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종통문제, 즉 왕위계승의 정통성 문제는 조선후기 중요한 정치적 사안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특히 효종의 왕위계승은 이 후 두 차례의 치열한 예송을 가져올 만큼 종법적 측면에서 큰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사실 조선초기 태종, 세종, 세조, 예종 그리고 성종의 왕위계승도 고전적 종법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문제의 소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에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크게 논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면 예학의 발달과 함께 종법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 중요하게 자리 잡게 되었고, 이 시대 정치의 양상이 관념적이고 의례적인 문제의 논쟁을 통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당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왕실의 종통문제는 정치사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인조는 종법상 정당한 계승권자인 소현세자의 아들을 두고 효종을 택했다. 당시 종법 인식 수준으로도 문제의 소지가 많았고 군신회의를 개최할 정도로 논란이 있었으나, 이러한 왕위계승이 가능했던 정치적인 배경에는 인조와 소현세자의 갈등 및 인조의 왕권이 작용했다. 효종의 미묘한 종법상 위치를 고려한 것인지 소현세자의 상은 매우 간략하였다. 그러나 효종 사후 자의대비의 복을 둘러싸고 일어난 예송 과정에서 차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의 종통상 지위에 대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송시열, 허목, 윤휴로 대표되는 논쟁 참가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우선 소현세자에 대한 인조의 12일 복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송시열은 소현세자의 상을 장자에 대한 상으로 간주하고 논리를 전개한다. 허목과 윤휴는 예문 그대로 시행되지 않은 상을 장자상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를 전제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다. 예송논쟁 참가자들은 기년복을 주장하든 삼년복을 주장하든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의례』예문을 제시한다. 왕실 전례에 국제나 전례가 아닌 예문이 엄격히 적용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오류와 비약이 보이기도 하고, 순수한 학문 논쟁만이 아닌 각 정파의 정치적 입장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시대적인 분위기는 이러한 논쟁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정도로 종법에 대한 이해가 진전되어 있었다. 이는 ...
왕실의 종통문제, 즉 왕위계승의 정통성 문제는 조선후기 중요한 정치적 사안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특히 효종의 왕위계승은 이 후 두 차례의 치열한 예송을 가져올 만큼 종법적 측면에서 큰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사실 조선초기 태종, 세종, 세조, 예종 그리고 성종의 왕위계승도 고전적 종법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문제의 소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에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크게 논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면 예학의 발달과 함께 종법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 중요하게 자리 잡게 되었고, 이 시대 정치의 양상이 관념적이고 의례적인 문제의 논쟁을 통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당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왕실의 종통문제는 정치사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인조는 종법상 정당한 계승권자인 소현세자의 아들을 두고 효종을 택했다. 당시 종법 인식 수준으로도 문제의 소지가 많았고 군신회의를 개최할 정도로 논란이 있었으나, 이러한 왕위계승이 가능했던 정치적인 배경에는 인조와 소현세자의 갈등 및 인조의 왕권이 작용했다. 효종의 미묘한 종법상 위치를 고려한 것인지 소현세자의 상은 매우 간략하였다. 그러나 효종 사후 자의대비의 복을 둘러싸고 일어난 예송 과정에서 차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의 종통상 지위에 대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송시열, 허목, 윤휴로 대표되는 논쟁 참가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우선 소현세자에 대한 인조의 12일 복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송시열은 소현세자의 상을 장자에 대한 상으로 간주하고 논리를 전개한다. 허목과 윤휴는 예문 그대로 시행되지 않은 상을 장자상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를 전제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다. 예송논쟁 참가자들은 기년복을 주장하든 삼년복을 주장하든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의례』예문을 제시한다. 왕실 전례에 국제나 전례가 아닌 예문이 엄격히 적용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오류와 비약이 보이기도 하고, 순수한 학문 논쟁만이 아닌 각 정파의 정치적 입장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시대적인 분위기는 이러한 논쟁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정도로 종법에 대한 이해가 진전되어 있었다. 이는 현종과 숙종이 종법의 대원칙인 적장자 계승에 따라 왕세자의 자리를 거친 것과 『속대전』과『대전통편』 의 예전에서 종통 계승에 대한 인식이 확고해지고 있다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효종 ㆍ 현종대의 종통논쟁을 소모적이라고만 볼 수 없다. 당시 예학의 수준은 동양에서 최고 수준의 것이었다. 그리고 논쟁을 이끌었던 성리학자들은 자신들이 이상이라 생각하는 예를 현실 속에서 실현해내는 것이 정치라 생각했기 때문에 예송이 치열했던 것이다.
왕실의 종통문제, 즉 왕위계승의 정통성 문제는 조선후기 중요한 정치적 사안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특히 효종의 왕위계승은 이 후 두 차례의 치열한 예송을 가져올 만큼 종법적 측면에서 큰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사실 조선초기 태종, 세종, 세조, 예종 그리고 성종의 왕위계승도 고전적 종법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문제의 소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에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크게 논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면 예학의 발달과 함께 종법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 중요하게 자리 잡게 되었고, 이 시대 정치의 양상이 관념적이고 의례적인 문제의 논쟁을 통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당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왕실의 종통문제는 정치사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인조는 종법상 정당한 계승권자인 소현세자의 아들을 두고 효종을 택했다. 당시 종법 인식 수준으로도 문제의 소지가 많았고 군신회의를 개최할 정도로 논란이 있었으나, 이러한 왕위계승이 가능했던 정치적인 배경에는 인조와 소현세자의 갈등 및 인조의 왕권이 작용했다. 효종의 미묘한 종법상 위치를 고려한 것인지 소현세자의 상은 매우 간략하였다. 그러나 효종 사후 자의대비의 복을 둘러싸고 일어난 예송 과정에서 차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의 종통상 지위에 대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송시열, 허목, 윤휴로 대표되는 논쟁 참가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우선 소현세자에 대한 인조의 12일 복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송시열은 소현세자의 상을 장자에 대한 상으로 간주하고 논리를 전개한다. 허목과 윤휴는 예문 그대로 시행되지 않은 상을 장자상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를 전제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다. 예송논쟁 참가자들은 기년복을 주장하든 삼년복을 주장하든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의례』예문을 제시한다. 왕실 전례에 국제나 전례가 아닌 예문이 엄격히 적용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오류와 비약이 보이기도 하고, 순수한 학문 논쟁만이 아닌 각 정파의 정치적 입장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시대적인 분위기는 이러한 논쟁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정도로 종법에 대한 이해가 진전되어 있었다. 이는 현종과 숙종이 종법의 대원칙인 적장자 계승에 따라 왕세자의 자리를 거친 것과 『속대전』과『대전통편』 의 예전에서 종통 계승에 대한 인식이 확고해지고 있다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효종 ㆍ 현종대의 종통논쟁을 소모적이라고만 볼 수 없다. 당시 예학의 수준은 동양에서 최고 수준의 것이었다. 그리고 논쟁을 이끌었던 성리학자들은 자신들이 이상이라 생각하는 예를 현실 속에서 실현해내는 것이 정치라 생각했기 때문에 예송이 치열했던 것이다.
Jongtong, that is, an orthodoxy of a royal family is bound up with political views of the later period of Joseon. Especially, In some aspects,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of Hyojong had plenty of problems that led to the severe adverse criticism on propriety two times after that. Being several cont...
Jongtong, that is, an orthodoxy of a royal family is bound up with political views of the later period of Joseon. Especially, In some aspects,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of Hyojong had plenty of problems that led to the severe adverse criticism on propriety two times after that. Being several controversies from a classical angle on Jongbeob, there were no serious ones on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of Taejong, Sejong, Sejo, and Yejong. By the 17th century, however, as Yehak developed, Jongbeob put down roots in people's senses. As political complexion at those days was closely linked to factions fond of taking the leadership through ideal and formal controversies, Jongtong of a royal family had a matter of great importance from a political history. Injo nominated Hyojong as a successor instead of the crown prince, Sohyeon. Despite the problem in understanding standard of jongbeob and criticism leading to the meeting of the whole body of officials, the discord between Injo and the crown prince and the royal authority of Injo made it possible for Hyojong to succeed to the throne. Considering the Hyojong's position of Jongbeob, a brief funeral for the crown prince was held, After the death of Hyojong, however, in the course of the adverse criticism on propriety over the attire of Queen Mother Jaui, the Hyojong's position of Jongtong to have made him become a king regardless of Injo's second son brought about a controversy in earnest. Si-hyeol Song, Mok Heo, and Hyu Yun had different points of view on the traditional 12-day system of mourning attire that Injo had framed. Si-hyeol Song built up his logic with the proviso that the funeral of So-hyeon should be considered that of the eldest son. As explained in the example, the logic of Mok Heo and Hyu Yun was built up with the proviso that the funeral not held yet shouldn't be considered that of the eldest son. Irrespective of before-a-year or 3-year mourning attire, controversialists present Uirye-Yemun based on their points. In other words, they insisted that Yemun should be applied to the rite of a royal family under hard-and-fast rules instead of a national system or former examples. In the one hand, it is no wonder that there were logical fallacies and rapid progress to be able to rationalize their standpoints, and this was closely related with not only the controversy on a pure science but the political advantages and disadvantages of each party. But, the ambiance at that time was well-developed to take the controversy on the understanding of Jongbeob. It proves that Hyeonjong and Sukjong succeed to the throne in the dominant principle of Jongbeob as the eldest son and the succession of the eldest legitimate son was firmly recognized in Yejeon of Sokdaejeon and Daejeon-tongpyeon. We must not jump at conclusions that The Controversy on Jongtong of Hyojong ㆍ Hyeonjong was just exhausting. Yehak was the highest academic standard in the Orient then. And that's why a intense adverse criticism on propriety was brought about by the scholars learning human nature and natural laws who thought that on a realistic basis politics actualizes Ye which they consider ideal.
Jongtong, that is, an orthodoxy of a royal family is bound up with political views of the later period of Joseon. Especially, In some aspects,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of Hyojong had plenty of problems that led to the severe adverse criticism on propriety two times after that. Being several controversies from a classical angle on Jongbeob, there were no serious ones on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of Taejong, Sejong, Sejo, and Yejong. By the 17th century, however, as Yehak developed, Jongbeob put down roots in people's senses. As political complexion at those days was closely linked to factions fond of taking the leadership through ideal and formal controversies, Jongtong of a royal family had a matter of great importance from a political history. Injo nominated Hyojong as a successor instead of the crown prince, Sohyeon. Despite the problem in understanding standard of jongbeob and criticism leading to the meeting of the whole body of officials, the discord between Injo and the crown prince and the royal authority of Injo made it possible for Hyojong to succeed to the throne. Considering the Hyojong's position of Jongbeob, a brief funeral for the crown prince was held, After the death of Hyojong, however, in the course of the adverse criticism on propriety over the attire of Queen Mother Jaui, the Hyojong's position of Jongtong to have made him become a king regardless of Injo's second son brought about a controversy in earnest. Si-hyeol Song, Mok Heo, and Hyu Yun had different points of view on the traditional 12-day system of mourning attire that Injo had framed. Si-hyeol Song built up his logic with the proviso that the funeral of So-hyeon should be considered that of the eldest son. As explained in the example, the logic of Mok Heo and Hyu Yun was built up with the proviso that the funeral not held yet shouldn't be considered that of the eldest son. Irrespective of before-a-year or 3-year mourning attire, controversialists present Uirye-Yemun based on their points. In other words, they insisted that Yemun should be applied to the rite of a royal family under hard-and-fast rules instead of a national system or former examples. In the one hand, it is no wonder that there were logical fallacies and rapid progress to be able to rationalize their standpoints, and this was closely related with not only the controversy on a pure science but the political advantages and disadvantages of each party. But, the ambiance at that time was well-developed to take the controversy on the understanding of Jongbeob. It proves that Hyeonjong and Sukjong succeed to the throne in the dominant principle of Jongbeob as the eldest son and the succession of the eldest legitimate son was firmly recognized in Yejeon of Sokdaejeon and Daejeon-tongpyeon. We must not jump at conclusions that The Controversy on Jongtong of Hyojong ㆍ Hyeonjong was just exhausting. Yehak was the highest academic standard in the Orient then. And that's why a intense adverse criticism on propriety was brought about by the scholars learning human nature and natural laws who thought that on a realistic basis politics actualizes Ye which they consider id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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