 둘째, 교회의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세례는 하나님 나라를 보증해 주는 것으로,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소명을 받게 되는데 그 소명은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주의 만찬에 참가하는 자들을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가난한 모든 사람들과 유대를 가지고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평화와 의를 위한 공적이고, 공개적인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몰트만은「출애굽 공동체로서의 교회」에서 교회의 메시야적 사명으로 인간 해방을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십자가의 교회에서 십자가에 달린분과의 친교는 결국 가난한자, 불구자, 밖으로 쫓겨난자, 갇힌자, 박해받는자들과의 친교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몰트만은 교회의 본질에 있어서 영혼 구원보다도 인간 해방의 행위를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그는 교회를 하나의 국제인권단체로 생각하고 있는듯하다. 요컨대 몰트만은 교회에서 복음사역의 멍에를 벗기고 인권운동의 멍에를 씌운 것이다. 무모하게도 몰트만은 삼위일체로부터 수평적인 사회적 평등관계로 조작하고 이어서 교회도 수평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모든 세계시민을 수평적인 평등관계로 만드는 이른바 해방운동에 종사하도록 만들었다. 몰트만이 이러한 해방으로의 인내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하여금 급기야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같은 극렬한 혁명전사의 옷을 입게 만들었다.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이나 급집적인 사회관계를 추구한다는 데에는 다름이 없다. 칼빈은「교회의 본질」에 있어서「신자들의 어머니로서」양육하고 교육하는 기능에 대해서 말하면서 무엇보다도 신실한 말씀의 선포와 가르침을 강조하며 말씀의 선포에 있어서는 성령의 능력을 무엇보다도 강조하였다. 그리고 교회에서 권징이 신실히 행해져야 함에 대해서 말했다. 진정한 사회봉사는 제도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아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봉사가 참된 봉사이기에 세상을 향한 봉사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강화되어야한다. 말씀의 선포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말씀에 의해서 성도들이 변화를 받고, 스스로 사회를 향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해야한다. 그리고 「신자의 어머니로서의 교회」는 교인들의 양육을 위해서 많은 신앙훈련 프로그램들이 개발되어야한다. 이런 기능들이 강화될 때 자연히 교회는 말씀에 근거한 사회적 봉사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권징을 엄격하게 시행함으로 교인들이 죄짓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 마음을 갖도록하고, 교회의 성결을 유지해야만 한다. 개혁 교회는 학교교육에 밀려나 교회 교육을 점점 축소시킬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강화해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한 교육을 통해서 신실한 일꾼들을 길러내고 이들로 하여금 어두워져가는 세상을 개혁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사라진지 오래된 유년주일학교의 수요예배도 부활되어야 할뿐만아니라 주일 오전에만 참석하고 학교공부에 메어 달리는 중․고등학생들도 주일오후예배 뿐만 아니라 수요예배까지 참석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하고 주일밤은 산 기도를 하여야만한다. 개혁(改革)교회는 말씀의 능력에 의한 변화를 기대한다. 셋째,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명을 정립해야한다. 칼빈이 처한 시대와 몰트만이 처한 시대적 상황이 달랐기에 칼빈은 그리스도인과 집권자들의 관계에 대해서 서로 상호 협조 관계속에서 유대를 강화해야 할 것을 말하지만 단 예외로 왕에 대한 복종이 곧 하나님께 대한 불복종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의 명령이 하나님께 반대되는 것이 있다면 그 명령은 따르지 말 것을 요구하고, 교회의 본래적 기능이 통치자의 정부로 위협을 받을 때에 정부에 대하여 싸웠다. 반면에 몰트만은 불의한 정치에 대해서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고했다. 칼빈이 그리스도인의 현실참여, 혹은 문화적 사명에 대해서 조금미약한 반면에 몰트만은 너무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교회를 정치적 집단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칼빈은 그의 교회론에 있어서 교부들과 어거스틴 그리고 루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교부 키푸리안은 그의 서신에서 교회안에 있어야 함의 중요성을 말했고, 터틀리안은 교회를 ‘동일한 종교적 고백과 신성한 훈련과, 같은 소망을 가지고 결속된 하나의 몸인데, 이 몸은 하나의 조직된 힘으로서의 회합이며 회중’이라고 표현하였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부들의 교회관은 ‘불가견적’ 또는 내면적인 통일에 중심을 두었다. 다음으로 칼빈은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았는데, 어거스틴은 교회의 신성은 교회성원에 의존치 않고 오직 교회의 머리와 성화의 기능에 직접 연결된다고 말하면서 가견적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 즉 예정된자와 예정되지 못한자들로 썩여 있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가견적 교회밖에도 예정된 자가 없지 않으며, 예정된자만이 불가견적인 신성한 교회의 성원이 된다고 하엿다. 이 견해는 후에 칼빈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칼빈은 루터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데, 루터는「교회는 본질적으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했으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그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서 이기에 믿음을 생기게 하는 말씀의 선포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표지이며, 그리고 성례전을 통하여 그 믿음이 확인되므로 성례전 역시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루터는 말한다. 칼빈은 로마 교회가 성경의 진리를 벗어나서 교황의 권위를 앞세워 말씀에 의거하지 않는 교리적(敎理的) 무오성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회복시키는 개혁(改革)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역사적인 면에서 볼 때 칼빈은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는 상황에 살았던 사람이다. 교회와 세상의 구분이 뚜렷치 않았고, 세속의 권력보다 교회의 권위가 우선시 되던시대(時代)였다. 그러므로 교회의 부패는 극에 달하여 세상에 고통을 안겨주었고, 세상을 억압하는 결과를 초래하엿다. 특히 칼빈 당시의 상황은 신학적인 오류로 세상을 억압하는 상황에서 그의 교회에 대한 자신의 신학적(神學的) 입장을 정리했으므로 말씀에 근거한 바른교회, 즉 유형교회 보다는 무형교회를 강조하게 되었고, 역사적이고 동적이라기 보다는 영적이고 정적인 면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칼빈의 교회론의 강조점은 하나님 중심적이 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표지로서 강조되었다. 이에 반해 몰트만은 신학에 영향을 준 것은 2차 세계대전과 그 상황 가운데 발생했던 고백교회운동이다. 2차대전을 겪었던 몰트만은 전쟁으로 인해 고난받은 현실 속에서「하나님은 어디있느냐?」,「전능의 하나님이여! 어디계시나이까?」하고 물었다. 그러나 하늘은 침묵할 뿐이었다.「하나님이여! 살아계실진대 어떻게 이러한 참극이 하나님 목전에서 자행 될 수 있나이까?」,「하나님은 죽었구나! 사신신학에서 말하듯이 과연 하나님은 죽었구나! 옛날 하나님은 죽었다. 아브라함 시대 이삭, 야곱시대 그때 살아있던 하나님은 지금은 죽었다」는 신정론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당시 세상의 일에 무관심했던 독일의 루터교회 속에 살고있던 몰트만은 고백교회운동과 바르멘선언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그로 하여금 ‘인간’에게 관심을 갖게 했고, 교회의 역동성에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그는 행동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말한다. 교회는 외형적으로 그 시대속에서 영향력을 발휘해야만 진정한 교회라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에 있어서 칼빈은 교회를「신자들의 어머니로서」양육하고 교육하는 기능에 대해서 말하면서 무엇보다도 신실한 말씀의 선포와 가르침을 강조하였다. 나아가「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에서는 무엇보다도 그한 몸으로서의「성도의 교통」을 증시한다. 반면에 몰트만은 교회를「신앙(信仰)과 희망(希望) 사이의 긴장을 새로게 창조(創造)하는 성령의 역사」로 이해한다.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친교는 성령의 체험에 근거하고 있고, 하나님나라 안에서 교회의 친교도 교회를 진리(眞理)와 자유로 인도하는 성령의 능력안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하여 교회에서의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는 세례에 있어서는 칼빈의 견해와는 전혀 다르다. 칼빈은 세례는 봉헌의 징표로서, 세례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우리는 교회의 일원으로 영접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헤아림을 받게되며, 사람들 앞에서 신앙 고백을 하도록 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세례는 하나님 나라를 보증해주는 것으로,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소명을 받게 되는데 그 소명은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해방(解放)이라는 것은 영적으로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해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으러 눌린자를 의미한다. 그 사실은 주의 만찬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 곧 드러난다. 그는 주의 만찬에 참가하는 자들은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가난한 모든 사람들과 유대를 가지고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평화와 의를 위한 공적이고, 공개적인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몰트만은「출애굽 공동체로서의 교회」에서 교회의 메시야적 사명으로서 인간 해방을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십자가의 교회에서 십자가에 달린 분과의 친교는 결국 가난한 자, 불구자, 밖으로 쫒겨난자, 갇힌자, 박해받는 자들과의 친교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참된교회는「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방된 교회이고, 또한 해방하는 교회」라고 말한다. 그리고 공동생활에서는 신적인 법이 실천되어야 하므로 어떠한 인종적, 계급적 구별을 용납할수 없고, 국가나 사회가 그런 구별을 필요로 한다고 해도 용납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몰트만은 여기에서 성경의 입각한 교회의 본질에 의해서 상황을 보는것이 아니라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교회론을 적립하는, 다시 말하면 위로부터의 교회론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교회론을 정립하고 말았기에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교회의 표지」에서 칼빈은 교회의 표지로서 신실한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의 시행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지하게 전해지고 그리고 그것이 들려지는 곳 또 성례전이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그대로 집행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하나님의 교회는 존재하는 곳이라고 말하였다. 칼빈은 이와같이 말씀의 사역과 성례의 사역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으로 참된교회와 거짓된 교회를 식별하는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여러번 강조하였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수단의 하나로서 성례전을 언급하면서 성례전에서 그리스도를 계시하여 준다고 말한다. 설교의 말씀의 중심이 예수그리스도이듯이 성례전의 본체역시 예수 그리스도 이시라고 설명하면서 신자들이 이 성례전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더욱 풍성히 받게 된다고 밝혔다. 교회의 의무에는 성화의 생활을 해 나가도록 회원들을 지도하고 도와야 할 일이있는데, 교회의 설교가 헛되지않고 성례가 신자들의 신앙을 충분히 강화할수 있기를 바란다면 교회는 오류에서 피하기 위하여 끓임없는 자아 반성과 함께 신자에 관한 권징을 집행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칼빈의 말씀에 대한 강조와 성례의 중요성, 그리고 성찬을 자주 시행할 것에 대하여 깊이 새겨야 한다. 개혁주의에 있어서 말씀의 중요성은 인식 하지만 말씀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설교자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몰트만은 교회의 표지에 있어서 교회의 현실 참여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다. 교회가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을 끝난다면 단지 자신에게 환상적인 종교로 끝나고 말것이라고 하였다. 몰트만은 만일 교회가 자신의 사회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삶의 정황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포기하는 것이 될것이며 다만 자신에게만 종사하는 환상적인 교회로 변하게 될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표지들을 말씀과 성례전으로부터 이해하거나 내적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이해할수만은 없고, 같은 정도로 외적방향을 제시해야 하며, 세상성을 고려하면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될 때 교회의 표지들은 오늘날 인간을 분산시키고 분리시키고 있는 갈등속에서 신앙고백적인 표징들이 될것이라고 주장하며, 교회의 표지와 세상과의 관계를 말한다. 몰트만은 교회의 일치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일치를 말하고「그리스도의 일치는 그의 제자들과 믿는 자들의 친교와의 일치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에 기초를 둔 억압당하고 굴욕당하고 버림받은 사람들과의 친교이며 일치」라고 주장한다. 몰트만은 교회의 거룩함은 교회의 가난함 속에서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비천함과 무력함과 가난과 고난에 참여하는 곳에서 거룩하게 된다고 말한다. 몰트만은 교회의 표지와 세상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였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교회의 역할을 찾는 시도는 좋았지만 그는 작업에 있어서 교회의 본질적(本質的)인 요소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세상을 향한 교회의 역할이 말씀에근거하지 않은 윤리나 도덕에 머물고 말았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改革主義神學)에서는 몰트만이 시도하여 실패한 것에 대해서 비판만 할것이 아니라 올바른 성경적 원리에 충실한 밖으로의 교회에 대한 본질이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의 요청이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명에 대해 칼빈은 좀 소홀히 다루었다. 우리는 지금그가 살던 시대와는 전혀 다른시대에 살기에, 오늘날 이 시대에 부응하는 교회들을 정립해야만 한다. 무턱대고 자유주의 자들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성경적 원리에 입각한 교회의 사명으로서, 정치에, 사회에, 환경적 문제에 어떻게 관리해야 할것인지에 대해서 개혁주의적인 입장을 정립해야만 한다. 몰트만은 교회에 대해서「모든시대에 교회의 위임과 상황과 목표를 분명하게 해야하며, 하나님과 사람과 미래 앞에서 각각 자신에게 맡겨진 위임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해 감으로써 보다 믿을 만한 형태로의 혁신을 위한 출발점을 제공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고 하였다.」 이어서 몰트만은 기독교는 다른 세계 종교에 대해서 어떤 관계를 가진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신앙을 일깨우고, 세례를 베풀며, 교회를 세우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주권아래있는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것이 선교(宣敎)의 목표라고 말한다. 이 선교는 지리학적으로 전 세계까지이며, 영적으로 교회성장을 위한 전략도 전개해야 하지만 이것 뿐만 아니라 역시 다른 목표를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신뢰, 감정, 사유, 그리고 행위라는 삶의 분위기의 집적 변화란, 굶주림,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지배, 이념적 제국주의, 원자전쟁 그리고 환경파괴등 오늘날 세계사에서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도움이 되는 삶의 분위기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선교의 개념에 있어서 영혼에 대한 관심이 결여된 것에 대해서는 비판(批判)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진정한 선교는 긂주리고 억눌린 자들에게 영혼을 구원하고 치유하는 말씀과 함께 그들 생활(生活)의 질적변화(質的變化)를 위해서도 노력해야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한국의 개혁(改革) 교회에서 배울점이 있다고 본다. 이제까지 칼빈과 몰트만의 교회관에 대해서 살펴보고 개혁신학적(改革神學的) 입장에서 평가를 시도해 보았다. 칼빈이 교회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성경에 입각한 본질적 요소에 충실한 반면에, 몰트만은 교회의 본질을 성경적으로 풀려고 하기보다는 지나치게 시대상황에 교회를 끌어드려서 세상을 향한 교회의 역할만을 강조한 나머지 교회의 본질을 흐리고 말았다. 반면에 칼빈의 교회관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하나의 중심점으로 좋은 위치를 주지만 세상을 향하여 빛과 소금으로 나아가는 측면에서는 좀 약하다는 느낌을 갖게한다. 오늘날 국제적으로 환경이 오염되고, 기아에 허덕이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을 뿐만아니라 인권을 유린당하는 근로자들이 많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등 여러측면에서 문제를 안고있는 오늘날 원리에 충실한 칼빈의 교회론 더하여 교회의 기능이 잘 조화를 이루어 하겠기에 여기에서는 개혁주의(改革主義) 입장에서 몇가지 제언을 하고자한다. 첫째, 두 신학자가 다른시대적 배경하에서 다른 교회론이 나왔듯이 오늘날 우리시대에 맞는 교회론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교회론은 반드시 성경적이어야 한다. 성경에는 사회를 향하여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할것인지에 나타나 있다. 이것을 토대로 해서 다시금 교회론을 정리해야 한다. 이것은 몰트만처럼 주어진 환경에 교회의 역할을 물어서 교회론을 정립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밀라드 J.에릭슨은 그의 책, 「복음주의 조직신학」교회론에서 교회의 기능을 설명하면서 교회는 신자들과 비기독인들 모두를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연민의 행위들을 수행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는 곤궁한자와 고난당하는 자의 문제들을 염려하셨고, 병든자를 치료하셨고, 심지어 때로는 죽은자들도 일으키셨다. 만약 교회가 그의 사역을 수행하려 한다면, 교회는 곤궁한 자와 고난당하는 자에 대한 어떤 형태의 사역에 종사하게 될 것이다. 예수가 신자들에게 이러한 기대를 가지고 계셨다는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명백하다(눅 10:25-37). 예수는 사람이 전 존재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의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함으로써 영생을 유업으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누가 그의 이웃이냐고 물었던 율법사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율법에 의하면 이웃사랑은 하나님사랑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위들과 같은 행위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교회는 세상의 상하고 궁핍한자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실제로 마태복음 25:31-46에, 참된 신자들이 공허한 고백들을 일삼는 사람들과 구별 될 수 있는 한가지 표지(標識)는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또한 그를 본받는 사랑의 행위들임을 암시하고 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는 일은 스스로 그런 배려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하다(신 10:17-19). 그는 계속해서 사회에 대한 관심이 서신서에도 강조되고 있다고 밝힌다. 야고보서는 특별히 실천적인 기독교를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야고보서에 나타나는 경건의 정의를 언급한다.「하나님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이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에릭슨은 행함에 대한 강조를 야고보서를 인용해서 계속 강조한다.「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하라, 배부르게 하라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5-17). 요한 사도도 똑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이,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7-18). 에릭슨은 사회적 관심은 불의를 비난하는 일도 포함한다고 성경의 실례를 들어서 지적하였다. 아모스와 몇몇 다른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그 당시의 악과 부패에 맞서서 거리낌 없이 강하게 말하였다. 세례요한도 역시 이 일이 그의 자유를 아갔고(눅 3:19-20), 결국은 그의 목숨까지도 앗아갔지만(막6:17-29), 당시의 통치자인 헤롯의 죄를 비난하였다. 교회는 곤궁에 처하거나, 상하거나, 혹은 악한자를 볼 때마다, 관심을 보이고 행동을 취해야한다. 채택되어야 할 전략과 전술에 대해서는 상이한 선택의 길이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교회는 단순히 상한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즉 문제의 결과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일할 것이다. 다른 경우에, 교회는 그 문제를 산출한 상황을 변경하기 위해 행동할 것이다.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교회가 개별적으로 행동하는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는 때도 있을 것이다. 둘째, 교회의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세례는 하나님 나라를 보증해 주는 것으로,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소명을 받게 되는데 그 소명은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주의 만찬에 참가하는 자들을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가난한 모든 사람들과 유대를 가지고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평화와 의를 위한 공적이고, 공개적인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몰트만은「출애굽 공동체로서의 교회」에서 교회의 메시야적 사명으로 인간 해방을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십자가의 교회에서 십자가에 달린분과의 친교는 결국 가난한자, 불구자, 밖으로 쫓겨난자, 갇힌자, 박해받는자들과의 친교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몰트만은 교회의 본질에 있어서 영혼 구원보다도 인간 해방의 행위를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그는 교회를 하나의 국제인권단체로 생각하고 있는듯하다. 요컨대 몰트만은 교회에서 복음사역의 멍에를 벗기고 인권운동의 멍에를 씌운 것이다. 무모하게도 몰트만은 삼위일체로부터 수평적인 사회적 평등관계로 조작하고 이어서 교회도 수평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모든 세계시민을 수평적인 평등관계로 만드는 이른바 해방운동에 종사하도록 만들었다. 몰트만이 이러한 해방으로의 인내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하여금 급기야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같은 극렬한 혁명전사의 옷을 입게 만들었다.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이나 급집적인 사회관계를 추구한다는 데에는 다름이 없다. 칼빈은「교회의 본질」에 있어서「신자들의 어머니로서」양육하고 교육하는 기능에 대해서 말하면서 무엇보다도 신실한 말씀의 선포와 가르침을 강조하며 말씀의 선포에 있어서는 성령의 능력을 무엇보다도 강조하였다. 그리고 교회에서 권징이 신실히 행해져야 함에 대해서 말했다. 진정한 사회봉사는 제도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아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봉사가 참된 봉사이기에 세상을 향한 봉사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강화되어야한다. 말씀의 선포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말씀에 의해서 성도들이 변화를 받고, 스스로 사회를 향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해야한다. 그리고 「신자의 어머니로서의 교회」는 교인들의 양육을 위해서 많은 신앙훈련 프로그램들이 개발되어야한다. 이런 기능들이 강화될 때 자연히 교회는 말씀에 근거한 사회적 봉사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권징을 엄격하게 시행함으로 교인들이 죄짓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 마음을 갖도록하고, 교회의 성결을 유지해야만 한다. 개혁 교회는 학교교육에 밀려나 교회 교육을 점점 축소시킬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강화해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한 교육을 통해서 신실한 일꾼들을 길러내고 이들로 하여금 어두워져가는 세상을 개혁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사라진지 오래된 유년주일학교의 수요예배도 부활되어야 할뿐만아니라 주일 오전에만 참석하고 학교공부에 메어 달리는 중․고등학생들도 주일오후예배 뿐만 아니라 수요예배까지 참석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하고 주일밤은 산 기도를 하여야만한다. 개혁(改革)교회는 말씀의 능력에 의한 변화를 기대한다. 셋째,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명을 정립해야한다. 칼빈이 처한 시대와 몰트만이 처한 시대적 상황이 달랐기에 칼빈은 그리스도인과 집권자들의 관계에 대해서 서로 상호 협조 관계속에서 유대를 강화해야 할 것을 말하지만 단 예외로 왕에 대한 복종이 곧 하나님께 대한 불복종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의 명령이 하나님께 반대되는 것이 있다면 그 명령은 따르지 말 것을 요구하고, 교회의 본래적 기능이 통치자의 정부로 위협을 받을 때에 정부에 대하여 싸웠다. 반면에 몰트만은 불의한 정치에 대해서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고했다. 칼빈이 그리스도인의 현실참여, 혹은 문화적 사명에 대해서 조금미약한 반면에 몰트만은 너무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교회를 정치적 집단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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