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의 메시야사상은 인류를 위한 메시야사상이다.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인 것이다. 즉 여자의 후손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전체 구약 역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메시야의 개념으로 나타났다. 메시야에 대한 갈망은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하는 왕국을 수립하시게 될 왕으로 오심을 기다리게 하였다. 이러한 메시야에 대한 갈망은 다윗의 왕에 이르러 보다 확고하게 되었다. 메시야라는 명칭은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기위하여 부름을 받은 자가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의미했다. 이러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여야만 한다. 즉 그는 여호와 앞에서 백성들을 정결케 하고 이를 유지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감독하는 특별한 의무도 있었으며 어떤 분쟁에 대한 중재자적인 성격을 가지고 백성들과 함께 해야 했으며 또한 하나님과도 함께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선지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공동체의 아들로써 여호와 하나님이 이들에게 권능을 주시고, 여호와의 영을 불어 넣으셔서 소양을 갖추게 하시고 이들에게 주어지고 밝혀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백성들을 적절하게 인도할 책임이 이었다. 또한 왕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서 분쟁이나 동맹의 파괴 그리고 전투 등에서 승리하며, 백성들을 전쟁에서 평화로 인도하는 것, 즉 언약공동체를 다스리는 것으로 왕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며, 백성들을 합당하게 인도하고, 백성을 돌보는 목자로서의 사명, 즉 언약백성의 구원자였다. 그러나 왕국시대를 지나 B.C. 8세기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기대는 허탈감으로 바뀌게 된다. 이스라엘 민족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언약은 부패와 심각한 죄악으로 타락의 끝을 모르고 질주하는 ...
이사야서의 메시야사상은 인류를 위한 메시야사상이다.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인 것이다. 즉 여자의 후손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전체 구약 역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메시야의 개념으로 나타났다. 메시야에 대한 갈망은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하는 왕국을 수립하시게 될 왕으로 오심을 기다리게 하였다. 이러한 메시야에 대한 갈망은 다윗의 왕에 이르러 보다 확고하게 되었다. 메시야라는 명칭은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기위하여 부름을 받은 자가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의미했다. 이러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여야만 한다. 즉 그는 여호와 앞에서 백성들을 정결케 하고 이를 유지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감독하는 특별한 의무도 있었으며 어떤 분쟁에 대한 중재자적인 성격을 가지고 백성들과 함께 해야 했으며 또한 하나님과도 함께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선지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공동체의 아들로써 여호와 하나님이 이들에게 권능을 주시고, 여호와의 영을 불어 넣으셔서 소양을 갖추게 하시고 이들에게 주어지고 밝혀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백성들을 적절하게 인도할 책임이 이었다. 또한 왕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서 분쟁이나 동맹의 파괴 그리고 전투 등에서 승리하며, 백성들을 전쟁에서 평화로 인도하는 것, 즉 언약공동체를 다스리는 것으로 왕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며, 백성들을 합당하게 인도하고, 백성을 돌보는 목자로서의 사명, 즉 언약백성의 구원자였다. 그러나 왕국시대를 지나 B.C. 8세기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기대는 허탈감으로 바뀌게 된다. 이스라엘 민족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언약은 부패와 심각한 죄악으로 타락의 끝을 모르고 질주하는 제동장치가 없는 병거가 되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를 초래하게 되었고,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언약을 파기하고 부패와 심각한 죄악으로 달려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외치는 선지자의 예언들은 현실로 다가와 B.C. 722에는 앗수르에 의해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말발굽아래에 짓밟히게 되었다. 남 유다왕국 역시 B.C. 586에 느부갓네살에 그들의 왕이 두 눈이 뽑히고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한 줌의 재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다윗왕가에 대한 기대인 메시야 사상은 선지자의 가슴 속에 있었다. 즉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고, 타락으로 빠져 완전한 패망으로 완전히 없어질 것처럼 보였지만, 이스라엘의 거목은 베어 넘어졌지만 그루터기는 남아있었고, 그 그루터기에선 새로이 돋아날 ‘싹’인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있었다. 구약 성경의 메시야 예언 중에서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메시야 사상이 이사야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이사야서의 예언 중에서 메시야 사상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약성경의 그 어느 곳에서 보다 더 선명하게 메시야의 인격과 성품 그리고 사역에 이르기까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것들은 여호와의 목전에서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기다리는 B.C. 8세기의 이스라엘사람들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우리에도 들려지는 메시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사야서의 계시는 그리스도가 이방의 빛으로 오셨고(사 9:1), 인간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러 오셨다(사 53:4). 그는 다윗의 씨를 통하여 ‘유대의 왕’으로, ‘하나님의 종’(사 42:1-3)으로 오셨다. 그리스도인를 박해하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는 확신을 가지고 유대인 뿐 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F.F 부르스, 『신약사』, 나용화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p. 269 참조.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에 대한 통념은 모세와 같이 그들을 정치적인 메시야로서 영광스런 다윗의 왕적인 메시야로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언약의 백성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셔야만 하는 고난의 종, 고난의 메시야로 오셨다. 김두석, 『구약성경과 그리스도』, p. 549. 특별히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배경의 말씀으로 가장 명확히 암시되어있다. 여호와의 종이 이룩하여야 할 사역은 ‘한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 질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이사야의 예언은 역사적 사실로 성취되었으며 또한 성취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동정녀 탄생으로 그는 육신의 몸을 입고 낳으며, 그분은 인간이요 참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시며, 함께 연합하여 한 백성을 이루셨다. 즉 종족을 뛰어 넘어 믿음과 순종으로 여호와의 계시된 말씀아래 그분과 한 몸이 되었다. 그 분은 굴욕을 당하셨으나 부활 승천하셔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서 공평과 정의와 성실하심으로 다스리고 계시며, 영광의 날에 우리의 얼굴에 가려진 면사포를 제거하시며,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날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요, 대제사장이시며, 대선지자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셨다. 그분은 우주적 종말론적 메시야로 오셨으며 또한 다시금 오실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문명이 발달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기보다는 과학의 힘에 적극적으로 의지하며, 과학적인 제 증명을 통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우둔하고 미련한 우리들은 영의 눈은 장님이 되어 주 여호와를 경외하기보다는 세상의 과학에 집착함으로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과학적 물질문명을 따르는 우상 숭배자들이 되고 말았다. 마치 우리의 시대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인간 중심적인 쾌락과 삶의 편이성을 갈망하고, 세상의 물질을 소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한 우리의 사고는 점점 더 인간 중심적 변화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들며 증명이 어려운 말씀을 하나님이 말씀이 아니라고 부인하며, 때로는 허구라고 단정 짓는 시점에 다다르고 말았다. 지금의 시대는 종말의 시대로 향하여, 과학이라는 속도감을 높이며 멈출 줄 모르 고속으로 질주하는 자동차와 같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신학도가 해야만 하고 전달하여야만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종말로 향하여 질주하는 자동차의 제동장치가 되고, 핸들이 되어 이 세상의 민족들에게 하나님을 향할 수 있도록 방향전환을 인도하여야만 하고,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안전하게 도착하도록 우리의 사명을 다하는 신학도가 되어야겠으며, 주님의 재림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이전의 수치를 씻김을 받으며 하늘나라의 즐거운 잔치에 함께하는 영광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세상 끝날 까지 전파할 수 있는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된 사명을 다하는 삶이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니리요. 그러므로 오신 메시야, 장차 오실 재림의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함이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가.
이사야서의 메시야사상은 인류를 위한 메시야사상이다.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인 것이다. 즉 여자의 후손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전체 구약 역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메시야의 개념으로 나타났다. 메시야에 대한 갈망은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하는 왕국을 수립하시게 될 왕으로 오심을 기다리게 하였다. 이러한 메시야에 대한 갈망은 다윗의 왕에 이르러 보다 확고하게 되었다. 메시야라는 명칭은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기위하여 부름을 받은 자가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의미했다. 이러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여야만 한다. 즉 그는 여호와 앞에서 백성들을 정결케 하고 이를 유지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감독하는 특별한 의무도 있었으며 어떤 분쟁에 대한 중재자적인 성격을 가지고 백성들과 함께 해야 했으며 또한 하나님과도 함께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선지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공동체의 아들로써 여호와 하나님이 이들에게 권능을 주시고, 여호와의 영을 불어 넣으셔서 소양을 갖추게 하시고 이들에게 주어지고 밝혀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백성들을 적절하게 인도할 책임이 이었다. 또한 왕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서 분쟁이나 동맹의 파괴 그리고 전투 등에서 승리하며, 백성들을 전쟁에서 평화로 인도하는 것, 즉 언약공동체를 다스리는 것으로 왕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며, 백성들을 합당하게 인도하고, 백성을 돌보는 목자로서의 사명, 즉 언약백성의 구원자였다. 그러나 왕국시대를 지나 B.C. 8세기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기대는 허탈감으로 바뀌게 된다. 이스라엘 민족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언약은 부패와 심각한 죄악으로 타락의 끝을 모르고 질주하는 제동장치가 없는 병거가 되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를 초래하게 되었고,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언약을 파기하고 부패와 심각한 죄악으로 달려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외치는 선지자의 예언들은 현실로 다가와 B.C. 722에는 앗수르에 의해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말발굽아래에 짓밟히게 되었다. 남 유다왕국 역시 B.C. 586에 느부갓네살에 그들의 왕이 두 눈이 뽑히고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한 줌의 재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다윗왕가에 대한 기대인 메시야 사상은 선지자의 가슴 속에 있었다. 즉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고, 타락으로 빠져 완전한 패망으로 완전히 없어질 것처럼 보였지만, 이스라엘의 거목은 베어 넘어졌지만 그루터기는 남아있었고, 그 그루터기에선 새로이 돋아날 ‘싹’인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있었다. 구약 성경의 메시야 예언 중에서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메시야 사상이 이사야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이사야서의 예언 중에서 메시야 사상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약성경의 그 어느 곳에서 보다 더 선명하게 메시야의 인격과 성품 그리고 사역에 이르기까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것들은 여호와의 목전에서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기다리는 B.C. 8세기의 이스라엘사람들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우리에도 들려지는 메시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사야서의 계시는 그리스도가 이방의 빛으로 오셨고(사 9:1), 인간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러 오셨다(사 53:4). 그는 다윗의 씨를 통하여 ‘유대의 왕’으로, ‘하나님의 종’(사 42:1-3)으로 오셨다. 그리스도인를 박해하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는 확신을 가지고 유대인 뿐 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F.F 부르스, 『신약사』, 나용화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p. 269 참조.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에 대한 통념은 모세와 같이 그들을 정치적인 메시야로서 영광스런 다윗의 왕적인 메시야로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언약의 백성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셔야만 하는 고난의 종, 고난의 메시야로 오셨다. 김두석, 『구약성경과 그리스도』, p. 549. 특별히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배경의 말씀으로 가장 명확히 암시되어있다. 여호와의 종이 이룩하여야 할 사역은 ‘한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 질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이사야의 예언은 역사적 사실로 성취되었으며 또한 성취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동정녀 탄생으로 그는 육신의 몸을 입고 낳으며, 그분은 인간이요 참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시며, 함께 연합하여 한 백성을 이루셨다. 즉 종족을 뛰어 넘어 믿음과 순종으로 여호와의 계시된 말씀아래 그분과 한 몸이 되었다. 그 분은 굴욕을 당하셨으나 부활 승천하셔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서 공평과 정의와 성실하심으로 다스리고 계시며, 영광의 날에 우리의 얼굴에 가려진 면사포를 제거하시며,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날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요, 대제사장이시며, 대선지자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셨다. 그분은 우주적 종말론적 메시야로 오셨으며 또한 다시금 오실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문명이 발달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기보다는 과학의 힘에 적극적으로 의지하며, 과학적인 제 증명을 통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우둔하고 미련한 우리들은 영의 눈은 장님이 되어 주 여호와를 경외하기보다는 세상의 과학에 집착함으로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과학적 물질문명을 따르는 우상 숭배자들이 되고 말았다. 마치 우리의 시대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인간 중심적인 쾌락과 삶의 편이성을 갈망하고, 세상의 물질을 소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한 우리의 사고는 점점 더 인간 중심적 변화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들며 증명이 어려운 말씀을 하나님이 말씀이 아니라고 부인하며, 때로는 허구라고 단정 짓는 시점에 다다르고 말았다. 지금의 시대는 종말의 시대로 향하여, 과학이라는 속도감을 높이며 멈출 줄 모르 고속으로 질주하는 자동차와 같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신학도가 해야만 하고 전달하여야만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종말로 향하여 질주하는 자동차의 제동장치가 되고, 핸들이 되어 이 세상의 민족들에게 하나님을 향할 수 있도록 방향전환을 인도하여야만 하고,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안전하게 도착하도록 우리의 사명을 다하는 신학도가 되어야겠으며, 주님의 재림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이전의 수치를 씻김을 받으며 하늘나라의 즐거운 잔치에 함께하는 영광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세상 끝날 까지 전파할 수 있는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된 사명을 다하는 삶이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니리요. 그러므로 오신 메시야, 장차 오실 재림의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함이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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