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 1815~1860)는 에도(江戸)막부 말엽의 다이로(大老)였던 인물이다. 또한 그는 득오의 인가까지 받았던 선 수행자이며 차·와카(和歌)·노가쿠(能樂) 같은 기예와 검술·창술 등의 무예에도 조예가 깊은 문화인이었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국내외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미일수호통상조약과 쇼군가(將軍家)의 후계문제를 매듭지었다. 하지만 정적에 대한 가혹한 탄압과 고메이 천황과의 불화로 반대파인 양이세력들에 의해 46세의 나이에 암살 당했다. 그는 강의과단(剛毅果斷)한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치적 입장에 따라 공신과 국적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한편 그는 특히 차도에 있어 오랜 수행과 연구를 바탕으로 자신의 일파의 수립과 함께 많은 차도 관련 저술 등을 남겼다. 『차탕일회집(茶湯一會集)』은 그의 인생의 정점이며 차도가 가장 원숙해졌던 시기에 저술한 주저이다. 자신의 차사작법의 총론서에 해당하는 책으로 차도사상의 핵심인 ‘일기일회(一期一會)’와 ‘독좌관념(獨座觀念)’의 내용을 여기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 연구는 『차탕일회집』을 중심으로 이이 나오스케의 차도사상을 구명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기복 심한 그의 생애와 독실한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그의 차도사상은 형성되었다. 그것을 밝히기 위해서 그의 성장과정, 무사로서의 수행과 불교의 탐구 그리고 차도 수행과 연구의 과정, 그리고 그의 차도사상이 집대성되기 이전의 형성 과정을 당시의 시대 배경과 그의 저술 및 활동을 통해 분석하였다. 특히 『차탕일회집』을 분석하여 그의 차도사상의 근원을 파악하고 타류와 구분되는 독자성과 차사작법 속의 근본 뜻을 파악함으로써 그가 차도를 통해 실현하려는 이상을 이해하려 했다. 히코네(彦根)번의 세자로 출세하기 전까지 그는 15년여를 우모레기노야(埋木舍)에서 은거 생활을 했다. 권력에서 배제된 서자로서의 불우한 이 시절이 오히려 그에게는 수행과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의 처지를 위안하고 극복하기 위해 선과 차도 등에 매진했던 것이 그의 차도사상의 밑거름이 되었다. 에도 말기 그리고 다이묘(大名)라는 신분으로서 그가 불교 신앙에 심취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경우였다. 그의 차도사상은 불교 신앙에 바탕한 선사상(禪思想)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는 센에이(仙英)선사에게 참선하며 도겐(道元)의 조동선을 익혔다. 선수행의 경험과 득오를 통해 그는 행지(行持)로서 차도수행이 선수행과 동일함을 깨달았다. 차도의 본질이 불교 수행에 있다는 그의 차도사상은 여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는 초년 시절 다이묘차로서 세키슈류를 접하였다. 그러나 그는 특정한 스승의 문하에 정식으로 입문하지 아니하고, 독학으로 차도의 수행과 연구를 진행했다. 대신 가타기리 사다노부(片桐貞信, 1802~1848)와 가타기리 소엔(片桐宗猿, 1774~1864) 등의 차인과 교류를 통해 자신의 차도를 완성시켜 나갔다. 선의 본질을 체득한 그는 당시 차도의 유예화(遊藝化)를 경계하며 이러한 것을 세간차(世間茶)라 하여 철저히 배격하려 하였다. 그에게 이상적인 차도 즉 진차(眞茶)는 불교 수행이 바탕이 된 차도였기 때문이다. 『차탕일회집』에서 그의 핵심사상인 ‘일기일회’와 ‘독좌관념’도 차를 통한 불교적 깨달음 내지 의식의 고양이 목적이다. 그는 『차탕일회집』에서 기존 차도의 유예화를 비난하면서 불교 수행을 바탕으로 초암차의 전통을 회복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자신의 유의가 세키슈류에 속해 있음에도 세키슈류 차서의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많은 부분에서 『남방록(南方錄)』 등을 통해 수정하고 있다. 그리고 다이묘차의 의례적·연회적 요소를 제거하는 한편 차사작법의 연원을 선원청규(禪院淸規)와 승방의 법식에서 구함으로써 ...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 1815~1860)는 에도(江戸)막부 말엽의 다이로(大老)였던 인물이다. 또한 그는 득오의 인가까지 받았던 선 수행자이며 차·와카(和歌)·노가쿠(能樂) 같은 기예와 검술·창술 등의 무예에도 조예가 깊은 문화인이었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국내외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미일수호통상조약과 쇼군가(將軍家)의 후계문제를 매듭지었다. 하지만 정적에 대한 가혹한 탄압과 고메이 천황과의 불화로 반대파인 양이세력들에 의해 46세의 나이에 암살 당했다. 그는 강의과단(剛毅果斷)한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치적 입장에 따라 공신과 국적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한편 그는 특히 차도에 있어 오랜 수행과 연구를 바탕으로 자신의 일파의 수립과 함께 많은 차도 관련 저술 등을 남겼다. 『차탕일회집(茶湯一會集)』은 그의 인생의 정점이며 차도가 가장 원숙해졌던 시기에 저술한 주저이다. 자신의 차사작법의 총론서에 해당하는 책으로 차도사상의 핵심인 ‘일기일회(一期一會)’와 ‘독좌관념(獨座觀念)’의 내용을 여기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 연구는 『차탕일회집』을 중심으로 이이 나오스케의 차도사상을 구명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기복 심한 그의 생애와 독실한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그의 차도사상은 형성되었다. 그것을 밝히기 위해서 그의 성장과정, 무사로서의 수행과 불교의 탐구 그리고 차도 수행과 연구의 과정, 그리고 그의 차도사상이 집대성되기 이전의 형성 과정을 당시의 시대 배경과 그의 저술 및 활동을 통해 분석하였다. 특히 『차탕일회집』을 분석하여 그의 차도사상의 근원을 파악하고 타류와 구분되는 독자성과 차사작법 속의 근본 뜻을 파악함으로써 그가 차도를 통해 실현하려는 이상을 이해하려 했다. 히코네(彦根)번의 세자로 출세하기 전까지 그는 15년여를 우모레기노야(埋木舍)에서 은거 생활을 했다. 권력에서 배제된 서자로서의 불우한 이 시절이 오히려 그에게는 수행과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의 처지를 위안하고 극복하기 위해 선과 차도 등에 매진했던 것이 그의 차도사상의 밑거름이 되었다. 에도 말기 그리고 다이묘(大名)라는 신분으로서 그가 불교 신앙에 심취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경우였다. 그의 차도사상은 불교 신앙에 바탕한 선사상(禪思想)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는 센에이(仙英)선사에게 참선하며 도겐(道元)의 조동선을 익혔다. 선수행의 경험과 득오를 통해 그는 행지(行持)로서 차도수행이 선수행과 동일함을 깨달았다. 차도의 본질이 불교 수행에 있다는 그의 차도사상은 여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는 초년 시절 다이묘차로서 세키슈류를 접하였다. 그러나 그는 특정한 스승의 문하에 정식으로 입문하지 아니하고, 독학으로 차도의 수행과 연구를 진행했다. 대신 가타기리 사다노부(片桐貞信, 1802~1848)와 가타기리 소엔(片桐宗猿, 1774~1864) 등의 차인과 교류를 통해 자신의 차도를 완성시켜 나갔다. 선의 본질을 체득한 그는 당시 차도의 유예화(遊藝化)를 경계하며 이러한 것을 세간차(世間茶)라 하여 철저히 배격하려 하였다. 그에게 이상적인 차도 즉 진차(眞茶)는 불교 수행이 바탕이 된 차도였기 때문이다. 『차탕일회집』에서 그의 핵심사상인 ‘일기일회’와 ‘독좌관념’도 차를 통한 불교적 깨달음 내지 의식의 고양이 목적이다. 그는 『차탕일회집』에서 기존 차도의 유예화를 비난하면서 불교 수행을 바탕으로 초암차의 전통을 회복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자신의 유의가 세키슈류에 속해 있음에도 세키슈류 차서의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많은 부분에서 『남방록(南方錄)』 등을 통해 수정하고 있다. 그리고 다이묘차의 의례적·연회적 요소를 제거하는 한편 차사작법의 연원을 선원청규(禪院淸規)와 승방의 법식에서 구함으로써 수행성을 회복하려 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일기일회’의 관념은 단순히 선대의 차인과 차서의 답습이 아니라 차도의 수행성을 바탕으로 한층 더 발전시킨 개념이다. ‘일기일회’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차회의 즉흥성 즉 일회성을 주목하여 주객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라면, 그는 수행의 즉시성과 현재성을 강조하려 했다. ‘독좌관념’의 개념도 그만의 독자적 개념이다. 기존의 차서들이 ‘여정잔심(餘情殘心)’의 단계에서 머물고 있는 것을 그는 무상관을 통해 ‘일기일회’의 본의를 깨닫는 것으로 자기 내면의 자성을 마주 대하고, 그것이 공한 것임을 깨닫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차탕일회집』에서 그는 초암차의 전통을 계승하고 검(儉)의 차도를 실천하여 차선일미사상을 구현하려 했다. 한편 기존 무가차도의 신분적 한계성에 대하여 여성의 차도참여 긍정과 귀천을 불문한 평등의 차도를 지양하여 전향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이 나오스케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차도란 ‘일기일회’의 본의를 회득하는 차도 즉 불교적 깨달음을 전제로 한 수행의 차도이며, 차선일미(茶禪一味)의 실천임을 말한다. 차도의 변질과 본의의 회복에 대한 고민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가 추구하려 했던 차도를 통한 깨달음 내지 의식의 고양은 현재에 더욱 필요한 것이라 하겠다.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 1815~1860)는 에도(江戸)막부 말엽의 다이로(大老)였던 인물이다. 또한 그는 득오의 인가까지 받았던 선 수행자이며 차·와카(和歌)·노가쿠(能樂) 같은 기예와 검술·창술 등의 무예에도 조예가 깊은 문화인이었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국내외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미일수호통상조약과 쇼군가(將軍家)의 후계문제를 매듭지었다. 하지만 정적에 대한 가혹한 탄압과 고메이 천황과의 불화로 반대파인 양이세력들에 의해 46세의 나이에 암살 당했다. 그는 강의과단(剛毅果斷)한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치적 입장에 따라 공신과 국적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한편 그는 특히 차도에 있어 오랜 수행과 연구를 바탕으로 자신의 일파의 수립과 함께 많은 차도 관련 저술 등을 남겼다. 『차탕일회집(茶湯一會集)』은 그의 인생의 정점이며 차도가 가장 원숙해졌던 시기에 저술한 주저이다. 자신의 차사작법의 총론서에 해당하는 책으로 차도사상의 핵심인 ‘일기일회(一期一會)’와 ‘독좌관념(獨座觀念)’의 내용을 여기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 연구는 『차탕일회집』을 중심으로 이이 나오스케의 차도사상을 구명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기복 심한 그의 생애와 독실한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그의 차도사상은 형성되었다. 그것을 밝히기 위해서 그의 성장과정, 무사로서의 수행과 불교의 탐구 그리고 차도 수행과 연구의 과정, 그리고 그의 차도사상이 집대성되기 이전의 형성 과정을 당시의 시대 배경과 그의 저술 및 활동을 통해 분석하였다. 특히 『차탕일회집』을 분석하여 그의 차도사상의 근원을 파악하고 타류와 구분되는 독자성과 차사작법 속의 근본 뜻을 파악함으로써 그가 차도를 통해 실현하려는 이상을 이해하려 했다. 히코네(彦根)번의 세자로 출세하기 전까지 그는 15년여를 우모레기노야(埋木舍)에서 은거 생활을 했다. 권력에서 배제된 서자로서의 불우한 이 시절이 오히려 그에게는 수행과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의 처지를 위안하고 극복하기 위해 선과 차도 등에 매진했던 것이 그의 차도사상의 밑거름이 되었다. 에도 말기 그리고 다이묘(大名)라는 신분으로서 그가 불교 신앙에 심취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경우였다. 그의 차도사상은 불교 신앙에 바탕한 선사상(禪思想)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는 센에이(仙英)선사에게 참선하며 도겐(道元)의 조동선을 익혔다. 선수행의 경험과 득오를 통해 그는 행지(行持)로서 차도수행이 선수행과 동일함을 깨달았다. 차도의 본질이 불교 수행에 있다는 그의 차도사상은 여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는 초년 시절 다이묘차로서 세키슈류를 접하였다. 그러나 그는 특정한 스승의 문하에 정식으로 입문하지 아니하고, 독학으로 차도의 수행과 연구를 진행했다. 대신 가타기리 사다노부(片桐貞信, 1802~1848)와 가타기리 소엔(片桐宗猿, 1774~1864) 등의 차인과 교류를 통해 자신의 차도를 완성시켜 나갔다. 선의 본질을 체득한 그는 당시 차도의 유예화(遊藝化)를 경계하며 이러한 것을 세간차(世間茶)라 하여 철저히 배격하려 하였다. 그에게 이상적인 차도 즉 진차(眞茶)는 불교 수행이 바탕이 된 차도였기 때문이다. 『차탕일회집』에서 그의 핵심사상인 ‘일기일회’와 ‘독좌관념’도 차를 통한 불교적 깨달음 내지 의식의 고양이 목적이다. 그는 『차탕일회집』에서 기존 차도의 유예화를 비난하면서 불교 수행을 바탕으로 초암차의 전통을 회복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자신의 유의가 세키슈류에 속해 있음에도 세키슈류 차서의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많은 부분에서 『남방록(南方錄)』 등을 통해 수정하고 있다. 그리고 다이묘차의 의례적·연회적 요소를 제거하는 한편 차사작법의 연원을 선원청규(禪院淸規)와 승방의 법식에서 구함으로써 수행성을 회복하려 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일기일회’의 관념은 단순히 선대의 차인과 차서의 답습이 아니라 차도의 수행성을 바탕으로 한층 더 발전시킨 개념이다. ‘일기일회’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차회의 즉흥성 즉 일회성을 주목하여 주객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라면, 그는 수행의 즉시성과 현재성을 강조하려 했다. ‘독좌관념’의 개념도 그만의 독자적 개념이다. 기존의 차서들이 ‘여정잔심(餘情殘心)’의 단계에서 머물고 있는 것을 그는 무상관을 통해 ‘일기일회’의 본의를 깨닫는 것으로 자기 내면의 자성을 마주 대하고, 그것이 공한 것임을 깨닫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차탕일회집』에서 그는 초암차의 전통을 계승하고 검(儉)의 차도를 실천하여 차선일미사상을 구현하려 했다. 한편 기존 무가차도의 신분적 한계성에 대하여 여성의 차도참여 긍정과 귀천을 불문한 평등의 차도를 지양하여 전향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이 나오스케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차도란 ‘일기일회’의 본의를 회득하는 차도 즉 불교적 깨달음을 전제로 한 수행의 차도이며, 차선일미(茶禪一味)의 실천임을 말한다. 차도의 변질과 본의의 회복에 대한 고민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가 추구하려 했던 차도를 통한 깨달음 내지 의식의 고양은 현재에 더욱 필요한 것이라 하겠다.
Ii Naosuke(井伊直弼, 1815~1860) was a chief minister in the last days of the Edo period. He was a famous politician, a zen master who obtained a certificate of spiritual enlightenment and a culturati who was well-versed in tea, Japanese poetry, Japanese play and martial arts as swordsmanship and spearma...
Ii Naosuke(井伊直弼, 1815~1860) was a chief minister in the last days of the Edo period. He was a famous politician, a zen master who obtained a certificate of spiritual enlightenment and a culturati who was well-versed in tea, Japanese poetry, Japanese play and martial arts as swordsmanship and spearmanship. He solved the treaty between Japan and America and the succession struggle of the Tokugawa shogunate in the chaotic political situation in and outside the country. He finished his life at the age of 46 by the assassination which carried out by the political opponent caused by a harsh political suppression and discord with Emperor Kōmei(孝明天皇). He was known as the politician who was strong-willed and decisive. But he was given conflicting reviews as a meritorious retainer or a traitor in accordance with a political stance. On the other hand, based on long training and research as an expert in tea, he founded a new sect and left lots of books and writing about tea ceremony. Chanoyuichiesu(茶湯一會集) is the book written at his prime. It is a book of a general introduction to the tea ceremony. The core of his thought of the tea ceremony, ‘Ichigoichie(一期一會)’ and ‘Dokuzakannen(獨座觀念)’ are described in this book.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dentify the thought of the tea ceremony of Ii Naosuke focusing on Chanoyuichiesu. His thought of the tea ceremony was formed based on his eventful career and Buddhist faith. To trace the basis of his thought, I analyze his growth process, knight-errantry, exploration of Buddhism and raining and research of tea. this study revealed the process of formation of his thought by investigating his writings, activities and time background. Especially I attempt to understand his ideal of tea ceremony by grasping the origin of ideas and his intention in his book. Before starting his career as the prince of Hikone, Ii Naosuke lived in seclusion from the world as a bastard son. In the deprived days ousted from power, he could be absorbed in the research and training to console himself and overcome hardships. Striving to concentrate on his study about zen and tea was the foundation for the development of his tea philosophy. His devout Buddhist faith was an extremely unusual case to the capacity of a chief minister in the last days of the Edo period. He learned zen meditation of Dogen(道元) from the monk Senei(仙英). From experiences of zen training and spiritual enlightenment, he realized that the training of tea is equal to the training of zen. His thought of tea that the essence of tea ceremony resides in Buddhist asceticism started from those experiences. He encountered the tea ceremony of Sekisyu style(石州流) in his childhood. Without a teacher and entrance of a specific class, he taught the tea ceremony to himself and kept up his training and research. He supplemented his tea ceremony by the exchange of letters with experts of the days, Katagiri Sadanobu(片桐貞信) and Katagiri Sōen(片桐宗猿). He strictly rejected the decadence of the tea ceremony that he called the secularized tea(世間茶). The ideal type of tea ceremony that he desired was the tea ceremony based on Buddhist practice asceticism. The goal of his thought in Chanoyuichiesu, Ichigoichie and Dokuzakannen was Buddhist enlightenment and enhancement of consciousness by the tea ceremony. He attempted to restore the tradition of Wabi-cha associated with Sen Rikyū(草庵茶) and criticized the then malady of the tea ceremony in his book. Therefore, he modified his tea ceremony divaricated from Sekisyu style with Nanpōroku(南方錄) and the technique of Wabi-cha. He eliminated apolaustic and extravagant elements of Daimyō-cha(大名茶) from his tea ceremony. He restored the asceticism of the tea ceremony by finding the origin of techniques of tea from the Rule of purity(禪院淸規) and etiquette of monks in the zen center. Ichigoichie and Dokuzakannen in his book, were original concepts based on Buddhist practice asceticism, not following the previous books and master of tea. In Ichigoichie, the existing perception was one-shot of the tea ceremony that means ‘once in a lifetime’. But he emphasized the immediacy and nowness of practice like ‘now and here’. He insisted that Dokuzakannen is the step of realization of the meaning of Ichigoichie by the view of transient and empty. He tried to implement the oneness of tea and zen by succeeding the tradition of Wabi-cha and practice the tea ceremony of simplicity. He overcame limitations of the tea ceremony of warrior class by accepting women's participation and aiming equality without distinction of rank in the tea ceremony. The true meaning of the tea ceremony that he said, is the tea ceremony of practice asceticism aimed at Buddhist enlightenment, that knows the truth of Ichigoichie. And it is the practice of the oneness of tea and zen(茶禪一味) in the true sense of the word. It continues to this day that The agony about recovery to distortion of essentials of tea. The ideal of Ii Naosuke that is the enhancement of consciousness by the tea ceremony, it may be necessary for the present as ever.
Ii Naosuke(井伊直弼, 1815~1860) was a chief minister in the last days of the Edo period. He was a famous politician, a zen master who obtained a certificate of spiritual enlightenment and a culturati who was well-versed in tea, Japanese poetry, Japanese play and martial arts as swordsmanship and spearmanship. He solved the treaty between Japan and America and the succession struggle of the Tokugawa shogunate in the chaotic political situation in and outside the country. He finished his life at the age of 46 by the assassination which carried out by the political opponent caused by a harsh political suppression and discord with Emperor Kōmei(孝明天皇). He was known as the politician who was strong-willed and decisive. But he was given conflicting reviews as a meritorious retainer or a traitor in accordance with a political stance. On the other hand, based on long training and research as an expert in tea, he founded a new sect and left lots of books and writing about tea ceremony. Chanoyuichiesu(茶湯一會集) is the book written at his prime. It is a book of a general introduction to the tea ceremony. The core of his thought of the tea ceremony, ‘Ichigoichie(一期一會)’ and ‘Dokuzakannen(獨座觀念)’ are described in this book.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dentify the thought of the tea ceremony of Ii Naosuke focusing on Chanoyuichiesu. His thought of the tea ceremony was formed based on his eventful career and Buddhist faith. To trace the basis of his thought, I analyze his growth process, knight-errantry, exploration of Buddhism and raining and research of tea. this study revealed the process of formation of his thought by investigating his writings, activities and time background. Especially I attempt to understand his ideal of tea ceremony by grasping the origin of ideas and his intention in his book. Before starting his career as the prince of Hikone, Ii Naosuke lived in seclusion from the world as a bastard son. In the deprived days ousted from power, he could be absorbed in the research and training to console himself and overcome hardships. Striving to concentrate on his study about zen and tea was the foundation for the development of his tea philosophy. His devout Buddhist faith was an extremely unusual case to the capacity of a chief minister in the last days of the Edo period. He learned zen meditation of Dogen(道元) from the monk Senei(仙英). From experiences of zen training and spiritual enlightenment, he realized that the training of tea is equal to the training of zen. His thought of tea that the essence of tea ceremony resides in Buddhist asceticism started from those experiences. He encountered the tea ceremony of Sekisyu style(石州流) in his childhood. Without a teacher and entrance of a specific class, he taught the tea ceremony to himself and kept up his training and research. He supplemented his tea ceremony by the exchange of letters with experts of the days, Katagiri Sadanobu(片桐貞信) and Katagiri Sōen(片桐宗猿). He strictly rejected the decadence of the tea ceremony that he called the secularized tea(世間茶). The ideal type of tea ceremony that he desired was the tea ceremony based on Buddhist practice asceticism. The goal of his thought in Chanoyuichiesu, Ichigoichie and Dokuzakannen was Buddhist enlightenment and enhancement of consciousness by the tea ceremony. He attempted to restore the tradition of Wabi-cha associated with Sen Rikyū(草庵茶) and criticized the then malady of the tea ceremony in his book. Therefore, he modified his tea ceremony divaricated from Sekisyu style with Nanpōroku(南方錄) and the technique of Wabi-cha. He eliminated apolaustic and extravagant elements of Daimyō-cha(大名茶) from his tea ceremony. He restored the asceticism of the tea ceremony by finding the origin of techniques of tea from the Rule of purity(禪院淸規) and etiquette of monks in the zen center. Ichigoichie and Dokuzakannen in his book, were original concepts based on Buddhist practice asceticism, not following the previous books and master of tea. In Ichigoichie, the existing perception was one-shot of the tea ceremony that means ‘once in a lifetime’. But he emphasized the immediacy and nowness of practice like ‘now and here’. He insisted that Dokuzakannen is the step of realization of the meaning of Ichigoichie by the view of transient and empty. He tried to implement the oneness of tea and zen by succeeding the tradition of Wabi-cha and practice the tea ceremony of simplicity. He overcame limitations of the tea ceremony of warrior class by accepting women's participation and aiming equality without distinction of rank in the tea ceremony. The true meaning of the tea ceremony that he said, is the tea ceremony of practice asceticism aimed at Buddhist enlightenment, that knows the truth of Ichigoichie. And it is the practice of the oneness of tea and zen(茶禪一味) in the true sense of the word. It continues to this day that The agony about recovery to distortion of essentials of tea. The ideal of Ii Naosuke that is the enhancement of consciousness by the tea ceremony, it may be necessary for the present as 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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