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부모가 가르침이라는 이름으로 자녀에게 가하는 행위의 근원적인 한계가 부모의 ‘성심成心’에서 비롯됨을 밝히고, 그러한 성심이 해체된 또 다른 차원의 마음, ‘허심虛心’으로 행하는 자녀교육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구상되었다. 궁극적으로는 이 논의가 부모 마음교육의 필요성을 부각시킬 수 있기를 기대한다. 동서양의 철학에는 인간의 마음을 하늘(신, 우주, 도, 태초)의 본성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이해하고, 그 본성을 회복하기 위한 마음교육을 교육의 핵심으로 삼았던 오랜 전통이 존재한다. 장자는 이와 같은 마음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가 형성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장자莊子』「소요유逍遙遊」편의 ‘곤鯤과 붕鵬의 신화’를 통해 장자가 서로 다른 마음의 차원, 그리고 각각의 서로 다른 마음에 바탕한 서로 다른 삶의 차원을 상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심’과 ‘허심(허정한 마음)’은 장자가 이해한 마음의 두 차원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개념이다. 이 가운데 ‘성심’은 물아物我의 분리로 만들어진 허구적인 ‘나(我)’의 마음으로, 주변세계를 자신의 제한된 경험과 지식으로 분별하고 소유와 지배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소유 지평의 마음이다. 그리고 ‘허심’은 ‘나’라는 허구적인 관념이 해체된 후(喪我), 우주의 일부로 전체 생명과 연결된 ‘참된 나(眞我)’의 마음으로, 부분과 분별, 그리고 소유의 지평에 머물러 있던 의식이 전체와 수용, 그리고 존재의 지평으로 확장된 정신경계를 의미한다. 장자는 이러한 마음 지평의 전환을 통해 삶의 양식과 그 삶을 함께 살아가는 타자에 대한 태도도 변화할 것이라 믿었으며, 그러한 삶의 양식과 태도를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유遊’의 철학을 통해 설명하였다. 장자철학의 관점에서 가르침이라는 행위는 ‘유심이위有心而爲’, 곧 ‘유위有爲’이다. 마음이 없이는 가르침도 없다. 이때의 마음은 ‘성심成心’을 가리킨다. 이로써 보면 부모 가르침의 근원적 한계는 그 가르침이 기대어 있는 성심의 한계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연구자는 부모 성심의 한계로, 인간의 의식이 자연(天)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면서 시작되는 외치外馳의 소유적 욕망, 자기중심적인 분별의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부모의 앎, 그리고 ‘나’에 뿌리내린 성심을 통과해 자녀의 정신을 소유하고 지배하고 주재하려는 의지로 나타나는 부모의 사랑에 대하여 논하였다. 이러한 부모의 성심에 기대어 이루어지는 유위의 가르침은 부모가 자녀에 대해 갖는 지배적 권력에 의해 정당화된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부모와의 근원적 결연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삶을 창조하려는 자녀의 자유로운 성장을 가로막는다, 이러한 까닭에 부모에게는 자신의 가르침이 근거하고 있는 마음을 돌아보고, 본연의 마음에 덧대어진 군더더기들(益生)을 내려놓는 ‘마음의 재계(心齋)’가 필요하다. ...
본 논문은, 부모가 가르침이라는 이름으로 자녀에게 가하는 행위의 근원적인 한계가 부모의 ‘성심成心’에서 비롯됨을 밝히고, 그러한 성심이 해체된 또 다른 차원의 마음, ‘허심虛心’으로 행하는 자녀교육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구상되었다. 궁극적으로는 이 논의가 부모 마음교육의 필요성을 부각시킬 수 있기를 기대한다. 동서양의 철학에는 인간의 마음을 하늘(신, 우주, 도, 태초)의 본성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이해하고, 그 본성을 회복하기 위한 마음교육을 교육의 핵심으로 삼았던 오랜 전통이 존재한다. 장자는 이와 같은 마음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가 형성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장자莊子』「소요유逍遙遊」편의 ‘곤鯤과 붕鵬의 신화’를 통해 장자가 서로 다른 마음의 차원, 그리고 각각의 서로 다른 마음에 바탕한 서로 다른 삶의 차원을 상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심’과 ‘허심(허정한 마음)’은 장자가 이해한 마음의 두 차원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개념이다. 이 가운데 ‘성심’은 물아物我의 분리로 만들어진 허구적인 ‘나(我)’의 마음으로, 주변세계를 자신의 제한된 경험과 지식으로 분별하고 소유와 지배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소유 지평의 마음이다. 그리고 ‘허심’은 ‘나’라는 허구적인 관념이 해체된 후(喪我), 우주의 일부로 전체 생명과 연결된 ‘참된 나(眞我)’의 마음으로, 부분과 분별, 그리고 소유의 지평에 머물러 있던 의식이 전체와 수용, 그리고 존재의 지평으로 확장된 정신경계를 의미한다. 장자는 이러한 마음 지평의 전환을 통해 삶의 양식과 그 삶을 함께 살아가는 타자에 대한 태도도 변화할 것이라 믿었으며, 그러한 삶의 양식과 태도를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유遊’의 철학을 통해 설명하였다. 장자철학의 관점에서 가르침이라는 행위는 ‘유심이위有心而爲’, 곧 ‘유위有爲’이다. 마음이 없이는 가르침도 없다. 이때의 마음은 ‘성심成心’을 가리킨다. 이로써 보면 부모 가르침의 근원적 한계는 그 가르침이 기대어 있는 성심의 한계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연구자는 부모 성심의 한계로, 인간의 의식이 자연(天)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면서 시작되는 외치外馳의 소유적 욕망, 자기중심적인 분별의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부모의 앎, 그리고 ‘나’에 뿌리내린 성심을 통과해 자녀의 정신을 소유하고 지배하고 주재하려는 의지로 나타나는 부모의 사랑에 대하여 논하였다. 이러한 부모의 성심에 기대어 이루어지는 유위의 가르침은 부모가 자녀에 대해 갖는 지배적 권력에 의해 정당화된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부모와의 근원적 결연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삶을 창조하려는 자녀의 자유로운 성장을 가로막는다, 이러한 까닭에 부모에게는 자신의 가르침이 근거하고 있는 마음을 돌아보고, 본연의 마음에 덧대어진 군더더기들(益生)을 내려놓는 ‘마음의 재계(心齋)’가 필요하다. 심재의 마음공부를 통해 ‘나(我)’라는 의식까지 내려놓은 후 도달하는 마음의 상태가 바로 ‘허정虛靜’이다. 부모의 허심虛心은 자신과 자녀의 관계를 우주적 유대 안에서 이해한다. 그러므로 자녀의 성장과 변화를 자신의 공으로 여기지 않으며(無功), 타자의 욕망이 투사된 허명虛名에 매달리지 않는다(無名). 또한 부모의 허심은 ‘나’의 관점이 아닌 전체의 관점에서 자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한다. 이때의 존재는 장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생명 전체와의 연관 속에서 드러나는 성명性命이다. 허정한 마음을 가진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방식은 ‘품음(懷)’이다. 장자는 ‘나’의 척도, ‘나’의 의지를 내려놓고 존재 전체를 품는 사랑을 진정한 사랑(大仁)이라 하였다. 연구자는 이러한 허정한 마음으로 행하는 교육을 ‘가르치지 않는 교육’ 혹은 ‘무위의 교육’이라 표현하였다. 가르침의 존재 이유가 배움에 있다고 한다면, 성심에 기대어 이루어지는 유위의 가르침은 진정한 가르침이라 볼 수 없다. 진정한 가르침은 상대의 감화感化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장자는 ‘불언지교不言之敎’라 했다. 불언지교는 교육자의 허정한 마음에 감응하여 스스로 배움을 얻는(感化) 가르침이다. 가르침의 말이 없어도 부모의 존재는, 그리고 그들이 살아온 삶은 그 자체로 아이들에게 배움을 준다. 무위의 교육은 순자연順自然의 교육이다. 무위는 인간의 제한된 의식에 의한 인위적인 조장助長을 지양하고 자연自然을 기다리고 따르는 무행동의 행동으로 자연이 바로 무위의 근거고 내용이 된다. 연구자는 교육적인 의미에서 ‘자연’을 ‘자기창조적 본성’으로 이해하였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기 고유의 삶을 창조해야 하고, 또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순자연의 교육은 그러한 아이들의 자기창조의 생명력을 지켜주는 교육이다. 이를 위해 부모는 아이가 스스로 배울 준비가 될 때를 기다려 가르쳐야 하며, 아이의 타고난 성품과 기질에 따라 교육해야 한다. 하늘(道)의 관점으로 삶을 관조觀照하는 부모에게 자녀의 성장과 변화는 대자연의 큰 흐름 안에서 내적인 힘과 원리에 의해서 진행되는 필연(命)이다. 이를 깨우친 부모는 필연을 수용하고, 변화의 도래를 유유자적한 마음으로 기다리는(安命) 삶의 자세를 지닐 수 있다. 이러한 삶의 자세를 장자는 ‘유유자적한 노닒(遊)’의 이미지로 묘사했다. 자기를 떠나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부모에게 자녀와의 동행은 즐겁고 자유로운 노닒이다. 이렇듯 ‘나’의 척도를 내려놓고 도래하는 것을 도래하도록 놓아두는 안명무위의 교육태도는 아이들이 무한한 생명력으로, 그 누구의 삶도 아닌 자신의 삶을 창조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부모가 가르침이라는 이름으로 자녀에게 가하는 행위의 근원적인 한계가 부모의 ‘성심成心’에서 비롯됨을 밝히고, 그러한 성심이 해체된 또 다른 차원의 마음, ‘허심虛心’으로 행하는 자녀교육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구상되었다. 궁극적으로는 이 논의가 부모 마음교육의 필요성을 부각시킬 수 있기를 기대한다. 동서양의 철학에는 인간의 마음을 하늘(신, 우주, 도, 태초)의 본성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이해하고, 그 본성을 회복하기 위한 마음교육을 교육의 핵심으로 삼았던 오랜 전통이 존재한다. 장자는 이와 같은 마음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가 형성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장자莊子』「소요유逍遙遊」편의 ‘곤鯤과 붕鵬의 신화’를 통해 장자가 서로 다른 마음의 차원, 그리고 각각의 서로 다른 마음에 바탕한 서로 다른 삶의 차원을 상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심’과 ‘허심(허정한 마음)’은 장자가 이해한 마음의 두 차원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개념이다. 이 가운데 ‘성심’은 물아物我의 분리로 만들어진 허구적인 ‘나(我)’의 마음으로, 주변세계를 자신의 제한된 경험과 지식으로 분별하고 소유와 지배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소유 지평의 마음이다. 그리고 ‘허심’은 ‘나’라는 허구적인 관념이 해체된 후(喪我), 우주의 일부로 전체 생명과 연결된 ‘참된 나(眞我)’의 마음으로, 부분과 분별, 그리고 소유의 지평에 머물러 있던 의식이 전체와 수용, 그리고 존재의 지평으로 확장된 정신경계를 의미한다. 장자는 이러한 마음 지평의 전환을 통해 삶의 양식과 그 삶을 함께 살아가는 타자에 대한 태도도 변화할 것이라 믿었으며, 그러한 삶의 양식과 태도를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유遊’의 철학을 통해 설명하였다. 장자철학의 관점에서 가르침이라는 행위는 ‘유심이위有心而爲’, 곧 ‘유위有爲’이다. 마음이 없이는 가르침도 없다. 이때의 마음은 ‘성심成心’을 가리킨다. 이로써 보면 부모 가르침의 근원적 한계는 그 가르침이 기대어 있는 성심의 한계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연구자는 부모 성심의 한계로, 인간의 의식이 자연(天)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면서 시작되는 외치外馳의 소유적 욕망, 자기중심적인 분별의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부모의 앎, 그리고 ‘나’에 뿌리내린 성심을 통과해 자녀의 정신을 소유하고 지배하고 주재하려는 의지로 나타나는 부모의 사랑에 대하여 논하였다. 이러한 부모의 성심에 기대어 이루어지는 유위의 가르침은 부모가 자녀에 대해 갖는 지배적 권력에 의해 정당화된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부모와의 근원적 결연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삶을 창조하려는 자녀의 자유로운 성장을 가로막는다, 이러한 까닭에 부모에게는 자신의 가르침이 근거하고 있는 마음을 돌아보고, 본연의 마음에 덧대어진 군더더기들(益生)을 내려놓는 ‘마음의 재계(心齋)’가 필요하다. 심재의 마음공부를 통해 ‘나(我)’라는 의식까지 내려놓은 후 도달하는 마음의 상태가 바로 ‘허정虛靜’이다. 부모의 허심虛心은 자신과 자녀의 관계를 우주적 유대 안에서 이해한다. 그러므로 자녀의 성장과 변화를 자신의 공으로 여기지 않으며(無功), 타자의 욕망이 투사된 허명虛名에 매달리지 않는다(無名). 또한 부모의 허심은 ‘나’의 관점이 아닌 전체의 관점에서 자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한다. 이때의 존재는 장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생명 전체와의 연관 속에서 드러나는 성명性命이다. 허정한 마음을 가진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방식은 ‘품음(懷)’이다. 장자는 ‘나’의 척도, ‘나’의 의지를 내려놓고 존재 전체를 품는 사랑을 진정한 사랑(大仁)이라 하였다. 연구자는 이러한 허정한 마음으로 행하는 교육을 ‘가르치지 않는 교육’ 혹은 ‘무위의 교육’이라 표현하였다. 가르침의 존재 이유가 배움에 있다고 한다면, 성심에 기대어 이루어지는 유위의 가르침은 진정한 가르침이라 볼 수 없다. 진정한 가르침은 상대의 감화感化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장자는 ‘불언지교不言之敎’라 했다. 불언지교는 교육자의 허정한 마음에 감응하여 스스로 배움을 얻는(感化) 가르침이다. 가르침의 말이 없어도 부모의 존재는, 그리고 그들이 살아온 삶은 그 자체로 아이들에게 배움을 준다. 무위의 교육은 순자연順自然의 교육이다. 무위는 인간의 제한된 의식에 의한 인위적인 조장助長을 지양하고 자연自然을 기다리고 따르는 무행동의 행동으로 자연이 바로 무위의 근거고 내용이 된다. 연구자는 교육적인 의미에서 ‘자연’을 ‘자기창조적 본성’으로 이해하였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기 고유의 삶을 창조해야 하고, 또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순자연의 교육은 그러한 아이들의 자기창조의 생명력을 지켜주는 교육이다. 이를 위해 부모는 아이가 스스로 배울 준비가 될 때를 기다려 가르쳐야 하며, 아이의 타고난 성품과 기질에 따라 교육해야 한다. 하늘(道)의 관점으로 삶을 관조觀照하는 부모에게 자녀의 성장과 변화는 대자연의 큰 흐름 안에서 내적인 힘과 원리에 의해서 진행되는 필연(命)이다. 이를 깨우친 부모는 필연을 수용하고, 변화의 도래를 유유자적한 마음으로 기다리는(安命) 삶의 자세를 지닐 수 있다. 이러한 삶의 자세를 장자는 ‘유유자적한 노닒(遊)’의 이미지로 묘사했다. 자기를 떠나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부모에게 자녀와의 동행은 즐겁고 자유로운 노닒이다. 이렇듯 ‘나’의 척도를 내려놓고 도래하는 것을 도래하도록 놓아두는 안명무위의 교육태도는 아이들이 무한한 생명력으로, 그 누구의 삶도 아닌 자신의 삶을 창조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장자 부모의 마음과 가르침 마음교육 마음의 두 차원 성심 유위의 가르침 허심 허정 무위의 가르침 순자연 불언지교 안명 유 Zhuangzi parent's heart-mind and teaching chen-xin xu-xin xu-jing education of wuwei following the selfcreating nature wordless teaching you
학위논문 정보
저자
이성미
학위수여기관
연세대학교 대학원
학위구분
국내박사
학과
교육학과
지도교수
황금중
발행연도
2013
총페이지
v, 263 p.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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