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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倭亂期 民人의 反王朝 活動
An activities of the people against the Chosun dynasty in the Imjin War 원문보기


김만호 (전남대학교 사학과 국내박사)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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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사 연구는 주로 國難克服의 시각에서 진행되어 왔다. 義兵과 水軍의 활약으로 결국 일본군을 몰아냈다고 하는 설명방식이 주를 이루었으며, 승리의 밑바탕에는 수많은 조선 백성들의 희생이 있었다고 평가해 왔다. 하지만 임진왜란이라는 대규모 전쟁은 과도기이자 혼란 그 자체였다. 전쟁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모든 백성들이 지배층과 혼연일체가 되어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고 하는 것은 임진왜란의 실상을 일부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에 본고는 임진왜란 시기에 발생했던 민인에 의한 반왕조 활동을 살펴보려고 한다. 반왕조 활동의 양상과 발생 배경, 그에 따른 조정의 대책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겠다. 더 나아가 민인에 의한 반왕조 활동이 전후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도 언급해 보려고 한다.
첫 번째로는 宣祖의 播遷 과정에서 발생했던 放火 사건을 다루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朝廷에서는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결국 申砬이 패배하였고, 이에 宣祖는 1592년 4월 30일 漢城에서 몸을 피하였다. 사실 한성에는 전쟁 발발 직후부터 急報가 끊임없이 도착했기 때문에 주민들의 불안감은 매우 컸다. 하지만 선조가 파천하게 되자 한성에 거주하던 자들의 불안은 분노로 급변하였다. 亂民들은 掌隷院과 刑曹를 불태웠으며, 內帑庫를 약탈하고, 景福宮ㆍ昌德宮ㆍ昌慶宮 등 왕실 권위의 표상인 궁궐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선조는 한성을 떠나 義州로 향했는데, 開城과 平壤을 지나던 중에 지역민들에 의해 大駕 행렬이 가로막히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렇듯 선조의 권위와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한편으로는 일본군의 북상이 계속되었지만 믿을 만한 정보가 부족하여 백성들의 불안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처럼 분노와 불신, 불안이라는 여러 감정들은 선조와 관련한 여러 가지 訛言을 생산하였다. 와언의 내용 속에는 선조를 대신할 새로운 왕이 출현하기 시작했으며, 일본군이 새로운 임금을 세우고 국정을 개혁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정에서는 와언을 잠재우기 위해 정보를 공개하자고 논의하였으며, 동시에 와언에 대한 죄를 물어 엄격하게 단속하고자 했다. 하지만 와언을 통제하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두 번째로는 附倭를 살펴보았다. 부왜 활동을 살펴보기 전에 일본군의 점령정책을 살펴보았는데, 그들의 점령정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군은 ① 점령지에서 자신들의 점령의도를 게시하면서 백성들의 安住를 꾀했으며, ② 賊帖?章標?倭牌?民牌 등을 발급하면서 지역 주민들을 통제하였으며, ③ 지역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鄕吏를 동원하였고, ④ 일본군처럼 조선인의 머리를 깎게 하고 倭服을 입히는 등 조선인을 일본인화하는 정책을 펼쳤고, ⑤ 적극적으로 부왜하는 조선인들에게 관직을 주어 효과적인 점령을 시도하였다.
조선 민인의 부왜 활동은 일상적 부왜와 적극적 부왜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일상적 부왜의 유형은 대부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군의 점령을 받아들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적극적으로 부왜한 자들은 의병활동을 밀고한 자, 점령군에게 受職한 자, 間諜 활동을 한 자, 潛商人 등 개인의 이익을 위해 조선에 해를 끼친 자, 일본군에 여러 가지 資源을 제공한 자 등 다양한 유형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부왜자에 대해 조정은 우선 다수의 일상적 부왜자들은 용서해 주었으며, 적극적으로 일본군에 협조했던 자들에게만 책임을 물었다. 특히 관료나 사대부의 부왜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처벌했다. 더하여 宣祖는 敎書를 반포하여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려는 노력도 보여주었다.
세 번째로 살펴본 반왕조 활동은 민인의 土賊 활동이다. 임진왜란 시기는 기후사적으로 볼 때 小氷期 초반에 해당하여 자연재해에 의한 失農 가능성이 높았던 때이다. 또한 전쟁기에는 피난 혹은 전투 참여 등을 이유로 정상적인 농사가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중 1593년과 1594년에는 人相食의 상황에 이르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賑濟場을 개설하여 飢餓에 허덕이는 자들을 진휼하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에 많은 백성들이 流浪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토적활동에 가담하여 식량난을 해결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본고에서는 京畿 일대의 토적 활동과 智異山 일대의 토적 활동을 검토해 보았다.
우선 경기 지역의 경우, 李能, 玄夢, 薛世昌 등이 주도하고 白丁이나 山尺들이 일부 가담하였다. 그들은 신분적으로 천대를 받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살았던 자들이었다. 때문에 경기 지역의 토적 집단은 守令을 모욕하고, 官人을 살해하고, 英陵으로 향하던 祭物을 약탈하는 양상을 보였다. 반면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했던 토적 집단의 주도자는 金希, 高波, 姜大水, 李福 등 이었다. 여기에 일본군의 침략을 피해온 자들, 식량난에서 ...

Abstract AI-Helper 아이콘AI-Helper

Imjin War was a massive war, because of a transition period and confusion itself. People showed various forms of reactions to the war. It is only partially true to say that all people fought against the Japanese forces in unity with the ruling class. This study thus set out to investigate the anti-d...

주제어

#임진왜란 파천(播遷) 궁궐 방화 점령정책 부왜(附倭) 기근 토적(土賊) 반란(叛亂) 변하복(邊遐福) 송유진(宋儒眞) 이몽학(李夢鶴) 

학위논문 정보

저자 김만호
학위수여기관 전남대학교
학위구분 국내박사
학과 사학과
지도교수 김병인
발행연도 2015
총페이지 180
키워드 임진왜란 파천(播遷) 궁궐 방화 점령정책 부왜(附倭) 기근 토적(土賊) 반란(叛亂) 변하복(邊遐福) 송유진(宋儒眞) 이몽학(李夢鶴)
언어 kor
원문 URL http://www.riss.kr/link?id=T13837639&outLink=K
정보원 한국교육학술정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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