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는 스스로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는 노인문제와 그 실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인문제의 핵심이 노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인한 것임을, 그래서 노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요청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노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란, 노인을 ‘노인(老늙을 노 人인)’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노인’(努힘쓸 노 人인),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따라서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애써하기에 노인은 하나님의 형상에 가장 가깝게 도달한 자로 그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아야만 한다. 또한 노인에 대한 신학적 해석과 노인신학의 재정립을 통해, 우리에게는 노인에 대한 새로운 의식 전환을 가져다주고, 노인에게는 고독과 절망의 삶 가운데 희망을 갖게 해줄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결국 노인은 결코 나약한 모습만을 가진 절망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지혜와 총명함을 가진 자로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줄 수 있으며, 미래에 대한 소망과 현재적 구원으로 희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그 희망이 노인의 삶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교육은 단지 노인의 개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교육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영적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교육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교육은 교회가 제시하는 성서의 이야기와 비전을 통해 노인이 완전한 성숙의 삶을 살아가도록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나 교회 안에서의 노인문제는 노인의 새로운 해석과 노인신학을 기반으로 교회가 교육함에 힘쓸 때 해결되리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 교회는 젊은이들의 부흥에만 열중하였기 때문에 아직까지 이러한 노인의 새로운 해석과 노인신학의 재정립이 확립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젊은이들의 욕구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였지만, 노인에 대한 관심은 물론 그들의 욕구와 교육에 대해서는 등한시하였다. 그 결과 교회는 점점 늘어만 가는 다수의 노인을 양육하기보다는 세상의 즐거움을 쫓아 교회 밖으로 나가는 소수의 젊은이들을 붙들고 교육하기에 열을 올렸다. 그래서 예배, 프로그램, 교회 건물 디자인 등은 모두 젊은이 위주로 바뀌어만 가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선교적인 사명을 이루려면, 반드시 노인에게 관심을 갖고 교육하기에 힘써야만 한다. 주님의 구원은 모든 열방을 품는다. 그러므로 선교함에 있어서 선교의 대상에 제외될 수 있는 연령층은 존재하지 않는다. 본 논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래도 몇몇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이 시대적 요청에 따라 노인 문제에 반응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모습으로 판단되어진다. 하지만 그 반응하는 모습들이 사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면 교회는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 사회의 수많은 공동체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넘어서 사람과 하나님과의 ...
지금까지 우리는 스스로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는 노인문제와 그 실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인문제의 핵심이 노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인한 것임을, 그래서 노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요청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노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란, 노인을 ‘노인(老늙을 노 人인)’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노인’(努힘쓸 노 人인),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따라서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애써하기에 노인은 하나님의 형상에 가장 가깝게 도달한 자로 그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아야만 한다. 또한 노인에 대한 신학적 해석과 노인신학의 재정립을 통해, 우리에게는 노인에 대한 새로운 의식 전환을 가져다주고, 노인에게는 고독과 절망의 삶 가운데 희망을 갖게 해줄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결국 노인은 결코 나약한 모습만을 가진 절망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지혜와 총명함을 가진 자로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줄 수 있으며, 미래에 대한 소망과 현재적 구원으로 희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그 희망이 노인의 삶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교육은 단지 노인의 개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교육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영적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교육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교육은 교회가 제시하는 성서의 이야기와 비전을 통해 노인이 완전한 성숙의 삶을 살아가도록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나 교회 안에서의 노인문제는 노인의 새로운 해석과 노인신학을 기반으로 교회가 교육함에 힘쓸 때 해결되리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 교회는 젊은이들의 부흥에만 열중하였기 때문에 아직까지 이러한 노인의 새로운 해석과 노인신학의 재정립이 확립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젊은이들의 욕구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였지만, 노인에 대한 관심은 물론 그들의 욕구와 교육에 대해서는 등한시하였다. 그 결과 교회는 점점 늘어만 가는 다수의 노인을 양육하기보다는 세상의 즐거움을 쫓아 교회 밖으로 나가는 소수의 젊은이들을 붙들고 교육하기에 열을 올렸다. 그래서 예배, 프로그램, 교회 건물 디자인 등은 모두 젊은이 위주로 바뀌어만 가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선교적인 사명을 이루려면, 반드시 노인에게 관심을 갖고 교육하기에 힘써야만 한다. 주님의 구원은 모든 열방을 품는다. 그러므로 선교함에 있어서 선교의 대상에 제외될 수 있는 연령층은 존재하지 않는다. 본 논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래도 몇몇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이 시대적 요청에 따라 노인 문제에 반응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모습으로 판단되어진다. 하지만 그 반응하는 모습들이 사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면 교회는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 사회의 수많은 공동체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넘어서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기 때문에, 모든 교회는 보다 노인에 대한 문제의 심각성을 절실히 깨닫고 노인신학에 입각한 노인 교육의 실천에 발 벗고 나서야만 한다. 사회와 마찬가지로 교회에서조차 노인이 소외되고 평가절하 되고 있다면, 교회는 발광하지 못하는 빛이요, 맛을 잃은 소금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성서의 가르침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약하고 병들고 어리석을지라도 노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지체다(롬 12:5). 만약 자신의 지체 중에 어느 것이 아프고 병들었다면 누구나 그 지체를 돌보고 치유하는 데에 힘을 기울일 것이다. 누구도 그 지체를 잘라 내거나 아픔을 가진 채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커서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8-39).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노인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깨닫고, 노인을 사랑으로 돌보며 교육하는 일에 힘을 기울일 때, 미래의 노인인 우리에게 소망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스스로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는 노인문제와 그 실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인문제의 핵심이 노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인한 것임을, 그래서 노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요청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노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란, 노인을 ‘노인(老늙을 노 人인)’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노인’(努힘쓸 노 人인),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따라서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애써하기에 노인은 하나님의 형상에 가장 가깝게 도달한 자로 그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아야만 한다. 또한 노인에 대한 신학적 해석과 노인신학의 재정립을 통해, 우리에게는 노인에 대한 새로운 의식 전환을 가져다주고, 노인에게는 고독과 절망의 삶 가운데 희망을 갖게 해줄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결국 노인은 결코 나약한 모습만을 가진 절망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지혜와 총명함을 가진 자로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줄 수 있으며, 미래에 대한 소망과 현재적 구원으로 희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그 희망이 노인의 삶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교육은 단지 노인의 개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교육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영적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교육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교육은 교회가 제시하는 성서의 이야기와 비전을 통해 노인이 완전한 성숙의 삶을 살아가도록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나 교회 안에서의 노인문제는 노인의 새로운 해석과 노인신학을 기반으로 교회가 교육함에 힘쓸 때 해결되리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 교회는 젊은이들의 부흥에만 열중하였기 때문에 아직까지 이러한 노인의 새로운 해석과 노인신학의 재정립이 확립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젊은이들의 욕구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였지만, 노인에 대한 관심은 물론 그들의 욕구와 교육에 대해서는 등한시하였다. 그 결과 교회는 점점 늘어만 가는 다수의 노인을 양육하기보다는 세상의 즐거움을 쫓아 교회 밖으로 나가는 소수의 젊은이들을 붙들고 교육하기에 열을 올렸다. 그래서 예배, 프로그램, 교회 건물 디자인 등은 모두 젊은이 위주로 바뀌어만 가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선교적인 사명을 이루려면, 반드시 노인에게 관심을 갖고 교육하기에 힘써야만 한다. 주님의 구원은 모든 열방을 품는다. 그러므로 선교함에 있어서 선교의 대상에 제외될 수 있는 연령층은 존재하지 않는다. 본 논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래도 몇몇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이 시대적 요청에 따라 노인 문제에 반응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모습으로 판단되어진다. 하지만 그 반응하는 모습들이 사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면 교회는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 사회의 수많은 공동체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넘어서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기 때문에, 모든 교회는 보다 노인에 대한 문제의 심각성을 절실히 깨닫고 노인신학에 입각한 노인 교육의 실천에 발 벗고 나서야만 한다. 사회와 마찬가지로 교회에서조차 노인이 소외되고 평가절하 되고 있다면, 교회는 발광하지 못하는 빛이요, 맛을 잃은 소금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성서의 가르침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약하고 병들고 어리석을지라도 노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지체다(롬 12:5). 만약 자신의 지체 중에 어느 것이 아프고 병들었다면 누구나 그 지체를 돌보고 치유하는 데에 힘을 기울일 것이다. 누구도 그 지체를 잘라 내거나 아픔을 가진 채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커서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8-39).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노인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깨닫고, 노인을 사랑으로 돌보며 교육하는 일에 힘을 기울일 때, 미래의 노인인 우리에게 소망이 있을 것이다.
※ AI-Helper는 부적절한 답변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