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구관조사(舊慣調査)의 일환으로 실시된 민속 조사는 당시 일상적인 생활이 어떠했는지, 조선의 민중들이 지켜가던 관습으로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 그 시대 문화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시기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1891~1968)은 1919년부터 1941년 일본으로 귀국할 때까지 총독부의 촉탁으로서 조선의 민간신앙과 향토신사(鄕土神祀)를 조사ㆍ정리하여 일련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그것들은 오늘날에도 한국의 민속연구에 있어서 참고할만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논문은 무라야마의 ...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구관조사(舊慣調査)의 일환으로 실시된 민속 조사는 당시 일상적인 생활이 어떠했는지, 조선의 민중들이 지켜가던 관습으로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 그 시대 문화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시기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1891~1968)은 1919년부터 1941년 일본으로 귀국할 때까지 총독부의 촉탁으로서 조선의 민간신앙과 향토신사(鄕土神祀)를 조사ㆍ정리하여 일련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그것들은 오늘날에도 한국의 민속연구에 있어서 참고할만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논문은 무라야마의 조선체류기간 동안의 조선인식과 그의 학술활동을 관련지어 고찰하는 연구의 필요성에 따른 것이다. 무라야마는 신앙 현상의 규명에 의해 한 사람의 성향과 생활 이상 등을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 말처럼 그의 사상과 인식을 살펴보는 데에는 그의 민간신앙 관련 조사보고서가 최적의 대상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의 「조선의 민간신앙」4부작, 즉 『조선의 귀신(朝鮮の鬼神)』(1929),『조선의 풍수(朝鮮の風水)』(1931),『조선의 무격(朝鮮の巫覡)』(1932),『조선의 점복과 예언(朝鮮の占卜と豫言)』(1933)을 검토하여 그가 조선에 대하여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그것이 조사보고서에 어떤 형태로 반영되어 있는가를 고찰하였다. 이 논문은 전체를 다음과 같이 4장으로 구성하였다. 1장에서는 선행연구들을 살펴봄과 함께 본 연구의 목적을 밝혔다. 2장에서는 무라야마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을 개관하였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구관조사와 무라야마의 조사보고서와의 관련성을 살폈다. 3장에서는 먼저「조선의 민간신앙」4부작의 내용을 분석하였다. 그 다음으로 무라야마의 조선에 대한 인식의 흐름에 대해 시기별로 구분하여 고찰하고자 하였다. 마지막으로 4장에서는 이제까지 논의한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고, 앞으로의 연구 방향에 관하여 기술하였다. 조사보고서의 내용을 분석한 결과, 조선과 조선 민속에 대한 그의 인식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첫째, 조선의 사상의 근저에는 귀신 신앙이 있고, 조선의 문화는 이 귀신신앙의 영향 하에 있다. 둘째, 조선인의 민간신앙은 원시적이고 그 폐해가 크다. 셋째, 조선인은 소극적 운명론자이다. 무라야마는 조선에서 종교사상의 본류(本流)를 이루고 있는 것은 귀신신앙이며 그 중추는 무격신앙이라고 파악하였다. 같은 맥락 안에서 한국의 사회구조와 행복관이 반영된 것이 풍수라고 보았다. 또한 귀신으로부터의 재화(災禍)에서 벗어나고 그 신의(神意)를 알고자 조선민중은 오로지 무격에 의존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조선의 민중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려 하지 않고 다만 양귀(攘鬼)로 귀신의 재앙을 없애려는 소극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귀신신앙ㆍ묘지 풍수ㆍ무격의 양귀(攘鬼)와 점복’이라는 핵심어로 요약되는 무라야마의 조선 민간신앙 인식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 개념들을 하나의 체계도 안에서 각각 자리매김해보았다. 그리고 조선의 민간신앙 4부작과『부락제(部落祭)』(1937)의 내용을 함께 살펴 무라야마의 조선에 대한 인식의 흐름에 대해 시기별로 구분하였다. 그는『부락제』가 완성되는 시점 이전에 인식의 전환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부락제』에서의 서술 양상 변화를 그 근거로 하였으며, 이에 따라 조사보고서 속에서 나타나는 무라야마의 조선 인식에 대하여 그 시기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전반기: 민간신앙 집중연구 단계(1919-1936) : 조선은 원시적인 귀신 신앙으로 인한 무격의 폐해가 크고, 민중은 과학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여 귀신의 힘에 순응하는 운명론자들이라고 생각한 시기이다. 후반기: 전통문화 인정 단계(1937-1941) :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져 조선의 민중이 공동체 정신으로 다수의 아름다운 전통문화를 유지하고 있다고 인식한 시기이다. 덧붙여 조선에 대한 무라야마의 인식의 성격 및 한계에 관해서도 함께 살펴보았다. 그는 조선 민간신앙의 원시성ㆍ열등성ㆍ저급성으로 인한 폐해가 크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당시의 조선인들이 넓은 의미로서의 조상신인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다양하게 발달해 온 하나의 신앙 형태로 인정하지 않고 원시적이며 미신이라는 관점을 가진 무라야마의 인식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는 귀신에 순종하는 공순법 등을 예로 들어 조선민중이 운명에 순응하며 대세를 따르는 기질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던 인식으로, 식민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부락제』를 기점으로 바뀌었다고는 하나 촉탁이라는 그의 신분으로 말미암아 그 후의 조사보고서 내에서의 서술도 일정한 방향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日帝强占期、 朝鮮總督府の舊慣調査の一環として実施された民俗調査は当時の日常的な生活はどうだったのか、朝鮮の民衆が守っていった慣習の中にはどんなものがあったのか、あの時代の文化の一端が覗き見られる。 この時期村山智順(1891~(1891~1968)は1919年から1941年、日本へ帰国するまで總督府の囑託として朝鮮の民間信仰と鄕土神祀を調査ㆍ整理して一連の報告書を出したのである。それらは今日も韓国の民俗硏究において參考すべき貴重な資料だと評されている。 この論文は村山の朝鮮滯留期の間の朝鮮認識と彼の学術活動を関連づけて考察する硏究の必要性に依るものである。村山は信仰現像の糾明によってある人の性向と生活理想等が分かると言った。その通に彼の思想と認識を察するには彼の民間信仰に関する調査報告書が最適な対象になれるだろうと思われるので彼の「朝鮮の民間信仰」4部作、すなわち『朝鮮の鬼神』(1929)、『朝鮮の風水』(1931)、『朝鮮の巫覡』(1932)、『朝鮮の占卜と豫言)』(1933)を検討して彼が朝鮮についてどんな認識を持っていたのか、またそれが調査報告書にどんな形態で反映されているのかを考察した。 この論文は全体が次のように4章に構成されている。 1章では先行硏究を調べると共にこの硏究の目的を取り立てた。 2章では村山の生涯と時代的背景を槪觀した。それから朝鮮總督府の舊慣調査と村山の調査報告書との関連性を察した。 3章ではまず「朝鮮의 民間信仰」4部作の內容を分析した。その後村山の朝鮮についての認識の流れに於て時期別に区分して考察しようとした。 最後に4章では今まで論議してきた內容を要約整理して、これからの硏の方向に関して記述した。 調査報告書の內容を分析した結果, 朝鮮と朝鮮民俗についての彼の認識を次のような三項に要約が出来たのである。 一、朝鮮の思想の根底には鬼神信仰があり、朝鮮の文化はこの鬼神信仰の影響の下にある。 二、朝鮮人の民間信仰は原始的で、その弊害が大きい。 三、朝鮮人は消極的な運命論者である。 村山は朝鮮において宗敎思想の本流を成しているのは鬼神信仰で、その中軸は巫覡信仰だと把握していたのでる。同じ流れの中から韓国の社会構造と幸福観が反映されているのは風水だと思っていた。また鬼神に依るからの災禍から離れ、その神意が分かりたくて朝鮮民衆はひたすら巫覡に寄りかかるのだと言った。これは朝鮮の民衆が自分の運命を自ら開拓しようとしないでただ攘鬼で鬼神の災殃を払おうとする消極的な生き方をしているからだと言っている。 このように彼が‘鬼神信仰ㆍ墓地風水ㆍ巫覡の攘鬼と占卜’という核心語で要約出来た村山の朝鮮民間信仰についての認識を説明するため、それら概念を一つの体系図の中にそれぞれ位置づけてみた。 そして「朝鮮の民間信仰」4部作と『部落祭』(1937)の內容をいっしょうに検討し、調べて村山の朝鮮についての認識の流れを時期別に区分した。彼は『部落祭』が完成する時点の前に認識の転換があったように見える。これは『部落祭』での敍述樣相の変化をその根拠にしたものである。これに従い、調査報告書の中に現れる村山の朝鮮認識についてその時期を次のように区分することが出来るのである。 前半期: 民間信仰執中硏究段階(1919-1936) : 朝鮮は原始的な鬼神信仰による巫覡の弊害が大きく、民衆は科學的な思考が出来なく鬼神の力に順応する運命論者だと考えたる時期である。 後半期: 傳統文化 認定 段階(1937-1941) : 思考の転換が成し遂げられ、朝鮮の民衆が共同体精神で数多くの美しい伝統文化を保持していると認識した時期である。 加えて朝鮮に関する村山の認識の性格及び限界にもついていっしょうに調べてみた。彼は朝鮮民間信仰の原始性ㆍ劣等性ㆍ低級性による弊害が大きいことを强調した。当時の朝鮮人が幅広い意味としての祖上神たる鬼神に祭祀を奉ることを多樣に発達してきたひとつの信仰形態に認定しないで原始的で迷信だという観点を持っていた村山の認識は間違っていたと言える。 また彼は鬼神に順從する恭順法等を例えながら朝鮮民が運命に順応し、大勢に従う氣質があると言った。これは当時、多くの知識人が持っていた認識と同じで、それは植民支配に正当性を附與する役割も果たしただろう。このような認識が『部落祭』を起点として変ったとはいうものの、囑託としての彼の身分により、その後の調査報告書の敍述も一定の方向に限定されるしかなかった。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구관조사(舊慣調査)의 일환으로 실시된 민속 조사는 당시 일상적인 생활이 어떠했는지, 조선의 민중들이 지켜가던 관습으로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 그 시대 문화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시기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1891~1968)은 1919년부터 1941년 일본으로 귀국할 때까지 총독부의 촉탁으로서 조선의 민간신앙과 향토신사(鄕土神祀)를 조사ㆍ정리하여 일련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그것들은 오늘날에도 한국의 민속연구에 있어서 참고할만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논문은 무라야마의 조선체류기간 동안의 조선인식과 그의 학술활동을 관련지어 고찰하는 연구의 필요성에 따른 것이다. 무라야마는 신앙 현상의 규명에 의해 한 사람의 성향과 생활 이상 등을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 말처럼 그의 사상과 인식을 살펴보는 데에는 그의 민간신앙 관련 조사보고서가 최적의 대상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의 「조선의 민간신앙」4부작, 즉 『조선의 귀신(朝鮮の鬼神)』(1929),『조선의 풍수(朝鮮の風水)』(1931),『조선의 무격(朝鮮の巫覡)』(1932),『조선의 점복과 예언(朝鮮の占卜と豫言)』(1933)을 검토하여 그가 조선에 대하여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그것이 조사보고서에 어떤 형태로 반영되어 있는가를 고찰하였다. 이 논문은 전체를 다음과 같이 4장으로 구성하였다. 1장에서는 선행연구들을 살펴봄과 함께 본 연구의 목적을 밝혔다. 2장에서는 무라야마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을 개관하였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구관조사와 무라야마의 조사보고서와의 관련성을 살폈다. 3장에서는 먼저「조선의 민간신앙」4부작의 내용을 분석하였다. 그 다음으로 무라야마의 조선에 대한 인식의 흐름에 대해 시기별로 구분하여 고찰하고자 하였다. 마지막으로 4장에서는 이제까지 논의한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고, 앞으로의 연구 방향에 관하여 기술하였다. 조사보고서의 내용을 분석한 결과, 조선과 조선 민속에 대한 그의 인식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첫째, 조선의 사상의 근저에는 귀신 신앙이 있고, 조선의 문화는 이 귀신신앙의 영향 하에 있다. 둘째, 조선인의 민간신앙은 원시적이고 그 폐해가 크다. 셋째, 조선인은 소극적 운명론자이다. 무라야마는 조선에서 종교사상의 본류(本流)를 이루고 있는 것은 귀신신앙이며 그 중추는 무격신앙이라고 파악하였다. 같은 맥락 안에서 한국의 사회구조와 행복관이 반영된 것이 풍수라고 보았다. 또한 귀신으로부터의 재화(災禍)에서 벗어나고 그 신의(神意)를 알고자 조선민중은 오로지 무격에 의존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조선의 민중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려 하지 않고 다만 양귀(攘鬼)로 귀신의 재앙을 없애려는 소극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귀신신앙ㆍ묘지 풍수ㆍ무격의 양귀(攘鬼)와 점복’이라는 핵심어로 요약되는 무라야마의 조선 민간신앙 인식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 개념들을 하나의 체계도 안에서 각각 자리매김해보았다. 그리고 조선의 민간신앙 4부작과『부락제(部落祭)』(1937)의 내용을 함께 살펴 무라야마의 조선에 대한 인식의 흐름에 대해 시기별로 구분하였다. 그는『부락제』가 완성되는 시점 이전에 인식의 전환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부락제』에서의 서술 양상 변화를 그 근거로 하였으며, 이에 따라 조사보고서 속에서 나타나는 무라야마의 조선 인식에 대하여 그 시기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전반기: 민간신앙 집중연구 단계(1919-1936) : 조선은 원시적인 귀신 신앙으로 인한 무격의 폐해가 크고, 민중은 과학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여 귀신의 힘에 순응하는 운명론자들이라고 생각한 시기이다. 후반기: 전통문화 인정 단계(1937-1941) :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져 조선의 민중이 공동체 정신으로 다수의 아름다운 전통문화를 유지하고 있다고 인식한 시기이다. 덧붙여 조선에 대한 무라야마의 인식의 성격 및 한계에 관해서도 함께 살펴보았다. 그는 조선 민간신앙의 원시성ㆍ열등성ㆍ저급성으로 인한 폐해가 크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당시의 조선인들이 넓은 의미로서의 조상신인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다양하게 발달해 온 하나의 신앙 형태로 인정하지 않고 원시적이며 미신이라는 관점을 가진 무라야마의 인식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는 귀신에 순종하는 공순법 등을 예로 들어 조선민중이 운명에 순응하며 대세를 따르는 기질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던 인식으로, 식민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부락제』를 기점으로 바뀌었다고는 하나 촉탁이라는 그의 신분으로 말미암아 그 후의 조사보고서 내에서의 서술도 일정한 방향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日帝强占期、 朝鮮總督府の舊慣調査の一環として実施された民俗調査は当時の日常的な生活はどうだったのか、朝鮮の民衆が守っていった慣習の中にはどんなものがあったのか、あの時代の文化の一端が覗き見られる。 この時期村山智順(1891~(1891~1968)は1919年から1941年、日本へ帰国するまで總督府の囑託として朝鮮の民間信仰と鄕土神祀を調査ㆍ整理して一連の報告書を出したのである。それらは今日も韓国の民俗硏究において參考すべき貴重な資料だと評されている。 この論文は村山の朝鮮滯留期の間の朝鮮認識と彼の学術活動を関連づけて考察する硏究の必要性に依るものである。村山は信仰現像の糾明によってある人の性向と生活理想等が分かると言った。その通に彼の思想と認識を察するには彼の民間信仰に関する調査報告書が最適な対象になれるだろうと思われるので彼の「朝鮮の民間信仰」4部作、すなわち『朝鮮の鬼神』(1929)、『朝鮮の風水』(1931)、『朝鮮の巫覡』(1932)、『朝鮮の占卜と豫言)』(1933)を検討して彼が朝鮮についてどんな認識を持っていたのか、またそれが調査報告書にどんな形態で反映されているのかを考察した。 この論文は全体が次のように4章に構成されている。 1章では先行硏究を調べると共にこの硏究の目的を取り立てた。 2章では村山の生涯と時代的背景を槪觀した。それから朝鮮總督府の舊慣調査と村山の調査報告書との関連性を察した。 3章ではまず「朝鮮의 民間信仰」4部作の內容を分析した。その後村山の朝鮮についての認識の流れに於て時期別に区分して考察しようとした。 最後に4章では今まで論議してきた內容を要約整理して、これからの硏の方向に関して記述した。 調査報告書の內容を分析した結果, 朝鮮と朝鮮民俗についての彼の認識を次のような三項に要約が出来たのである。 一、朝鮮の思想の根底には鬼神信仰があり、朝鮮の文化はこの鬼神信仰の影響の下にある。 二、朝鮮人の民間信仰は原始的で、その弊害が大きい。 三、朝鮮人は消極的な運命論者である。 村山は朝鮮において宗敎思想の本流を成しているのは鬼神信仰で、その中軸は巫覡信仰だと把握していたのでる。同じ流れの中から韓国の社会構造と幸福観が反映されているのは風水だと思っていた。また鬼神に依るからの災禍から離れ、その神意が分かりたくて朝鮮民衆はひたすら巫覡に寄りかかるのだと言った。これは朝鮮の民衆が自分の運命を自ら開拓しようとしないでただ攘鬼で鬼神の災殃を払おうとする消極的な生き方をしているからだと言っている。 このように彼が‘鬼神信仰ㆍ墓地風水ㆍ巫覡の攘鬼と占卜’という核心語で要約出来た村山の朝鮮民間信仰についての認識を説明するため、それら概念を一つの体系図の中にそれぞれ位置づけてみた。 そして「朝鮮の民間信仰」4部作と『部落祭』(1937)の內容をいっしょうに検討し、調べて村山の朝鮮についての認識の流れを時期別に区分した。彼は『部落祭』が完成する時点の前に認識の転換があったように見える。これは『部落祭』での敍述樣相の変化をその根拠にしたものである。これに従い、調査報告書の中に現れる村山の朝鮮認識についてその時期を次のように区分することが出来るのである。 前半期: 民間信仰執中硏究段階(1919-1936) : 朝鮮は原始的な鬼神信仰による巫覡の弊害が大きく、民衆は科學的な思考が出来なく鬼神の力に順応する運命論者だと考えたる時期である。 後半期: 傳統文化 認定 段階(1937-1941) : 思考の転換が成し遂げられ、朝鮮の民衆が共同体精神で数多くの美しい伝統文化を保持していると認識した時期である。 加えて朝鮮に関する村山の認識の性格及び限界にもついていっしょうに調べてみた。彼は朝鮮民間信仰の原始性ㆍ劣等性ㆍ低級性による弊害が大きいことを强調した。当時の朝鮮人が幅広い意味としての祖上神たる鬼神に祭祀を奉ることを多樣に発達してきたひとつの信仰形態に認定しないで原始的で迷信だという観点を持っていた村山の認識は間違っていたと言える。 また彼は鬼神に順從する恭順法等を例えながら朝鮮民が運命に順応し、大勢に従う氣質があると言った。これは当時、多くの知識人が持っていた認識と同じで、それは植民支配に正当性を附與する役割も果たしただろう。このような認識が『部落祭』を起点として変ったとはいうものの、囑託としての彼の身分により、その後の調査報告書の敍述も一定の方向に限定されるしかな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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