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수혈주거지의 평면형태는 2~3가지 유형이 중복분포 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정리하면 방형계와 원형계 부정형 주거지 모두가 조사된 유적, 방형계 주거지가 조사된 유적, 원형계와 부정형 주거지가 나타나는 유적으로 구분된다. 방형계의 주거지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동일시기의 유적에서 서로 다른 2~3가지 유형의 주거지가 같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주거지의 평면형태 별로 선후관계가 나타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내부시설로는 부뚜막시설과 구들시설이 있으며 이들 시설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주거지 내부에서 확인된다. 첫 번째는 주거지의 내부에서 구들시설이 확인되는 유형, 두 번째는 呂 혹은 日자형의 평면형태를 가지며 연도 부 및 고래시설이 있는 공간과 주생활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유형 세 번째는 주거지의 내부에 부뚜막시설만이 확인되는 유형으로 구분된다. 두 번째 유형은 평면형태 呂, 혹은 日자형인 주거지로 구들이 시설된 상면과 아궁이로 연결된 하 면으로 주거지가 이등분되어 있다. 두 번째 유형의 주거지는 첫 번째와 세 번째 유형과 다르게 주거지의 내면 혹은 외면에서 주혈이 확인되어 있지 않고 있다. 이것은 화성 남양 동 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따라서 고래가 시설된 상면에 할석을 깔고 그 위에 별도로 흙으로 시설을 하여 주거공간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대상으로 삼은 유적의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에서 부뚜막시설이 확인되는 주거지는 127동이며Ⅰ형식은 10.4%, Ⅱ형식은 43.2% Ⅲ형식이 46.4%로 ⅢA형식이 22.4%, ⅢB형식이 24%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Ⅱ형식의 부뚜막시설이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Ⅱ형식과 Ⅲ형식의 붓 돌 간의 간격이 20~30㎝로 매우 좁아 취사용기를 올려 놓지 못하므로 실제 취사행위가 이루어졌기 보다는 난방 및 조명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 한 것이라고 단정짓고 있다. 하지만 Ⅱ형식의 부뚜막시설의 경우 Ⅱ형식의 봇돌간의 간격을 계측한 <도면 6>의 ...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의 평면형태는 2~3가지 유형이 중복분포 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정리하면 방형계와 원형계 부정형 주거지 모두가 조사된 유적, 방형계 주거지가 조사된 유적, 원형계와 부정형 주거지가 나타나는 유적으로 구분된다. 방형계의 주거지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동일시기의 유적에서 서로 다른 2~3가지 유형의 주거지가 같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주거지의 평면형태 별로 선후관계가 나타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내부시설로는 부뚜막시설과 구들시설이 있으며 이들 시설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주거지 내부에서 확인된다. 첫 번째는 주거지의 내부에서 구들시설이 확인되는 유형, 두 번째는 呂 혹은 日자형의 평면형태를 가지며 연도 부 및 고래시설이 있는 공간과 주생활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유형 세 번째는 주거지의 내부에 부뚜막시설만이 확인되는 유형으로 구분된다. 두 번째 유형은 평면형태 呂, 혹은 日자형인 주거지로 구들이 시설된 상면과 아궁이로 연결된 하 면으로 주거지가 이등분되어 있다. 두 번째 유형의 주거지는 첫 번째와 세 번째 유형과 다르게 주거지의 내면 혹은 외면에서 주혈이 확인되어 있지 않고 있다. 이것은 화성 남양 동 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따라서 고래가 시설된 상면에 할석을 깔고 그 위에 별도로 흙으로 시설을 하여 주거공간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대상으로 삼은 유적의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에서 부뚜막시설이 확인되는 주거지는 127동이며Ⅰ형식은 10.4%, Ⅱ형식은 43.2% Ⅲ형식이 46.4%로 ⅢA형식이 22.4%, ⅢB형식이 24%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Ⅱ형식의 부뚜막시설이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Ⅱ형식과 Ⅲ형식의 붓 돌 간의 간격이 20~30㎝로 매우 좁아 취사용기를 올려 놓지 못하므로 실제 취사행위가 이루어졌기 보다는 난방 및 조명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 한 것이라고 단정짓고 있다. 하지만 Ⅱ형식의 부뚜막시설의 경우 Ⅱ형식의 봇돌간의 간격을 계측한 <도면 6>의 히스토그램에서 볼 수 있듯이 봇돌과 봇돌 간의 거리가 40㎝이상으로 Ⅲ형식보다. 넓게 조성되어 있다. 또 최근 용인 구갈리유적 15호 주거지에서 부뚜막시설의 아궁이부에서 소결된 흔적이 있는 파수부동이가 확인되었다. 파수부동이의 겉면에는 소결된 흙이 붙어 있었는데 이것은 파수부동이를 고정시키기 위해 덧바른 것으로 추정된다. 수원 영통동 뒷골유적 2호 주거지에서 아궁이부 주위에 철제이 1점이 확인되었고 주거지 내부에서 탄화된 보리가 주거지 전면에 깔려 있는 양상이 확인되었다. 또 철제솥의 내부에서 탄화된 곡물이 확인된 바 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기존의 연구의 결과와 다르게 Ⅱ형식의 부뚜막시설을 가진 주거지에서 실제로 취사행위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뚜막시설이 주거지 북벽에 많이 위치하는 것은 겨울철의 북풍을 의식한 배치라고 보는 견해가 있으며 이는 주거지가 위치한 환경에 의한 영향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주거지의 성격에 관한 기존의 연구에서는 아래와 같은 문헌 기록을 근거로 화전일 일구던 가난한 빈민층의 주거지라고 주장하였다. “이 지방에서는 이른바 양반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가난하여 머슴을 하나도 두지 못하며 따라서 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 일도 몸소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을 兼奴上典 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사는 집도 돼지우리나 진배없다. 가운데 기둥을 하나 세우고 그 기둥에 의지하여 동그랗게 돌아가며 서까래를 놓고 그 위에 풀을 덮어 만든 것이다.” 화전이 15세기에서부터 16세기에 성행하는 것은 조선시대 주거지의 16세기의 갑작스러운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의 증가를 설명할 수 있는 자료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근거가 그 당시의 유구 수에 불과하므로 조금의 무리가 있는 주장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의 경우 다음의 사실이 주목된다. 첫째 주거지를 장기적인 거주보다는 단기적인 거주를 염두에 두고 축도하였다는 점, 둘째 이 시기 일반 거주입지인 평지보다는 사람이 거주하기 힘든 구릉 사면부에 조성하였다는 점, 출토유물 중 생산도구의 비중이 생활도구에 비해 적고 출토량이 빈약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백자의 출토량이다.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를 사용한 계층이 극빈층이라면 백자 혹은 청자가 주거지 내에서 확인되는 사실에는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는 전란 혹은 나라의 가혹한 役을 피하기 위한 유민의 임시거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7세기 이후 일반화된 삼년상의 풍습을 위한 묘막지로서 의 역할을 담당한 것도 볼 수 있겠다.The pit dwellings in Joseon period were frequent in a case of being additionally investigated about 1∼2 units while surveying relics in other period. Accordingly, it has been alienated relatively compared to other historical relics. However, owing to a rise in the recently large-scale excavation investigation, many materials were cumulated. Thus, even a case is confirmed that the pit dwellings are surveyed to be formed cluster recently. Based on a rise in these materials, it reanalyzed the pit dwellings in Joseon period with escaping from a conventional research. It analyzed character of pit dwellings based on a location state, plane form, interior facilities, and excavated relics targeting 135 units available for classification among pit dwellings in Joseon period. Given seeing the plane form in dwelling, a square form can be known to form mainstream with 51% in square-system dwelling, 41% in round-system dwelling, and 8% in free type. However, diverse forms of dwellings in this way are being confirmed simultaneously within the same relics. The interior facilities are confirmed the heating & cooking arrangements and the drainage facilities. The form of possessing the largest weight among the heating & cooking arrangements is a form that allowed chimney to be projected to the outside of dwelling in the form of semicircle or long oval while allowing furnace part to be vertical digging style or making it ‘ㅠ ’ form by using stone. The excavated relics are formed mainly by white porcelain.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의 평면형태는 2~3가지 유형이 중복분포 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정리하면 방형계와 원형계 부정형 주거지 모두가 조사된 유적, 방형계 주거지가 조사된 유적, 원형계와 부정형 주거지가 나타나는 유적으로 구분된다. 방형계의 주거지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동일시기의 유적에서 서로 다른 2~3가지 유형의 주거지가 같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주거지의 평면형태 별로 선후관계가 나타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내부시설로는 부뚜막시설과 구들시설이 있으며 이들 시설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주거지 내부에서 확인된다. 첫 번째는 주거지의 내부에서 구들시설이 확인되는 유형, 두 번째는 呂 혹은 日자형의 평면형태를 가지며 연도 부 및 고래시설이 있는 공간과 주생활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유형 세 번째는 주거지의 내부에 부뚜막시설만이 확인되는 유형으로 구분된다. 두 번째 유형은 평면형태 呂, 혹은 日자형인 주거지로 구들이 시설된 상면과 아궁이로 연결된 하 면으로 주거지가 이등분되어 있다. 두 번째 유형의 주거지는 첫 번째와 세 번째 유형과 다르게 주거지의 내면 혹은 외면에서 주혈이 확인되어 있지 않고 있다. 이것은 화성 남양 동 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따라서 고래가 시설된 상면에 할석을 깔고 그 위에 별도로 흙으로 시설을 하여 주거공간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대상으로 삼은 유적의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에서 부뚜막시설이 확인되는 주거지는 127동이며Ⅰ형식은 10.4%, Ⅱ형식은 43.2% Ⅲ형식이 46.4%로 ⅢA형식이 22.4%, ⅢB형식이 24%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Ⅱ형식의 부뚜막시설이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Ⅱ형식과 Ⅲ형식의 붓 돌 간의 간격이 20~30㎝로 매우 좁아 취사용기를 올려 놓지 못하므로 실제 취사행위가 이루어졌기 보다는 난방 및 조명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 한 것이라고 단정짓고 있다. 하지만 Ⅱ형식의 부뚜막시설의 경우 Ⅱ형식의 봇돌간의 간격을 계측한 <도면 6>의 히스토그램에서 볼 수 있듯이 봇돌과 봇돌 간의 거리가 40㎝이상으로 Ⅲ형식보다. 넓게 조성되어 있다. 또 최근 용인 구갈리유적 15호 주거지에서 부뚜막시설의 아궁이부에서 소결된 흔적이 있는 파수부동이가 확인되었다. 파수부동이의 겉면에는 소결된 흙이 붙어 있었는데 이것은 파수부동이를 고정시키기 위해 덧바른 것으로 추정된다. 수원 영통동 뒷골유적 2호 주거지에서 아궁이부 주위에 철제이 1점이 확인되었고 주거지 내부에서 탄화된 보리가 주거지 전면에 깔려 있는 양상이 확인되었다. 또 철제솥의 내부에서 탄화된 곡물이 확인된 바 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기존의 연구의 결과와 다르게 Ⅱ형식의 부뚜막시설을 가진 주거지에서 실제로 취사행위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뚜막시설이 주거지 북벽에 많이 위치하는 것은 겨울철의 북풍을 의식한 배치라고 보는 견해가 있으며 이는 주거지가 위치한 환경에 의한 영향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주거지의 성격에 관한 기존의 연구에서는 아래와 같은 문헌 기록을 근거로 화전일 일구던 가난한 빈민층의 주거지라고 주장하였다. “이 지방에서는 이른바 양반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가난하여 머슴을 하나도 두지 못하며 따라서 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 일도 몸소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을 兼奴上典 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사는 집도 돼지우리나 진배없다. 가운데 기둥을 하나 세우고 그 기둥에 의지하여 동그랗게 돌아가며 서까래를 놓고 그 위에 풀을 덮어 만든 것이다.” 화전이 15세기에서부터 16세기에 성행하는 것은 조선시대 주거지의 16세기의 갑작스러운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의 증가를 설명할 수 있는 자료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근거가 그 당시의 유구 수에 불과하므로 조금의 무리가 있는 주장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조선시대 수혈주거지의 경우 다음의 사실이 주목된다. 첫째 주거지를 장기적인 거주보다는 단기적인 거주를 염두에 두고 축도하였다는 점, 둘째 이 시기 일반 거주입지인 평지보다는 사람이 거주하기 힘든 구릉 사면부에 조성하였다는 점, 출토유물 중 생산도구의 비중이 생활도구에 비해 적고 출토량이 빈약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백자의 출토량이다.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를 사용한 계층이 극빈층이라면 백자 혹은 청자가 주거지 내에서 확인되는 사실에는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조선시대 수혈주거지는 전란 혹은 나라의 가혹한 役을 피하기 위한 유민의 임시거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7세기 이후 일반화된 삼년상의 풍습을 위한 묘막지로서 의 역할을 담당한 것도 볼 수 있겠다.The pit dwellings in Joseon period were frequent in a case of being additionally investigated about 1∼2 units while surveying relics in other period. Accordingly, it has been alienated relatively compared to other historical relics. However, owing to a rise in the recently large-scale excavation investigation, many materials were cumulated. Thus, even a case is confirmed that the pit dwellings are surveyed to be formed cluster recently. Based on a rise in these materials, it reanalyzed the pit dwellings in Joseon period with escaping from a conventional research. It analyzed character of pit dwellings based on a location state, plane form, interior facilities, and excavated relics targeting 135 units available for classification among pit dwellings in Joseon period. Given seeing the plane form in dwelling, a square form can be known to form mainstream with 51% in square-system dwelling, 41% in round-system dwelling, and 8% in free type. However, diverse forms of dwellings in this way are being confirmed simultaneously within the same relics. The interior facilities are confirmed the heating & cooking arrangements and the drainage facilities. The form of possessing the largest weight among the heating & cooking arrangements is a form that allowed chimney to be projected to the outside of dwelling in the form of semicircle or long oval while allowing furnace part to be vertical digging style or making it ‘ㅠ ’ form by using stone. The excavated relics are formed mainly by white porcel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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