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한국 천주교 순교자신심과 순교자현양운동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우선 시대순으로 Ⅰ부 박해시기, Ⅱ부 개항과 근대시기, Ⅲ부 일제강점기로 분류한 후, 시기별로의 순교자신심의 형성, 확산, 확장 과정에 따라 다시 총 6개의 장으로 구성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구체적으로는 한국 천주교 역사 안에서 순교자신심의 형성 배경과 진행 과정, 그리고 순교자현양에 영향을 준 요인들에 주목하였다. 더불어 순교자신심과 순교자현양이 당대 신자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분석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본 논문은 역사방법론을 도입하였다. 순교자신심과 현양에 관련된 교회사적 사건들을 정리하고, 이에 대한 사료를 찾아 수집한 후 그 신학적 의미를 도출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통해 아래와 같은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박해시기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을 비롯하여, 2014년에 시복된 124명의 순교자들을 대상으로 순교자신심의 형성 배경을 살펴보았다. 특히 순교자들의 순교와 순교적 삶, 그리고 신앙 실천에 초점을 맞추어, 순교자신심의 본질적인 의미를 찾아보았다. 그 결과 윤지충과 권상연, 그리고 122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천주교 교리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자신들이 깨달은 하느님을 확고하게 고백하였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 효와 충을 더욱 철저히 지켰으며,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존엄하다는 것을 삶으로 드러냈다. 또한 그들은 현실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했으며, 형제애를 통하여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실천의 중요성을 확신하였다. 당시 많은 신자들은 이와 같은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본받고자 결심했고, 순교자들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철저히 영위하고자 신앙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이처럼 박해시기 순교자들이 보여 준 삶과 신앙의 모범은 당대 신자들 사이에서 순교자에 대한 공경의 마음 안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가치를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신심으로 드러났다. 그러므로 박해시기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주목할 때, 순교자신심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에 따라 앞으로도 순교자신심의 본질과 가치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순교자의 삶과 신앙에 주목해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개항 이후 선교사들의 재입국 과정과 1866년 박해 때 살아남은 신자들과의 만남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박해가 종식된 이후, 교구장의 선교정책에 따라 선교사들과 신자들이 합심하여 교회를 재건하던 시기를 대상으로 순교자신심이 신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개항 이후 선교사들은 조선 재입국에 성공하였고, 당시 살아남은 신자들은 재입국한 선교사들을 위해 선교 거점 공간을 마련해 놓았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선교사들은 박해시기 동안 순교자신심의 요람인 교우촌에서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는 신자들을 만났고,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성사생활을 통해서 영적인 위로를 주고받았다. 그 후 선교사들은 박해시기에 순교한 선배 선교사들이 보여 준 헌신적인 열정을 간직하며 살았으며, 신자들도 선배 신앙인들이 살아온 삶과 신앙의 방식을 지켜내면서 교회정책에 최선을 다해 협력하였다. 그리고 개항 이후 교구장들은 박해시기 조선 순교자들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일환으로 교구장들은 박해시기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다양한 노력들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신자들이 순교자에 대한 공경의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가도록 도와주었고, 순교자신심 확산에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조선 순교자 연구와 시복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인 교구장 뮈텔이 보여 준 순교자신심을 주목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뮈텔은 사목활동을 하는 동안 순교자신심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뮈텔이 보여 준 순교자에 대한 관심은 동료 선교사들과 신자들에게 전해져 당시 순교자신심 고취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는 순교자신심이 확산되고, 순교자에 대한 현양이 진행되는 데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셋째, 근대 이후로 넘어가는 시기에 교회는 순교와 순교자에 대한 기억을 현재화하려는 노력 가운데 순교자신심에 대한 이론적 배경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그래서 순교자에 대한 교구장들의 인식 내용, 교회 간행물들에서 드러나는 순교ㆍ순교자에 대한 이해, 그리고 순교자에 관한 다양한 연구 활동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1900년대 이후 조선 천주교회 교구장들이 순교자를 ‘전구자’, ‘신앙의 증거자’, ‘덕행의 모범자’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교구장들은 순교자들이 ‘신덕’과 ‘용덕’을 가진 인물임을 강조하면서, 신자들에게도 순교자들의 ‘신덕’과 ‘용덕’을 본받으며 살아가기를 독려했다. 이어서 교회 간행물을 통한 순교ㆍ순교자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신덕’과 ‘용덕’을 강조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교회 간행물에서는 순교에 대한 개념 이해, 용어 해설, 시복과 시성에 대한 의미, 주요 절차 과정, 순교자 명단이나 약전 등을 지속적으로 소개하였다. 특히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 안에서 평신도의 자발적 신앙 도입과 순교자들의 신앙고백 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은 결국 교회 간행물을 접하는 신자들로 하여금 순교자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순교복자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이 시기의 교회 간행물의 내용에는 교회 역사에 관한 연구물들이 계속적으로 실렸음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이 연구물들은 당시 신자들에게 교회 역사와 순교자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계기가 된 사실도 살펴보았다. 또한 조선 천주교 전래의 기원을 밝히는 작업들은 조선 교회의 뿌리를 확인하는 중요한 작업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의 인식이나 교회 간행물 등을 통해서 드러난 순교자에 대한 ‘신덕’과 ‘용덕’ 중심의 인식은 순교자신심이 이원론적, 내세지향적 신심으로 흘러가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넷째, 일제 강점 당시에 거행된 시복식을 전후로 하여 순교자신심이 확장되고, 순교자에 대한 현양이 활성화되는 과정들을 검토하였다. 그래서 시복을 위한 교구장들의 일치된 노력과 「조선 치명자 시복식 반포와 교유서」를 통한 순교복자에 대한 약전 소개가 순교자신심 확장의 주요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순교복자축일에 전례 안에 수용된 것으로 순교복자 기도문 반포와 복자찬양가, 순교복자 유해 공경과 친구 예절도 주요 요인이 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교구장과 교회 잡지가 순교복자의 시성과 관련하여 순교복자께 기도하기를 강조한 사실도 확장 요인에 해당되었다. 이어서 순교자신심 확장의 매개 요인 중에 신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우선 시복 준비 과정에서 교구장들이 일치된 노력을 보였다는 사실은 긍정적인 면이었다. 이는 신자들로 하여금 조선 순교자 시복에 대한 관심을 높여 주었다. 교구장들은 시복된 순교자에 대한 약전을 신자들에게 소개함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순교복자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 주었다. 또한 교구장들은 순교복자 기도문 반포를 통해 순교복자들의 ‘신덕’과 ‘용덕’을 강조함으로써 신자들이 그들의 덕행을 본받도록 이끌어주었다. 복자찬양가의 경우 전례 때마다 노래함으로써 신자들이 가사를 통해 순교자들의 모습을 본받아 용감하고 굳은 신앙을 간직하여 살아가도록 도와주었다. 순교복자 유해 공경과 친구 예절은 박해시기 순교자들의 모습을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교구장과 교회 잡지가 순교복자들의 시성을 위해 기도와 기적을 간구하도록 권장함으로써 순교복자들이 기도의 주된 대상됨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순교복자 기도문이나 복자찬양가의 내용을 보면, 순교자들의 덕행 중에서 ‘신덕’과 ‘용덕’만을 강조하고, 또한 그들의 거룩한 죽음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는 신자들로 하여금 순교자들이 순교를 결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원동력, 그러니까 삶과 신앙 내용을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순교복자 기도문과 복자찬양가는 세상을 ‘삼구’로 묘사한 후, 순교자들은 이와 같은 악한 세상에서 용맹을 발휘한 군사로 전쟁터에서 승리한 인물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순교자들이 죽음 이후에 천상복락을 누리는 모습만을 부각시켜 놓음으로써, 순교자신심 자체를 신자들이 내세지향적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또한, 교구장과 교회 잡지는 신자들이 순교복자들께 기적 청원을 바라는 기도를 하도록 지나치게 강조하며 순교자신심을 현세구복적 행위로 비추어지게 하였다. 시복식 이후 교회 역사와 관련된 대규모 기념행사 역시 순교자신심 확장의 매개 요인이 되었다. 교구 차원에서 진행된 이 행사는 당시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신자들은 행사를 통해서 교회사의 중요한 사건과 순교자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규모 기념행사는 순교자신심이 행사 위주의 신심으로 인식될 여지를 남겼다. 또한 박해시기 순교자들의 죽음을 강조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는 행사의 궁극적 목적을 신자들에게 순교자들의 투철한 신앙과 불굴의 용맹심을 전하는 데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대규모 기념행사는 당시 신자들에게 순교자신심이 가지는 본질적인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전달하지는 못하였다. 다섯째, 연구는 일제 강점 말기 조선 내 모든 종교가 탄압을 받았고, 그 중에 교회 역시 일제의 종교정책에 순응한 사실과 순교자신심을 왜곡시킨 내용까지도 확인하였다. 그리고 교회는 박해시기 때부터 신앙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온 순교자신심을 ‘순교정신’으로 왜곡시킨 후, 일제가 저지른 침략전쟁의 정당성을 옹호한 사실도 살펴보았다. 특히 1939년 당시 교회는 순교자현양회 설립을 준비하면서, 이 단체의 설립 목적이 일제를 위한 훌륭한 보국(報國)운동이라고 명시한 사실도 파악하였다. 그리고 잡지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지키는 사람은 국가의 충신임은 물론, 하느님 앞에서도 훌륭한 순교자, 치명자가 된다고 말한 사실도 확인하였다. 또한,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을 칭송한 후, 그들이 ‘순교정신’으로 싸우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순교정신’은 곧 일제를 위한 ‘순국’임을 강조한 사실도 살펴보았다. 계속해서 ‘1839년 기해박해 100주년’을 맞이하여 조선 순교자에 대한 현양을 강조하던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특히 이 당시 교회가 1939년을 기점으로 하여 경향잡지의 논설과 사설에 순교자현양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조명한 사실도 주목하였다. 그래서 1939년 ‘1839년 기해박해 100주년’을 맞이하여, 교회는 조선의 순교자들에 대한 현양을 위해 그들의 행적을 만방에 알리는 일을 활발하게 추진했다. 또한 잡지는 「사설」을 통해 순교자현양을 ‘순교자들을 위해 행하는 일체의 모든 행동’이라고 규정하였으며, 각 성당에서 실천할 수 있는 순교자현양의 구체적인 방법 등을 제시한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어서 일제 강점 말기 동안 순교자를 현양하려는 신자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주목하였다. 1939년 ‘1839년 박해 100주년’을 맞이하였지만, 교구 차원의 대규모 기념행사는 치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교자현양을 목적으로 하는 교회 사업들은 꾸준히 진행되었다. 그리고 당시 신자들이 조선 순교자들의 업적을 기억하는 다양한 일들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사실도 파악하였다. 특히 이 당시에 전국의 성당에서는 ‘복자공경주일’ 운동을 실행하였고, 매달 첫째 주일에 순교복자를 기념하는 전례로 거행된 이 운동은 짧은 시간에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를 통해 당시 신자들 사이에서 순교자신심이 중요한 신심으로 자리 잡아 나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제 강점에도 불구하고 순교자신심을 간직하며 살아가던 신자들 중에 당시 교회 활동의 중심에 있었던 청년단체들의 모습을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 청년단체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청년들은 순교자신심을 바탕으로 하는 기념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고, 행사를 기획하거나 준비하는 등 실질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청년들의 노력은 순교자현양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행사에 참석한 이들도 자연스럽게 순교자들의 행적을 배우고 본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상으로 순교자신심에 대해서 순교자의 삶과 신앙을 중심으로 고찰한 본 연구는 앞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순교자신심의 본질을 찾아나가는 데 어느 정도 기여를 할 것으로 본다. 이러한 기여는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영성적인 삶의 풍요로움을 제공해 줄 것이며, 신자들의 내적인 신앙 성숙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순교자신심과 현양에 관한 역사신학적 연구는 역사가 단지 신학 안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일반사와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
본 논문은 한국 천주교 순교자신심과 순교자현양운동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우선 시대순으로 Ⅰ부 박해시기, Ⅱ부 개항과 근대시기, Ⅲ부 일제강점기로 분류한 후, 시기별로의 순교자신심의 형성, 확산, 확장 과정에 따라 다시 총 6개의 장으로 구성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구체적으로는 한국 천주교 역사 안에서 순교자신심의 형성 배경과 진행 과정, 그리고 순교자현양에 영향을 준 요인들에 주목하였다. 더불어 순교자신심과 순교자현양이 당대 신자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분석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본 논문은 역사방법론을 도입하였다. 순교자신심과 현양에 관련된 교회사적 사건들을 정리하고, 이에 대한 사료를 찾아 수집한 후 그 신학적 의미를 도출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통해 아래와 같은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박해시기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을 비롯하여, 2014년에 시복된 124명의 순교자들을 대상으로 순교자신심의 형성 배경을 살펴보았다. 특히 순교자들의 순교와 순교적 삶, 그리고 신앙 실천에 초점을 맞추어, 순교자신심의 본질적인 의미를 찾아보았다. 그 결과 윤지충과 권상연, 그리고 122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천주교 교리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자신들이 깨달은 하느님을 확고하게 고백하였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 효와 충을 더욱 철저히 지켰으며,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존엄하다는 것을 삶으로 드러냈다. 또한 그들은 현실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했으며, 형제애를 통하여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실천의 중요성을 확신하였다. 당시 많은 신자들은 이와 같은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본받고자 결심했고, 순교자들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철저히 영위하고자 신앙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이처럼 박해시기 순교자들이 보여 준 삶과 신앙의 모범은 당대 신자들 사이에서 순교자에 대한 공경의 마음 안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가치를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신심으로 드러났다. 그러므로 박해시기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주목할 때, 순교자신심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에 따라 앞으로도 순교자신심의 본질과 가치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순교자의 삶과 신앙에 주목해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개항 이후 선교사들의 재입국 과정과 1866년 박해 때 살아남은 신자들과의 만남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박해가 종식된 이후, 교구장의 선교정책에 따라 선교사들과 신자들이 합심하여 교회를 재건하던 시기를 대상으로 순교자신심이 신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개항 이후 선교사들은 조선 재입국에 성공하였고, 당시 살아남은 신자들은 재입국한 선교사들을 위해 선교 거점 공간을 마련해 놓았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선교사들은 박해시기 동안 순교자신심의 요람인 교우촌에서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는 신자들을 만났고,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성사생활을 통해서 영적인 위로를 주고받았다. 그 후 선교사들은 박해시기에 순교한 선배 선교사들이 보여 준 헌신적인 열정을 간직하며 살았으며, 신자들도 선배 신앙인들이 살아온 삶과 신앙의 방식을 지켜내면서 교회정책에 최선을 다해 협력하였다. 그리고 개항 이후 교구장들은 박해시기 조선 순교자들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일환으로 교구장들은 박해시기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다양한 노력들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신자들이 순교자에 대한 공경의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가도록 도와주었고, 순교자신심 확산에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조선 순교자 연구와 시복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인 교구장 뮈텔이 보여 준 순교자신심을 주목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뮈텔은 사목활동을 하는 동안 순교자신심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뮈텔이 보여 준 순교자에 대한 관심은 동료 선교사들과 신자들에게 전해져 당시 순교자신심 고취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는 순교자신심이 확산되고, 순교자에 대한 현양이 진행되는 데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셋째, 근대 이후로 넘어가는 시기에 교회는 순교와 순교자에 대한 기억을 현재화하려는 노력 가운데 순교자신심에 대한 이론적 배경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그래서 순교자에 대한 교구장들의 인식 내용, 교회 간행물들에서 드러나는 순교ㆍ순교자에 대한 이해, 그리고 순교자에 관한 다양한 연구 활동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1900년대 이후 조선 천주교회 교구장들이 순교자를 ‘전구자’, ‘신앙의 증거자’, ‘덕행의 모범자’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교구장들은 순교자들이 ‘신덕’과 ‘용덕’을 가진 인물임을 강조하면서, 신자들에게도 순교자들의 ‘신덕’과 ‘용덕’을 본받으며 살아가기를 독려했다. 이어서 교회 간행물을 통한 순교ㆍ순교자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신덕’과 ‘용덕’을 강조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교회 간행물에서는 순교에 대한 개념 이해, 용어 해설, 시복과 시성에 대한 의미, 주요 절차 과정, 순교자 명단이나 약전 등을 지속적으로 소개하였다. 특히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 안에서 평신도의 자발적 신앙 도입과 순교자들의 신앙고백 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은 결국 교회 간행물을 접하는 신자들로 하여금 순교자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순교복자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이 시기의 교회 간행물의 내용에는 교회 역사에 관한 연구물들이 계속적으로 실렸음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이 연구물들은 당시 신자들에게 교회 역사와 순교자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계기가 된 사실도 살펴보았다. 또한 조선 천주교 전래의 기원을 밝히는 작업들은 조선 교회의 뿌리를 확인하는 중요한 작업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의 인식이나 교회 간행물 등을 통해서 드러난 순교자에 대한 ‘신덕’과 ‘용덕’ 중심의 인식은 순교자신심이 이원론적, 내세지향적 신심으로 흘러가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넷째, 일제 강점 당시에 거행된 시복식을 전후로 하여 순교자신심이 확장되고, 순교자에 대한 현양이 활성화되는 과정들을 검토하였다. 그래서 시복을 위한 교구장들의 일치된 노력과 「조선 치명자 시복식 반포와 교유서」를 통한 순교복자에 대한 약전 소개가 순교자신심 확장의 주요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순교복자축일에 전례 안에 수용된 것으로 순교복자 기도문 반포와 복자찬양가, 순교복자 유해 공경과 친구 예절도 주요 요인이 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교구장과 교회 잡지가 순교복자의 시성과 관련하여 순교복자께 기도하기를 강조한 사실도 확장 요인에 해당되었다. 이어서 순교자신심 확장의 매개 요인 중에 신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우선 시복 준비 과정에서 교구장들이 일치된 노력을 보였다는 사실은 긍정적인 면이었다. 이는 신자들로 하여금 조선 순교자 시복에 대한 관심을 높여 주었다. 교구장들은 시복된 순교자에 대한 약전을 신자들에게 소개함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순교복자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 주었다. 또한 교구장들은 순교복자 기도문 반포를 통해 순교복자들의 ‘신덕’과 ‘용덕’을 강조함으로써 신자들이 그들의 덕행을 본받도록 이끌어주었다. 복자찬양가의 경우 전례 때마다 노래함으로써 신자들이 가사를 통해 순교자들의 모습을 본받아 용감하고 굳은 신앙을 간직하여 살아가도록 도와주었다. 순교복자 유해 공경과 친구 예절은 박해시기 순교자들의 모습을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교구장과 교회 잡지가 순교복자들의 시성을 위해 기도와 기적을 간구하도록 권장함으로써 순교복자들이 기도의 주된 대상됨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순교복자 기도문이나 복자찬양가의 내용을 보면, 순교자들의 덕행 중에서 ‘신덕’과 ‘용덕’만을 강조하고, 또한 그들의 거룩한 죽음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는 신자들로 하여금 순교자들이 순교를 결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원동력, 그러니까 삶과 신앙 내용을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순교복자 기도문과 복자찬양가는 세상을 ‘삼구’로 묘사한 후, 순교자들은 이와 같은 악한 세상에서 용맹을 발휘한 군사로 전쟁터에서 승리한 인물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순교자들이 죽음 이후에 천상복락을 누리는 모습만을 부각시켜 놓음으로써, 순교자신심 자체를 신자들이 내세지향적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또한, 교구장과 교회 잡지는 신자들이 순교복자들께 기적 청원을 바라는 기도를 하도록 지나치게 강조하며 순교자신심을 현세구복적 행위로 비추어지게 하였다. 시복식 이후 교회 역사와 관련된 대규모 기념행사 역시 순교자신심 확장의 매개 요인이 되었다. 교구 차원에서 진행된 이 행사는 당시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신자들은 행사를 통해서 교회사의 중요한 사건과 순교자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규모 기념행사는 순교자신심이 행사 위주의 신심으로 인식될 여지를 남겼다. 또한 박해시기 순교자들의 죽음을 강조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는 행사의 궁극적 목적을 신자들에게 순교자들의 투철한 신앙과 불굴의 용맹심을 전하는 데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대규모 기념행사는 당시 신자들에게 순교자신심이 가지는 본질적인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전달하지는 못하였다. 다섯째, 연구는 일제 강점 말기 조선 내 모든 종교가 탄압을 받았고, 그 중에 교회 역시 일제의 종교정책에 순응한 사실과 순교자신심을 왜곡시킨 내용까지도 확인하였다. 그리고 교회는 박해시기 때부터 신앙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온 순교자신심을 ‘순교정신’으로 왜곡시킨 후, 일제가 저지른 침략전쟁의 정당성을 옹호한 사실도 살펴보았다. 특히 1939년 당시 교회는 순교자현양회 설립을 준비하면서, 이 단체의 설립 목적이 일제를 위한 훌륭한 보국(報國)운동이라고 명시한 사실도 파악하였다. 그리고 잡지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지키는 사람은 국가의 충신임은 물론, 하느님 앞에서도 훌륭한 순교자, 치명자가 된다고 말한 사실도 확인하였다. 또한,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을 칭송한 후, 그들이 ‘순교정신’으로 싸우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순교정신’은 곧 일제를 위한 ‘순국’임을 강조한 사실도 살펴보았다. 계속해서 ‘1839년 기해박해 100주년’을 맞이하여 조선 순교자에 대한 현양을 강조하던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특히 이 당시 교회가 1939년을 기점으로 하여 경향잡지의 논설과 사설에 순교자현양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조명한 사실도 주목하였다. 그래서 1939년 ‘1839년 기해박해 100주년’을 맞이하여, 교회는 조선의 순교자들에 대한 현양을 위해 그들의 행적을 만방에 알리는 일을 활발하게 추진했다. 또한 잡지는 「사설」을 통해 순교자현양을 ‘순교자들을 위해 행하는 일체의 모든 행동’이라고 규정하였으며, 각 성당에서 실천할 수 있는 순교자현양의 구체적인 방법 등을 제시한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어서 일제 강점 말기 동안 순교자를 현양하려는 신자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주목하였다. 1939년 ‘1839년 박해 100주년’을 맞이하였지만, 교구 차원의 대규모 기념행사는 치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교자현양을 목적으로 하는 교회 사업들은 꾸준히 진행되었다. 그리고 당시 신자들이 조선 순교자들의 업적을 기억하는 다양한 일들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사실도 파악하였다. 특히 이 당시에 전국의 성당에서는 ‘복자공경주일’ 운동을 실행하였고, 매달 첫째 주일에 순교복자를 기념하는 전례로 거행된 이 운동은 짧은 시간에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를 통해 당시 신자들 사이에서 순교자신심이 중요한 신심으로 자리 잡아 나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제 강점에도 불구하고 순교자신심을 간직하며 살아가던 신자들 중에 당시 교회 활동의 중심에 있었던 청년단체들의 모습을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 청년단체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청년들은 순교자신심을 바탕으로 하는 기념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고, 행사를 기획하거나 준비하는 등 실질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청년들의 노력은 순교자현양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행사에 참석한 이들도 자연스럽게 순교자들의 행적을 배우고 본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상으로 순교자신심에 대해서 순교자의 삶과 신앙을 중심으로 고찰한 본 연구는 앞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순교자신심의 본질을 찾아나가는 데 어느 정도 기여를 할 것으로 본다. 이러한 기여는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영성적인 삶의 풍요로움을 제공해 줄 것이며, 신자들의 내적인 신앙 성숙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순교자신심과 현양에 관한 역사신학적 연구는 역사가 단지 신학 안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일반사와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학제 간의 연구는 앞으로 교회 역사에서 다양한 주제를 역사적ㆍ신학적으로 명료화해, 끊임없는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 논문은 해방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다루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박해시기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다루면서 먼저 시성된 103명의 한국 순교 성인에 대해서도 다루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들은 추후 계속적인 연구 작업을 통해 성실하게 밝히고자 다짐한다.
본 논문은 한국 천주교 순교자신심과 순교자현양운동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우선 시대순으로 Ⅰ부 박해시기, Ⅱ부 개항과 근대시기, Ⅲ부 일제강점기로 분류한 후, 시기별로의 순교자신심의 형성, 확산, 확장 과정에 따라 다시 총 6개의 장으로 구성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구체적으로는 한국 천주교 역사 안에서 순교자신심의 형성 배경과 진행 과정, 그리고 순교자현양에 영향을 준 요인들에 주목하였다. 더불어 순교자신심과 순교자현양이 당대 신자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분석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본 논문은 역사방법론을 도입하였다. 순교자신심과 현양에 관련된 교회사적 사건들을 정리하고, 이에 대한 사료를 찾아 수집한 후 그 신학적 의미를 도출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통해 아래와 같은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박해시기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을 비롯하여, 2014년에 시복된 124명의 순교자들을 대상으로 순교자신심의 형성 배경을 살펴보았다. 특히 순교자들의 순교와 순교적 삶, 그리고 신앙 실천에 초점을 맞추어, 순교자신심의 본질적인 의미를 찾아보았다. 그 결과 윤지충과 권상연, 그리고 122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천주교 교리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자신들이 깨달은 하느님을 확고하게 고백하였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 효와 충을 더욱 철저히 지켰으며,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존엄하다는 것을 삶으로 드러냈다. 또한 그들은 현실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했으며, 형제애를 통하여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실천의 중요성을 확신하였다. 당시 많은 신자들은 이와 같은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본받고자 결심했고, 순교자들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철저히 영위하고자 신앙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이처럼 박해시기 순교자들이 보여 준 삶과 신앙의 모범은 당대 신자들 사이에서 순교자에 대한 공경의 마음 안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가치를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신심으로 드러났다. 그러므로 박해시기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주목할 때, 순교자신심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에 따라 앞으로도 순교자신심의 본질과 가치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순교자의 삶과 신앙에 주목해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개항 이후 선교사들의 재입국 과정과 1866년 박해 때 살아남은 신자들과의 만남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박해가 종식된 이후, 교구장의 선교정책에 따라 선교사들과 신자들이 합심하여 교회를 재건하던 시기를 대상으로 순교자신심이 신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개항 이후 선교사들은 조선 재입국에 성공하였고, 당시 살아남은 신자들은 재입국한 선교사들을 위해 선교 거점 공간을 마련해 놓았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선교사들은 박해시기 동안 순교자신심의 요람인 교우촌에서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는 신자들을 만났고,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성사생활을 통해서 영적인 위로를 주고받았다. 그 후 선교사들은 박해시기에 순교한 선배 선교사들이 보여 준 헌신적인 열정을 간직하며 살았으며, 신자들도 선배 신앙인들이 살아온 삶과 신앙의 방식을 지켜내면서 교회정책에 최선을 다해 협력하였다. 그리고 개항 이후 교구장들은 박해시기 조선 순교자들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일환으로 교구장들은 박해시기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다양한 노력들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신자들이 순교자에 대한 공경의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가도록 도와주었고, 순교자신심 확산에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조선 순교자 연구와 시복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인 교구장 뮈텔이 보여 준 순교자신심을 주목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뮈텔은 사목활동을 하는 동안 순교자신심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뮈텔이 보여 준 순교자에 대한 관심은 동료 선교사들과 신자들에게 전해져 당시 순교자신심 고취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는 순교자신심이 확산되고, 순교자에 대한 현양이 진행되는 데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셋째, 근대 이후로 넘어가는 시기에 교회는 순교와 순교자에 대한 기억을 현재화하려는 노력 가운데 순교자신심에 대한 이론적 배경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그래서 순교자에 대한 교구장들의 인식 내용, 교회 간행물들에서 드러나는 순교ㆍ순교자에 대한 이해, 그리고 순교자에 관한 다양한 연구 활동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1900년대 이후 조선 천주교회 교구장들이 순교자를 ‘전구자’, ‘신앙의 증거자’, ‘덕행의 모범자’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교구장들은 순교자들이 ‘신덕’과 ‘용덕’을 가진 인물임을 강조하면서, 신자들에게도 순교자들의 ‘신덕’과 ‘용덕’을 본받으며 살아가기를 독려했다. 이어서 교회 간행물을 통한 순교ㆍ순교자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신덕’과 ‘용덕’을 강조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교회 간행물에서는 순교에 대한 개념 이해, 용어 해설, 시복과 시성에 대한 의미, 주요 절차 과정, 순교자 명단이나 약전 등을 지속적으로 소개하였다. 특히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 안에서 평신도의 자발적 신앙 도입과 순교자들의 신앙고백 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은 결국 교회 간행물을 접하는 신자들로 하여금 순교자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순교복자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이 시기의 교회 간행물의 내용에는 교회 역사에 관한 연구물들이 계속적으로 실렸음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이 연구물들은 당시 신자들에게 교회 역사와 순교자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계기가 된 사실도 살펴보았다. 또한 조선 천주교 전래의 기원을 밝히는 작업들은 조선 교회의 뿌리를 확인하는 중요한 작업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의 인식이나 교회 간행물 등을 통해서 드러난 순교자에 대한 ‘신덕’과 ‘용덕’ 중심의 인식은 순교자신심이 이원론적, 내세지향적 신심으로 흘러가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넷째, 일제 강점 당시에 거행된 시복식을 전후로 하여 순교자신심이 확장되고, 순교자에 대한 현양이 활성화되는 과정들을 검토하였다. 그래서 시복을 위한 교구장들의 일치된 노력과 「조선 치명자 시복식 반포와 교유서」를 통한 순교복자에 대한 약전 소개가 순교자신심 확장의 주요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순교복자축일에 전례 안에 수용된 것으로 순교복자 기도문 반포와 복자찬양가, 순교복자 유해 공경과 친구 예절도 주요 요인이 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교구장과 교회 잡지가 순교복자의 시성과 관련하여 순교복자께 기도하기를 강조한 사실도 확장 요인에 해당되었다. 이어서 순교자신심 확장의 매개 요인 중에 신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우선 시복 준비 과정에서 교구장들이 일치된 노력을 보였다는 사실은 긍정적인 면이었다. 이는 신자들로 하여금 조선 순교자 시복에 대한 관심을 높여 주었다. 교구장들은 시복된 순교자에 대한 약전을 신자들에게 소개함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순교복자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 주었다. 또한 교구장들은 순교복자 기도문 반포를 통해 순교복자들의 ‘신덕’과 ‘용덕’을 강조함으로써 신자들이 그들의 덕행을 본받도록 이끌어주었다. 복자찬양가의 경우 전례 때마다 노래함으로써 신자들이 가사를 통해 순교자들의 모습을 본받아 용감하고 굳은 신앙을 간직하여 살아가도록 도와주었다. 순교복자 유해 공경과 친구 예절은 박해시기 순교자들의 모습을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교구장과 교회 잡지가 순교복자들의 시성을 위해 기도와 기적을 간구하도록 권장함으로써 순교복자들이 기도의 주된 대상됨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순교복자 기도문이나 복자찬양가의 내용을 보면, 순교자들의 덕행 중에서 ‘신덕’과 ‘용덕’만을 강조하고, 또한 그들의 거룩한 죽음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는 신자들로 하여금 순교자들이 순교를 결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원동력, 그러니까 삶과 신앙 내용을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순교복자 기도문과 복자찬양가는 세상을 ‘삼구’로 묘사한 후, 순교자들은 이와 같은 악한 세상에서 용맹을 발휘한 군사로 전쟁터에서 승리한 인물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순교자들이 죽음 이후에 천상복락을 누리는 모습만을 부각시켜 놓음으로써, 순교자신심 자체를 신자들이 내세지향적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또한, 교구장과 교회 잡지는 신자들이 순교복자들께 기적 청원을 바라는 기도를 하도록 지나치게 강조하며 순교자신심을 현세구복적 행위로 비추어지게 하였다. 시복식 이후 교회 역사와 관련된 대규모 기념행사 역시 순교자신심 확장의 매개 요인이 되었다. 교구 차원에서 진행된 이 행사는 당시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신자들은 행사를 통해서 교회사의 중요한 사건과 순교자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규모 기념행사는 순교자신심이 행사 위주의 신심으로 인식될 여지를 남겼다. 또한 박해시기 순교자들의 죽음을 강조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는 행사의 궁극적 목적을 신자들에게 순교자들의 투철한 신앙과 불굴의 용맹심을 전하는 데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대규모 기념행사는 당시 신자들에게 순교자신심이 가지는 본질적인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전달하지는 못하였다. 다섯째, 연구는 일제 강점 말기 조선 내 모든 종교가 탄압을 받았고, 그 중에 교회 역시 일제의 종교정책에 순응한 사실과 순교자신심을 왜곡시킨 내용까지도 확인하였다. 그리고 교회는 박해시기 때부터 신앙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온 순교자신심을 ‘순교정신’으로 왜곡시킨 후, 일제가 저지른 침략전쟁의 정당성을 옹호한 사실도 살펴보았다. 특히 1939년 당시 교회는 순교자현양회 설립을 준비하면서, 이 단체의 설립 목적이 일제를 위한 훌륭한 보국(報國)운동이라고 명시한 사실도 파악하였다. 그리고 잡지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지키는 사람은 국가의 충신임은 물론, 하느님 앞에서도 훌륭한 순교자, 치명자가 된다고 말한 사실도 확인하였다. 또한,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을 칭송한 후, 그들이 ‘순교정신’으로 싸우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순교정신’은 곧 일제를 위한 ‘순국’임을 강조한 사실도 살펴보았다. 계속해서 ‘1839년 기해박해 100주년’을 맞이하여 조선 순교자에 대한 현양을 강조하던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특히 이 당시 교회가 1939년을 기점으로 하여 경향잡지의 논설과 사설에 순교자현양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조명한 사실도 주목하였다. 그래서 1939년 ‘1839년 기해박해 100주년’을 맞이하여, 교회는 조선의 순교자들에 대한 현양을 위해 그들의 행적을 만방에 알리는 일을 활발하게 추진했다. 또한 잡지는 「사설」을 통해 순교자현양을 ‘순교자들을 위해 행하는 일체의 모든 행동’이라고 규정하였으며, 각 성당에서 실천할 수 있는 순교자현양의 구체적인 방법 등을 제시한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어서 일제 강점 말기 동안 순교자를 현양하려는 신자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주목하였다. 1939년 ‘1839년 박해 100주년’을 맞이하였지만, 교구 차원의 대규모 기념행사는 치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교자현양을 목적으로 하는 교회 사업들은 꾸준히 진행되었다. 그리고 당시 신자들이 조선 순교자들의 업적을 기억하는 다양한 일들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사실도 파악하였다. 특히 이 당시에 전국의 성당에서는 ‘복자공경주일’ 운동을 실행하였고, 매달 첫째 주일에 순교복자를 기념하는 전례로 거행된 이 운동은 짧은 시간에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를 통해 당시 신자들 사이에서 순교자신심이 중요한 신심으로 자리 잡아 나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제 강점에도 불구하고 순교자신심을 간직하며 살아가던 신자들 중에 당시 교회 활동의 중심에 있었던 청년단체들의 모습을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 청년단체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청년들은 순교자신심을 바탕으로 하는 기념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고, 행사를 기획하거나 준비하는 등 실질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청년들의 노력은 순교자현양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행사에 참석한 이들도 자연스럽게 순교자들의 행적을 배우고 본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상으로 순교자신심에 대해서 순교자의 삶과 신앙을 중심으로 고찰한 본 연구는 앞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순교자신심의 본질을 찾아나가는 데 어느 정도 기여를 할 것으로 본다. 이러한 기여는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영성적인 삶의 풍요로움을 제공해 줄 것이며, 신자들의 내적인 신앙 성숙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순교자신심과 현양에 관한 역사신학적 연구는 역사가 단지 신학 안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일반사와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학제 간의 연구는 앞으로 교회 역사에서 다양한 주제를 역사적ㆍ신학적으로 명료화해, 끊임없는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 논문은 해방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다루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박해시기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다루면서 먼저 시성된 103명의 한국 순교 성인에 대해서도 다루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들은 추후 계속적인 연구 작업을 통해 성실하게 밝히고자 다짐한다.
This study researches on the martyr devotion and the martyr commemoration. The thesis consists of three chronological parts: Persecution Period(1874~1895), Open Ports Period(1876~1910) and Japanese Occupation Period(1910~1945). They are divided into six inner chapters that have focused on the Cathol...
This study researches on the martyr devotion and the martyr commemoration. The thesis consists of three chronological parts: Persecution Period(1874~1895), Open Ports Period(1876~1910) and Japanese Occupation Period(1910~1945). They are divided into six inner chapters that have focused on the Catholic martyrdom in the history of the Catholic Church in Korea. The historical methods of this thesis collected the matters, surveyed the former studies and revealed the theological meanings. The results are as follows below. First of all, the study observed the persecutions of Catholics in Korean history. It took notice of the 124 martyr Blessed including Bl. Paul Yoon Ji-chung and Bl. James Kwon Sang-yeon, who two were beatified in 2014. Especially, the research made an attempt to represent the meaning of the commemoration of the martyr Blessed. This research acknowledged that their sincere confession of the Creed and their rightly identification of the Dogma construed their martyrdom at last. It recognized that they believed in Dignity and Equality of Human Beings. Having not abandoned the essence of the filial piety and the loyalty taught by Confucianism, they found God in everyday life, and made sure of the importance of the Divine Love for the neighborhood with their fraternal sacrifice above all. Their sincere love to their neighbors supplemented the Creed and the Dogma of the Church. Second, the research remarked the encounter between the missionaries and the lay people survived from the persecution. The lay people had established the missionary stations for whom the foreign missionaries entered Korean peninsula again. Reconstructing the church, the missionaries began to perform the divine services. After the Open Ports Period, the bishops were interested in the local martyrs in the previous persecutions. They tried their best to celebrate them fully. In this respect, the study paid very attention to the martyr devotion of the Bishop Gustave-Charles-Marie Mutel. Thirdly, the study found that the Church tried best to modernize the memory of the persecution, which turned into the theoretical ground of the martyr devotion. The results are grouped into three categories. The bishops at the Church in 1900s regarded the martyrs for the “mediator of bliss”, the ‘witness of faith’, and the ‘exemplar of virtue.’ The study found out that the church publications of the martyrdom reassures both virtues as the bishops did. They underlined the voluntary foundation of the church with the confession of the martyrs in the historical context. They made the faithful readers’ point of view over the Church history wide-opened. And yet, the overemphasis on the ‘Confidence’ and ‘Bravery’ of the martyrs misled the pious devotions to the dilemma between life and afterlife. Next, the study analyzed the developments of the martyr devotion along with the beatification in the Japanese colonial times. It explicitly found the reasons of the propagation of the martyr devotion in the effective document, so we called, ‘Official Opening of the Cause of Beatification of Chosun Martyrs and Guidebook’ written by the collaboration of the bishops. The research found that it was confirmed by the Korean Blessed days set up newly in the liturgy, the prayers of the Congregation of the Blessed Korean Martyrs, the martyr remain devotion, and the holy kissing. This study surveyed the various reasons of the propagation of the martyr devotion. The prayer to the Martyr-Blessed made the laity to be familiar with them in their virtue of ‘Confidence’ and ‘Bravery.’The hymn to the Blessed encouraged them to live in the spirituality of the Martyrs. The remain reverence and the holy kissing offered the chances to embody them virtually. However, there were side effects, too. The prayers and the hymns to the Blessed emphasized too much ‘Confidence’, ‘Bravery’ and their ‘Holy Deaths’; these deprived the motive force of their martyrdom. They blurred the faith in everyday interactions. They too much highlighted the afterlife bliss, which fixed the martyr devotion beyond the horizon of the reasonable doubt. They dragged it to the earthly blessing. The lay persons were imposed on too much unearthly braveries by the formalities. In this way, the grand scale ceremonies undercut the reality of the martyr devotion for the laity in daily life. Then, this study revealed the hard facts that Church distorted the martyr devotion since the Japanese colonial policies forced them to conform to the illegal laws as every religion did. The Church too offered a perverse idea on the martyrdom, which changed martyr devotion into the ‘martyr slogan’ of Japanese imperialism in order to support the world invasion. When the ‘Korean Institute of Commemoration of Martyrs’ was being prepared, the Church was obliged to misrepresent the devotion: The aim of the institute disappointedly was described as “the national movement for the Japanese imperial colony.” The traditional Church journal, ‘Kyeong Hyang Magazine’ admired the patriotism of the soldiers who were compelled to fight, and wasted the martyr devotion. The Church promoted the ‘Centennial of 1839’ all over the country. This research took the notice of the individual voluntary actions from the laity for martyr devotion. In 1939, the diocesan ceremony for the Centennial of the 1839 victory over the persecution was not held though, the Church projects kept on. The lay people took them in part readily. The Churches all over the country served the ‘Blessed Sundays’. They held and celebrated on the first Sunday of every month at every churches. This sort of uncomfortable fact is still in the martyr devotion, which rooted in one of major laity devotions in an inappropriate way. Finally, the study reviewed some young adult laity who devoted to martyrdom. They were very active, overcoming the oppression of Japanese. And the young Catholics voluntarily organized the activities, participated in them, and performed key roles. These accomplishments backed the development of the martyr commemoration movements. The ‘Lectures on Martyr Blessed’ was organized, and were held by the group. The open lectures explained the martyrs’ holy deeds and sacred acts. In addition to the Catholic educations, the ‘Martyr Dramas’ were very touching and effective in extending the devotion to all over the country. They lively delivered the martyr devotion to the general audience as well as the lay Catholics. Their deliberate involvement in the Church activities contributed to the spiritual devotion and the pride of the Catholics in Korea. This study expects to contribute to disclose the essence of the martyr devotion of the Catholic Church in Korea. This hopes to overcome the present spiritual crisis, and enrich the individual faith in each religious community. For this reason, the research admits that the interdisciplinary studies is to bridge the separate gap. Especially, the interdisciplinarity between historical theology and theology of spirituality will surely help to clarify the various historical topics of the Church. To my regret, this research did not deal with the related issues after the Japanese surrender 1945. I owe a great debt of gratitude to God for this. My promise is to study it henceforth with all earnestness.
This study researches on the martyr devotion and the martyr commemoration. The thesis consists of three chronological parts: Persecution Period(1874~1895), Open Ports Period(1876~1910) and Japanese Occupation Period(1910~1945). They are divided into six inner chapters that have focused on the Catholic martyrdom in the history of the Catholic Church in Korea. The historical methods of this thesis collected the matters, surveyed the former studies and revealed the theological meanings. The results are as follows below. First of all, the study observed the persecutions of Catholics in Korean history. It took notice of the 124 martyr Blessed including Bl. Paul Yoon Ji-chung and Bl. James Kwon Sang-yeon, who two were beatified in 2014. Especially, the research made an attempt to represent the meaning of the commemoration of the martyr Blessed. This research acknowledged that their sincere confession of the Creed and their rightly identification of the Dogma construed their martyrdom at last. It recognized that they believed in Dignity and Equality of Human Beings. Having not abandoned the essence of the filial piety and the loyalty taught by Confucianism, they found God in everyday life, and made sure of the importance of the Divine Love for the neighborhood with their fraternal sacrifice above all. Their sincere love to their neighbors supplemented the Creed and the Dogma of the Church. Second, the research remarked the encounter between the missionaries and the lay people survived from the persecution. The lay people had established the missionary stations for whom the foreign missionaries entered Korean peninsula again. Reconstructing the church, the missionaries began to perform the divine services. After the Open Ports Period, the bishops were interested in the local martyrs in the previous persecutions. They tried their best to celebrate them fully. In this respect, the study paid very attention to the martyr devotion of the Bishop Gustave-Charles-Marie Mutel. Thirdly, the study found that the Church tried best to modernize the memory of the persecution, which turned into the theoretical ground of the martyr devotion. The results are grouped into three categories. The bishops at the Church in 1900s regarded the martyrs for the “mediator of bliss”, the ‘witness of faith’, and the ‘exemplar of virtue.’ The study found out that the church publications of the martyrdom reassures both virtues as the bishops did. They underlined the voluntary foundation of the church with the confession of the martyrs in the historical context. They made the faithful readers’ point of view over the Church history wide-opened. And yet, the overemphasis on the ‘Confidence’ and ‘Bravery’ of the martyrs misled the pious devotions to the dilemma between life and afterlife. Next, the study analyzed the developments of the martyr devotion along with the beatification in the Japanese colonial times. It explicitly found the reasons of the propagation of the martyr devotion in the effective document, so we called, ‘Official Opening of the Cause of Beatification of Chosun Martyrs and Guidebook’ written by the collaboration of the bishops. The research found that it was confirmed by the Korean Blessed days set up newly in the liturgy, the prayers of the Congregation of the Blessed Korean Martyrs, the martyr remain devotion, and the holy kissing. This study surveyed the various reasons of the propagation of the martyr devotion. The prayer to the Martyr-Blessed made the laity to be familiar with them in their virtue of ‘Confidence’ and ‘Bravery.’The hymn to the Blessed encouraged them to live in the spirituality of the Martyrs. The remain reverence and the holy kissing offered the chances to embody them virtually. However, there were side effects, too. The prayers and the hymns to the Blessed emphasized too much ‘Confidence’, ‘Bravery’ and their ‘Holy Deaths’; these deprived the motive force of their martyrdom. They blurred the faith in everyday interactions. They too much highlighted the afterlife bliss, which fixed the martyr devotion beyond the horizon of the reasonable doubt. They dragged it to the earthly blessing. The lay persons were imposed on too much unearthly braveries by the formalities. In this way, the grand scale ceremonies undercut the reality of the martyr devotion for the laity in daily life. Then, this study revealed the hard facts that Church distorted the martyr devotion since the Japanese colonial policies forced them to conform to the illegal laws as every religion did. The Church too offered a perverse idea on the martyrdom, which changed martyr devotion into the ‘martyr slogan’ of Japanese imperialism in order to support the world invasion. When the ‘Korean Institute of Commemoration of Martyrs’ was being prepared, the Church was obliged to misrepresent the devotion: The aim of the institute disappointedly was described as “the national movement for the Japanese imperial colony.” The traditional Church journal, ‘Kyeong Hyang Magazine’ admired the patriotism of the soldiers who were compelled to fight, and wasted the martyr devotion. The Church promoted the ‘Centennial of 1839’ all over the country. This research took the notice of the individual voluntary actions from the laity for martyr devotion. In 1939, the diocesan ceremony for the Centennial of the 1839 victory over the persecution was not held though, the Church projects kept on. The lay people took them in part readily. The Churches all over the country served the ‘Blessed Sundays’. They held and celebrated on the first Sunday of every month at every churches. This sort of uncomfortable fact is still in the martyr devotion, which rooted in one of major laity devotions in an inappropriate way. Finally, the study reviewed some young adult laity who devoted to martyrdom. They were very active, overcoming the oppression of Japanese. And the young Catholics voluntarily organized the activities, participated in them, and performed key roles. These accomplishments backed the development of the martyr commemoration movements. The ‘Lectures on Martyr Blessed’ was organized, and were held by the group. The open lectures explained the martyrs’ holy deeds and sacred acts. In addition to the Catholic educations, the ‘Martyr Dramas’ were very touching and effective in extending the devotion to all over the country. They lively delivered the martyr devotion to the general audience as well as the lay Catholics. Their deliberate involvement in the Church activities contributed to the spiritual devotion and the pride of the Catholics in Korea. This study expects to contribute to disclose the essence of the martyr devotion of the Catholic Church in Korea. This hopes to overcome the present spiritual crisis, and enrich the individual faith in each religious community. For this reason, the research admits that the interdisciplinary studies is to bridge the separate gap. Especially, the interdisciplinarity between historical theology and theology of spirituality will surely help to clarify the various historical topics of the Church. To my regret, this research did not deal with the related issues after the Japanese surrender 1945. I owe a great debt of gratitude to God for this. My promise is to study it henceforth with all earnestness.
※ AI-Helper는 부적절한 답변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