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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羲之 王鐸의 審美意識과 書藝美 硏究
A Study on the Aesthetic Awareness and Calligraphic Aesthetics of Wang Xi Zhi and Wang Duo 원문보기


박원희 (대전대학교 일반대학원 서예미학과 국내박사)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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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羲之・王鐸의 審美意識과 書藝美 硏究


東晋의 王羲之(303~361 또는 307~365)는 晉・漢 이래로 형성된 篆書와 隸書의 서로 다른 필법을 바탕으로 그의 楷書, 行書, 草書에 융해시켜 中和의 美를 갖춘 자신의 서예를 완성시켰다. 이 때문에 왕희지는 중국서예사에서 서예의 전형이 되었고 특히 唐 太宗에 의해 書聖으로 추앙받으면서 중국 서예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되었다.
그의 작품은 필법이 정밀하고 교묘하여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蘭亭敍>는 필법 뿐 만 아니라 문학적인 측면에서도 높이 평가 받고 있으며 널리 알려져 있다. <난정서>외에도 행서로 <集字聖敎序>와 <興福寺斷碑>가 있으며, 해서로 <樂毅論>, <黃庭經>이 있고, 초서로 <十七帖>, <喪亂帖> 등이 있어 후인들에게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왕희지는 글씨 쓰는데 있어서 뜻이 붓보다 앞에 있어야 한다는 ‘意在筆先’을 중시하였다. 또한 글씨의 평정함과 안온한 성정을 중시하는 중화미를 강조하였으며 그리고 자형에서 자연의 무궁한 변화를 중시하고 고정되지 않은 개성을 드러내는 無爲自然의 道家的 美意識을 중시하였다. 그런 서예인식은 그의 서예와 서론 전반에 내재되어 있다.
왕희지 서예의 사상적 기반은 궁극적 가치를 인간 세상 밖의 자연에 둔다는 자연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으며 유가와 함께 道家의 미학사상에 접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東晋시기 玄學의 영향으로 불교 또한 관념적 불학으로 변화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의 귀족재사들은 이를 수용하였으며 왕희지도 깊이 이해하고 깨달았다.
왕희지는 태생적으로 유가의 외관을 지닌 예술가이면서 장자의 자연사상과 불교사상이 더해진 ‘천지 만물은 다 無爲를 근본으로 한다’는 사유를 하지만 다시 유교로 회귀해 간다.
王鐸(1592~1652)은 명말 청초에 활동하였던 인물로 帖學으로 일가를 이루었는데 당시의 서예가 黃道周, 倪元璐와 함께 유명하였다. 그러나 만주족의 淸朝가 들어오면서 明의 舊臣으로 신왕조를 섬겨야 했던 왕탁은 「貳臣傳」에 오르는 등 불명예를 받게 되었다. 당시 자존심이 지극히 훼손된 한족 중심의 中華的 입장에서 不事二君하지 못한 왕탁의 행적 때문에 왕탁의 서예적 가치와 지위는 격하되었던 것이다.
왕탁의 學書淵源을 보면 字形, 章法, 墨色 등에서 전통 서예를 學書하였다. 그는 오랜 시간 연마하여 독자적인 서체를 완성하였다. 왕탁의 서예에 큰 영향을 준 서예가로 동진의 왕희지와 왕헌지 부자, 당의 안진경과 회소, 송의 미불 등을 들 수 있다.
왕탁과 교우관계에 있던 倪元璐는 ��倪氏雜著筆法��에서 왕탁의 학서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왕탁은 글씨를 쓸 때 하루는 법첩을 임서하였고, 하루는 창작을 하는 것을 반복하기를 평생을 변함이 없었고, 이것을 하루도 멈추지 않았다.

위의 내용을 통해서 왕탁은 임서와 창작을 같이 중요시하고 평생 부지런한 학서 태도를 간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탁은 그의 글씨가 古法에 근원하고 二王父子의 글씨를 숭상한다고 밝히고 있다. 청대의 康有爲는 왕탁의 행서를 筆力驚絶이라 하였고 근현대에 들어와서야 왕탁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하는 논고들이 발표되고 있다.
왕희지의 書論인 「自論書」, 「題衛夫人筆陣圖後」, 「書論」, 「筆勢論十二章幷序」를 보면 생동감과 호방함이 있는 陽剛美를 추구하며 법도를 중요시하는 심미의식과 형태를 중요하게 여기는 종합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는 중국 고대 미학이 위진시대 이래로 출현하였던 情感과 主體와 資質을 중시하면서 精神과 資質無法을 강조하는 것으로 성장하였다.
왕탁의 서론은 그의 題跋文에서 조금씩 살펴볼 수 있다. 그는 <米芾吳江舟中詩跋>에서

米芾 글씨는 왕희지와 왕헌지에 근본을 두고서 縱橫으로 가볍게 운필하는 것은 神仙이 나르는 것 같다. <난정서>의 필법을 깊이 얻고 모방한 것을 찾아 볼 수가 없으니 나는 그 아래에서 焚香하며 누워 있을 것이다.

라고 하여 米芾이 二王을 追從하였지만 글씨의 形態를 닮지 않고 그 글씨의 精神을 收用하고 있다고 여겨서 높이 評價 하였다. 또한 王鐸은 <琅華館帖> 冊跋에서

글씨 쓰는데 옛 것을 스승삼지 않으면 속된 길로 빠지기 쉽다. 이것은 詩文을 짓는 것과 같으니 法이 있은 후에야 합당하다. 그런바 六律이 아니면 능히 五音을 바로 조정할 수 없다. 악기와 바둑에서 樂譜가 있는 것과 같다.
그런 면에서 詩를 알려면 風・雅・頌을 보아야 하며, 文章을 알려면 夏・商・周・秦・漢의 일을 또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스승이란 옛 것이므로 옛 것을 떠나지 말아야 하고 옛것을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옛 것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文章을 공부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라 하여 古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로서 그가 保守的이고 傳統的인 學書觀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왕희지는 종요 해서를 계승하였다. 대표적인 해서로 <樂毅論>과 <東方朔畵讚>과 <黃庭經> 등이 있는데 이 작품들을 중심으로 서예미를 비교하였다. 행서는 그의 최고 작품인 <蘭亭敍>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으며, 초서는 <喪亂帖>을 중심으로 살폈다.
왕탁의 해서는 세 가지로 그 특징을 살필 수 있다. 첫째는 魏晋의 小楷風이 나타나며, 둘째는 唐의 顔眞卿과 柳公權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고, 셋째는 大楷보다 小楷가 많다는 것이다. 행서는 二王을 宗으로 삼지만 書奴가 되지 않았다. 그는 늘 逸少와 子敬의 筆墨章法을 사용하지만 변화를 주어서 溫文爾雅한 魏晉韻致를 벗어나 雄強恣肆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안진경과 미불의 글씨를 매우 존중하였으며 한편으로 학습하였다. 특히 그의 행서에서 미불의 영향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왕탁은 행서와 초서에 능통했다. 특히 행초와 초서가 섞인 行草書에서 그의 서예적 재능을 발휘했다. 행서와 초서의 특징을 겸한 행초서는 독특한 예술성이 있다. 왕탁은 많은 행초서를 남겨 놓았으며 당시에 뛰어남을 인정받았다.
따라서 왕희지 서예와 왕탁 서예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왕희지는 法을 爲主로 하는 內擫法을 사용하였다. 그의 ...

학위논문 정보

저자 박원희
학위수여기관 대전대학교 일반대학원
학위구분 국내박사
학과 서예미학과
지도교수 정태희
발행연도 2017
언어 kor
원문 URL http://www.riss.kr/link?id=T14557333&outLink=K
정보원 한국교육학술정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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