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 행복론에 대한 연구로서 욕망 추구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추구를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며 더 자극적이고 더 큰 쾌락을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과도한 쾌락 추구는 오히려 불쾌와 불안을 가져오고, 쾌락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쾌락과 멀어지는 쾌락의 역설을 가져온다. 이러한 쾌락 범람의 시대에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쾌락과 행복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점에서 고대의 쾌락주의자인 에피쿠로스는 쾌락 범람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행복추구에 대하여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세속적인 의미의 물질적인 쾌락 추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된 자기 통제의 쾌락 추구를 주장한다. 에피쿠로스는 육체적 쾌락보다는 정신적 쾌락을, 쾌락의 적극적 추구보다는 고통과 불안의 부재를, 최대한의 욕구만족 보다는 소박한 자족을 더 강조하였으며, 이성적이고 고상하고 정의로운 삶에서 쾌락을 추구하였다. 무한히 커지는 욕구를 조절하고,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소박한 자족의 삶에 만족하면서, 이 세상에서 한 발짝 물러나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고, 명료한 이성적 사고로써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고 죽음과 신에 대해 올바로 인식함으로써 우주의 변화나 죽음과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것, 그래서 육체에 고통이 없고 영혼에 불안이 없는 평정상태에 도달하는 것, 이것이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적 이상이었다. 에피쿠로스의 정신적․소극적․도덕적․개인주의적 쾌락주의는 고대의 쾌락주의 행복론의 완결편으로서 오늘날까지도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도 은둔을 강조하는 지나친 개인주의적 측면에서 한계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쾌락을 최고선과 동일시 한 점에서는 비판의 여지를 안고 있다. 쾌락은 좋은 것이지만, 유일하게 좋은 것은 아니며, 더욱이 우리가 진정으로 근본적으로 바라고 원하는 궁극 목적이나 최고선은 아니다. 에피쿠로스 쾌락주의는 현대의 행복심리학자들이 말하는 행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에피쿠로스가 내세우는 고통의 부재로서 쾌락이나 마음의 평정과 자기만족은 자기만족으로서의 행복을 강조하는 현대의 주관주의적 행복심리학과 상통한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행복론은 행복을 쾌락추구와 자기만족에 한정할 뿐,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쾌락과 자기만족을 넘어서 자아실현과 ...
이 논문은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 행복론에 대한 연구로서 욕망 추구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추구를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며 더 자극적이고 더 큰 쾌락을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과도한 쾌락 추구는 오히려 불쾌와 불안을 가져오고, 쾌락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쾌락과 멀어지는 쾌락의 역설을 가져온다. 이러한 쾌락 범람의 시대에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쾌락과 행복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점에서 고대의 쾌락주의자인 에피쿠로스는 쾌락 범람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행복추구에 대하여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세속적인 의미의 물질적인 쾌락 추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된 자기 통제의 쾌락 추구를 주장한다. 에피쿠로스는 육체적 쾌락보다는 정신적 쾌락을, 쾌락의 적극적 추구보다는 고통과 불안의 부재를, 최대한의 욕구만족 보다는 소박한 자족을 더 강조하였으며, 이성적이고 고상하고 정의로운 삶에서 쾌락을 추구하였다. 무한히 커지는 욕구를 조절하고,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소박한 자족의 삶에 만족하면서, 이 세상에서 한 발짝 물러나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고, 명료한 이성적 사고로써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고 죽음과 신에 대해 올바로 인식함으로써 우주의 변화나 죽음과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것, 그래서 육체에 고통이 없고 영혼에 불안이 없는 평정상태에 도달하는 것, 이것이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적 이상이었다. 에피쿠로스의 정신적․소극적․도덕적․개인주의적 쾌락주의는 고대의 쾌락주의 행복론의 완결편으로서 오늘날까지도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도 은둔을 강조하는 지나친 개인주의적 측면에서 한계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쾌락을 최고선과 동일시 한 점에서는 비판의 여지를 안고 있다. 쾌락은 좋은 것이지만, 유일하게 좋은 것은 아니며, 더욱이 우리가 진정으로 근본적으로 바라고 원하는 궁극 목적이나 최고선은 아니다. 에피쿠로스 쾌락주의는 현대의 행복심리학자들이 말하는 행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에피쿠로스가 내세우는 고통의 부재로서 쾌락이나 마음의 평정과 자기만족은 자기만족으로서의 행복을 강조하는 현대의 주관주의적 행복심리학과 상통한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행복론은 행복을 쾌락추구와 자기만족에 한정할 뿐,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쾌락과 자기만족을 넘어서 자아실현과 삶의 의미를 추구하여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이점에서 주관주의적 행복심리학과 마찬가지로 객관주의적 행복심리학의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 논문은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 행복론에 대한 연구로서 욕망 추구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추구를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며 더 자극적이고 더 큰 쾌락을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과도한 쾌락 추구는 오히려 불쾌와 불안을 가져오고, 쾌락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쾌락과 멀어지는 쾌락의 역설을 가져온다. 이러한 쾌락 범람의 시대에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쾌락과 행복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점에서 고대의 쾌락주의자인 에피쿠로스는 쾌락 범람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행복추구에 대하여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세속적인 의미의 물질적인 쾌락 추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된 자기 통제의 쾌락 추구를 주장한다. 에피쿠로스는 육체적 쾌락보다는 정신적 쾌락을, 쾌락의 적극적 추구보다는 고통과 불안의 부재를, 최대한의 욕구만족 보다는 소박한 자족을 더 강조하였으며, 이성적이고 고상하고 정의로운 삶에서 쾌락을 추구하였다. 무한히 커지는 욕구를 조절하고,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소박한 자족의 삶에 만족하면서, 이 세상에서 한 발짝 물러나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고, 명료한 이성적 사고로써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고 죽음과 신에 대해 올바로 인식함으로써 우주의 변화나 죽음과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것, 그래서 육체에 고통이 없고 영혼에 불안이 없는 평정상태에 도달하는 것, 이것이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적 이상이었다. 에피쿠로스의 정신적․소극적․도덕적․개인주의적 쾌락주의는 고대의 쾌락주의 행복론의 완결편으로서 오늘날까지도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도 은둔을 강조하는 지나친 개인주의적 측면에서 한계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쾌락을 최고선과 동일시 한 점에서는 비판의 여지를 안고 있다. 쾌락은 좋은 것이지만, 유일하게 좋은 것은 아니며, 더욱이 우리가 진정으로 근본적으로 바라고 원하는 궁극 목적이나 최고선은 아니다. 에피쿠로스 쾌락주의는 현대의 행복심리학자들이 말하는 행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에피쿠로스가 내세우는 고통의 부재로서 쾌락이나 마음의 평정과 자기만족은 자기만족으로서의 행복을 강조하는 현대의 주관주의적 행복심리학과 상통한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행복론은 행복을 쾌락추구와 자기만족에 한정할 뿐,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쾌락과 자기만족을 넘어서 자아실현과 삶의 의미를 추구하여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이점에서 주관주의적 행복심리학과 마찬가지로 객관주의적 행복심리학의 비판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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