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는 한국 근대기의 대표적인 채색화가이다. 그는 19세기 말 인천에서 태어나 최초의 미술기관 ‘서화미술회’에서 서화교육을 받았다. 무엇보다 ‘서화미술회’ 출신 작가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채색화를 말년까지 지속적으로 작업했던 작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논문은 김은호의 생애와 시기별 화풍변화, 채색인물화, 그리고 그의 채색인물화가 후대에 끼친 영향 등에 대하여 살펴 본 것이다. 김은호 회화의 화풍 변화 양상은 크게 세시기로 요약할 수 있다. 학습기, 새로운 화풍의 수용, 김은호 화풍의 확립기로 나눈 화풍의 시기별 변천은 특히 화조화와 산수화에서 뚜렷하고 인물화 부분은 말년까지 큰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편이다. 첫 시기인 학습기에는 서화미술회 스승 안중식, 조석진의 화풍과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등의 화보를 바탕으로 화조화와 산수화를 제작하였다. 1925년을 전·후해서는 당시 유행하였던 새로운 화풍인 서양화와 일본화의 기법을 차용하여 작품에 응용한다. 다음 시기인 1930년대 중반부터는 김은호 양식이라 할 수 있는 섬세하고 절제된 간결미, 함축미가 드러나는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김은호의 섬세하고 깔끔한 화면구성은 그의 성실함과 유연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뚜렷하게 나타나는 작풍이라 할 수 있다. 확립 후기인 1950년 이후부터는 수요자들의 요구에 의해 화조화 제작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많은 수요자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에 체본(體本)을 가지고 제작했던 화조화가 다른 화목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작하기 용이했을 것이다. 후반기의 꿩 그림 등에 보이는 작품들은 수요자에 따라 밀도감이나 묘사 디테일이 달라져 가시적인 화격 비교가 가능한 부분이기도 하다. 산수화 양상은 초기에 남종화풍을 고수하였으나 새로운 화풍의 영향을 받은 시기에는 실경을 그린 풍경화식 산수화를 그리는 등 다양한 실험과 시도를 감행한다. 1950년대 이후에는 수묵과 채색으로 산수화를 제작하는데 이 일련의 그림들은 모두 금강산을 그린 것이다. 일부 채색산수화의 지나치게 원색적이고 분방한 작품은 해방이후의 시장원리가 적용된 것으로 대부분의 작품들은 수요자의 주문에 따른 것이었다. 체본을 바탕으로 제작한 화조화와 디테일이 적은 수묵. 채색산수화는 빠르게 제작할 수 있었던 장르로 수요자의 요청에 적합하였다. 이렇게 1950년대 이후 화조화와 산수화 작품에 나타나는 재제작과 다작은 ...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는 한국 근대기의 대표적인 채색화가이다. 그는 19세기 말 인천에서 태어나 최초의 미술기관 ‘서화미술회’에서 서화교육을 받았다. 무엇보다 ‘서화미술회’ 출신 작가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채색화를 말년까지 지속적으로 작업했던 작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논문은 김은호의 생애와 시기별 화풍변화, 채색인물화, 그리고 그의 채색인물화가 후대에 끼친 영향 등에 대하여 살펴 본 것이다. 김은호 회화의 화풍 변화 양상은 크게 세시기로 요약할 수 있다. 학습기, 새로운 화풍의 수용, 김은호 화풍의 확립기로 나눈 화풍의 시기별 변천은 특히 화조화와 산수화에서 뚜렷하고 인물화 부분은 말년까지 큰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편이다. 첫 시기인 학습기에는 서화미술회 스승 안중식, 조석진의 화풍과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등의 화보를 바탕으로 화조화와 산수화를 제작하였다. 1925년을 전·후해서는 당시 유행하였던 새로운 화풍인 서양화와 일본화의 기법을 차용하여 작품에 응용한다. 다음 시기인 1930년대 중반부터는 김은호 양식이라 할 수 있는 섬세하고 절제된 간결미, 함축미가 드러나는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김은호의 섬세하고 깔끔한 화면구성은 그의 성실함과 유연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뚜렷하게 나타나는 작풍이라 할 수 있다. 확립 후기인 1950년 이후부터는 수요자들의 요구에 의해 화조화 제작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많은 수요자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에 체본(體本)을 가지고 제작했던 화조화가 다른 화목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작하기 용이했을 것이다. 후반기의 꿩 그림 등에 보이는 작품들은 수요자에 따라 밀도감이나 묘사 디테일이 달라져 가시적인 화격 비교가 가능한 부분이기도 하다. 산수화 양상은 초기에 남종화풍을 고수하였으나 새로운 화풍의 영향을 받은 시기에는 실경을 그린 풍경화식 산수화를 그리는 등 다양한 실험과 시도를 감행한다. 1950년대 이후에는 수묵과 채색으로 산수화를 제작하는데 이 일련의 그림들은 모두 금강산을 그린 것이다. 일부 채색산수화의 지나치게 원색적이고 분방한 작품은 해방이후의 시장원리가 적용된 것으로 대부분의 작품들은 수요자의 주문에 따른 것이었다. 체본을 바탕으로 제작한 화조화와 디테일이 적은 수묵. 채색산수화는 빠르게 제작할 수 있었던 장르로 수요자의 요청에 적합하였다. 이렇게 1950년대 이후 화조화와 산수화 작품에 나타나는 재제작과 다작은 수요와 공급에 따른 시장원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이러한 다작은 그림의 완성도에 큰 영향을 주어 작품간 격차를 초래하였다. 인물화는 김은호의 회화적 특징과 장점이 확연히 드러나는 장르이다. 인물화는 성실함과 테크닉이 작품의 격을 결정하는 화목으로 임모에 능했던 김은호에게 가장 적합했던 장르였다. 김은호에게 인물화는 1912년 서화미술회 입문 직후 <송병준초상>을 제작 하면서 처음으로 주목 받았고, 이후 1915년 순종의 어진제작으로 이어져 공인된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기도 한다. 김은호의 인물화는 제재와 양식에 따라 초상화, 여성인물화, 고사·도석인물화, 기타 인물화로 분류 된다. 그는 1915년의 어진제작에 사진을 이용한 섬세한 화법으로 털끝만큼도 다르면 안된다는 초상화의 보편적 이상을 실현시켰다. 역사인물화 제작에도 역시 전통 초상화에 서양화법인 명암을 이용하여 안면 묘사에 입체적, 사실적 표현을 하여 현대 초상화의 새로운 형식을 확립하기도 한다. 여성인물화의 초기 작품에 보이는 배경과 인물의 부조화는 초상화가로 출발한 그가 초상화 기법을 미인도에 적용시켜서 생긴 문제였다. 이런 문제점은 1925년 동경유학을 전·후하여 수용한 일본화풍과 서양화풍으로 데생과 구도에 자연스러운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실험기를 거쳐 화풍의 확립기로 접어드는 30년대 중반 이후에는 그의 특장인 섬세하고 맑은 필치가 작품에 완연히 드러난다. 전통적으로 고사·도석인물화는 주제와 내용에 따라 도상이 정형화되어 있는 장르의 화목으로 대부분 주문에 의한 작품이다. 때문에 김은호도 주문에 의한 작품제작에 도상을 새롭게 창안해 내기 보다는 화보나 안중식, 조석진의 화풍에 자신의 화풍을 가미하여 제작한 것으로 확인 된다. 김은호가 끼친 채색인물화의 영향은 문하생인 후소회의 활동으로 확인할 수 있다. 후소회원들은 일제강점기 김은호의 미인도류와 연계된 여성인물화를 관전에 출품하여 매회 입상하는 특출한 성적을 거두었다. 해방 이후에는 정부나 지역기관에서 주도한 역사인물화 제작에 김은호와 후소회원들이 참여하면서 채색인물화 명맥은 지속시켰다. 이러한 후소회원들의 표준영정 작업에 김은호의 영향이 나타나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판단된다. 김은호 작품평가에 대한 걸림돌은 주지하듯이 일제강점기 제작한 <금차봉납(金釵奉納)>(1937), <일억일심(一億一心)(1942) 등의 작품과 조선남화연맹전, 반도총후전 등의 미술 활동으로 드러난 친일활동이 큰 작용을 하였다. 시대의식 결여로 인한 과오는 부정할 수 없는 문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들을 차지하더라도 김은호가 화업 초기부터 말년까지 끊임없는 작품 활동으로 수묵화 일색의 화단에서 채색인물화의 맥을 이어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김은호의 특출한 업적은 근대기에 후소회 등의 후진양성에 큰 역할을 한 점이다. 문하생들인 후소회는 다양한 작품 활동으로 두각을 보이며 채색화단을 주도하였고, 해방이후에는 그의 뒤를 이어 미술대학에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배출하는 디딤돌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김은호는 채색인물화의 전통을 전수, 보급하여 근대기 수묵화의 우위 속에서 채색화를 근대에서 현대로 맥을 잇게 하였고, 채색화 계파를 형성하여 동양화단에서 채색화의 미술사적 위치를 확고히 한 점은 매우 중요한 미술사적 의의로 볼 수 있다.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는 한국 근대기의 대표적인 채색화가이다. 그는 19세기 말 인천에서 태어나 최초의 미술기관 ‘서화미술회’에서 서화교육을 받았다. 무엇보다 ‘서화미술회’ 출신 작가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채색화를 말년까지 지속적으로 작업했던 작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논문은 김은호의 생애와 시기별 화풍변화, 채색인물화, 그리고 그의 채색인물화가 후대에 끼친 영향 등에 대하여 살펴 본 것이다. 김은호 회화의 화풍 변화 양상은 크게 세시기로 요약할 수 있다. 학습기, 새로운 화풍의 수용, 김은호 화풍의 확립기로 나눈 화풍의 시기별 변천은 특히 화조화와 산수화에서 뚜렷하고 인물화 부분은 말년까지 큰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편이다. 첫 시기인 학습기에는 서화미술회 스승 안중식, 조석진의 화풍과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등의 화보를 바탕으로 화조화와 산수화를 제작하였다. 1925년을 전·후해서는 당시 유행하였던 새로운 화풍인 서양화와 일본화의 기법을 차용하여 작품에 응용한다. 다음 시기인 1930년대 중반부터는 김은호 양식이라 할 수 있는 섬세하고 절제된 간결미, 함축미가 드러나는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김은호의 섬세하고 깔끔한 화면구성은 그의 성실함과 유연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뚜렷하게 나타나는 작풍이라 할 수 있다. 확립 후기인 1950년 이후부터는 수요자들의 요구에 의해 화조화 제작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많은 수요자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에 체본(體本)을 가지고 제작했던 화조화가 다른 화목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작하기 용이했을 것이다. 후반기의 꿩 그림 등에 보이는 작품들은 수요자에 따라 밀도감이나 묘사 디테일이 달라져 가시적인 화격 비교가 가능한 부분이기도 하다. 산수화 양상은 초기에 남종화풍을 고수하였으나 새로운 화풍의 영향을 받은 시기에는 실경을 그린 풍경화식 산수화를 그리는 등 다양한 실험과 시도를 감행한다. 1950년대 이후에는 수묵과 채색으로 산수화를 제작하는데 이 일련의 그림들은 모두 금강산을 그린 것이다. 일부 채색산수화의 지나치게 원색적이고 분방한 작품은 해방이후의 시장원리가 적용된 것으로 대부분의 작품들은 수요자의 주문에 따른 것이었다. 체본을 바탕으로 제작한 화조화와 디테일이 적은 수묵. 채색산수화는 빠르게 제작할 수 있었던 장르로 수요자의 요청에 적합하였다. 이렇게 1950년대 이후 화조화와 산수화 작품에 나타나는 재제작과 다작은 수요와 공급에 따른 시장원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이러한 다작은 그림의 완성도에 큰 영향을 주어 작품간 격차를 초래하였다. 인물화는 김은호의 회화적 특징과 장점이 확연히 드러나는 장르이다. 인물화는 성실함과 테크닉이 작품의 격을 결정하는 화목으로 임모에 능했던 김은호에게 가장 적합했던 장르였다. 김은호에게 인물화는 1912년 서화미술회 입문 직후 <송병준초상>을 제작 하면서 처음으로 주목 받았고, 이후 1915년 순종의 어진제작으로 이어져 공인된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기도 한다. 김은호의 인물화는 제재와 양식에 따라 초상화, 여성인물화, 고사·도석인물화, 기타 인물화로 분류 된다. 그는 1915년의 어진제작에 사진을 이용한 섬세한 화법으로 털끝만큼도 다르면 안된다는 초상화의 보편적 이상을 실현시켰다. 역사인물화 제작에도 역시 전통 초상화에 서양화법인 명암을 이용하여 안면 묘사에 입체적, 사실적 표현을 하여 현대 초상화의 새로운 형식을 확립하기도 한다. 여성인물화의 초기 작품에 보이는 배경과 인물의 부조화는 초상화가로 출발한 그가 초상화 기법을 미인도에 적용시켜서 생긴 문제였다. 이런 문제점은 1925년 동경유학을 전·후하여 수용한 일본화풍과 서양화풍으로 데생과 구도에 자연스러운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실험기를 거쳐 화풍의 확립기로 접어드는 30년대 중반 이후에는 그의 특장인 섬세하고 맑은 필치가 작품에 완연히 드러난다. 전통적으로 고사·도석인물화는 주제와 내용에 따라 도상이 정형화되어 있는 장르의 화목으로 대부분 주문에 의한 작품이다. 때문에 김은호도 주문에 의한 작품제작에 도상을 새롭게 창안해 내기 보다는 화보나 안중식, 조석진의 화풍에 자신의 화풍을 가미하여 제작한 것으로 확인 된다. 김은호가 끼친 채색인물화의 영향은 문하생인 후소회의 활동으로 확인할 수 있다. 후소회원들은 일제강점기 김은호의 미인도류와 연계된 여성인물화를 관전에 출품하여 매회 입상하는 특출한 성적을 거두었다. 해방 이후에는 정부나 지역기관에서 주도한 역사인물화 제작에 김은호와 후소회원들이 참여하면서 채색인물화 명맥은 지속시켰다. 이러한 후소회원들의 표준영정 작업에 김은호의 영향이 나타나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판단된다. 김은호 작품평가에 대한 걸림돌은 주지하듯이 일제강점기 제작한 <금차봉납(金釵奉納)>(1937), <일억일심(一億一心)(1942) 등의 작품과 조선남화연맹전, 반도총후전 등의 미술 활동으로 드러난 친일활동이 큰 작용을 하였다. 시대의식 결여로 인한 과오는 부정할 수 없는 문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들을 차지하더라도 김은호가 화업 초기부터 말년까지 끊임없는 작품 활동으로 수묵화 일색의 화단에서 채색인물화의 맥을 이어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김은호의 특출한 업적은 근대기에 후소회 등의 후진양성에 큰 역할을 한 점이다. 문하생들인 후소회는 다양한 작품 활동으로 두각을 보이며 채색화단을 주도하였고, 해방이후에는 그의 뒤를 이어 미술대학에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배출하는 디딤돌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김은호는 채색인물화의 전통을 전수, 보급하여 근대기 수묵화의 우위 속에서 채색화를 근대에서 현대로 맥을 잇게 하였고, 채색화 계파를 형성하여 동양화단에서 채색화의 미술사적 위치를 확고히 한 점은 매우 중요한 미술사적 의의로 볼 수 있다.
Kim Eun-ho (1892-1979) was one of Korea's leading modern color painters. Born in Incheon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he was educated in calligraphy and painting at the Seohwa Misulhoe (“Calligraphy and Painting Association”), Korea's first art college. Kim is notable for being the only graduate ...
Kim Eun-ho (1892-1979) was one of Korea's leading modern color painters. Born in Incheon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he was educated in calligraphy and painting at the Seohwa Misulhoe (“Calligraphy and Painting Association”), Korea's first art college. Kim is notable for being the only graduate of the Seohwa Misulhoe to have kept producing color paintings until his final years.
This study examines Kim's life, periodical changes in painting style, figure paintings, and the influence of his color figure paintings on later generations. Kim Eun-ho's paintings can broadly be divided into three periods: that of learning, that of embracing new styles, and that during which his own style was established. These divisions are particularly noticeable in the artist's “flower and bird” and landscape paintings. During his initial learning period, Kim produced works based on the styles of his teachers, An Jung-sik and Jo Seok-jin, and on painting albums such as the Manual of the Mustard Seed Garden (芥子園畵傳). Around 1925, he began borrowing techniques from newly-discovered Western and Japanese painting and applying them to his own works. During his next period, which began in the mid-1930s, the artist started producing works that showed a subtle and simple inner beauty that can be described as the “Kim Eun-ho style.” From the late-1950s, the later part of his established period, Kim produced more flower and bird paintings in response to demand from clients. This is thought to be because such works, based on a single model and similar to each other, were easier to paint than those in other genres. Kim painted his early landscapes in the Southern School style. During his next period, that of embracing other styles, his works became more experimental and included attempts to produce Western-style landscapes. From the 1950s, he painted a large number of colored ink-and-wash landscapes, all of which took Mt. Geumgangsan as their subject. Some of these, largely works commissioned by clients, were excessively showy in character. Flower and bird works painted according to a model, and ink or colored landscapes, with few details, were quick to produce and thus ideal genres to paint by commission. There is a commercial aspect to works thus produced from the 1950s by Kim in large numbers due to demand from clients. Such prolificacy also affected the standard of the works themselves. Figure paintings demonstrate Kim's artistic characteristics and strengths particularly well. Dependent on the faithfulness and technique of the artist, this genre was well-suited to Kim. He was first noticed for his work Song Byeong-jun chosang (“Portrait of Song Byeong-jun”), produced immediately after he entered Seohwa Misulhoe. Later, in1915, Kim achieved official recognition and renown as a portrait artist after painting Emper or Sunjong. Kim's figure paintings can be categorized in terms of subject and style into portraits; female figures; figures from legends, history, and Taoist or Buddhist lore; and other figure paintings. In his 1915 portrait of Emperor Sunjong, Kim adhered to the universal portrait principle of referring to a photograph and reproducing its content exactly on canvas. In his works depicting historical figures, too, Kim combined traditional portrait technique with Western styles, creating a new form of contemporary Korean portrait. The incongruity between figures and backgrounds found in Kim's early female figure paintings arose from his application of portrait techniques to the traditional miindo (美人圖; “beautiful woman painting”) genre. Around 1925, while studying in Tokyo, Kim embraced Western and Japanese styles, bringing natural change to his drawings and composition. From the mid-1930s, the time of his transition from experimentation to an established style, Kim's works show a subtle, clear touch. Traditionally, paintings of figures from legends, history, and Taoist or Buddhist lore take standard forms in accordance with subject or story content; most are produced on commission. Kim, too, modeled his works in this genre after Chinese painting albums or the works of An Jung-sik and Jo Seok-jin, rather than creating new styles or formats of his own. Kim's influence on color painting is demonstrated by the activity of the Husohoe, an association of his student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members of the association submitted female figure paintings similar to Kim's miindo to the Chosen Fine Arts Exhibition, winning prizes every year. After liberation, they produced large numbers of historical figure paintings commissioned by central and provincial governments, continuing Kim's style of color figure painting.
This study was motivated by recognition of the fact that no systematic analysis or objective assessment of Kim's oeuvre, despite the diverse body of work that he produced in the span of a 68-year career, has so far been conducted. As is well known, Kim's pro-Japanese activities during the colonial period, including his production of the work Geumchabongnap (1937) and participation in pro-Japanese events such as the Chosen Southern School Painting Youth League Exhibition and the Peninsula Home front Exhibition, have presented a serious obstacle to the assessment of his works themselves. His mistakes, made through a lack of patriotic consciousness, are undeniably problematic. It is also undeniable, however, that Kim's constant production of color paintings from his early years as an artist to old age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Korean color painting world. Another particular achievement of Kim was his passionate support for the next generation of artists, including members of the Husohoe. The association took a leading role in color painting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producing a large number of works and going on to teach many students at art universities after liberation.
Kim Eun-ho is thus an important artist in passing down and disseminating the tradition of modern color painting, and ensuring its continuity into the present. He can also be regarded as a highly significant figure in Korean art history thanks to his work in establishing the status of contemporary color painting.
Keyword Kim Eun-ho , figure painting ,Seohwa Misulhoe, portrait Emperor Sunjong,, Korea traditional portrait, traditional miindo(美人圖; “beautiful woman painting”), Husohoe(後素會), modern color painting, Chosen Fine Arts Exhibition, of historical figure paintings
Kim Eun-ho (1892-1979) was one of Korea's leading modern color painters. Born in Incheon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he was educated in calligraphy and painting at the Seohwa Misulhoe (“Calligraphy and Painting Association”), Korea's first art college. Kim is notable for being the only graduate of the Seohwa Misulhoe to have kept producing color paintings until his final years.
This study examines Kim's life, periodical changes in painting style, figure paintings, and the influence of his color figure paintings on later generations. Kim Eun-ho's paintings can broadly be divided into three periods: that of learning, that of embracing new styles, and that during which his own style was established. These divisions are particularly noticeable in the artist's “flower and bird” and landscape paintings. During his initial learning period, Kim produced works based on the styles of his teachers, An Jung-sik and Jo Seok-jin, and on painting albums such as the Manual of the Mustard Seed Garden (芥子園畵傳). Around 1925, he began borrowing techniques from newly-discovered Western and Japanese painting and applying them to his own works. During his next period, which began in the mid-1930s, the artist started producing works that showed a subtle and simple inner beauty that can be described as the “Kim Eun-ho style.” From the late-1950s, the later part of his established period, Kim produced more flower and bird paintings in response to demand from clients. This is thought to be because such works, based on a single model and similar to each other, were easier to paint than those in other genres. Kim painted his early landscapes in the Southern School style. During his next period, that of embracing other styles, his works became more experimental and included attempts to produce Western-style landscapes. From the 1950s, he painted a large number of colored ink-and-wash landscapes, all of which took Mt. Geumgangsan as their subject. Some of these, largely works commissioned by clients, were excessively showy in character. Flower and bird works painted according to a model, and ink or colored landscapes, with few details, were quick to produce and thus ideal genres to paint by commission. There is a commercial aspect to works thus produced from the 1950s by Kim in large numbers due to demand from clients. Such prolificacy also affected the standard of the works themselves. Figure paintings demonstrate Kim's artistic characteristics and strengths particularly well. Dependent on the faithfulness and technique of the artist, this genre was well-suited to Kim. He was first noticed for his work Song Byeong-jun chosang (“Portrait of Song Byeong-jun”), produced immediately after he entered Seohwa Misulhoe. Later, in1915, Kim achieved official recognition and renown as a portrait artist after painting Emper or Sunjong. Kim's figure paintings can be categorized in terms of subject and style into portraits; female figures; figures from legends, history, and Taoist or Buddhist lore; and other figure paintings. In his 1915 portrait of Emperor Sunjong, Kim adhered to the universal portrait principle of referring to a photograph and reproducing its content exactly on canvas. In his works depicting historical figures, too, Kim combined traditional portrait technique with Western styles, creating a new form of contemporary Korean portrait. The incongruity between figures and backgrounds found in Kim's early female figure paintings arose from his application of portrait techniques to the traditional miindo (美人圖; “beautiful woman painting”) genre. Around 1925, while studying in Tokyo, Kim embraced Western and Japanese styles, bringing natural change to his drawings and composition. From the mid-1930s, the time of his transition from experimentation to an established style, Kim's works show a subtle, clear touch. Traditionally, paintings of figures from legends, history, and Taoist or Buddhist lore take standard forms in accordance with subject or story content; most are produced on commission. Kim, too, modeled his works in this genre after Chinese painting albums or the works of An Jung-sik and Jo Seok-jin, rather than creating new styles or formats of his own. Kim's influence on color painting is demonstrated by the activity of the Husohoe, an association of his student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members of the association submitted female figure paintings similar to Kim's miindo to the Chosen Fine Arts Exhibition, winning prizes every year. After liberation, they produced large numbers of historical figure paintings commissioned by central and provincial governments, continuing Kim's style of color figure painting.
This study was motivated by recognition of the fact that no systematic analysis or objective assessment of Kim's oeuvre, despite the diverse body of work that he produced in the span of a 68-year career, has so far been conducted. As is well known, Kim's pro-Japanese activities during the colonial period, including his production of the work Geumchabongnap (1937) and participation in pro-Japanese events such as the Chosen Southern School Painting Youth League Exhibition and the Peninsula Home front Exhibition, have presented a serious obstacle to the assessment of his works themselves. His mistakes, made through a lack of patriotic consciousness, are undeniably problematic. It is also undeniable, however, that Kim's constant production of color paintings from his early years as an artist to old age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Korean color painting world. Another particular achievement of Kim was his passionate support for the next generation of artists, including members of the Husohoe. The association took a leading role in color painting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producing a large number of works and going on to teach many students at art universities after liberation.
Kim Eun-ho is thus an important artist in passing down and disseminating the tradition of modern color painting, and ensuring its continuity into the present. He can also be regarded as a highly significant figure in Korean art history thanks to his work in establishing the status of contemporary color painting.
Keyword Kim Eun-ho , figure painting ,Seohwa Misulhoe, portrait Emperor Sunjong,, Korea traditional portrait, traditional miindo(美人圖; “beautiful woman painting”), Husohoe(後素會), modern color painting, Chosen Fine Arts Exhibition, of historical figure pain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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