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총 20건의「가례도감의궤」의 기록과 반차도에 나타난 궁녀 복식을 고찰하여 조선시대 궁녀 복식의 종류와 형태 및 직급에 따른 궁녀복식의 변천과정을 살펴보고 분석ㆍ종합하여 그 특징과 시대적인 흐름을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이를 통해 궁녀복식 연구가 활성화되고 제시한 의차(衣次)를 바탕으로 한 후속 연구가 이어질 때 정확한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 연구의 의의를 두고 있다.
「숭유척불(崇儒斥佛)」정책을 국가 통치의 기본이념으로 예를 중요시하였던 조선시대는 가례(嘉禮), 국장(國葬) 등 수많은 의례(儀禮)뿐만 아니라 진연(進宴) 등과 같은 궁중 행사까지 존재하였고 모든 행사의 내용을 의궤로 제작하여 보관하였다. 다른 복식 고증자료에 비해 양적, 질적으로 잘 보존된 의궤를 통해 의례 및 행사시 관료의 복식부터 의례의 과정 등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파악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의궤를 통해서 수많은 의례와 행사 뒤에 이를 준비하고 수행해야 했던 궁녀들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례도감의궤」에 나타난 궁녀의 복식 종류는 표의(表衣)인 할의와 장삼, 상의인 저고리와 삼아, 하의인 치마와 말군, 두식인 너울과 이엄 그리고 신 등이 나타났다. 궁녀의 복식은 의궤 기록상 전, 후반기 의복의 종류는 변화가 크지 않았으나, 모든 내인들의 의차, 즉 의복재료의 종류와 소요량이 영조 35년, 1759년「영조정순후 가례도감」을 기점으로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등으로 전반기와 후반기가 양분되었다. 이는 영조 25년의「국혼정례」와 영조 28년의「상방정례」등 가례에 대한 정비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반차도상에서는 의복의 형태가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뉘어 뚜렷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어 의궤기록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궁녀 복식의 종류별 특징과 전, 후반기의 변화를 분석, 고찰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할의의 유무(有無)이다. 할의는 그 명칭상 활의(豁衣) 또는 화의(華衣)라고 하는 활옷과 같은 종류의 여자 예복으로 보이나 할의와 저고리 원단소요량 간에 차이가 거의 없다. 따라서 위의 ‘할의’는 조선 시대의 활의로 이어지는 ...
본 연구는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총 20건의「가례도감의궤」의 기록과 반차도에 나타난 궁녀 복식을 고찰하여 조선시대 궁녀 복식의 종류와 형태 및 직급에 따른 궁녀복식의 변천과정을 살펴보고 분석ㆍ종합하여 그 특징과 시대적인 흐름을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이를 통해 궁녀복식 연구가 활성화되고 제시한 의차(衣次)를 바탕으로 한 후속 연구가 이어질 때 정확한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 연구의 의의를 두고 있다.
「숭유척불(崇儒斥佛)」정책을 국가 통치의 기본이념으로 예를 중요시하였던 조선시대는 가례(嘉禮), 국장(國葬) 등 수많은 의례(儀禮)뿐만 아니라 진연(進宴) 등과 같은 궁중 행사까지 존재하였고 모든 행사의 내용을 의궤로 제작하여 보관하였다. 다른 복식 고증자료에 비해 양적, 질적으로 잘 보존된 의궤를 통해 의례 및 행사시 관료의 복식부터 의례의 과정 등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파악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의궤를 통해서 수많은 의례와 행사 뒤에 이를 준비하고 수행해야 했던 궁녀들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례도감의궤」에 나타난 궁녀의 복식 종류는 표의(表衣)인 할의와 장삼, 상의인 저고리와 삼아, 하의인 치마와 말군, 두식인 너울과 이엄 그리고 신 등이 나타났다. 궁녀의 복식은 의궤 기록상 전, 후반기 의복의 종류는 변화가 크지 않았으나, 모든 내인들의 의차, 즉 의복재료의 종류와 소요량이 영조 35년, 1759년「영조정순후 가례도감」을 기점으로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등으로 전반기와 후반기가 양분되었다. 이는 영조 25년의「국혼정례」와 영조 28년의「상방정례」등 가례에 대한 정비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반차도상에서는 의복의 형태가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뉘어 뚜렷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어 의궤기록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궁녀 복식의 종류별 특징과 전, 후반기의 변화를 분석, 고찰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할의의 유무(有無)이다. 할의는 그 명칭상 활의(豁衣) 또는 화의(華衣)라고 하는 활옷과 같은 종류의 여자 예복으로 보이나 할의와 저고리 원단소요량 간에 차이가 거의 없다. 따라서 위의 ‘할의’는 조선 시대의 활의로 이어지는 포(袍)가 아닌 저고리 위에 착용하였던 또 다른 종류의 예복으로 후반기 이후 기록이 없다.
둘째, 장삼의 형태변화이다. 장삼은 후반기 반차도상에서 기록과 달리 원삼형태의 녹색 표의를 입고 있다. 효장세자(1727) 가례 시 빈궁의대에 ‘겹장삼’ 대신 ‘원삼’이 기록되어 있는 점과 원삼의 대표적인 특징인 넓은 소매의 색동과 한삼이 달린 녹색 표의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이는 국초 이래 ‘노의’ 다음가는 비빈이하 상궁 층의 예복인 장삼이 후반기에 노의와 함께 ‘원삼’ 하나로 집약되어 조선시대 예복으로 정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셋째, 저고리의 길이변화이다. 조선시대의 일반 저고리가 초기에서 후기로 갈수록 길이가 짧아지는 데 반해 오히려 옷감의 양은 늘어 난 사실에 주목된다. 반차도상에서도 저고리가 후반기로 갈수록 둔부를 가릴 정도로 길어지며 또한 양 옆선이 트인 ‘당의’형태가 나타난다. 기록이나 반차도상의 저고리 색이 초록색으로 궁녀의 당의 색과 일치하고 안감도 당의와 같은 홍색으로, 이는 국초에 덧저고리가 후반기로 갈수록 점차 길어지고 옆선이 트여져 당의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넷째, 치마 길이의 변화이다. 전반기 원단 소요량은 30척으로, 내인들의 계급에 따라 종류의 차이는 있으나 그 소요량은 동일한 기록을 보이며 후반기 이후 시녀, 유모의 장치마(28尺)를 제외한 상궁 이하 모든 내인들의 원단 소요량이 1필로 기록된다. 치마길이가 전반기보다 길어지는 것은 저고리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아지고 있음을 나타내지만, 의궤기록의 치마와 저고리 의차가 동시에 후반기로 갈수록 늘어나고 있어, 이는 덧저고리 이외에 또 다른 저고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다섯째, 너울 길이의 변화이다. 너울은 내인들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전반기에서 후반기로 갈수록 원단 소요량이 증가하는 기록이 나타났으며 반차도 상에 나타난 내인들의 모습에서 길이가 길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총 20건의「가례도감의궤」기록에 등장하는 궁녀의 직급 명칭은 상궁(尙宮), 시녀(侍女), 유모(乳母), 기행내인(騎行內人), 보행내인(步行內人), 본택내인(本宅內人)이며 기록 외에 반차도상의 의녀(醫女), 향차비(香差備), 대향(戴香), 봉향(奉香), 대함(戴函)내인들이 등장한다. 각 신분별 복식을 살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상궁의 복식은 전반기에 초록색 겹저고리와 남색 겹치마 위에 모단 할의, 아청색 홑장삼을 착용하였다. 저고리, 치마 안에는 흰색 삼아와 활한삼, 홍색 장치마를 입었고 치마 위에 말군을 덧입었으며 청상립에 너울과 이엄을 사용하였다. 후반기이후부터는 할의 대신 장삼만을 착용하였으며 복식의 종류에 큰 변화는 보이지 않았으나 의복의 재료나 원단소요량이 차이를 나타냈다.
2. 시녀, 유모의 복식은 상궁과 거의 같으며 의차만을 달리하여 격을 두었다.초록색 겹저고리와 남색 겹치마 위에 초(綃)나 견(絹)으로 만든 할의, 흑색 홑장삼을 착용하였고 활삼아와 홍색 장치마와 말군을 덧입었으며 후반기 이후부터는 장삼만을 착용하였으며 의복의 재료와 원단소요량이 변화하였다.
3. 기행내인의 복식은 전반기에 남색 겹치마와 초록색 겹저고리 위에 각각 홍색과 황색 장삼을 착용하였으며 청상립에 너울과 양이엄을 사용하였고 흰색 삼아와 아청색 치마, 말군이 포함되어있다. 후반기 이후 장삼의 의차변화가 심하여 시녀, 유모의 경우 보다 10척 5촌이 더 길게 나타났다.
4. 보행내인의 복식은 포(袍)제 없이 초록색 겹저고리와 남색 겹치마만을 입고 안에 흰색 단치마와 황색 장치마를 착용하였으며 양이엄을 사용하였다. 전, 후반기 의차에 변화가 있을 뿐이며 의복종류의 차이는 없다.
5. 본택내인의 복식은 포제 없이 초록색이나 남색 저고리에 아청색의 홑겹 치마를 착용하였다. 전, 후반기 의복의 재료나 소요량에 변화가 있을 뿐이며 의복종류의 차이는 없다.
6. 의녀의 복식은 전반기에 남색 저고리에 황색 치마를 입고, 후반기이후 녹색계열의 당의를 착용하고 있다. 두식은 전, 후반기에 걸쳐 황색 립을 쓰고 있으며 후반기에는 립 속에 가리마를 착용하였다.
7. 향차비, 봉향, 대향, 대함내인의 복식은 반차도 상에서만 보여 전반기에는 ‘향차비’만이 존재하며 남색 저고리에 황색치마, 두식은 고계형태를 하고 있다. 후반기에는 향차비 이외에 봉향, 대향, 대함의 모습이 나타나 가례에 대한 절차가 정립되어가고 있는 모습이 확인되며 복식은 치마, 저고리 모두 아청색(鴉靑色)이며 얹은머리에 가리마를 착용하고 있다.
이상으로「가례도감의궤」에 궁녀 복식의 종류와 신분별 시대에 따른 변화를 분석, 고찰하였다. 인조 5년 「소현세자가례도감」을 시작으로 280년간 총 20건의 가례도감의 기록은 전후반기에 걸쳐 변화가 나타나지만 그 폭이 크지 않다. 이는「가례도감의궤」가 국가의 의례나 행사의 시행착오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된 전례서로 선대의 기록을 참조하였을 가능성에서 기인한 결과로, 그로 인해 시대의 흐름에 따르는 복식의 변화가 잘 반영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남자들로 이루어진 사관(史官)의 의해 기록되다보니 복잡한 여자 의복의 명칭이 잘못 표기된 부분이 많이 발견되며 기록 중 생략된 경우도 많아 연대적인 연구에 오차를 주고 있다.
반면에 의궤의 반차도는 이러한 실정을 조금 상쇄시켜주는 역할을 해주며 복식의 색과 형태가 변화하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어 기록과 비교, 분석할 수 있었다. 다만 의궤에 기록된 내용과 그림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아 각 복식의 명확한 기준을 정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한계점은 앞으로 발견될 복식유물자료와 후속 연구를 통하여 그 연관성을 밝혀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며 본 연구가 궁녀복식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되기를 기대해 본다.
본 연구는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총 20건의「가례도감의궤」의 기록과 반차도에 나타난 궁녀 복식을 고찰하여 조선시대 궁녀 복식의 종류와 형태 및 직급에 따른 궁녀복식의 변천과정을 살펴보고 분석ㆍ종합하여 그 특징과 시대적인 흐름을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이를 통해 궁녀복식 연구가 활성화되고 제시한 의차(衣次)를 바탕으로 한 후속 연구가 이어질 때 정확한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 연구의 의의를 두고 있다.
「숭유척불(崇儒斥佛)」정책을 국가 통치의 기본이념으로 예를 중요시하였던 조선시대는 가례(嘉禮), 국장(國葬) 등 수많은 의례(儀禮)뿐만 아니라 진연(進宴) 등과 같은 궁중 행사까지 존재하였고 모든 행사의 내용을 의궤로 제작하여 보관하였다. 다른 복식 고증자료에 비해 양적, 질적으로 잘 보존된 의궤를 통해 의례 및 행사시 관료의 복식부터 의례의 과정 등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파악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의궤를 통해서 수많은 의례와 행사 뒤에 이를 준비하고 수행해야 했던 궁녀들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례도감의궤」에 나타난 궁녀의 복식 종류는 표의(表衣)인 할의와 장삼, 상의인 저고리와 삼아, 하의인 치마와 말군, 두식인 너울과 이엄 그리고 신 등이 나타났다. 궁녀의 복식은 의궤 기록상 전, 후반기 의복의 종류는 변화가 크지 않았으나, 모든 내인들의 의차, 즉 의복재료의 종류와 소요량이 영조 35년, 1759년「영조정순후 가례도감」을 기점으로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등으로 전반기와 후반기가 양분되었다. 이는 영조 25년의「국혼정례」와 영조 28년의「상방정례」등 가례에 대한 정비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반차도상에서는 의복의 형태가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뉘어 뚜렷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어 의궤기록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궁녀 복식의 종류별 특징과 전, 후반기의 변화를 분석, 고찰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할의의 유무(有無)이다. 할의는 그 명칭상 활의(豁衣) 또는 화의(華衣)라고 하는 활옷과 같은 종류의 여자 예복으로 보이나 할의와 저고리 원단소요량 간에 차이가 거의 없다. 따라서 위의 ‘할의’는 조선 시대의 활의로 이어지는 포(袍)가 아닌 저고리 위에 착용하였던 또 다른 종류의 예복으로 후반기 이후 기록이 없다.
둘째, 장삼의 형태변화이다. 장삼은 후반기 반차도상에서 기록과 달리 원삼형태의 녹색 표의를 입고 있다. 효장세자(1727) 가례 시 빈궁의대에 ‘겹장삼’ 대신 ‘원삼’이 기록되어 있는 점과 원삼의 대표적인 특징인 넓은 소매의 색동과 한삼이 달린 녹색 표의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이는 국초 이래 ‘노의’ 다음가는 비빈이하 상궁 층의 예복인 장삼이 후반기에 노의와 함께 ‘원삼’ 하나로 집약되어 조선시대 예복으로 정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셋째, 저고리의 길이변화이다. 조선시대의 일반 저고리가 초기에서 후기로 갈수록 길이가 짧아지는 데 반해 오히려 옷감의 양은 늘어 난 사실에 주목된다. 반차도상에서도 저고리가 후반기로 갈수록 둔부를 가릴 정도로 길어지며 또한 양 옆선이 트인 ‘당의’형태가 나타난다. 기록이나 반차도상의 저고리 색이 초록색으로 궁녀의 당의 색과 일치하고 안감도 당의와 같은 홍색으로, 이는 국초에 덧저고리가 후반기로 갈수록 점차 길어지고 옆선이 트여져 당의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넷째, 치마 길이의 변화이다. 전반기 원단 소요량은 30척으로, 내인들의 계급에 따라 종류의 차이는 있으나 그 소요량은 동일한 기록을 보이며 후반기 이후 시녀, 유모의 장치마(28尺)를 제외한 상궁 이하 모든 내인들의 원단 소요량이 1필로 기록된다. 치마길이가 전반기보다 길어지는 것은 저고리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아지고 있음을 나타내지만, 의궤기록의 치마와 저고리 의차가 동시에 후반기로 갈수록 늘어나고 있어, 이는 덧저고리 이외에 또 다른 저고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다섯째, 너울 길이의 변화이다. 너울은 내인들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전반기에서 후반기로 갈수록 원단 소요량이 증가하는 기록이 나타났으며 반차도 상에 나타난 내인들의 모습에서 길이가 길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총 20건의「가례도감의궤」기록에 등장하는 궁녀의 직급 명칭은 상궁(尙宮), 시녀(侍女), 유모(乳母), 기행내인(騎行內人), 보행내인(步行內人), 본택내인(本宅內人)이며 기록 외에 반차도상의 의녀(醫女), 향차비(香差備), 대향(戴香), 봉향(奉香), 대함(戴函)내인들이 등장한다. 각 신분별 복식을 살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상궁의 복식은 전반기에 초록색 겹저고리와 남색 겹치마 위에 모단 할의, 아청색 홑장삼을 착용하였다. 저고리, 치마 안에는 흰색 삼아와 활한삼, 홍색 장치마를 입었고 치마 위에 말군을 덧입었으며 청상립에 너울과 이엄을 사용하였다. 후반기이후부터는 할의 대신 장삼만을 착용하였으며 복식의 종류에 큰 변화는 보이지 않았으나 의복의 재료나 원단소요량이 차이를 나타냈다.
2. 시녀, 유모의 복식은 상궁과 거의 같으며 의차만을 달리하여 격을 두었다.초록색 겹저고리와 남색 겹치마 위에 초(綃)나 견(絹)으로 만든 할의, 흑색 홑장삼을 착용하였고 활삼아와 홍색 장치마와 말군을 덧입었으며 후반기 이후부터는 장삼만을 착용하였으며 의복의 재료와 원단소요량이 변화하였다.
3. 기행내인의 복식은 전반기에 남색 겹치마와 초록색 겹저고리 위에 각각 홍색과 황색 장삼을 착용하였으며 청상립에 너울과 양이엄을 사용하였고 흰색 삼아와 아청색 치마, 말군이 포함되어있다. 후반기 이후 장삼의 의차변화가 심하여 시녀, 유모의 경우 보다 10척 5촌이 더 길게 나타났다.
4. 보행내인의 복식은 포(袍)제 없이 초록색 겹저고리와 남색 겹치마만을 입고 안에 흰색 단치마와 황색 장치마를 착용하였으며 양이엄을 사용하였다. 전, 후반기 의차에 변화가 있을 뿐이며 의복종류의 차이는 없다.
5. 본택내인의 복식은 포제 없이 초록색이나 남색 저고리에 아청색의 홑겹 치마를 착용하였다. 전, 후반기 의복의 재료나 소요량에 변화가 있을 뿐이며 의복종류의 차이는 없다.
6. 의녀의 복식은 전반기에 남색 저고리에 황색 치마를 입고, 후반기이후 녹색계열의 당의를 착용하고 있다. 두식은 전, 후반기에 걸쳐 황색 립을 쓰고 있으며 후반기에는 립 속에 가리마를 착용하였다.
7. 향차비, 봉향, 대향, 대함내인의 복식은 반차도 상에서만 보여 전반기에는 ‘향차비’만이 존재하며 남색 저고리에 황색치마, 두식은 고계형태를 하고 있다. 후반기에는 향차비 이외에 봉향, 대향, 대함의 모습이 나타나 가례에 대한 절차가 정립되어가고 있는 모습이 확인되며 복식은 치마, 저고리 모두 아청색(鴉靑色)이며 얹은머리에 가리마를 착용하고 있다.
이상으로「가례도감의궤」에 궁녀 복식의 종류와 신분별 시대에 따른 변화를 분석, 고찰하였다. 인조 5년 「소현세자가례도감」을 시작으로 280년간 총 20건의 가례도감의 기록은 전후반기에 걸쳐 변화가 나타나지만 그 폭이 크지 않다. 이는「가례도감의궤」가 국가의 의례나 행사의 시행착오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된 전례서로 선대의 기록을 참조하였을 가능성에서 기인한 결과로, 그로 인해 시대의 흐름에 따르는 복식의 변화가 잘 반영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남자들로 이루어진 사관(史官)의 의해 기록되다보니 복잡한 여자 의복의 명칭이 잘못 표기된 부분이 많이 발견되며 기록 중 생략된 경우도 많아 연대적인 연구에 오차를 주고 있다.
반면에 의궤의 반차도는 이러한 실정을 조금 상쇄시켜주는 역할을 해주며 복식의 색과 형태가 변화하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어 기록과 비교, 분석할 수 있었다. 다만 의궤에 기록된 내용과 그림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아 각 복식의 명확한 기준을 정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한계점은 앞으로 발견될 복식유물자료와 후속 연구를 통하여 그 연관성을 밝혀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며 본 연구가 궁녀복식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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