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초계문신제에 대해 고찰하였던 주요내용을 요약한 다음 이 제도의 한계점을 언급함으로써 맺음말에 갈음하려고 한다. 초계문신제는 37세 이하의 4품에서 9품까지의 당하관 문신을 선발하여 성인과 같은 인재양성을 교육목표로 삼았다. 교육내용으로 《대학》·《논어》·《맹자》·《중용》·《시전》·《서전》·《주역》을 공부하였고, 읽기 시험인 시강과 글짓기 시험인 시제로 시험 보았다. 시강은 위와 같은 순서대로 반복하여 글을 읽게 하였는데 글을 정확히 읽는 것보다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을 중요시하였으며 시험은 매달 과강으로 한 번 시행하였다. 시제는 친시와 과시를 매달 한 차례씩 거행하였고 고증을 얼마나 정확히 하였는가를 중요시 하였다. 그리고 사기를 북돋아 주는 방법으로 상벌제를 실시하였는데, 시강은 통·약·조·불로 나누어 ‘불’을 받은 자에게, 시제는 ‘말’을 받은 자에게 각각 벌을 내렸다. 3차례 연속 1등을 한 자에게는 관직에 따라 승진을 시켜주었고 강제성을 두어 결시한 문신들에게는 추궁하여 벌금을 부과하거나 관직을 강등시켰다. 교육제도는 얼마나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운영하는가에 따라 그 성과가 달라진다. 아무리 좋은 교육제도라도 운영하는 사람이 게으르거나 무관심하다면 교육대상자들은 그 제도의 틀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초계문신제는 당시 필요로 했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초계문신제는 정조 이전의 호당제와 동일한 선상에 있는 관리의 재교육제도였다. 호당제도 또한 관리들의 재교육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형식의 틀에 얽매이지 않았고 일방적인 통제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재양성의 목적을 이루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초계문신제는 시강과 시제를 규장각에서 매달 정기적으로 치렀고 또한 정조가 직접 초계문신들을 대면하고 문답을 주고받는 친림도 행하였다. 이렇게 학문에 뛰어나고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정조가 그 중심에 서있었기 때문에 초계문신들은 방심하지 않고 학문에 힘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초계문신제는 호당제의 부족한 면을 채워 규정으로 정하여 실행하였지만, 이 교육제도에는 다음과 같은 한계점이 있다. 먼저, 교육의 연속성에 한계가 있다. 정조 사후 정조만큼 학문에 열정을 두고 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능력 있는 군주가 없었다. 초계문신제는 정조대의 20년 동안에만 실시되었고 더 이상 연속되지 못하였다. 헌종이 두 번에 걸쳐 초계문신들을 선발하여 실시하려고 하였지만, 이미 세도정치가 강화되고 있었던 당시 상황과 그의 능력부족 때문에 교육이 제대로 시행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후대에 계속 실시되지 못하여 왕들에 따라서 초계문신제가 어떠한 흐름을 가졌는지 초계문신들이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해 나갔는지 그 변화양상을 알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둘째, 교육대상의 제한에 한계가 있다. 교육은 나이와 지위를 떠나 평생에 걸쳐 하는 것이다. 초계문신제는 37세 이하의 문산과 당하관으로 교육대상을 제한하였고 40세가 되면 교육을 면하게 하였다. 40세 이상의 문신의 교육도 중요하고 당상관의 고위직 관리의 교육도 중요하다. 하지만 당시 노론이라는 당파의 견제와 고위 관리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교육은 시도는 되었으나 1781년 경연이 있은 이후 더 이상 활성화 되지 못하였다. 셋째, 교육 자율성에 한계가 있다. 초계문신제는 군주인 정조와 초계문신들의 상호관계로 이루어진 즉, 교사와 학생간의 상호작용 교육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에서 벗어나 교육의 방향에 있어 좀 더 발전된 형태인 문신들 위주의 자기계발이나 ...
이제까지 초계문신제에 대해 고찰하였던 주요내용을 요약한 다음 이 제도의 한계점을 언급함으로써 맺음말에 갈음하려고 한다. 초계문신제는 37세 이하의 4품에서 9품까지의 당하관 문신을 선발하여 성인과 같은 인재양성을 교육목표로 삼았다. 교육내용으로 《대학》·《논어》·《맹자》·《중용》·《시전》·《서전》·《주역》을 공부하였고, 읽기 시험인 시강과 글짓기 시험인 시제로 시험 보았다. 시강은 위와 같은 순서대로 반복하여 글을 읽게 하였는데 글을 정확히 읽는 것보다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을 중요시하였으며 시험은 매달 과강으로 한 번 시행하였다. 시제는 친시와 과시를 매달 한 차례씩 거행하였고 고증을 얼마나 정확히 하였는가를 중요시 하였다. 그리고 사기를 북돋아 주는 방법으로 상벌제를 실시하였는데, 시강은 통·약·조·불로 나누어 ‘불’을 받은 자에게, 시제는 ‘말’을 받은 자에게 각각 벌을 내렸다. 3차례 연속 1등을 한 자에게는 관직에 따라 승진을 시켜주었고 강제성을 두어 결시한 문신들에게는 추궁하여 벌금을 부과하거나 관직을 강등시켰다. 교육제도는 얼마나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운영하는가에 따라 그 성과가 달라진다. 아무리 좋은 교육제도라도 운영하는 사람이 게으르거나 무관심하다면 교육대상자들은 그 제도의 틀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초계문신제는 당시 필요로 했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초계문신제는 정조 이전의 호당제와 동일한 선상에 있는 관리의 재교육제도였다. 호당제도 또한 관리들의 재교육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형식의 틀에 얽매이지 않았고 일방적인 통제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재양성의 목적을 이루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초계문신제는 시강과 시제를 규장각에서 매달 정기적으로 치렀고 또한 정조가 직접 초계문신들을 대면하고 문답을 주고받는 친림도 행하였다. 이렇게 학문에 뛰어나고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정조가 그 중심에 서있었기 때문에 초계문신들은 방심하지 않고 학문에 힘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초계문신제는 호당제의 부족한 면을 채워 규정으로 정하여 실행하였지만, 이 교육제도에는 다음과 같은 한계점이 있다. 먼저, 교육의 연속성에 한계가 있다. 정조 사후 정조만큼 학문에 열정을 두고 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능력 있는 군주가 없었다. 초계문신제는 정조대의 20년 동안에만 실시되었고 더 이상 연속되지 못하였다. 헌종이 두 번에 걸쳐 초계문신들을 선발하여 실시하려고 하였지만, 이미 세도정치가 강화되고 있었던 당시 상황과 그의 능력부족 때문에 교육이 제대로 시행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후대에 계속 실시되지 못하여 왕들에 따라서 초계문신제가 어떠한 흐름을 가졌는지 초계문신들이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해 나갔는지 그 변화양상을 알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둘째, 교육대상의 제한에 한계가 있다. 교육은 나이와 지위를 떠나 평생에 걸쳐 하는 것이다. 초계문신제는 37세 이하의 문산과 당하관으로 교육대상을 제한하였고 40세가 되면 교육을 면하게 하였다. 40세 이상의 문신의 교육도 중요하고 당상관의 고위직 관리의 교육도 중요하다. 하지만 당시 노론이라는 당파의 견제와 고위 관리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교육은 시도는 되었으나 1781년 경연이 있은 이후 더 이상 활성화 되지 못하였다. 셋째, 교육 자율성에 한계가 있다. 초계문신제는 군주인 정조와 초계문신들의 상호관계로 이루어진 즉, 교사와 학생간의 상호작용 교육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에서 벗어나 교육의 방향에 있어 좀 더 발전된 형태인 문신들 위주의 자기계발이나 자기 주도적 학습이 이루어지는 학생 중심의 교육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이것은 정조이후 초계문신제의 발달을 더 이상 가져오지 못하고 정체하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본 논문은 초계문신제의 기본내용을 토대로 교육적 의의를 고찰하는데 그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규장각지》와 《내각일력》 등의 다양한 자료를 참고하지 못한 아쉬움을 갖고 있다. 앞으로 정조와 규장각 그리고 초계문신들과 관련된 다양한 문헌을 통해 초계문신제에 대한 연구가 더 깊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 초계문신제에 대해 고찰하였던 주요내용을 요약한 다음 이 제도의 한계점을 언급함으로써 맺음말에 갈음하려고 한다. 초계문신제는 37세 이하의 4품에서 9품까지의 당하관 문신을 선발하여 성인과 같은 인재양성을 교육목표로 삼았다. 교육내용으로 《대학》·《논어》·《맹자》·《중용》·《시전》·《서전》·《주역》을 공부하였고, 읽기 시험인 시강과 글짓기 시험인 시제로 시험 보았다. 시강은 위와 같은 순서대로 반복하여 글을 읽게 하였는데 글을 정확히 읽는 것보다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을 중요시하였으며 시험은 매달 과강으로 한 번 시행하였다. 시제는 친시와 과시를 매달 한 차례씩 거행하였고 고증을 얼마나 정확히 하였는가를 중요시 하였다. 그리고 사기를 북돋아 주는 방법으로 상벌제를 실시하였는데, 시강은 통·약·조·불로 나누어 ‘불’을 받은 자에게, 시제는 ‘말’을 받은 자에게 각각 벌을 내렸다. 3차례 연속 1등을 한 자에게는 관직에 따라 승진을 시켜주었고 강제성을 두어 결시한 문신들에게는 추궁하여 벌금을 부과하거나 관직을 강등시켰다. 교육제도는 얼마나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운영하는가에 따라 그 성과가 달라진다. 아무리 좋은 교육제도라도 운영하는 사람이 게으르거나 무관심하다면 교육대상자들은 그 제도의 틀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초계문신제는 당시 필요로 했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초계문신제는 정조 이전의 호당제와 동일한 선상에 있는 관리의 재교육제도였다. 호당제도 또한 관리들의 재교육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형식의 틀에 얽매이지 않았고 일방적인 통제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재양성의 목적을 이루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초계문신제는 시강과 시제를 규장각에서 매달 정기적으로 치렀고 또한 정조가 직접 초계문신들을 대면하고 문답을 주고받는 친림도 행하였다. 이렇게 학문에 뛰어나고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정조가 그 중심에 서있었기 때문에 초계문신들은 방심하지 않고 학문에 힘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초계문신제는 호당제의 부족한 면을 채워 규정으로 정하여 실행하였지만, 이 교육제도에는 다음과 같은 한계점이 있다. 먼저, 교육의 연속성에 한계가 있다. 정조 사후 정조만큼 학문에 열정을 두고 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능력 있는 군주가 없었다. 초계문신제는 정조대의 20년 동안에만 실시되었고 더 이상 연속되지 못하였다. 헌종이 두 번에 걸쳐 초계문신들을 선발하여 실시하려고 하였지만, 이미 세도정치가 강화되고 있었던 당시 상황과 그의 능력부족 때문에 교육이 제대로 시행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후대에 계속 실시되지 못하여 왕들에 따라서 초계문신제가 어떠한 흐름을 가졌는지 초계문신들이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해 나갔는지 그 변화양상을 알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둘째, 교육대상의 제한에 한계가 있다. 교육은 나이와 지위를 떠나 평생에 걸쳐 하는 것이다. 초계문신제는 37세 이하의 문산과 당하관으로 교육대상을 제한하였고 40세가 되면 교육을 면하게 하였다. 40세 이상의 문신의 교육도 중요하고 당상관의 고위직 관리의 교육도 중요하다. 하지만 당시 노론이라는 당파의 견제와 고위 관리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교육은 시도는 되었으나 1781년 경연이 있은 이후 더 이상 활성화 되지 못하였다. 셋째, 교육 자율성에 한계가 있다. 초계문신제는 군주인 정조와 초계문신들의 상호관계로 이루어진 즉, 교사와 학생간의 상호작용 교육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에서 벗어나 교육의 방향에 있어 좀 더 발전된 형태인 문신들 위주의 자기계발이나 자기 주도적 학습이 이루어지는 학생 중심의 교육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이것은 정조이후 초계문신제의 발달을 더 이상 가져오지 못하고 정체하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본 논문은 초계문신제의 기본내용을 토대로 교육적 의의를 고찰하는데 그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규장각지》와 《내각일력》 등의 다양한 자료를 참고하지 못한 아쉬움을 갖고 있다. 앞으로 정조와 규장각 그리고 초계문신들과 관련된 다양한 문헌을 통해 초계문신제에 대한 연구가 더 깊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Chogyemoonsin was established by King Jeongjo in order to re-educate Moonsin(文臣)s under 37 year-old age. The selected Moonsins were educated the process of education, the way of education, reward and punishment. In the process of education, they studied 《Daehak(大學)》·《Noneo(論語)》·《Maengja(孟子)》...
Chogyemoonsin was established by King Jeongjo in order to re-educate Moonsin(文臣)s under 37 year-old age. The selected Moonsins were educated the process of education, the way of education, reward and punishment. In the process of education, they studied 《Daehak(大學)》·《Noneo(論語)》·《Maengja(孟子)》·《Jung-yong(中庸)》·《Sijeon(詩傳)》·《Seojeon(書傳)》·《Juyeok(周易)》 in order. They are tested reading called Sigang(試講) and writing called Sije(試製) once a month. Sigang is scored not only correct reading but understanding the meaning of a story. In order to encourage the members, there are promotion for the member who got first grade 3 times continuously. On the other hand, degradation and fine for who miss this duty test. This is the main contents of Chogyemoonsin. In the way of education were Sigang when they read and understood writings, Sije when they wrote articles, and Chinlim(親臨) when King Jeongjo took part in lectures directly. All of them were regularly carried out monthly. In this way, the civil ministers took a test and then they were divided into classes. So they got reward or punishment in the shape of a promotion and a fine. The result of education system depends on continued attention. Moonsins will wander away from the education system if educator is lazy or indifference even it's so good. The system of Chogyemoonsin carried out in this way accomplished a basic purpose of raising competent people and became a foundational change of politics and culture from the late 18th to the early 19th century of the Choseon Dynasty. Chogyemoonsin is re-education system for officials which is similar to former King Jeongjo of Hodang(湖當). Hodang is without formality and unilateral control even it's for re-education of officials. Thanks to the system of Chogyemoonsin, they thought widely through Saseosamgyeong(四書三經), accepted new ideology and different classes.
Chogyemoonsin was established by King Jeongjo in order to re-educate Moonsin(文臣)s under 37 year-old age. The selected Moonsins were educated the process of education, the way of education, reward and punishment. In the process of education, they studied 《Daehak(大學)》·《Noneo(論語)》·《Maengja(孟子)》·《Jung-yong(中庸)》·《Sijeon(詩傳)》·《Seojeon(書傳)》·《Juyeok(周易)》 in order. They are tested reading called Sigang(試講) and writing called Sije(試製) once a month. Sigang is scored not only correct reading but understanding the meaning of a story. In order to encourage the members, there are promotion for the member who got first grade 3 times continuously. On the other hand, degradation and fine for who miss this duty test. This is the main contents of Chogyemoonsin. In the way of education were Sigang when they read and understood writings, Sije when they wrote articles, and Chinlim(親臨) when King Jeongjo took part in lectures directly. All of them were regularly carried out monthly. In this way, the civil ministers took a test and then they were divided into classes. So they got reward or punishment in the shape of a promotion and a fine. The result of education system depends on continued attention. Moonsins will wander away from the education system if educator is lazy or indifference even it's so good. The system of Chogyemoonsin carried out in this way accomplished a basic purpose of raising competent people and became a foundational change of politics and culture from the late 18th to the early 19th century of the Choseon Dynasty. Chogyemoonsin is re-education system for officials which is similar to former King Jeongjo of Hodang(湖當). Hodang is without formality and unilateral control even it's for re-education of officials. Thanks to the system of Chogyemoonsin, they thought widely through Saseosamgyeong(四書三經), accepted new ideology and different clas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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