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 불교조각사에서 화엄계 불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특히 불교가 사회전반을 이끄는 이념이자 문화적인 번영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던 통일신라시대에는 화엄이 불교계의 주축을 이루면서 융성했기 때문에 자연히 화엄계 불상도 많이 조성되었다. 그러므로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은 불상의 양식이나 도상 특징을 통해서 당시 불교미술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라가 주변 국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완성한 국제적인 불교문화의 토대 위에서 어떻게 나름의 독자성을 추구하고 정착시켰는지를 규명할 수 있기 때문에 통일신라시대 불교조각사 연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의의가 자못 크다고 하겠다. 이 논문에서는 기왕의 관련연구를 통해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 중에 대표적인 예들만을 개별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파악되지 못했거나, 구체적으로 논의되지 못했던 연구과제들을 해명하는데 주안점을 두면서 통일신라시대 불교사적인 맥락 속에서 화엄계 불상을 다각적인 측면에서 규명하고자 했다. 즉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과 관련되는 선행연구는 대부분 석굴암 본존불상이나 석남사 석조비로자나불상 등의 한국조각사에서 비중이 큰 연구대상만을 개별적으로 다루거나,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미술 전반에 대해서 개괄적인 흐름을 소략하게 살펴보는 정도에 머물렀다. 이에 이 논문에서는 이미 논해진 바 있는 불상뿐만 아니라 그 동안 주목하지 못했던 화엄계 불상들을 새롭게 발굴하여 논의의 대상에 포함시키고, 그 불상들을 계통별로 묶어서 살펴봄으로써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의 전개양상을 구체적이면서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연구목적에 따라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을 촉지인, 시무외·여원인, 지권인의 형식으로 분류한 다음 각 계통의 불상들을 화엄불신론에 입각하여 분석하고 화엄교의적인 관점으로 해석함으로써, 신라 화엄종에서 어떤 불상을 주존으로 신앙했는지, 또 그 양상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규명하였다. 또 관련문헌이나 발굴조사를 통해서 화엄계 불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예나 도상체계를 판별할 수 없는 화엄계 불상까지 포괄하여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의 전개양상을 종합적으로 분석, 검토하였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 도출된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에 대한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라 화엄종의 주축을 이루었던 의상계에서는『60화엄경』을 바탕으로 의상의 화엄불신론에 입각하여 주존불상을 형상화하였다. 즉 의상계 화엄종에서는 석가모니의 모습 속에서 화엄의 법신불을 찾고자했기 때문에 촉지인을 결한 모습으로 주존불상을 형상화하였다. 신라 화엄종의 근본도량인 부석사 무량수전에 봉안된 소조아미타불상이 그러한 경우이다. 기왕의 연구에서 부석사 무량수전 소조아미타불상의 尊名은 밝혀진 바 있지만 이 불상은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이 아니라 석가모니불, 노사나불과 同格의 개념을 갖고 있는 華嚴一乘의 아미타불상으로 파악된다. 석굴암도 표훈과 신림에 의해서 조영된 의상계 화엄종 사찰이다. 석굴암은 38軀에 이르는 불상군이 하나의 조합을 이루고 있는데, 불상군의 중심에서 이들을 圓融하는 본존불상도 華嚴一乘의 개념을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 석굴암 본존불상은 석가모니의 정각을 표현한 인도 보드가야의 금강좌진용상을 模本으로 조성되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석가모니불의 개념 이외에도, 석굴암의 구조와 배치체계를 볼 때 본존불상은 문수보살상, 보현보살상과 함께 三尊을 이루기도 하며 11면관음보살상과는 완전히 포개져서 不二의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다. 즉 석굴암 본존불상은『화엄경』의 經主인 비로자나불을 대신하여 설법을 하거나, 화엄세계를 체험하도록 지혜를 주고 법계를 보여주는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협시로 三尊을 이루고 있다. 이 삼존불상을 의상의「화엄일승발원문」의 내용과 결부시켜 해석해보면, 본존불상은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통해서 깨달음의 세계를 설명하며 보살도를 실천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법신 비로자나불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의상의「백화도량발원문」에 나타나는 ...
통일신라시대 불교조각사에서 화엄계 불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특히 불교가 사회전반을 이끄는 이념이자 문화적인 번영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던 통일신라시대에는 화엄이 불교계의 주축을 이루면서 융성했기 때문에 자연히 화엄계 불상도 많이 조성되었다. 그러므로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은 불상의 양식이나 도상 특징을 통해서 당시 불교미술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라가 주변 국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완성한 국제적인 불교문화의 토대 위에서 어떻게 나름의 독자성을 추구하고 정착시켰는지를 규명할 수 있기 때문에 통일신라시대 불교조각사 연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의의가 자못 크다고 하겠다. 이 논문에서는 기왕의 관련연구를 통해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 중에 대표적인 예들만을 개별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파악되지 못했거나, 구체적으로 논의되지 못했던 연구과제들을 해명하는데 주안점을 두면서 통일신라시대 불교사적인 맥락 속에서 화엄계 불상을 다각적인 측면에서 규명하고자 했다. 즉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과 관련되는 선행연구는 대부분 석굴암 본존불상이나 석남사 석조비로자나불상 등의 한국조각사에서 비중이 큰 연구대상만을 개별적으로 다루거나,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미술 전반에 대해서 개괄적인 흐름을 소략하게 살펴보는 정도에 머물렀다. 이에 이 논문에서는 이미 논해진 바 있는 불상뿐만 아니라 그 동안 주목하지 못했던 화엄계 불상들을 새롭게 발굴하여 논의의 대상에 포함시키고, 그 불상들을 계통별로 묶어서 살펴봄으로써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의 전개양상을 구체적이면서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연구목적에 따라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을 촉지인, 시무외·여원인, 지권인의 형식으로 분류한 다음 각 계통의 불상들을 화엄불신론에 입각하여 분석하고 화엄교의적인 관점으로 해석함으로써, 신라 화엄종에서 어떤 불상을 주존으로 신앙했는지, 또 그 양상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규명하였다. 또 관련문헌이나 발굴조사를 통해서 화엄계 불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예나 도상체계를 판별할 수 없는 화엄계 불상까지 포괄하여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의 전개양상을 종합적으로 분석, 검토하였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 도출된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에 대한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라 화엄종의 주축을 이루었던 의상계에서는『60화엄경』을 바탕으로 의상의 화엄불신론에 입각하여 주존불상을 형상화하였다. 즉 의상계 화엄종에서는 석가모니의 모습 속에서 화엄의 법신불을 찾고자했기 때문에 촉지인을 결한 모습으로 주존불상을 형상화하였다. 신라 화엄종의 근본도량인 부석사 무량수전에 봉안된 소조아미타불상이 그러한 경우이다. 기왕의 연구에서 부석사 무량수전 소조아미타불상의 尊名은 밝혀진 바 있지만 이 불상은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이 아니라 석가모니불, 노사나불과 同格의 개념을 갖고 있는 華嚴一乘의 아미타불상으로 파악된다. 석굴암도 표훈과 신림에 의해서 조영된 의상계 화엄종 사찰이다. 석굴암은 38軀에 이르는 불상군이 하나의 조합을 이루고 있는데, 불상군의 중심에서 이들을 圓融하는 본존불상도 華嚴一乘의 개념을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 석굴암 본존불상은 석가모니의 정각을 표현한 인도 보드가야의 금강좌진용상을 模本으로 조성되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석가모니불의 개념 이외에도, 석굴암의 구조와 배치체계를 볼 때 본존불상은 문수보살상, 보현보살상과 함께 三尊을 이루기도 하며 11면관음보살상과는 완전히 포개져서 不二의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다. 즉 석굴암 본존불상은『화엄경』의 經主인 비로자나불을 대신하여 설법을 하거나, 화엄세계를 체험하도록 지혜를 주고 법계를 보여주는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협시로 三尊을 이루고 있다. 이 삼존불상을 의상의「화엄일승발원문」의 내용과 결부시켜 해석해보면, 본존불상은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통해서 깨달음의 세계를 설명하며 보살도를 실천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법신 비로자나불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의상의「백화도량발원문」에 나타나는 관음보살의 개념을 독립된 예배대상으로서 본존불상과 합치되는 11면관음보살상과 결부시켜보면, 화엄신앙을 실천하는 방편으로 정토왕생을 주재하는 아미타불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석굴암 본존불상은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의 성격을 圓融하여 하나의 불신에 담고 있다고 이해된다. 그리고 석굴암 본존불상은 11면관음보살과 同格을 이루면서 아미타불의 실천적인 신앙을 드러내는 것은 行境의 개념, 삼존으로 이루어진 법신으로써 根本佛의 尊格을 깨닫고 이해하는 解境의 개념을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의 불신을 빌어 나타내고 있다고 해석된다. 청량사의 석조불좌상은『화엄경』의「보살주처품」에서 유래된 사찰의 명칭이나「신라가야산해인사주원벽기」와「신라가야산해인사결계장기」에서 청량사의 소재지인 가야산을 청량산으로 언급하고 있음을 볼 때, 화엄종 사찰에 봉안된 주존불상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청량사 석조불좌상은 광배와 대좌에 화불과 보살상, 신장상을 배치되어 있어서 같은 시기에 조성된 통상적인 촉지인 불상과는 도상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청량사 석조불좌상과 형식 및 양식 면에서 가장 유사해서 그 도상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것은 용화전 석조불좌상이다. 보관과 영락으로 불신을 장엄하면서 광배와 대좌에 석가모니의 성도를 경축하는 권속을 표현하고 있는 용화전 석조불좌상은 菩提瑞像과 대좌의 형식과 도상요소가 일치한다. 이런 용화전 석조불좌상의 도상을 볼 때 청량사 석조불좌상도 보리서상을 모방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즉 청량사 석조불좌상은『화엄경』의 法身佛을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광배와 대좌에는 성도를 경축하고 법신불의 법문을 듣기위해 모여든 華嚴聖衆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둘째,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을 통해 시무외·여원인을 결한 노사나불상을 주존으로 신앙했던 신라 화엄종 계파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시무외·여원인은 모든 부처에게 통용되는 通印이지만, 근본적으로 석가모니불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 도상 역시 석가모니의 모습을 빌어『60화엄경』의 주존인 노사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이해된다. 7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화엄승려들이《일승법계도》가 곧 시무외·여원인 노사나불상과 일맥상통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는 해석을 볼 때, 그 때부터 시무외·여원인 노사나불상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진다. 또한 대좌 연판마다 화불이 새겨져 있는 8세기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불입상도 시무외·여원인 노사나불상으로 생각된다. 그리고『실상사사적기』에서 노사나불임을 밝히고 있어서 새롭게 재고되고 있는 실상사 철조불좌상, 현존하지 않지만《성주사비》의 기록과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된 철조불상의 손가락 잔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시무외·여원인 불상으로 밝혀진 성주사 철조불좌상도 같은 도상의 노사나불상으로 판단된다. 이상의 불상 예를 볼 때, 시무외·여원인을 결한 노사나불상은 촉지인 불상과 양축을 이루면서 신라 화엄종에서 주존으로 신앙되었으며, 그 도상은 같은 시기 하나의 불교문화권을 이루었던 주변국가와 공유되었던 것으로 법장계 화엄종 사찰에서 주존으로 신앙되던 화엄법신불상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셋째, 신라 화엄종에는 이전부터 존재하던 촉지인을 결한 석가모니불상이나 시무외·여원인을 결한 노사나불상의 도상을 빌리지 않고, 중기밀교의 금강계 대일여래가 결하는 지권인을 채용하여『80화엄경』에 나타나는 새로운 화엄법신불을 형상화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특히 주목되는 바는 지권인 불상은 독존뿐만 아니라 다른 불·보살상과 조합을 이루어서 三尊, 三身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화엄불신론에 입각하여 독특한 조상형식으로 변용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상(노사나불상)은 금동아미타불상(석가모니불상)과 조합을 이루는데, 이는『화엄경』의 主佛을 行境과 解境의 十佛로 구분하는 지엄의 ‘二鍾十佛說’에 근거한 조상형식으로 생각된다. 또 해인사의 지권인 불상 2구는《해인사묘길상탑비》에 언급된 ‘華嚴二佛’을 상징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화엄이불은『60화엄경』과『80화엄경』의 경주인 노사나불과 비로자나불로써 존명이 다를 뿐 모두『화엄경』의 법신불을 가리킨다. 그리고 불국사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一體를 이루는 비로자나삼존불상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불상의 예를 볼 때,『80화엄경』이 새롭게 전래되었지만 경전의 내용 중에는 화엄법신불상을 형상화할 수 있는 구체적인 도상전거가 없기 때문에 나름의 화엄불신론에 입각해서『80화엄경』의 화엄법신불상을 조형화하고 신앙했던 것으로 판단하였다. 한편 지권인 불상은 8세기 중반부터 나타나지만 처음에는 그리 조성되지 않다가, 9세기 중반 이후부터 조성범위가 확대되고 조상형식이 다양해지는 등 널리 유행하면서 신라하대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지권인 불상 중에서 화엄종 사찰의 주존으로 신앙되었던 예는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곧『80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면서 지권인을 결한 비로자나불상을 주존으로 신앙하는 화엄종의 계파는 성립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바꾸어 말하면 신라 화엄종에서는『60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촉지인의 석가모니불상과 시무외·여원인의 노사나불상을 화엄법신불로 신앙하는 전통성이 매우 강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넷째, 현전하지 않는 불상이나 도상체계가 불확실한 불상까지 포함하여 통일신라 화엄계 불상의 전개양상을 파악해보면, 신라 화엄종 系派 간의 動向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라 화엄종의 주축이면서 촉지인의 석가모니불상을 주존으로 신앙했던 의상계 화엄종은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전반까지 부석사를 중심으로 하는 소백산일대에만 분포하다가 8세기 중반부터 王京으로 진출하면서 교단세력을 넓혀갔다. 9세기에는 화엄십찰을 조영하는 등 전국에 걸쳐 융성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편 주변국가와 같이 시무외·여원인의 노사나불상을 주존으로 신앙했던 법장계도 7세기 후반부터 9세기 후반까지 꾸준히 교단을 운영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9세기에 화엄종 중심사찰로 새롭게 부상했던 화엄사에 시무외·여원인의 노사나불상이 주존으로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점을 통해 이 계파가 의상계와 함께 신라 화엄종의 양축을 형성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섯째, 신라하대에 성립한 九山禪門은 대체로 시무외·여원인 노사나불상을 주존으로 봉안했다고 추정된다. 그런데 唐代 선종사원에는 佛殿을 마련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百丈淸規』의 규정에 비추어 본다면, 신라 선종사찰에서 노사나불상을 주존으로 신앙하는 것은 신라 선종의 특수성이라고 하겠다. 신라 선종사찰에서 노사나불상을 주존으로 신앙했던 이유는 선종에서 화엄종의 교단운영체계를 빌리면서 신앙대상까지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점을 통해서 신라하대에 화엄종이 여전히 불교계에서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불교계의 동향에 따라 화엄계 불상을 종파를 초월하여 선종사찰에서도 신앙되면서 더욱 확산되었다고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독자적인 화엄불신론을 바탕으로 같은 불교문화권 내의 다른 국가들과 차별되는 화엄계 불상을 조성하고 신앙하였다. 즉 통일신라시대 불교계는 이미 선진의 불교교학을 섭렵하고 독자적으로 전개되는 단계로 접어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주요한 흐름을 형성했던 화엄종에서는 나름의 화엄불신론에 입각하여『60화엄경』과『80화엄경』의 법신불을 구현하였던 것이다. 촉지인 불상과 시무외·여원인 불상은『60화엄경』의 법신불을 구현한 것이며, 지권인 불상은『80화엄경』의 법신불을 구현한 것이다. 화엄이 불교계를 이끄는 중심축으로 작용하면서, 이 3가지 형식의 불상들은 불교도들에게 가장 널리 신앙된 예배존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수준 높은 교학체계를 갖추고 그에 따른 화엄불신론에 입각하여 화엄법신불을 구현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唐에서 유입되는 불상도상을 모방하는데서 벗어나 나름의 예배존상을 형상화할 수 있는 역량을 마련했던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의 고찰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파악하였으며, 아울러 통일신라시대 불교조각사의 국제성과 독자성을 확인하였다.
통일신라시대 불교조각사에서 화엄계 불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특히 불교가 사회전반을 이끄는 이념이자 문화적인 번영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던 통일신라시대에는 화엄이 불교계의 주축을 이루면서 융성했기 때문에 자연히 화엄계 불상도 많이 조성되었다. 그러므로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은 불상의 양식이나 도상 특징을 통해서 당시 불교미술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라가 주변 국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완성한 국제적인 불교문화의 토대 위에서 어떻게 나름의 독자성을 추구하고 정착시켰는지를 규명할 수 있기 때문에 통일신라시대 불교조각사 연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의의가 자못 크다고 하겠다. 이 논문에서는 기왕의 관련연구를 통해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 중에 대표적인 예들만을 개별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파악되지 못했거나, 구체적으로 논의되지 못했던 연구과제들을 해명하는데 주안점을 두면서 통일신라시대 불교사적인 맥락 속에서 화엄계 불상을 다각적인 측면에서 규명하고자 했다. 즉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과 관련되는 선행연구는 대부분 석굴암 본존불상이나 석남사 석조비로자나불상 등의 한국조각사에서 비중이 큰 연구대상만을 개별적으로 다루거나,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미술 전반에 대해서 개괄적인 흐름을 소략하게 살펴보는 정도에 머물렀다. 이에 이 논문에서는 이미 논해진 바 있는 불상뿐만 아니라 그 동안 주목하지 못했던 화엄계 불상들을 새롭게 발굴하여 논의의 대상에 포함시키고, 그 불상들을 계통별로 묶어서 살펴봄으로써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의 전개양상을 구체적이면서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연구목적에 따라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을 촉지인, 시무외·여원인, 지권인의 형식으로 분류한 다음 각 계통의 불상들을 화엄불신론에 입각하여 분석하고 화엄교의적인 관점으로 해석함으로써, 신라 화엄종에서 어떤 불상을 주존으로 신앙했는지, 또 그 양상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규명하였다. 또 관련문헌이나 발굴조사를 통해서 화엄계 불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예나 도상체계를 판별할 수 없는 화엄계 불상까지 포괄하여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의 전개양상을 종합적으로 분석, 검토하였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 도출된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에 대한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라 화엄종의 주축을 이루었던 의상계에서는『60화엄경』을 바탕으로 의상의 화엄불신론에 입각하여 주존불상을 형상화하였다. 즉 의상계 화엄종에서는 석가모니의 모습 속에서 화엄의 법신불을 찾고자했기 때문에 촉지인을 결한 모습으로 주존불상을 형상화하였다. 신라 화엄종의 근본도량인 부석사 무량수전에 봉안된 소조아미타불상이 그러한 경우이다. 기왕의 연구에서 부석사 무량수전 소조아미타불상의 尊名은 밝혀진 바 있지만 이 불상은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이 아니라 석가모니불, 노사나불과 同格의 개념을 갖고 있는 華嚴一乘의 아미타불상으로 파악된다. 석굴암도 표훈과 신림에 의해서 조영된 의상계 화엄종 사찰이다. 석굴암은 38軀에 이르는 불상군이 하나의 조합을 이루고 있는데, 불상군의 중심에서 이들을 圓融하는 본존불상도 華嚴一乘의 개념을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 석굴암 본존불상은 석가모니의 정각을 표현한 인도 보드가야의 금강좌진용상을 模本으로 조성되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석가모니불의 개념 이외에도, 석굴암의 구조와 배치체계를 볼 때 본존불상은 문수보살상, 보현보살상과 함께 三尊을 이루기도 하며 11면관음보살상과는 완전히 포개져서 不二의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다. 즉 석굴암 본존불상은『화엄경』의 經主인 비로자나불을 대신하여 설법을 하거나, 화엄세계를 체험하도록 지혜를 주고 법계를 보여주는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협시로 三尊을 이루고 있다. 이 삼존불상을 의상의「화엄일승발원문」의 내용과 결부시켜 해석해보면, 본존불상은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통해서 깨달음의 세계를 설명하며 보살도를 실천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법신 비로자나불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의상의「백화도량발원문」에 나타나는 관음보살의 개념을 독립된 예배대상으로서 본존불상과 합치되는 11면관음보살상과 결부시켜보면, 화엄신앙을 실천하는 방편으로 정토왕생을 주재하는 아미타불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석굴암 본존불상은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의 성격을 圓融하여 하나의 불신에 담고 있다고 이해된다. 그리고 석굴암 본존불상은 11면관음보살과 同格을 이루면서 아미타불의 실천적인 신앙을 드러내는 것은 行境의 개념, 삼존으로 이루어진 법신으로써 根本佛의 尊格을 깨닫고 이해하는 解境의 개념을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의 불신을 빌어 나타내고 있다고 해석된다. 청량사의 석조불좌상은『화엄경』의「보살주처품」에서 유래된 사찰의 명칭이나「신라가야산해인사주원벽기」와「신라가야산해인사결계장기」에서 청량사의 소재지인 가야산을 청량산으로 언급하고 있음을 볼 때, 화엄종 사찰에 봉안된 주존불상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청량사 석조불좌상은 광배와 대좌에 화불과 보살상, 신장상을 배치되어 있어서 같은 시기에 조성된 통상적인 촉지인 불상과는 도상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청량사 석조불좌상과 형식 및 양식 면에서 가장 유사해서 그 도상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것은 용화전 석조불좌상이다. 보관과 영락으로 불신을 장엄하면서 광배와 대좌에 석가모니의 성도를 경축하는 권속을 표현하고 있는 용화전 석조불좌상은 菩提瑞像과 대좌의 형식과 도상요소가 일치한다. 이런 용화전 석조불좌상의 도상을 볼 때 청량사 석조불좌상도 보리서상을 모방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즉 청량사 석조불좌상은『화엄경』의 法身佛을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광배와 대좌에는 성도를 경축하고 법신불의 법문을 듣기위해 모여든 華嚴聖衆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둘째,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을 통해 시무외·여원인을 결한 노사나불상을 주존으로 신앙했던 신라 화엄종 계파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시무외·여원인은 모든 부처에게 통용되는 通印이지만, 근본적으로 석가모니불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 도상 역시 석가모니의 모습을 빌어『60화엄경』의 주존인 노사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이해된다. 7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화엄승려들이《일승법계도》가 곧 시무외·여원인 노사나불상과 일맥상통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는 해석을 볼 때, 그 때부터 시무외·여원인 노사나불상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진다. 또한 대좌 연판마다 화불이 새겨져 있는 8세기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불입상도 시무외·여원인 노사나불상으로 생각된다. 그리고『실상사사적기』에서 노사나불임을 밝히고 있어서 새롭게 재고되고 있는 실상사 철조불좌상, 현존하지 않지만《성주사비》의 기록과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된 철조불상의 손가락 잔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시무외·여원인 불상으로 밝혀진 성주사 철조불좌상도 같은 도상의 노사나불상으로 판단된다. 이상의 불상 예를 볼 때, 시무외·여원인을 결한 노사나불상은 촉지인 불상과 양축을 이루면서 신라 화엄종에서 주존으로 신앙되었으며, 그 도상은 같은 시기 하나의 불교문화권을 이루었던 주변국가와 공유되었던 것으로 법장계 화엄종 사찰에서 주존으로 신앙되던 화엄법신불상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셋째, 신라 화엄종에는 이전부터 존재하던 촉지인을 결한 석가모니불상이나 시무외·여원인을 결한 노사나불상의 도상을 빌리지 않고, 중기밀교의 금강계 대일여래가 결하는 지권인을 채용하여『80화엄경』에 나타나는 새로운 화엄법신불을 형상화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특히 주목되는 바는 지권인 불상은 독존뿐만 아니라 다른 불·보살상과 조합을 이루어서 三尊, 三身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화엄불신론에 입각하여 독특한 조상형식으로 변용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상(노사나불상)은 금동아미타불상(석가모니불상)과 조합을 이루는데, 이는『화엄경』의 主佛을 行境과 解境의 十佛로 구분하는 지엄의 ‘二鍾十佛說’에 근거한 조상형식으로 생각된다. 또 해인사의 지권인 불상 2구는《해인사묘길상탑비》에 언급된 ‘華嚴二佛’을 상징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화엄이불은『60화엄경』과『80화엄경』의 경주인 노사나불과 비로자나불로써 존명이 다를 뿐 모두『화엄경』의 법신불을 가리킨다. 그리고 불국사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一體를 이루는 비로자나삼존불상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불상의 예를 볼 때,『80화엄경』이 새롭게 전래되었지만 경전의 내용 중에는 화엄법신불상을 형상화할 수 있는 구체적인 도상전거가 없기 때문에 나름의 화엄불신론에 입각해서『80화엄경』의 화엄법신불상을 조형화하고 신앙했던 것으로 판단하였다. 한편 지권인 불상은 8세기 중반부터 나타나지만 처음에는 그리 조성되지 않다가, 9세기 중반 이후부터 조성범위가 확대되고 조상형식이 다양해지는 등 널리 유행하면서 신라하대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지권인 불상 중에서 화엄종 사찰의 주존으로 신앙되었던 예는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곧『80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면서 지권인을 결한 비로자나불상을 주존으로 신앙하는 화엄종의 계파는 성립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바꾸어 말하면 신라 화엄종에서는『60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촉지인의 석가모니불상과 시무외·여원인의 노사나불상을 화엄법신불로 신앙하는 전통성이 매우 강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넷째, 현전하지 않는 불상이나 도상체계가 불확실한 불상까지 포함하여 통일신라 화엄계 불상의 전개양상을 파악해보면, 신라 화엄종 系派 간의 動向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라 화엄종의 주축이면서 촉지인의 석가모니불상을 주존으로 신앙했던 의상계 화엄종은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전반까지 부석사를 중심으로 하는 소백산일대에만 분포하다가 8세기 중반부터 王京으로 진출하면서 교단세력을 넓혀갔다. 9세기에는 화엄십찰을 조영하는 등 전국에 걸쳐 융성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편 주변국가와 같이 시무외·여원인의 노사나불상을 주존으로 신앙했던 법장계도 7세기 후반부터 9세기 후반까지 꾸준히 교단을 운영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9세기에 화엄종 중심사찰로 새롭게 부상했던 화엄사에 시무외·여원인의 노사나불상이 주존으로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점을 통해 이 계파가 의상계와 함께 신라 화엄종의 양축을 형성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섯째, 신라하대에 성립한 九山禪門은 대체로 시무외·여원인 노사나불상을 주존으로 봉안했다고 추정된다. 그런데 唐代 선종사원에는 佛殿을 마련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百丈淸規』의 규정에 비추어 본다면, 신라 선종사찰에서 노사나불상을 주존으로 신앙하는 것은 신라 선종의 특수성이라고 하겠다. 신라 선종사찰에서 노사나불상을 주존으로 신앙했던 이유는 선종에서 화엄종의 교단운영체계를 빌리면서 신앙대상까지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점을 통해서 신라하대에 화엄종이 여전히 불교계에서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불교계의 동향에 따라 화엄계 불상을 종파를 초월하여 선종사찰에서도 신앙되면서 더욱 확산되었다고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독자적인 화엄불신론을 바탕으로 같은 불교문화권 내의 다른 국가들과 차별되는 화엄계 불상을 조성하고 신앙하였다. 즉 통일신라시대 불교계는 이미 선진의 불교교학을 섭렵하고 독자적으로 전개되는 단계로 접어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주요한 흐름을 형성했던 화엄종에서는 나름의 화엄불신론에 입각하여『60화엄경』과『80화엄경』의 법신불을 구현하였던 것이다. 촉지인 불상과 시무외·여원인 불상은『60화엄경』의 법신불을 구현한 것이며, 지권인 불상은『80화엄경』의 법신불을 구현한 것이다. 화엄이 불교계를 이끄는 중심축으로 작용하면서, 이 3가지 형식의 불상들은 불교도들에게 가장 널리 신앙된 예배존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수준 높은 교학체계를 갖추고 그에 따른 화엄불신론에 입각하여 화엄법신불을 구현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唐에서 유입되는 불상도상을 모방하는데서 벗어나 나름의 예배존상을 형상화할 수 있는 역량을 마련했던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의 고찰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파악하였으며, 아울러 통일신라시대 불교조각사의 국제성과 독자성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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