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처음 ‘방령’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는 깃의 모[角]가 잘 잡혀서 반듯한 형상을 유지함을 의미하였고, 이에 유학자들의 대표적인 차림새를 표현하는 말로 쓰여 ‘방령구보(方領矩步)’로 표현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 여러 사회적 요인에 의해 단어의 의미가 변화하거나 한 단어에 여러 의미를 포괄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방령’도 이렇게 후대로 가면서 의미가 다양해지는 한 예가 된다. 본고는 중국의 고대에서부터 우리나라의 조선시대까지 문헌, 유물, 그림 등에 나타난 방령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전체적으로...
중국에서 처음 ‘방령’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는 깃의 모[角]가 잘 잡혀서 반듯한 형상을 유지함을 의미하였고, 이에 유학자들의 대표적인 차림새를 표현하는 말로 쓰여 ‘방령구보(方領矩步)’로 표현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 여러 사회적 요인에 의해 단어의 의미가 변화하거나 한 단어에 여러 의미를 포괄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방령’도 이렇게 후대로 가면서 의미가 다양해지는 한 예가 된다. 본고는 중국의 고대에서부터 우리나라의 조선시대까지 문헌, 유물, 그림 등에 나타난 방령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전체적으로 정리하였다. 또 이 바탕 위에 조선시대의 출토 유물을 중심으로 방령 자체와, 방령이 달린 옷의 형태를 분석하였다. 고찰 대상 유물은 총36점(방령 심의 2점 제외)이었고, 이 중 출토유물은 34점이고 전세유물은 2점이었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초기 중국 문헌에서 ‘방령’이 깃을 직령(直領)으로 단 후 앞길을 교차해서 입으면[交衽: 交領] 깃의 뒷목부분이 자연스럽게 모나게[方] 되는 것을 의미함을 확인하였다. 둘째, 조선시대 문헌에서 방령의 의미와 형태가 다양해지고, 시기별로 특징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방령은 중국에서의 초기 의미와 달리 고의로 모난 형상을 만들어 다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유학자들이 입는 심의에서는 17세기에 처음 이런 형태가 제기되었고, 18~19세기를 거치면서 재단법과 형태가 다양해졌다. 또 조선전기에서 후기로 갈수록 다양한 옷에서 방령이 사용되었다. 셋째, 중국 출토유물에서는 원대(元代)와 명대(明代)의 방령이 확인되었다. 원대의 방령은 철릭이므로 남자가 착용한 것임을 알 수 있었고, 명대의 방령은 여자옷에서 확인되었다. 넷째, 조선시대 방령 유물을 통해 형태, 바느질법, 피륙, 무늬를 상세히 고찰하였다. 방령은 다양한 형태의 옷에서 확인되어, 문헌의 기록과 일치하였다. 유물은 대부분 남자 분묘에서 발굴되었다. 다섯째, 유물 3점(방령의, 방령포, 방령액주름)을 복제하여, 형태와 바느질법을 상세히 재현하였다. 이 중 경북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이옥형(추정)의 방령액주름은 초기 보고서에 간단히 소개된 이후 처음으로 세부형태가 제시된 경우이다.
중국에서 처음 ‘방령’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는 깃의 모[角]가 잘 잡혀서 반듯한 형상을 유지함을 의미하였고, 이에 유학자들의 대표적인 차림새를 표현하는 말로 쓰여 ‘방령구보(方領矩步)’로 표현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 여러 사회적 요인에 의해 단어의 의미가 변화하거나 한 단어에 여러 의미를 포괄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방령’도 이렇게 후대로 가면서 의미가 다양해지는 한 예가 된다. 본고는 중국의 고대에서부터 우리나라의 조선시대까지 문헌, 유물, 그림 등에 나타난 방령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전체적으로 정리하였다. 또 이 바탕 위에 조선시대의 출토 유물을 중심으로 방령 자체와, 방령이 달린 옷의 형태를 분석하였다. 고찰 대상 유물은 총36점(방령 심의 2점 제외)이었고, 이 중 출토유물은 34점이고 전세유물은 2점이었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초기 중국 문헌에서 ‘방령’이 깃을 직령(直領)으로 단 후 앞길을 교차해서 입으면[交衽: 交領] 깃의 뒷목부분이 자연스럽게 모나게[方] 되는 것을 의미함을 확인하였다. 둘째, 조선시대 문헌에서 방령의 의미와 형태가 다양해지고, 시기별로 특징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방령은 중국에서의 초기 의미와 달리 고의로 모난 형상을 만들어 다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유학자들이 입는 심의에서는 17세기에 처음 이런 형태가 제기되었고, 18~19세기를 거치면서 재단법과 형태가 다양해졌다. 또 조선전기에서 후기로 갈수록 다양한 옷에서 방령이 사용되었다. 셋째, 중국 출토유물에서는 원대(元代)와 명대(明代)의 방령이 확인되었다. 원대의 방령은 철릭이므로 남자가 착용한 것임을 알 수 있었고, 명대의 방령은 여자옷에서 확인되었다. 넷째, 조선시대 방령 유물을 통해 형태, 바느질법, 피륙, 무늬를 상세히 고찰하였다. 방령은 다양한 형태의 옷에서 확인되어, 문헌의 기록과 일치하였다. 유물은 대부분 남자 분묘에서 발굴되었다. 다섯째, 유물 3점(방령의, 방령포, 방령액주름)을 복제하여, 형태와 바느질법을 상세히 재현하였다. 이 중 경북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이옥형(추정)의 방령액주름은 초기 보고서에 간단히 소개된 이후 처음으로 세부형태가 제시된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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