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조선후기와 근대기를 중심으로 다회의 제작기술 및 수요의 전개를 살펴본다. 다회의 기원과 상징, 그리고 시대상황과 연계하여 다회 제작품과 기술, 수요환경의 변화를 파악하는 것을 연구목적으로 가진다. 다회의 기원과 상징 및 명칭을 고찰하였다. 다회는 여러 올의 명주실로 엮어 짠 끈을 통칭하며, 어떤 대상의 위엄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표상으로 정의해볼 수 있겠다. 다회를 뜻하는 한자 명칭 총24개를 정리하여, 다회의 다양한 쓰임새를 방증하였다. 그중 絛와 綬, 纓은 다회의 형태와 기능성을 대표한다. 조선시대에 파생된 多繪는 새로운 제작기술의 유입 혹은 세밀한 기록을 위해 다회 자체의 명칭의 필요성으로 유추해보았다. 한글 명칭은 ‘-끈’, ‘-띠’, ‘끈목’으로 사용한 것을 확인하였다. 조선시대 경공장 다회장과 매듭장은 다회 관련 품목을 제작한다. 다회장은 대부분의 제작품(금전지, 장황끈, 소형유소 등)을 전담하며, 다회장과 매듭장의 협업은 대형유소의 발생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회장은 다회 전반을 담당한 장인인 반면, 매듭장은 굵은 다회로 정세한 매듭을 맺는 전문기술을 갖춘 장인인 것이다. 조선후기 장시의 발달로 인해 다회는 저변화된다. 또한 다회는 규방공예의 일종이다. 다회 수요확대의 주역은 다회를 치던 여성과 장신구를 유통하던 행상임을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조선시대까지 의물과 복식(조대와 ...
본 논문은 조선후기와 근대기를 중심으로 다회의 제작기술 및 수요의 전개를 살펴본다. 다회의 기원과 상징, 그리고 시대상황과 연계하여 다회 제작품과 기술, 수요환경의 변화를 파악하는 것을 연구목적으로 가진다. 다회의 기원과 상징 및 명칭을 고찰하였다. 다회는 여러 올의 명주실로 엮어 짠 끈을 통칭하며, 어떤 대상의 위엄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표상으로 정의해볼 수 있겠다. 다회를 뜻하는 한자 명칭 총24개를 정리하여, 다회의 다양한 쓰임새를 방증하였다. 그중 絛와 綬, 纓은 다회의 형태와 기능성을 대표한다. 조선시대에 파생된 多繪는 새로운 제작기술의 유입 혹은 세밀한 기록을 위해 다회 자체의 명칭의 필요성으로 유추해보았다. 한글 명칭은 ‘-끈’, ‘-띠’, ‘끈목’으로 사용한 것을 확인하였다. 조선시대 경공장 다회장과 매듭장은 다회 관련 품목을 제작한다. 다회장은 대부분의 제작품(금전지, 장황끈, 소형유소 등)을 전담하며, 다회장과 매듭장의 협업은 대형유소의 발생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회장은 다회 전반을 담당한 장인인 반면, 매듭장은 굵은 다회로 정세한 매듭을 맺는 전문기술을 갖춘 장인인 것이다. 조선후기 장시의 발달로 인해 다회는 저변화된다. 또한 다회는 규방공예의 일종이다. 다회 수요확대의 주역은 다회를 치던 여성과 장신구를 유통하던 행상임을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조선시대까지 의물과 복식(조대와 영자)은 꾸준한 수요가 있었으며, 조선후기에 생활용과 장식용 다회 제작품을 제작 및 소비되었다. 다회의 제작기술은 총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동다회와 광다회로 대별된다. 다시 동다회는 짜는 끈과 꼬는 끈, 광다회는 환조, 편조, 평직이다. 짜는 끈 동다회와 환조 광다회는 다회틀을 사용하며, 꼬는 끈 동다회는 새끼처럼 꼬는 방식으로 제작한다. 편조 광다회는 다회직기로 만들며, 평직 광다회는 직기와 동일한 원리로 구성된 대자틀로 제직한다. 광희동 장인집단은 근대기 가장 명성을 지닌 다회장 집단이다. 광희동 장인집단의 전신은 훈련도감 상공업자로 조선후기까지 소급해본다. 다회장 집단이 취급한 물품은 허리띠, 대님, 댕기 등이다. 특히 광희문 부근은 다수의 발인행렬이 행해져 민가에서 대형유소의 수요가 손꼽혔을 것이다. 다회장과 매듭장의 협업으로 광희동 다회의 명성을 쌓는 것이 가능하였다. 다회 제직기계는 1910년대부터 유입된 것으로 보이며, 1930년대에 기계화가 이뤄진 것으로 추론하였다. 1920년대까지 직뉴(織紐)가 성행하였다. 직뉴는 일제 강점기 때 다회 제직을 지칭하는 일본어이다. 1897년 설립한 ‘정경순공장’을 함께 1911년에 설립한 경성직뉴주식회사를 대표적인 직뉴공장으로 들 수 있겠다. 직뉴회사는 1910년대 말까지 경성 광희정·병목정을 중심으로 다회를 대량생산하여 전국 다회수요를 충당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부터 본격적인 근대복식의 유입과 ‘절약보국운동’으로 인해 필수적인 복식의 범주에서 제외되었으며, 광희문 개발로 인해 1920년에 다회장 집단이 해체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었다. 이후 수예 영역의 진입을 시도하나 당시 조선미술전람회의 미감에 불합하여 탈락한다. 다회의 마지막 소비자는 광복 이전까지 연희를 위해 전통한복을 착용하였던 기생임을 알 수 있겠다. 다회의 제작기술은 남원 노암리 박용학과 광희동 마지막 세대인 매듭장 정연수를 통해 이어지게 된다. 1969년 매듭장 정연수가 국가무형문화재 제22호로 인정되면서, 미술공예적 성격의 매듭공예화가 이루어지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여성들의 규방공예 중 하나로 매듭이 유행하였으며, 현재까지 매듭교육이 활성화를 이룩한 변모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공예의 발전사는 기술과 수용의 연동체계이다. 오랜 시간과 공간, 사람 속에서 공존하며 공예는 유기적인 변화과정을 거치게 된다. 다회를 그 하나의 사례로서 짚어보는 시도이다. 이번 연구는 다회의 기원과 상징, 제작품과 기술 및 소비대상의 변모를 시대상황과 결부하여 분석하였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자 한다.
본 논문은 조선후기와 근대기를 중심으로 다회의 제작기술 및 수요의 전개를 살펴본다. 다회의 기원과 상징, 그리고 시대상황과 연계하여 다회 제작품과 기술, 수요환경의 변화를 파악하는 것을 연구목적으로 가진다. 다회의 기원과 상징 및 명칭을 고찰하였다. 다회는 여러 올의 명주실로 엮어 짠 끈을 통칭하며, 어떤 대상의 위엄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표상으로 정의해볼 수 있겠다. 다회를 뜻하는 한자 명칭 총24개를 정리하여, 다회의 다양한 쓰임새를 방증하였다. 그중 絛와 綬, 纓은 다회의 형태와 기능성을 대표한다. 조선시대에 파생된 多繪는 새로운 제작기술의 유입 혹은 세밀한 기록을 위해 다회 자체의 명칭의 필요성으로 유추해보았다. 한글 명칭은 ‘-끈’, ‘-띠’, ‘끈목’으로 사용한 것을 확인하였다. 조선시대 경공장 다회장과 매듭장은 다회 관련 품목을 제작한다. 다회장은 대부분의 제작품(금전지, 장황끈, 소형유소 등)을 전담하며, 다회장과 매듭장의 협업은 대형유소의 발생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회장은 다회 전반을 담당한 장인인 반면, 매듭장은 굵은 다회로 정세한 매듭을 맺는 전문기술을 갖춘 장인인 것이다. 조선후기 장시의 발달로 인해 다회는 저변화된다. 또한 다회는 규방공예의 일종이다. 다회 수요확대의 주역은 다회를 치던 여성과 장신구를 유통하던 행상임을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조선시대까지 의물과 복식(조대와 영자)은 꾸준한 수요가 있었으며, 조선후기에 생활용과 장식용 다회 제작품을 제작 및 소비되었다. 다회의 제작기술은 총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동다회와 광다회로 대별된다. 다시 동다회는 짜는 끈과 꼬는 끈, 광다회는 환조, 편조, 평직이다. 짜는 끈 동다회와 환조 광다회는 다회틀을 사용하며, 꼬는 끈 동다회는 새끼처럼 꼬는 방식으로 제작한다. 편조 광다회는 다회직기로 만들며, 평직 광다회는 직기와 동일한 원리로 구성된 대자틀로 제직한다. 광희동 장인집단은 근대기 가장 명성을 지닌 다회장 집단이다. 광희동 장인집단의 전신은 훈련도감 상공업자로 조선후기까지 소급해본다. 다회장 집단이 취급한 물품은 허리띠, 대님, 댕기 등이다. 특히 광희문 부근은 다수의 발인행렬이 행해져 민가에서 대형유소의 수요가 손꼽혔을 것이다. 다회장과 매듭장의 협업으로 광희동 다회의 명성을 쌓는 것이 가능하였다. 다회 제직기계는 1910년대부터 유입된 것으로 보이며, 1930년대에 기계화가 이뤄진 것으로 추론하였다. 1920년대까지 직뉴(織紐)가 성행하였다. 직뉴는 일제 강점기 때 다회 제직을 지칭하는 일본어이다. 1897년 설립한 ‘정경순공장’을 함께 1911년에 설립한 경성직뉴주식회사를 대표적인 직뉴공장으로 들 수 있겠다. 직뉴회사는 1910년대 말까지 경성 광희정·병목정을 중심으로 다회를 대량생산하여 전국 다회수요를 충당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부터 본격적인 근대복식의 유입과 ‘절약보국운동’으로 인해 필수적인 복식의 범주에서 제외되었으며, 광희문 개발로 인해 1920년에 다회장 집단이 해체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었다. 이후 수예 영역의 진입을 시도하나 당시 조선미술전람회의 미감에 불합하여 탈락한다. 다회의 마지막 소비자는 광복 이전까지 연희를 위해 전통한복을 착용하였던 기생임을 알 수 있겠다. 다회의 제작기술은 남원 노암리 박용학과 광희동 마지막 세대인 매듭장 정연수를 통해 이어지게 된다. 1969년 매듭장 정연수가 국가무형문화재 제22호로 인정되면서, 미술공예적 성격의 매듭공예화가 이루어지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여성들의 규방공예 중 하나로 매듭이 유행하였으며, 현재까지 매듭교육이 활성화를 이룩한 변모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공예의 발전사는 기술과 수용의 연동체계이다. 오랜 시간과 공간, 사람 속에서 공존하며 공예는 유기적인 변화과정을 거치게 된다. 다회를 그 하나의 사례로서 짚어보는 시도이다. 이번 연구는 다회의 기원과 상징, 제작품과 기술 및 소비대상의 변모를 시대상황과 결부하여 분석하였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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