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사 연구는 주로 國難克服의 시각에서 진행되어 왔다. 義兵과 水軍의 활약으로 결국 일본군을 몰아냈다고 하는 설명방식이 주를 이루었으며, 승리의 밑바탕에는 수많은 조선 백성들의 희생이 있었다고 평가해 왔다. 하지만 임진왜란이라는 대규모 전쟁은 과도기이자 혼란 그 자체였다. 전쟁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모든 백성들이 지배층과 혼연일체가 되어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고 하는 것은 임진왜란의 실상을 일부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에 본고는 임진왜란 시기에 발생했던 민인에 의한 반왕조 활동을 살펴보려고 한다. 반왕조 활동의 양상과 발생 배경, 그에 따른 조정의 대책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겠다. 더 나아가 민인에 의한 반왕조 활동이 전후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도 언급해 보려고 한다. 첫 번째로는 宣祖의 播遷 과정에서 발생했던 放火 사건을 다루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朝廷에서는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결국 申砬이 패배하였고, 이에 宣祖는 1592년 4월 30일 漢城에서 몸을 피하였다. 사실 한성에는 전쟁 발발 직후부터 急報가 끊임없이 도착했기 때문에 주민들의 불안감은 매우 컸다. 하지만 선조가 파천하게 되자 한성에 거주하던 자들의 불안은 분노로 급변하였다. 亂民들은 掌隷院과 刑曹를 불태웠으며, 內帑庫를 약탈하고, 景福宮ㆍ昌德宮ㆍ昌慶宮 등 왕실 권위의 표상인 궁궐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선조는 한성을 떠나 義州로 향했는데, 開城과 平壤을 지나던 중에 지역민들에 의해 大駕 행렬이 가로막히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렇듯 선조의 권위와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한편으로는 일본군의 북상이 계속되었지만 믿을 만한 정보가 부족하여 백성들의 불안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처럼 분노와 불신, 불안이라는 여러 감정들은 선조와 관련한 여러 가지 訛言을 생산하였다. 와언의 내용 속에는 선조를 대신할 새로운 왕이 출현하기 시작했으며, 일본군이 새로운 임금을 세우고 국정을 개혁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정에서는 와언을 잠재우기 위해 정보를 공개하자고 논의하였으며, 동시에 와언에 대한 죄를 물어 엄격하게 단속하고자 했다. 하지만 와언을 통제하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두 번째로는 附倭를 살펴보았다. 부왜 활동을 살펴보기 전에 일본군의 점령정책을 살펴보았는데, 그들의 점령정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군은 ① 점령지에서 자신들의 점령의도를 게시하면서 백성들의 安住를 꾀했으며, ② 賊帖?章標?倭牌?民牌 등을 발급하면서 지역 주민들을 통제하였으며, ③ 지역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鄕吏를 동원하였고, ④ 일본군처럼 조선인의 머리를 깎게 하고 倭服을 입히는 등 조선인을 일본인화하는 정책을 펼쳤고, ⑤ 적극적으로 부왜하는 조선인들에게 관직을 주어 효과적인 점령을 시도하였다. 조선 민인의 부왜 활동은 일상적 부왜와 적극적 부왜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일상적 부왜의 유형은 대부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군의 점령을 받아들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적극적으로 부왜한 자들은 의병활동을 밀고한 자, 점령군에게 受職한 자, 間諜 활동을 한 자, 潛商人 등 개인의 이익을 위해 조선에 해를 끼친 자, 일본군에 여러 가지 資源을 제공한 자 등 다양한 유형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부왜자에 대해 조정은 우선 다수의 일상적 부왜자들은 용서해 주었으며, 적극적으로 일본군에 협조했던 자들에게만 책임을 물었다. 특히 관료나 사대부의 부왜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처벌했다. 더하여 宣祖는 敎書를 반포하여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려는 노력도 보여주었다. 세 번째로 살펴본 반왕조 활동은 민인의 土賊 활동이다. 임진왜란 시기는 기후사적으로 볼 때 小氷期 초반에 해당하여 자연재해에 의한 失農 가능성이 높았던 때이다. 또한 전쟁기에는 피난 혹은 전투 참여 등을 이유로 정상적인 농사가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중 1593년과 1594년에는 人相食의 상황에 이르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賑濟場을 개설하여 飢餓에 허덕이는 자들을 진휼하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에 많은 백성들이 流浪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토적활동에 가담하여 식량난을 해결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본고에서는 京畿 일대의 토적 활동과 智異山 일대의 토적 활동을 검토해 보았다. 우선 경기 지역의 경우, 李能, 玄夢, 薛世昌 등이 주도하고 白丁이나 山尺들이 일부 가담하였다. 그들은 신분적으로 천대를 받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살았던 자들이었다. 때문에 경기 지역의 토적 집단은 守令을 모욕하고, 官人을 살해하고, 英陵으로 향하던 祭物을 약탈하는 양상을 보였다. 반면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했던 토적 집단의 주도자는 金希, 高波, 姜大水, 李福 등 이었다. 여기에 일본군의 침략을 피해온 자들, 식량난에서 ...
임진왜란사 연구는 주로 國難克服의 시각에서 진행되어 왔다. 義兵과 水軍의 활약으로 결국 일본군을 몰아냈다고 하는 설명방식이 주를 이루었으며, 승리의 밑바탕에는 수많은 조선 백성들의 희생이 있었다고 평가해 왔다. 하지만 임진왜란이라는 대규모 전쟁은 과도기이자 혼란 그 자체였다. 전쟁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모든 백성들이 지배층과 혼연일체가 되어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고 하는 것은 임진왜란의 실상을 일부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에 본고는 임진왜란 시기에 발생했던 민인에 의한 반왕조 활동을 살펴보려고 한다. 반왕조 활동의 양상과 발생 배경, 그에 따른 조정의 대책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겠다. 더 나아가 민인에 의한 반왕조 활동이 전후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도 언급해 보려고 한다. 첫 번째로는 宣祖의 播遷 과정에서 발생했던 放火 사건을 다루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朝廷에서는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결국 申砬이 패배하였고, 이에 宣祖는 1592년 4월 30일 漢城에서 몸을 피하였다. 사실 한성에는 전쟁 발발 직후부터 急報가 끊임없이 도착했기 때문에 주민들의 불안감은 매우 컸다. 하지만 선조가 파천하게 되자 한성에 거주하던 자들의 불안은 분노로 급변하였다. 亂民들은 掌隷院과 刑曹를 불태웠으며, 內帑庫를 약탈하고, 景福宮ㆍ昌德宮ㆍ昌慶宮 등 왕실 권위의 표상인 궁궐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선조는 한성을 떠나 義州로 향했는데, 開城과 平壤을 지나던 중에 지역민들에 의해 大駕 행렬이 가로막히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렇듯 선조의 권위와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한편으로는 일본군의 북상이 계속되었지만 믿을 만한 정보가 부족하여 백성들의 불안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처럼 분노와 불신, 불안이라는 여러 감정들은 선조와 관련한 여러 가지 訛言을 생산하였다. 와언의 내용 속에는 선조를 대신할 새로운 왕이 출현하기 시작했으며, 일본군이 새로운 임금을 세우고 국정을 개혁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정에서는 와언을 잠재우기 위해 정보를 공개하자고 논의하였으며, 동시에 와언에 대한 죄를 물어 엄격하게 단속하고자 했다. 하지만 와언을 통제하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두 번째로는 附倭를 살펴보았다. 부왜 활동을 살펴보기 전에 일본군의 점령정책을 살펴보았는데, 그들의 점령정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군은 ① 점령지에서 자신들의 점령의도를 게시하면서 백성들의 安住를 꾀했으며, ② 賊帖?章標?倭牌?民牌 등을 발급하면서 지역 주민들을 통제하였으며, ③ 지역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鄕吏를 동원하였고, ④ 일본군처럼 조선인의 머리를 깎게 하고 倭服을 입히는 등 조선인을 일본인화하는 정책을 펼쳤고, ⑤ 적극적으로 부왜하는 조선인들에게 관직을 주어 효과적인 점령을 시도하였다. 조선 민인의 부왜 활동은 일상적 부왜와 적극적 부왜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일상적 부왜의 유형은 대부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군의 점령을 받아들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적극적으로 부왜한 자들은 의병활동을 밀고한 자, 점령군에게 受職한 자, 間諜 활동을 한 자, 潛商人 등 개인의 이익을 위해 조선에 해를 끼친 자, 일본군에 여러 가지 資源을 제공한 자 등 다양한 유형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부왜자에 대해 조정은 우선 다수의 일상적 부왜자들은 용서해 주었으며, 적극적으로 일본군에 협조했던 자들에게만 책임을 물었다. 특히 관료나 사대부의 부왜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처벌했다. 더하여 宣祖는 敎書를 반포하여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려는 노력도 보여주었다. 세 번째로 살펴본 반왕조 활동은 민인의 土賊 활동이다. 임진왜란 시기는 기후사적으로 볼 때 小氷期 초반에 해당하여 자연재해에 의한 失農 가능성이 높았던 때이다. 또한 전쟁기에는 피난 혹은 전투 참여 등을 이유로 정상적인 농사가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중 1593년과 1594년에는 人相食의 상황에 이르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賑濟場을 개설하여 飢餓에 허덕이는 자들을 진휼하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에 많은 백성들이 流浪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토적활동에 가담하여 식량난을 해결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본고에서는 京畿 일대의 토적 활동과 智異山 일대의 토적 활동을 검토해 보았다. 우선 경기 지역의 경우, 李能, 玄夢, 薛世昌 등이 주도하고 白丁이나 山尺들이 일부 가담하였다. 그들은 신분적으로 천대를 받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살았던 자들이었다. 때문에 경기 지역의 토적 집단은 守令을 모욕하고, 官人을 살해하고, 英陵으로 향하던 祭物을 약탈하는 양상을 보였다. 반면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했던 토적 집단의 주도자는 金希, 高波, 姜大水, 李福 등 이었다. 여기에 일본군의 침략을 피해온 자들, 식량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라도 지역으로 유망한 자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지리산 지역의 토적 집단은 생계유지를 위해 민가를 약탈하였으나, 경기 지역처럼 官을 약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 토적 집단이 활동했던 거점은 모두 교통의 요충지이자, 산악지대였다. 그들의 활동 시기 역시 기근의 고통이 가장 심했던 1594년을 전후한 시기였다. 활동 기간도 8~10여 개월 정도로 길었으며 조직적인 활동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살펴본 반왕조 활동은 바로 叛亂이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官軍 징병 과정에서 軍兵이 난동을 일으킬 만큼 통치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宣祖의 파천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은 수습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전쟁의 장기화와 飢饉의 만연으로 인해 토적들이 활동했다. 이처럼 조선 왕조의 권위가 급격히 상실되어 가고 있었으며, 치안의 부재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에 일부 백성들은 사회적 모순이나 불만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왕권을 부정하고 권력을 빼앗으려는 시도로까지 증폭되기도 했다. 임진왜란기에 발생한 반란은 邊遐福의 반란, 宋儒眞의 반란, 李夢鶴의 반란이 대표적이다. 변하복은 1594년 4월에 반란을 기도하였지만 擧事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追捕 과정에서 확인되듯이, 변하복의 반란은 관련자가 4백여 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 사건은 1589년에 발생했던 己丑獄事와 관련이 깊다. 정여립의 최측근이었던 邊崇福의 동생이 바로 변하복이었으며, 반란의 근거지 역시 황해도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기축옥사의 여파가 수습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한 셈인데, 전쟁 이전의 정치적 갈등과 獄事에 대한 불만이 전쟁 중의 혼란을 틈타 표출된 것이다. 한편 왕권교체를 위해 반란을 일으킨 사례도 있었다. 이는 통치체제의 이완, 즉 치안의 부재를 틈타 일으킨 반란으로 송유진과 이몽학의 반란이 대표적이다. 우선 송유진은 1593년 12월과 1594년 1월 사이에 湖西의 牙山과 平澤을 거점으로 반란을 기도하였다. 이 지역에는 경기도와 경상도에서 일본군의 침략을 피해 온 무리들이 많았다. 또 일본군의 점령을 받지 않았던 곳이었기 때문에 관의 수탈이 반복되면서 賦役의 고통이 격심하였다. 최초에 이 반란은 송유진 이외에도 홍씨 일가와 송씨 일가가 함께 준비한 것이었다. 송유진 일당은 한성을 공격하여 東宮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도중에 홍씨 일가의 배신으로 거사 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지만, 반란이 당시 조선 사회에 준 충격은 적지 않았다. 李夢鶴은 1596년 7월 초 湖西의 鴻山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반란군의 규모는 약 600~700명이었다. 하지만 홍산을 시작으로 인근의 郡縣들을 차례로 점령하는 과정에서 반란의 규모는 3~4천 명 정도로 커졌다. 이후 반란군은 洪州를 점령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고, 계속되는 관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부하들이 이몽학의 목을 베고 투항함으로써 반란은 끝이 났다. 5일 만에 제압되기는 했지만 同甲會를 활용하는 등 이몽학의 반란은 송유진의 반란보다 더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이몽학의 반란도 각종 부역의 고통을 견디지 못했던 백성들이 많이 가담하였다. 또한 당시 전황에 따르면 강화협상이 지지부진하던 때이고, 義兵들의 역할이 모호해질 시기였다. 조정에서는 군소 의병집단을 해산시키고 통제하려고 하였다. 이몽학의 반란에서는 해산된 의병의 잔존 세력도 확인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민의 이반은 곧 성리학적 지배질서의 위기이기도 했다. 때문에 선조를 포함한 지배층들은 전쟁 수습과정에서 다양한 정책을 통해 민생 파탄과 민심 이반이라는 총체적인 난국을 타개하고자 했다. 전쟁 후 선조는 성리학적 질서의 회복을 위해 宮闕 재건, 『東國新續三綱行實圖』 간행 등을 논의하였으며, 민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號牌法을 부활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향촌사회 내에서도 유사했다. 재지 사족들은 다시 鄕約을 보급하기 시작했다든지, 鄕案을 중수한다든지, 邑誌를 편찬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이완된 향촌 내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임진왜란사 연구는 주로 國難克服의 시각에서 진행되어 왔다. 義兵과 水軍의 활약으로 결국 일본군을 몰아냈다고 하는 설명방식이 주를 이루었으며, 승리의 밑바탕에는 수많은 조선 백성들의 희생이 있었다고 평가해 왔다. 하지만 임진왜란이라는 대규모 전쟁은 과도기이자 혼란 그 자체였다. 전쟁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모든 백성들이 지배층과 혼연일체가 되어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고 하는 것은 임진왜란의 실상을 일부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에 본고는 임진왜란 시기에 발생했던 민인에 의한 반왕조 활동을 살펴보려고 한다. 반왕조 활동의 양상과 발생 배경, 그에 따른 조정의 대책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겠다. 더 나아가 민인에 의한 반왕조 활동이 전후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도 언급해 보려고 한다. 첫 번째로는 宣祖의 播遷 과정에서 발생했던 放火 사건을 다루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朝廷에서는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결국 申砬이 패배하였고, 이에 宣祖는 1592년 4월 30일 漢城에서 몸을 피하였다. 사실 한성에는 전쟁 발발 직후부터 急報가 끊임없이 도착했기 때문에 주민들의 불안감은 매우 컸다. 하지만 선조가 파천하게 되자 한성에 거주하던 자들의 불안은 분노로 급변하였다. 亂民들은 掌隷院과 刑曹를 불태웠으며, 內帑庫를 약탈하고, 景福宮ㆍ昌德宮ㆍ昌慶宮 등 왕실 권위의 표상인 궁궐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선조는 한성을 떠나 義州로 향했는데, 開城과 平壤을 지나던 중에 지역민들에 의해 大駕 행렬이 가로막히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렇듯 선조의 권위와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한편으로는 일본군의 북상이 계속되었지만 믿을 만한 정보가 부족하여 백성들의 불안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처럼 분노와 불신, 불안이라는 여러 감정들은 선조와 관련한 여러 가지 訛言을 생산하였다. 와언의 내용 속에는 선조를 대신할 새로운 왕이 출현하기 시작했으며, 일본군이 새로운 임금을 세우고 국정을 개혁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정에서는 와언을 잠재우기 위해 정보를 공개하자고 논의하였으며, 동시에 와언에 대한 죄를 물어 엄격하게 단속하고자 했다. 하지만 와언을 통제하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두 번째로는 附倭를 살펴보았다. 부왜 활동을 살펴보기 전에 일본군의 점령정책을 살펴보았는데, 그들의 점령정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군은 ① 점령지에서 자신들의 점령의도를 게시하면서 백성들의 安住를 꾀했으며, ② 賊帖?章標?倭牌?民牌 등을 발급하면서 지역 주민들을 통제하였으며, ③ 지역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鄕吏를 동원하였고, ④ 일본군처럼 조선인의 머리를 깎게 하고 倭服을 입히는 등 조선인을 일본인화하는 정책을 펼쳤고, ⑤ 적극적으로 부왜하는 조선인들에게 관직을 주어 효과적인 점령을 시도하였다. 조선 민인의 부왜 활동은 일상적 부왜와 적극적 부왜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일상적 부왜의 유형은 대부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군의 점령을 받아들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적극적으로 부왜한 자들은 의병활동을 밀고한 자, 점령군에게 受職한 자, 間諜 활동을 한 자, 潛商人 등 개인의 이익을 위해 조선에 해를 끼친 자, 일본군에 여러 가지 資源을 제공한 자 등 다양한 유형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부왜자에 대해 조정은 우선 다수의 일상적 부왜자들은 용서해 주었으며, 적극적으로 일본군에 협조했던 자들에게만 책임을 물었다. 특히 관료나 사대부의 부왜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처벌했다. 더하여 宣祖는 敎書를 반포하여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려는 노력도 보여주었다. 세 번째로 살펴본 반왕조 활동은 민인의 土賊 활동이다. 임진왜란 시기는 기후사적으로 볼 때 小氷期 초반에 해당하여 자연재해에 의한 失農 가능성이 높았던 때이다. 또한 전쟁기에는 피난 혹은 전투 참여 등을 이유로 정상적인 농사가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중 1593년과 1594년에는 人相食의 상황에 이르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賑濟場을 개설하여 飢餓에 허덕이는 자들을 진휼하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에 많은 백성들이 流浪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토적활동에 가담하여 식량난을 해결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본고에서는 京畿 일대의 토적 활동과 智異山 일대의 토적 활동을 검토해 보았다. 우선 경기 지역의 경우, 李能, 玄夢, 薛世昌 등이 주도하고 白丁이나 山尺들이 일부 가담하였다. 그들은 신분적으로 천대를 받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살았던 자들이었다. 때문에 경기 지역의 토적 집단은 守令을 모욕하고, 官人을 살해하고, 英陵으로 향하던 祭物을 약탈하는 양상을 보였다. 반면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했던 토적 집단의 주도자는 金希, 高波, 姜大水, 李福 등 이었다. 여기에 일본군의 침략을 피해온 자들, 식량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라도 지역으로 유망한 자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지리산 지역의 토적 집단은 생계유지를 위해 민가를 약탈하였으나, 경기 지역처럼 官을 약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 토적 집단이 활동했던 거점은 모두 교통의 요충지이자, 산악지대였다. 그들의 활동 시기 역시 기근의 고통이 가장 심했던 1594년을 전후한 시기였다. 활동 기간도 8~10여 개월 정도로 길었으며 조직적인 활동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살펴본 반왕조 활동은 바로 叛亂이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官軍 징병 과정에서 軍兵이 난동을 일으킬 만큼 통치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宣祖의 파천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은 수습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전쟁의 장기화와 飢饉의 만연으로 인해 토적들이 활동했다. 이처럼 조선 왕조의 권위가 급격히 상실되어 가고 있었으며, 치안의 부재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에 일부 백성들은 사회적 모순이나 불만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왕권을 부정하고 권력을 빼앗으려는 시도로까지 증폭되기도 했다. 임진왜란기에 발생한 반란은 邊遐福의 반란, 宋儒眞의 반란, 李夢鶴의 반란이 대표적이다. 변하복은 1594년 4월에 반란을 기도하였지만 擧事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追捕 과정에서 확인되듯이, 변하복의 반란은 관련자가 4백여 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 사건은 1589년에 발생했던 己丑獄事와 관련이 깊다. 정여립의 최측근이었던 邊崇福의 동생이 바로 변하복이었으며, 반란의 근거지 역시 황해도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기축옥사의 여파가 수습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한 셈인데, 전쟁 이전의 정치적 갈등과 獄事에 대한 불만이 전쟁 중의 혼란을 틈타 표출된 것이다. 한편 왕권교체를 위해 반란을 일으킨 사례도 있었다. 이는 통치체제의 이완, 즉 치안의 부재를 틈타 일으킨 반란으로 송유진과 이몽학의 반란이 대표적이다. 우선 송유진은 1593년 12월과 1594년 1월 사이에 湖西의 牙山과 平澤을 거점으로 반란을 기도하였다. 이 지역에는 경기도와 경상도에서 일본군의 침략을 피해 온 무리들이 많았다. 또 일본군의 점령을 받지 않았던 곳이었기 때문에 관의 수탈이 반복되면서 賦役의 고통이 격심하였다. 최초에 이 반란은 송유진 이외에도 홍씨 일가와 송씨 일가가 함께 준비한 것이었다. 송유진 일당은 한성을 공격하여 東宮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도중에 홍씨 일가의 배신으로 거사 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지만, 반란이 당시 조선 사회에 준 충격은 적지 않았다. 李夢鶴은 1596년 7월 초 湖西의 鴻山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반란군의 규모는 약 600~700명이었다. 하지만 홍산을 시작으로 인근의 郡縣들을 차례로 점령하는 과정에서 반란의 규모는 3~4천 명 정도로 커졌다. 이후 반란군은 洪州를 점령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고, 계속되는 관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부하들이 이몽학의 목을 베고 투항함으로써 반란은 끝이 났다. 5일 만에 제압되기는 했지만 同甲會를 활용하는 등 이몽학의 반란은 송유진의 반란보다 더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이몽학의 반란도 각종 부역의 고통을 견디지 못했던 백성들이 많이 가담하였다. 또한 당시 전황에 따르면 강화협상이 지지부진하던 때이고, 義兵들의 역할이 모호해질 시기였다. 조정에서는 군소 의병집단을 해산시키고 통제하려고 하였다. 이몽학의 반란에서는 해산된 의병의 잔존 세력도 확인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민의 이반은 곧 성리학적 지배질서의 위기이기도 했다. 때문에 선조를 포함한 지배층들은 전쟁 수습과정에서 다양한 정책을 통해 민생 파탄과 민심 이반이라는 총체적인 난국을 타개하고자 했다. 전쟁 후 선조는 성리학적 질서의 회복을 위해 宮闕 재건, 『東國新續三綱行實圖』 간행 등을 논의하였으며, 민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號牌法을 부활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향촌사회 내에서도 유사했다. 재지 사족들은 다시 鄕約을 보급하기 시작했다든지, 鄕案을 중수한다든지, 邑誌를 편찬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이완된 향촌 내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Imjin War was a massive war, because of a transition period and confusion itself. People showed various forms of reactions to the war. It is only partially true to say that all people fought against the Japanese forces in unity with the ruling class. This study thus set out to investigate the anti-d...
Imjin War was a massive war, because of a transition period and confusion itself. People showed various forms of reactions to the war. It is only partially true to say that all people fought against the Japanese forces in unity with the ruling class. This study thus set out to investigate the anti-dynastic activities of people during the war, presenting discussions with a focus on the patterns and backgrounds of their anti-dynastic activities and the royal court's countermeasures against them. It also aimed to cover the influences of their activities against the Chosun dynasty after the war ended. First, the study dealt with the arson event. It took place, when King Seonjo(宣祖) took refuge. After the war broke out, the royal court tried to stop the Japanese forces, but the king eventually had to escape from Hanseong(漢城) on April 30, 1592. As a matter of fact, Hanseong was bombarded with constant arrivals of urgent messages right from the beginning of war, which made the residents very anxious. Once the king took refuge, however, the residents of Hanseong converted their anxiety into rage rapidly. The refugees burnt down all the palaces that represented the royal authority including the Gyeongbokgung(景福宮), the Changdeokgung(昌德宮), and the Changgyeonggung Palace(昌慶宮). After leaving Hanseong, King Seonjo moved toward Uiju(義州). While passing Gaeseong(開城) and Pyeongyang(平壤), his procession was even stopped by the local residents. Those episodes show that the king's authority and trust hit the bottom. Once the Japanese forces continued to move northward, Chosun people couldn’t get reliable information, so became more and more anxious. Various emotions including anger, distrust, and anxiety worked together to produce many different rumors related to King Seonjo. Some of them said that a new king started to emerge and replace King Seonjo, and that the Japanese forces would enthrone a new king and reform the government. The royal court discussed the idea of opening information to calm down wild rumors and, at the same time, tried to crack them down and brought strictly charge against spreading rumors. It, however, was not easy to control rumors. Secondly, this study examined pro-Japanese activities. Before focusing on pro-Japanese activities, I looked into the occupation policies of the Japanese forces and sorted them out as follows: The Japanese forces announced their intention of occupation in the occupied areas, and tried to promote the settlement of people; they issued passes and identification cards to control local residents; they called together group of Hyang-Li(鄕吏) to get an accurate picture of actual local states; they implemented a policy that turned Chosun people’s appearances into style of Japanese; and They gave a government position to the Chosun people that were pro-Japanese for effective occupation. The pro-Japanese activities of people were categorized into passive and activity participation. The former is a sort of accepting the occupation of the Japanese forces. The latter included various behaviors that reported the righteous army to the Japanese force, get a government position(Sujik, 受職), became a spy and provided the Japanese forces with various resources. The Chosun dynasty prepared a countermeasure, which a activity participant was executed. King Seonjo also tried hard to come down the public sentiment through the proclamation of Gyoso(敎書), but punished officials and noblemen acting the pro-Japanese severely. Third, this study examined the bandit activities as part of their anti-dynastic activities. During Imjin War, farming was impossible. So people killed and ate each other in 1593 and 1594. The royal court tried to take care of those who were suffering from famine, but the efforts were not enough. Many people thus ended up wandering, in the process, some of them would join the bandits to resolve their food shortage problems. Especially, the study reviewed the bandit activities around Gyeonggido(京畿道) and Mt. Jirisan(智異山). In Gyeonggido, Lee Neung(李能), Hyeon Mong(玄夢), and Seol Se-chang(薛世昌) leaded the bandit activities that were joined those who were treated with contempt due to the social status and were the poor. The bandit groups thus insulted the Suryeongs(守令), murdered government officials, and plundered the offerings that were transported to Yeongneung(英陵). At Mt. Jirisan, Kim Hee(金希), Go Pa(高波), Kang Dae-su(姜大水), and Lee Bok(李福) led the bandit groups. The groups involved escaping people from the invasion of Japanese forces and moving to the Jeollado(全羅道) because of the food shortage. The bandit groups rooted private houses, as compare to situation of Gyeonggido. Both were based in the important transportation point and mountainous areas. Two bandit groups were active around 1594 when people suffered form famine most. In addition, both of them lasted long for approximately eight to ten months and were organized in their activities. Finally, this study addressed rebellions as part of the anti-dynastic activities by Chosun people. The representative ones were led by Byeon Ha-bok(邊遐福), Song Yu-jin(宋儒眞), and Lee Mong-hak(李夢鶴). Byeon Ha-bok attempted to rebel in April, 1594. It was failed in the attempt. Participants were massive in size with approximately 400 individuals. The event was closely related to Gichukoksa(己丑獄事) that took place in 1589. In a situation which its aftermath was continued, Imjin War broke out. There were political conflicts and complaints about the handling of rebellion before the war, and they expressed in the middle of confusion caused by the war. There were even rebellions to replace the old royal power with the new one, taking advantage of the relaxed ruling system. The famous rebellions leaded by Song Yu-jin and Lee Mong-hak. Song Yu-jin tried to rebel with a base in Asan(牙山) and Pyeongtaek(平澤) in the Hoseo(湖西) region between December, 1593 and January, 1594. There were many refugees from Gyeonggido and Gyeongsangdo(慶尙道) because of the invasion of Japanese forces. In addition, the Hoseo region was free from the occupation by the Japanese forces. So the local residents were subjected to repeated exploitations and harsh forced labor. Song's attempt was detected in advance and failed, but it had huge impacts on the Chosun society. Lee Mong-hak rose in revolt in Hongsan(鴻山) of Hoseo region in early July, 1596. Approximately 600~700 individuals got involved in his attempt. The size grew to reach approximately 3~4,000 with the occupation of neighboring Gun-Hyeons(郡縣) one by one. Later, the rebel forces tried to occupy Hongju(洪州), but failed. As a result, not being able to endure the ongoing pressure from the government forces, Lee's subordinates cut his head off and surrendered, which brought an end to the rebellion. Even though Lee's rebellion was suppressed in five days, it was more organized rebellion than Song's one. Because there were even the remaining members of righteous army in Lee’ group. And to conclude, people's activities against the Chosun dynasty was a crisis with the ruling order of Neo-Confucianism. The ruling class including King Seonjo tried to resolve a total crisis relating to breakdown of people's livelihood and alienation of public sentiment through various policies in the process of settlement after the war. Once the war ended, King Seonjo discussed the reconstruction of palaces and publication of Dongkuksinsoksamkanghaeongsildo(東國新續三綱行實圖) to restore the Neo-Confucian order, and tried to revive the identity tag act to reinforce his control over people. Such movements were similar in local communities, as well. Local noble families made efforts to tighten the relaxed discipline of community by issuing Hyangyak(鄕約), rewriting Hyangan(鄕案), and publishing Eupji(邑誌) in the country.
Imjin War was a massive war, because of a transition period and confusion itself. People showed various forms of reactions to the war. It is only partially true to say that all people fought against the Japanese forces in unity with the ruling class. This study thus set out to investigate the anti-dynastic activities of people during the war, presenting discussions with a focus on the patterns and backgrounds of their anti-dynastic activities and the royal court's countermeasures against them. It also aimed to cover the influences of their activities against the Chosun dynasty after the war ended. First, the study dealt with the arson event. It took place, when King Seonjo(宣祖) took refuge. After the war broke out, the royal court tried to stop the Japanese forces, but the king eventually had to escape from Hanseong(漢城) on April 30, 1592. As a matter of fact, Hanseong was bombarded with constant arrivals of urgent messages right from the beginning of war, which made the residents very anxious. Once the king took refuge, however, the residents of Hanseong converted their anxiety into rage rapidly. The refugees burnt down all the palaces that represented the royal authority including the Gyeongbokgung(景福宮), the Changdeokgung(昌德宮), and the Changgyeonggung Palace(昌慶宮). After leaving Hanseong, King Seonjo moved toward Uiju(義州). While passing Gaeseong(開城) and Pyeongyang(平壤), his procession was even stopped by the local residents. Those episodes show that the king's authority and trust hit the bottom. Once the Japanese forces continued to move northward, Chosun people couldn’t get reliable information, so became more and more anxious. Various emotions including anger, distrust, and anxiety worked together to produce many different rumors related to King Seonjo. Some of them said that a new king started to emerge and replace King Seonjo, and that the Japanese forces would enthrone a new king and reform the government. The royal court discussed the idea of opening information to calm down wild rumors and, at the same time, tried to crack them down and brought strictly charge against spreading rumors. It, however, was not easy to control rumors. Secondly, this study examined pro-Japanese activities. Before focusing on pro-Japanese activities, I looked into the occupation policies of the Japanese forces and sorted them out as follows: The Japanese forces announced their intention of occupation in the occupied areas, and tried to promote the settlement of people; they issued passes and identification cards to control local residents; they called together group of Hyang-Li(鄕吏) to get an accurate picture of actual local states; they implemented a policy that turned Chosun people’s appearances into style of Japanese; and They gave a government position to the Chosun people that were pro-Japanese for effective occupation. The pro-Japanese activities of people were categorized into passive and activity participation. The former is a sort of accepting the occupation of the Japanese forces. The latter included various behaviors that reported the righteous army to the Japanese force, get a government position(Sujik, 受職), became a spy and provided the Japanese forces with various resources. The Chosun dynasty prepared a countermeasure, which a activity participant was executed. King Seonjo also tried hard to come down the public sentiment through the proclamation of Gyoso(敎書), but punished officials and noblemen acting the pro-Japanese severely. Third, this study examined the bandit activities as part of their anti-dynastic activities. During Imjin War, farming was impossible. So people killed and ate each other in 1593 and 1594. The royal court tried to take care of those who were suffering from famine, but the efforts were not enough. Many people thus ended up wandering, in the process, some of them would join the bandits to resolve their food shortage problems. Especially, the study reviewed the bandit activities around Gyeonggido(京畿道) and Mt. Jirisan(智異山). In Gyeonggido, Lee Neung(李能), Hyeon Mong(玄夢), and Seol Se-chang(薛世昌) leaded the bandit activities that were joined those who were treated with contempt due to the social status and were the poor. The bandit groups thus insulted the Suryeongs(守令), murdered government officials, and plundered the offerings that were transported to Yeongneung(英陵). At Mt. Jirisan, Kim Hee(金希), Go Pa(高波), Kang Dae-su(姜大水), and Lee Bok(李福) led the bandit groups. The groups involved escaping people from the invasion of Japanese forces and moving to the Jeollado(全羅道) because of the food shortage. The bandit groups rooted private houses, as compare to situation of Gyeonggido. Both were based in the important transportation point and mountainous areas. Two bandit groups were active around 1594 when people suffered form famine most. In addition, both of them lasted long for approximately eight to ten months and were organized in their activities. Finally, this study addressed rebellions as part of the anti-dynastic activities by Chosun people. The representative ones were led by Byeon Ha-bok(邊遐福), Song Yu-jin(宋儒眞), and Lee Mong-hak(李夢鶴). Byeon Ha-bok attempted to rebel in April, 1594. It was failed in the attempt. Participants were massive in size with approximately 400 individuals. The event was closely related to Gichukoksa(己丑獄事) that took place in 1589. In a situation which its aftermath was continued, Imjin War broke out. There were political conflicts and complaints about the handling of rebellion before the war, and they expressed in the middle of confusion caused by the war. There were even rebellions to replace the old royal power with the new one, taking advantage of the relaxed ruling system. The famous rebellions leaded by Song Yu-jin and Lee Mong-hak. Song Yu-jin tried to rebel with a base in Asan(牙山) and Pyeongtaek(平澤) in the Hoseo(湖西) region between December, 1593 and January, 1594. There were many refugees from Gyeonggido and Gyeongsangdo(慶尙道) because of the invasion of Japanese forces. In addition, the Hoseo region was free from the occupation by the Japanese forces. So the local residents were subjected to repeated exploitations and harsh forced labor. Song's attempt was detected in advance and failed, but it had huge impacts on the Chosun society. Lee Mong-hak rose in revolt in Hongsan(鴻山) of Hoseo region in early July, 1596. Approximately 600~700 individuals got involved in his attempt. The size grew to reach approximately 3~4,000 with the occupation of neighboring Gun-Hyeons(郡縣) one by one. Later, the rebel forces tried to occupy Hongju(洪州), but failed. As a result, not being able to endure the ongoing pressure from the government forces, Lee's subordinates cut his head off and surrendered, which brought an end to the rebellion. Even though Lee's rebellion was suppressed in five days, it was more organized rebellion than Song's one. Because there were even the remaining members of righteous army in Lee’ group. And to conclude, people's activities against the Chosun dynasty was a crisis with the ruling order of Neo-Confucianism. The ruling class including King Seonjo tried to resolve a total crisis relating to breakdown of people's livelihood and alienation of public sentiment through various policies in the process of settlement after the war. Once the war ended, King Seonjo discussed the reconstruction of palaces and publication of Dongkuksinsoksamkanghaeongsildo(東國新續三綱行實圖) to restore the Neo-Confucian order, and tried to revive the identity tag act to reinforce his control over people. Such movements were similar in local communities, as well. Local noble families made efforts to tighten the relaxed discipline of community by issuing Hyangyak(鄕約), rewriting Hyangan(鄕案), and publishing Eupji(邑誌) in the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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