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군사통치기(1961년 5월 16일~1963년 12월 16일) 동안 군사 정권의 헤게모니 형성 과정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이 글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국가의 역량이 성숙하지 못했던 1960년대 초반을 연구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기존 한국 국가형성 논의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던 약한 국가에서 강한 국가로의 정치적 발전 과정을 밝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국가 대 사회라는 이분법적 틀을 넘어 사회를 형성하는 국가와 국가를 형성하는 사회 사이의 상호작용을 경험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둘째는 4·19 항쟁과 5·16 쿠데타를 전후한 시기의 국가-사회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의 이분법적 개념 대립을 비판하고 두 개념이 지닌 복합성의 측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구체화함으로써 연구자는 국가 조직 확산과 대중적 지지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권위주의의 민주주의적 토대가 존재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을 구체화하기 위해, 연구자가 주목한 것은 재건국민운동(再建國民運動)이다. 재건국민운동은 쿠데타 직후 국민적-대중적 지지를 획득하고자 했던 통치 집단과 대중의 민주주의적 계몽을 목표했던 지식인 집단의 연합을 통한 헤게모니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군사통치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재건국민운동은 생활 습관 개선, 문맹퇴치와 민주주의 교육, 향토사회 개발 등 다종다양한 대중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재건국민운동은 운동의 기획과 방향 설정을 주도하는 민간 지식인과 운동의 집행을 담당하는 군인 집단이 공존하는 반관반민(半官半民)적 조직을 전국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이런 조직을 통해서 재건국민운동은 당시 한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농촌 사회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연구자는 재건국민운동을 둘러싼 지식인, 언론인, 군인, 농민, 도시민 사이의 상호작용과 그 사회적 결과를 분석함으로써 헤게모니의 형성 과정을 입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재건국민운동을 둘러싼 상호작용이 헤게모니 형성에 미친 결과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재건국민운동의 결과 국가의 헤게모니 장치로서 말단 행정조직이 확산되고 결과적으로 ...
이 연구는 군사통치기(1961년 5월 16일~1963년 12월 16일) 동안 군사 정권의 헤게모니 형성 과정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이 글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국가의 역량이 성숙하지 못했던 1960년대 초반을 연구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기존 한국 국가형성 논의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던 약한 국가에서 강한 국가로의 정치적 발전 과정을 밝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국가 대 사회라는 이분법적 틀을 넘어 사회를 형성하는 국가와 국가를 형성하는 사회 사이의 상호작용을 경험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둘째는 4·19 항쟁과 5·16 쿠데타를 전후한 시기의 국가-사회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의 이분법적 개념 대립을 비판하고 두 개념이 지닌 복합성의 측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구체화함으로써 연구자는 국가 조직 확산과 대중적 지지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권위주의의 민주주의적 토대가 존재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을 구체화하기 위해, 연구자가 주목한 것은 재건국민운동(再建國民運動)이다. 재건국민운동은 쿠데타 직후 국민적-대중적 지지를 획득하고자 했던 통치 집단과 대중의 민주주의적 계몽을 목표했던 지식인 집단의 연합을 통한 헤게모니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군사통치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재건국민운동은 생활 습관 개선, 문맹퇴치와 민주주의 교육, 향토사회 개발 등 다종다양한 대중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재건국민운동은 운동의 기획과 방향 설정을 주도하는 민간 지식인과 운동의 집행을 담당하는 군인 집단이 공존하는 반관반민(半官半民)적 조직을 전국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이런 조직을 통해서 재건국민운동은 당시 한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농촌 사회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연구자는 재건국민운동을 둘러싼 지식인, 언론인, 군인, 농민, 도시민 사이의 상호작용과 그 사회적 결과를 분석함으로써 헤게모니의 형성 과정을 입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재건국민운동을 둘러싼 상호작용이 헤게모니 형성에 미친 결과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재건국민운동의 결과 국가의 헤게모니 장치로서 말단 행정조직이 확산되고 결과적으로 지역 사회에 대한 국가의 침투력, 정책 수행 역량이 증가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는 통치 집단의 일방적인 강제력 행사의 결과가 아니라 재건국민운동 집단 내부의 지식인과 군인, 그리고 언론 집단의 상호작용 결과였다. 재건국민운동의 반민주주의적 성격에 대한 언론의 비판이 재건국민운동을 통해 민주주의 이념을 전파하려는 민간 지식인과 통치 이념을 전파하려는 군인 세력 사이의 갈등과 경쟁을 심화시키면서 역설적으로 민간 운동 지도부의 말단 행정기구에 대한 의존도가 증가한 것이다. 이렇게 확산된 헤게모니 장치는 1963년 선거 과정에서 여당의 정당 사전조직에 상당 부분 포섭되면서 1963년 선거에서 쿠데타 세력의 승리에 기여하게 된다. 재건국민운동이 박정희 정권의 헤게모니 형성 과정에 야기한 두 번째 결과는 농민들의 박정희 정권 및 여당에 대한 지지를 촉발시켰다는 것이다. 이 역시 국가의 강제력 동원이나 농민에 대한 일방적인 이데올로기적 주입의 결과가 아니라 국가의 사회 침투와 농촌 부락 지배구조의 특수한 성격이 맞물리면서 함께 변화하는 과정의 결과였다. 재건국민운동이 농촌 사회 깊숙이 침투하는 가운데, 1950년대부터 농촌 부락을 지배하고 있었던 이장과 유지 집단의 정당성이 약화되는 한편 성장하고 있었던 청년 농민 집단을 조직적·문화적으로 역량강화하는 결과를 촉발하게 된 것이다. 청년 농민들은 재건국민운동이나 군사 정권의 이데올로기에 적극적으로 동의했거나 설득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통치 이데올로기가 부락 내에서 자신의 정치 투쟁에서 유용했기 때문에 재건국민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고 결과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주된 사회적 지지기반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재건국민운동을 둘러싼 국가 형성 과정은 두 가지 점에서 독특한 특성을 보여준다. 첫째는 국가가 사회관계를 왜곡하고 갈등을 유발시킴으로써 사회로부터 원하는 행위를 동원해내는 능력이다. 재건국민운동에 참여했던 지식인과 부락에서 계급투쟁을 주도했던 청년 농민들이 모두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운동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 국가의 헤게모니를 강화시킨 결과를 낳은 것은, 왜곡된 계급 관계 속에서 정치적 투쟁 대상과 영역이 국소화되고 오히려 국가에 대한 탈정치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둘째는 국가의 도구성이다. 국가 기구나 통치 이데올로기는 각 계급 집단의 정치적·사회적 투쟁 과정에서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각 사회집단의 국가에 대한 의존과 지지가 증가하고 결과적으로 국가가 사회로 침투하는 역량과 헤게모니적 지위가 강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국가의 통치 행위에 대한 사회집단의 대응이 다시 보다 강한 국가의 형성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1960년대 초반 국가 형성은 국가와 사회가 상호작용 속에서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연구는 군사통치기(1961년 5월 16일~1963년 12월 16일) 동안 군사 정권의 헤게모니 형성 과정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이 글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국가의 역량이 성숙하지 못했던 1960년대 초반을 연구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기존 한국 국가형성 논의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던 약한 국가에서 강한 국가로의 정치적 발전 과정을 밝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국가 대 사회라는 이분법적 틀을 넘어 사회를 형성하는 국가와 국가를 형성하는 사회 사이의 상호작용을 경험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둘째는 4·19 항쟁과 5·16 쿠데타를 전후한 시기의 국가-사회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의 이분법적 개념 대립을 비판하고 두 개념이 지닌 복합성의 측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구체화함으로써 연구자는 국가 조직 확산과 대중적 지지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권위주의의 민주주의적 토대가 존재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을 구체화하기 위해, 연구자가 주목한 것은 재건국민운동(再建國民運動)이다. 재건국민운동은 쿠데타 직후 국민적-대중적 지지를 획득하고자 했던 통치 집단과 대중의 민주주의적 계몽을 목표했던 지식인 집단의 연합을 통한 헤게모니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군사통치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재건국민운동은 생활 습관 개선, 문맹퇴치와 민주주의 교육, 향토사회 개발 등 다종다양한 대중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재건국민운동은 운동의 기획과 방향 설정을 주도하는 민간 지식인과 운동의 집행을 담당하는 군인 집단이 공존하는 반관반민(半官半民)적 조직을 전국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이런 조직을 통해서 재건국민운동은 당시 한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농촌 사회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연구자는 재건국민운동을 둘러싼 지식인, 언론인, 군인, 농민, 도시민 사이의 상호작용과 그 사회적 결과를 분석함으로써 헤게모니의 형성 과정을 입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재건국민운동을 둘러싼 상호작용이 헤게모니 형성에 미친 결과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재건국민운동의 결과 국가의 헤게모니 장치로서 말단 행정조직이 확산되고 결과적으로 지역 사회에 대한 국가의 침투력, 정책 수행 역량이 증가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는 통치 집단의 일방적인 강제력 행사의 결과가 아니라 재건국민운동 집단 내부의 지식인과 군인, 그리고 언론 집단의 상호작용 결과였다. 재건국민운동의 반민주주의적 성격에 대한 언론의 비판이 재건국민운동을 통해 민주주의 이념을 전파하려는 민간 지식인과 통치 이념을 전파하려는 군인 세력 사이의 갈등과 경쟁을 심화시키면서 역설적으로 민간 운동 지도부의 말단 행정기구에 대한 의존도가 증가한 것이다. 이렇게 확산된 헤게모니 장치는 1963년 선거 과정에서 여당의 정당 사전조직에 상당 부분 포섭되면서 1963년 선거에서 쿠데타 세력의 승리에 기여하게 된다. 재건국민운동이 박정희 정권의 헤게모니 형성 과정에 야기한 두 번째 결과는 농민들의 박정희 정권 및 여당에 대한 지지를 촉발시켰다는 것이다. 이 역시 국가의 강제력 동원이나 농민에 대한 일방적인 이데올로기적 주입의 결과가 아니라 국가의 사회 침투와 농촌 부락 지배구조의 특수한 성격이 맞물리면서 함께 변화하는 과정의 결과였다. 재건국민운동이 농촌 사회 깊숙이 침투하는 가운데, 1950년대부터 농촌 부락을 지배하고 있었던 이장과 유지 집단의 정당성이 약화되는 한편 성장하고 있었던 청년 농민 집단을 조직적·문화적으로 역량강화하는 결과를 촉발하게 된 것이다. 청년 농민들은 재건국민운동이나 군사 정권의 이데올로기에 적극적으로 동의했거나 설득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통치 이데올로기가 부락 내에서 자신의 정치 투쟁에서 유용했기 때문에 재건국민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고 결과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주된 사회적 지지기반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재건국민운동을 둘러싼 국가 형성 과정은 두 가지 점에서 독특한 특성을 보여준다. 첫째는 국가가 사회관계를 왜곡하고 갈등을 유발시킴으로써 사회로부터 원하는 행위를 동원해내는 능력이다. 재건국민운동에 참여했던 지식인과 부락에서 계급투쟁을 주도했던 청년 농민들이 모두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운동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 국가의 헤게모니를 강화시킨 결과를 낳은 것은, 왜곡된 계급 관계 속에서 정치적 투쟁 대상과 영역이 국소화되고 오히려 국가에 대한 탈정치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둘째는 국가의 도구성이다. 국가 기구나 통치 이데올로기는 각 계급 집단의 정치적·사회적 투쟁 과정에서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각 사회집단의 국가에 대한 의존과 지지가 증가하고 결과적으로 국가가 사회로 침투하는 역량과 헤게모니적 지위가 강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국가의 통치 행위에 대한 사회집단의 대응이 다시 보다 강한 국가의 형성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1960년대 초반 국가 형성은 국가와 사회가 상호작용 속에서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This study examines the formation hegemonic domination during the military regime (16 May 1961 ~ 16 December 1963). The two main objectives are: ⑴ to specify the process of political development from a weak state to a strong state which was not fully discussed in the previous studies by focusing on ...
This study examines the formation hegemonic domination during the military regime (16 May 1961 ~ 16 December 1963). The two main objectives are: ⑴ to specify the process of political development from a weak state to a strong state which was not fully discussed in the previous studies by focusing on early 1960s when the state’s capacity was not sufficiently developed; in this attempt, I intend to challenge the conceptual opposition between state and society and to provide a better empirical description of the state formation process based on state-society relationship approach; and ⑵ to challenge the dichotomy of between democracy and authoritarianism and to illuminate the complex and contradictory relations between democracy and authoritarianism. In order to clarify the problem, I focused on the National Reconstruction Movement. NRM was initiated immediately after the coup, as part of the hegemony project of the military regime, which aimed to obtain more national-popular supports. During most of the military regime, the NRM staged a vigorous popular ‘enlightenment’ campaign to promote ethnic improvement, eradication of illiteracy, local development, and civic education. The organizational character of the movement was unique in the sense that it was formed by both the group of civilian intellectuals and the military officials. Through such organization, it actively implemented the enlightenment project to reform the rural communities that occupied most of the Korean population during early 1960s. By analyzing the interaction between the intellectuals, journalists, militaries, farmers and urban population inside and outside of the NRM, this study tried to clarify the mechanism that led to hegemony of authoritarian regime.
This study examines the formation hegemonic domination during the military regime (16 May 1961 ~ 16 December 1963). The two main objectives are: ⑴ to specify the process of political development from a weak state to a strong state which was not fully discussed in the previous studies by focusing on early 1960s when the state’s capacity was not sufficiently developed; in this attempt, I intend to challenge the conceptual opposition between state and society and to provide a better empirical description of the state formation process based on state-society relationship approach; and ⑵ to challenge the dichotomy of between democracy and authoritarianism and to illuminate the complex and contradictory relations between democracy and authoritarianism. In order to clarify the problem, I focused on the National Reconstruction Movement. NRM was initiated immediately after the coup, as part of the hegemony project of the military regime, which aimed to obtain more national-popular supports. During most of the military regime, the NRM staged a vigorous popular ‘enlightenment’ campaign to promote ethnic improvement, eradication of illiteracy, local development, and civic education. The organizational character of the movement was unique in the sense that it was formed by both the group of civilian intellectuals and the military officials. Through such organization, it actively implemented the enlightenment project to reform the rural communities that occupied most of the Korean population during early 1960s. By analyzing the interaction between the intellectuals, journalists, militaries, farmers and urban population inside and outside of the NRM, this study tried to clarify the mechanism that led to hegemony of authoritarian regime.
주제어
#민주주의 권위주의 재건국민운동 군사통치기 농민 지식인 국가 형성 헤게모니 democracy authoritarianism national reconstruction movement military regime peasants intellectuals state formation hegemony
학위논문 정보
저자
윤지민
학위수여기관
연세대학교 대학원
학위구분
국내석사
학과
사회학과
지도교수
김동노
발행연도
2017
총페이지
vii, 118 p.
키워드
민주주의 권위주의 재건국민운동 군사통치기 농민 지식인 국가 형성 헤게모니 democracy authoritarianism national reconstruction movement military regime peasants intellectuals state formation hegem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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