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1970년대 군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전사로서 1960년대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경험한 대반란전의 성격을 규명하고, 대반란전의 경험이 한국군의 변화에 중요한 변수였음을 밝히고자 했다. 이는 선행연구가 군사 교리적 차원에서 베트남 파병을 이해했던 것에서, 연구의 시야를 역사적 영역으로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첫째, 한국군은 1960년대 초 도미유학과 군사시찰을 통해 미군 대반란전 교리를 수용했는데, 대반란전 교리의 핵심은 군의 경찰임무, 민사심리전, 특수훈련 등이었다. 이를 토대로 군사정부는 대반란전에 필요한 제반사항을 구축했으나, 경찰임무는 군에 부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군 감축문제가 대두되는 상황에서 군이 경찰임무까지 담당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둘째, 주월 한국군은 파병기간 중 미군과 밀접한 협조관계를 형성했고, 이를 통해 미군 대반란전 수행방법을 배웠다. 주월 한국군의 대반란전 방식은 미군과 규모의 차이는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이는 한국군이 파병 전부터 미군 대반란전 교리를 이해했고, 파병기간 중 미군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월 한국군은 미군 대반란전 교리와 한국군의 작전경험을 결합하여 주월 한국군의 교리로 정리했다. 주월 한국군의 교리는 주월 한국군과 국내장교 교육에 활용되었다. 셋째, ...
본 연구는 1970년대 군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전사로서 1960년대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경험한 대반란전의 성격을 규명하고, 대반란전의 경험이 한국군의 변화에 중요한 변수였음을 밝히고자 했다. 이는 선행연구가 군사 교리적 차원에서 베트남 파병을 이해했던 것에서, 연구의 시야를 역사적 영역으로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첫째, 한국군은 1960년대 초 도미유학과 군사시찰을 통해 미군 대반란전 교리를 수용했는데, 대반란전 교리의 핵심은 군의 경찰임무, 민사심리전, 특수훈련 등이었다. 이를 토대로 군사정부는 대반란전에 필요한 제반사항을 구축했으나, 경찰임무는 군에 부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군 감축문제가 대두되는 상황에서 군이 경찰임무까지 담당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둘째, 주월 한국군은 파병기간 중 미군과 밀접한 협조관계를 형성했고, 이를 통해 미군 대반란전 수행방법을 배웠다. 주월 한국군의 대반란전 방식은 미군과 규모의 차이는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이는 한국군이 파병 전부터 미군 대반란전 교리를 이해했고, 파병기간 중 미군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월 한국군은 미군 대반란전 교리와 한국군의 작전경험을 결합하여 주월 한국군의 교리로 정리했다. 주월 한국군의 교리는 주월 한국군과 국내장교 교육에 활용되었다. 셋째, 박정희 정부는 1967년부터 정부주도형 대간첩작전 시스템을 구축해 나갔는데, 그 이유는 전투부대 파병이 시작된 1965년부터 점차 남·북 갈등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군사작전’ 수준에 머물렀던 대간첩작전을 ‘정부정책’에서 논의했고, 세부적으로 「대통령훈령 제18호」 공포, 재건촌 설치, 특전사 창설, 대간첩협의회 설치, 유격훈련 확대 등을 시행했다. 이와 함께 정부는 파병장교들을 ‘베트남 경험의 전달자’로 선택했고, 파병장교들은 파병경험을 국내에 빠르게 전파했다. 파병장교들은 파병경험을 반영한 “對 게릴라전” 교리를 정립함으로써, 대간첩작전 개념을 미군 대반란전 개념으로 변화시켰다.
본 연구는 1970년대 군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전사로서 1960년대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경험한 대반란전의 성격을 규명하고, 대반란전의 경험이 한국군의 변화에 중요한 변수였음을 밝히고자 했다. 이는 선행연구가 군사 교리적 차원에서 베트남 파병을 이해했던 것에서, 연구의 시야를 역사적 영역으로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첫째, 한국군은 1960년대 초 도미유학과 군사시찰을 통해 미군 대반란전 교리를 수용했는데, 대반란전 교리의 핵심은 군의 경찰임무, 민사심리전, 특수훈련 등이었다. 이를 토대로 군사정부는 대반란전에 필요한 제반사항을 구축했으나, 경찰임무는 군에 부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군 감축문제가 대두되는 상황에서 군이 경찰임무까지 담당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둘째, 주월 한국군은 파병기간 중 미군과 밀접한 협조관계를 형성했고, 이를 통해 미군 대반란전 수행방법을 배웠다. 주월 한국군의 대반란전 방식은 미군과 규모의 차이는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이는 한국군이 파병 전부터 미군 대반란전 교리를 이해했고, 파병기간 중 미군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월 한국군은 미군 대반란전 교리와 한국군의 작전경험을 결합하여 주월 한국군의 교리로 정리했다. 주월 한국군의 교리는 주월 한국군과 국내장교 교육에 활용되었다. 셋째, 박정희 정부는 1967년부터 정부주도형 대간첩작전 시스템을 구축해 나갔는데, 그 이유는 전투부대 파병이 시작된 1965년부터 점차 남·북 갈등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군사작전’ 수준에 머물렀던 대간첩작전을 ‘정부정책’에서 논의했고, 세부적으로 「대통령훈령 제18호」 공포, 재건촌 설치, 특전사 창설, 대간첩협의회 설치, 유격훈련 확대 등을 시행했다. 이와 함께 정부는 파병장교들을 ‘베트남 경험의 전달자’로 선택했고, 파병장교들은 파병경험을 국내에 빠르게 전파했다. 파병장교들은 파병경험을 반영한 “對 게릴라전” 교리를 정립함으로써, 대간첩작전 개념을 미군 대반란전 개념으로 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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