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조선시대 봉수를 주제로 한다. 봉수는 봉(烽: 횃불)과 수(燧: 연기)로 써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이다. 그러나 통신제도는 단순히 烽과 燧만 올린다고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수행할 수 있는 다양한 조건이 필요하 다. 따라서 필자는 ‘봉수란 국가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공적기구로서, 변방의 賊情 을 晝烟夜火의 약정된 신호로 봉수대라는 시설에서 이미 정해진 노선을 따라 신 속하게 전달하였던 군사통신제도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삼국시대에는 烽․擧火․烽候의 기록을 통해 봉수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헌기록이나 현재 발견되고 있는 유구만으로는 제도화된 봉수로 보기에는 어려 움이 있었다. 한국에서 봉수가 제도화된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고려 ...
이 논문은 조선시대 봉수를 주제로 한다. 봉수는 봉(烽: 횃불)과 수(燧: 연기)로 써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이다. 그러나 통신제도는 단순히 烽과 燧만 올린다고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수행할 수 있는 다양한 조건이 필요하 다. 따라서 필자는 ‘봉수란 국가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공적기구로서, 변방의 賊情 을 晝烟夜火의 약정된 신호로 봉수대라는 시설에서 이미 정해진 노선을 따라 신 속하게 전달하였던 군사통신제도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삼국시대에는 烽․擧火․烽候의 기록을 통해 봉수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헌기록이나 현재 발견되고 있는 유구만으로는 제도화된 봉수로 보기에는 어려 움이 있었다. 한국에서 봉수가 제도화된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고려 현종 20년 (1029)부터 봉수의 기록이 나오며, 의종 3년(1149) 조진약의 烽𤐰式 제정, 『宣和 奉使 高麗圖經』의 흑산도 봉수, 『東國李相國集』의 곡령봉수, 『圃隱集』의 김 해지역 봉수를 통해 고려시대 봉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조선은 고려 봉수를 계승하면서 개혁을 단행하였다. 조선의 거화법은 초기 중국 의 거화법을 받아들였으나, 이를 조선의 실정에 맞게 수정 보완하여 내륙과 해양 을 분리한 조선식 5거제로 정립하였다. 봉수노선은 기존 陸路와 海路를 배경으로 획정하였으며, 노선 획정 과정에서 봉수의 新設과 廢止, 기존 봉수의 移設과 間設 등 여러 변동 상황이 있었다. 봉수의 입지는 치소․역, 賊路의 요해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봉수의 무용론이 대두되었으나, 일본의 재침입을 대비하는 과정 에서 봉수는 재정비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봉수의 기능을 대신하고자 파발을 운영 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시상황에는 가능하였으나 평시에는 불가능하였고 잘 지켜 지지 않았다. 조선 후기 해적선과 황당선의 출몰 그리고 도서로의 유민이입 증가 로 봉수의 증설이 이루어졌다. 봉수를 변통하기 위해 숙종 원년(1675)과 10년 (1684) ‘摘奸節目’ 10가지를 마련하는 등 봉수 기능 회복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시대 봉수는 목멱산봉수․연변봉수․내지봉수․권설봉수로 구분된다. 이중 연변봉수를 집중 검토하였다. 연변봉수가 위치하는 연변지역은 線的 개념보다는 面的 개념으로 이해하고 연변봉수는 ‘국경 연변지역 군현에 설치되어 그 수령의 관리하에 있었던 봉수’로 정의하였다. 그리고 연대를 분석하여 중국의 영향→보완 발전→沿邊煙臺造築之式 제정으로의 조선식 연대 확립 과정을 상정해 보았다. 봉수대 조사사례를 살펴보고, 시설물의 기능에 따라 중심시설과 보조시설로 구 분하였다. 연조의 특징을 살피던 중 봉수 복원에 인용되고 있는 차상찬의 ‘烽火 設置方法’을 비판하여 조선 봉수와 상관없음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멸실된 연조와 연대의 이해를 돕기 위해 2가지 추정 복원 안을 제시하였다. 연대는 7차례의 공정 을 거쳐 축조되었으며, 일부 공정은 읍성 및 진보성과 동일하여 축조기법을 공유 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건물지는 아궁이와 온돌의 유무에 따라 주거용과 창고용으로 나누어지고 주거 용은 다시 지상식과 수혈식으로 구분되었다. 지상식은 3칸 구조의 瓦家가 많았으 며, 수혈식은 겨울 방한용 주거시설이었다. 창고용은 고방의 유무나 물품의 수량 에 의해 多間構造와 一間構造로 구분되었다. 경남지역 봉수는 牧․都護府, 倭寇 侵入路地域에 주로 설치되어 있었다. 조선 초기 연대봉화는 세종 29년에 반포된 ‘沿邊煙臺造築之式’의 영향으로 축조되었고, 그 입지적 특성으로는 수군진과 관련이 있었다. 慶南地域 烽燧와 他地域 烽燧의 비교에서 봉수대의 평면형태, 연대의 구조, 연조의 有無 등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타지역 봉수 조사사례가 적어 계속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烽燧軍은 달리 烽卒․烽軍․烽火干․烽火軍․候望人․烟臺軍이라 하였다. 연변 과 내지 그리고 당시 수행하는 임무를 감안하여 부르던 이름들로 생각되었다. 烽 卒․烽火干․烽火軍․烟臺軍은 조선 전기, 烽燧軍․烽軍․烽臺軍은 조선 후기에 주로 불려졌다. 고려시대 봉수 근무인원은 방정 2인과 백정 20인, 장교 2인과 군인 33인이 배정 되어 있었는데, 이는 동시 근무자가 아닌 교대 근무에 따른 인원 배정으로 추정하 였다. 조선시대에는 봉수 성격별로 근무인원을 배정하였다. 조선 전기 목멱산봉수 에는 오장 2인과 군 4인, 연변봉수에는 오장 2인과 봉수군 10인, 내지봉수에는 오 장 2인과 봉수군 6인이 근무하였고 전국의 봉수군 근무인원은 24,392인 정도로 추 산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봉수군 결원이 많아 봉수군 편제가 잘 지켜지지 않았고 연변과 내지봉수의 차이도 없었던 듯하다. 이러한 봉수 운영의 문제점은 처벌규정 강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세종대의 처벌규정은 『大明律』 등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적침의 현황에 따 른 처벌과 누적 처벌 등의 중국 규정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후 이를 수정․발전 시켜 조선식 처벌규정을 만들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거짓봉화나 방화 등에 대 한 규율이 강화되었다. 봉수군의 임무는 ①외부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후망과 감시, ②외부의 침입이나 惡獸로부터 봉수를 보호하기 위한 자체방호, ③변경의 상황을 알리는 신호전달, ④큰 사변이나 자연 재해 등에 따른 봉수의 改補修가 있었다. 이 외에도 봉수군은 식수의 확보, 숙식해결 등 실질적인 근무 외에도 일상의 대부분이 봉수대에서 이 루어졌다.
이 논문은 조선시대 봉수를 주제로 한다. 봉수는 봉(烽: 횃불)과 수(燧: 연기)로 써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이다. 그러나 통신제도는 단순히 烽과 燧만 올린다고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수행할 수 있는 다양한 조건이 필요하 다. 따라서 필자는 ‘봉수란 국가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공적기구로서, 변방의 賊情 을 晝烟夜火의 약정된 신호로 봉수대라는 시설에서 이미 정해진 노선을 따라 신 속하게 전달하였던 군사통신제도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삼국시대에는 烽․擧火․烽候의 기록을 통해 봉수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헌기록이나 현재 발견되고 있는 유구만으로는 제도화된 봉수로 보기에는 어려 움이 있었다. 한국에서 봉수가 제도화된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고려 현종 20년 (1029)부터 봉수의 기록이 나오며, 의종 3년(1149) 조진약의 烽𤐰式 제정, 『宣和 奉使 高麗圖經』의 흑산도 봉수, 『東國李相國集』의 곡령봉수, 『圃隱集』의 김 해지역 봉수를 통해 고려시대 봉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조선은 고려 봉수를 계승하면서 개혁을 단행하였다. 조선의 거화법은 초기 중국 의 거화법을 받아들였으나, 이를 조선의 실정에 맞게 수정 보완하여 내륙과 해양 을 분리한 조선식 5거제로 정립하였다. 봉수노선은 기존 陸路와 海路를 배경으로 획정하였으며, 노선 획정 과정에서 봉수의 新設과 廢止, 기존 봉수의 移設과 間設 등 여러 변동 상황이 있었다. 봉수의 입지는 치소․역, 賊路의 요해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봉수의 무용론이 대두되었으나, 일본의 재침입을 대비하는 과정 에서 봉수는 재정비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봉수의 기능을 대신하고자 파발을 운영 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시상황에는 가능하였으나 평시에는 불가능하였고 잘 지켜 지지 않았다. 조선 후기 해적선과 황당선의 출몰 그리고 도서로의 유민이입 증가 로 봉수의 증설이 이루어졌다. 봉수를 변통하기 위해 숙종 원년(1675)과 10년 (1684) ‘摘奸節目’ 10가지를 마련하는 등 봉수 기능 회복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시대 봉수는 목멱산봉수․연변봉수․내지봉수․권설봉수로 구분된다. 이중 연변봉수를 집중 검토하였다. 연변봉수가 위치하는 연변지역은 線的 개념보다는 面的 개념으로 이해하고 연변봉수는 ‘국경 연변지역 군현에 설치되어 그 수령의 관리하에 있었던 봉수’로 정의하였다. 그리고 연대를 분석하여 중국의 영향→보완 발전→沿邊煙臺造築之式 제정으로의 조선식 연대 확립 과정을 상정해 보았다. 봉수대 조사사례를 살펴보고, 시설물의 기능에 따라 중심시설과 보조시설로 구 분하였다. 연조의 특징을 살피던 중 봉수 복원에 인용되고 있는 차상찬의 ‘烽火 設置方法’을 비판하여 조선 봉수와 상관없음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멸실된 연조와 연대의 이해를 돕기 위해 2가지 추정 복원 안을 제시하였다. 연대는 7차례의 공정 을 거쳐 축조되었으며, 일부 공정은 읍성 및 진보성과 동일하여 축조기법을 공유 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건물지는 아궁이와 온돌의 유무에 따라 주거용과 창고용으로 나누어지고 주거 용은 다시 지상식과 수혈식으로 구분되었다. 지상식은 3칸 구조의 瓦家가 많았으 며, 수혈식은 겨울 방한용 주거시설이었다. 창고용은 고방의 유무나 물품의 수량 에 의해 多間構造와 一間構造로 구분되었다. 경남지역 봉수는 牧․都護府, 倭寇 侵入路地域에 주로 설치되어 있었다. 조선 초기 연대봉화는 세종 29년에 반포된 ‘沿邊煙臺造築之式’의 영향으로 축조되었고, 그 입지적 특성으로는 수군진과 관련이 있었다. 慶南地域 烽燧와 他地域 烽燧의 비교에서 봉수대의 평면형태, 연대의 구조, 연조의 有無 등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타지역 봉수 조사사례가 적어 계속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烽燧軍은 달리 烽卒․烽軍․烽火干․烽火軍․候望人․烟臺軍이라 하였다. 연변 과 내지 그리고 당시 수행하는 임무를 감안하여 부르던 이름들로 생각되었다. 烽 卒․烽火干․烽火軍․烟臺軍은 조선 전기, 烽燧軍․烽軍․烽臺軍은 조선 후기에 주로 불려졌다. 고려시대 봉수 근무인원은 방정 2인과 백정 20인, 장교 2인과 군인 33인이 배정 되어 있었는데, 이는 동시 근무자가 아닌 교대 근무에 따른 인원 배정으로 추정하 였다. 조선시대에는 봉수 성격별로 근무인원을 배정하였다. 조선 전기 목멱산봉수 에는 오장 2인과 군 4인, 연변봉수에는 오장 2인과 봉수군 10인, 내지봉수에는 오 장 2인과 봉수군 6인이 근무하였고 전국의 봉수군 근무인원은 24,392인 정도로 추 산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봉수군 결원이 많아 봉수군 편제가 잘 지켜지지 않았고 연변과 내지봉수의 차이도 없었던 듯하다. 이러한 봉수 운영의 문제점은 처벌규정 강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세종대의 처벌규정은 『大明律』 등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적침의 현황에 따 른 처벌과 누적 처벌 등의 중국 규정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후 이를 수정․발전 시켜 조선식 처벌규정을 만들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거짓봉화나 방화 등에 대 한 규율이 강화되었다. 봉수군의 임무는 ①외부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후망과 감시, ②외부의 침입이나 惡獸로부터 봉수를 보호하기 위한 자체방호, ③변경의 상황을 알리는 신호전달, ④큰 사변이나 자연 재해 등에 따른 봉수의 改補修가 있었다. 이 외에도 봉수군은 식수의 확보, 숙식해결 등 실질적인 근무 외에도 일상의 대부분이 봉수대에서 이 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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