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한국에서 풍수와 불교의 교섭이 언제 시작되었고 정치주도세력에 의해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 사회 및 풍수와 불교 상호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탐구한 글이다. 역사상에서 풍수와 불교는 융합적인 문화형태로 교섭되어 사찰의 입지 및 기능, 사회 공간적 이데올로기의 형성, 풍수의 도입 및 확산, 비보사탑설의 전개 등에서 영향을 주었다. 풍수와 불교는 신라 하대에 선종의 전래를 계기로 본격적인 교섭을 시작하였고, 나말려초에는 사회변혁을 이끄는 공간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으며, 고려시대를 걸쳐서는 왕권의 중앙집중 및 지방의 효율적인 통어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이념적 장치로 적극 활용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정치지배권에서의 불교와 풍수의 교섭은 쇠퇴되고 민간부문에서만 미약하게 유지되었다.
이 연구는 한국에서 풍수와 불교의 교섭이 언제 시작되었고 정치주도세력에 의해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 사회 및 풍수와 불교 상호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탐구한 글이다. 역사상에서 풍수와 불교는 융합적인 문화형태로 교섭되어 사찰의 입지 및 기능, 사회 공간적 이데올로기의 형성, 풍수의 도입 및 확산, 비보사탑설의 전개 등에서 영향을 주었다. 풍수와 불교는 신라 하대에 선종의 전래를 계기로 본격적인 교섭을 시작하였고, 나말려초에는 사회변혁을 이끄는 공간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으며, 고려시대를 걸쳐서는 왕권의 중앙집중 및 지방의 효율적인 통어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이념적 장치로 적극 활용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정치지배권에서의 불교와 풍수의 교섭은 쇠퇴되고 민간부문에서만 미약하게 유지되었다.
In Korean history, Fengshui and Buddhism were closely connected in a harmonious and interrelated manner, together influencing the location and function of Buddhist temples, the forming of social and spatial ideologies, the spread of Fengshui, the development of Buddhist Bibo-Fengshui, ete. The inter...
In Korean history, Fengshui and Buddhism were closely connected in a harmonious and interrelated manner, together influencing the location and function of Buddhist temples, the forming of social and spatial ideologies, the spread of Fengshui, the development of Buddhist Bibo-Fengshui, ete. The interaction between Fengshui and Buddhism, which began after the introduction of Zen Buddhism in the late-Silla period, acted as a spatial ideology that empowered the powerful local gentries to trigger a social upheaval in the late-Silla period and was used by the government leaders for political purposes throughout the Goryeo period. In the Joseon period, the link between Buddhism and Fengshui weakened and was felt only at a grass-roots level.
In Korean history, Fengshui and Buddhism were closely connected in a harmonious and interrelated manner, together influencing the location and function of Buddhist temples, the forming of social and spatial ideologies, the spread of Fengshui, the development of Buddhist Bibo-Fengshui, ete. The interaction between Fengshui and Buddhism, which began after the introduction of Zen Buddhism in the late-Silla period, acted as a spatial ideology that empowered the powerful local gentries to trigger a social upheaval in the late-Silla period and was used by the government leaders for political purposes throughout the Goryeo period. In the Joseon period, the link between Buddhism and Fengshui weakened and was felt only at a grass-roots le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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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정의
둘째, 나말려초의 사회정치적 주도집단에 의한 비보 사탑 설의 형성과 공간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적 기능을 고찰한다. 셋째, 풍수의 도입 및 공간적 확산에 미친 불교의 영향과, 사찰의 입지 및 사회문화적 기능에 미친 풍수의 영향에 관하여 논구한다.
중 . 일에서의 풍수와 불교 교섭의 기원을 살펴본다. 둘째, 나말려초의 사회정치적 주도집단에 의한 비보 사탑 설의 형성과 공간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적 기능을 고찰한다.
어떤 양상으로 형성 . 전개되었는지를 실펴보고, 그것이 한국의 사회 및 풍수와 불교 상호 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탐구한 글이다.
제안 방법
고려 태조 왕건은 도선의 비보설에 준거하여 국토의 지역 체계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수도와 지방도시에 여러 비보사찰들을 배치하였으며, 후대의 고려 조정에서는 풍수와 불교를 결합시킨 의례로서 지리 연기 비보를 실행하였다. 그리고 고려 조정에서는 풍수(地理業)를 전문적으로 하는 관직을 승려에게 배정하여 담당하게 했고, 몇몇 승려들은 국가의 중요한 풍수적 입지 결정에 참여하고 왕실이나 귀족들의 풍수도참적 자문도 하였다.
고려 조정은 비보설을 국토 공간의 통합적 운용 원리로 입각하여 수도와 지방에 비보 사찰을 설치 . 관리하였고, 풍수와 불교를 결합한 국가적 의례로서 延基裨補를 실행하였다.
일에서의 풍수와 불교 교섭의 기원을 살펴본다. 둘째, 나말려초의 사회정치적 주도집단에 의한 비보 사탑 설의 형성과 공간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적 기능을 고찰한다. 셋째, 풍수의 도입 및 공간적 확산에 미친 불교의 영향과, 사찰의 입지 및 사회문화적 기능에 미친 풍수의 영향에 관하여 논구한다.
이상과 같은 논지를 기초로 하여 이 글의 구성은, 풍수와 불교 교섭의 역사적 기원과 전개, 풍수와 불교의 교섭으로 인한 상호 영향이라는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전자에 관해서는, 한국에서 풍수와 불교가 교섭한 시기는 언제부터이고, 풍수와 불교의 교섭을 담당한 사회 집단은 누구이고 그 계기는 무엇이며, 풍수와 불교의 교섭은 전환기의 신라사회에 어떠한 기능을 하였는지가 탐구될 것이다.
당대의 유명한 승려 겸 풍수 전문가로는 -行(673-727), 浮屠泓(泓師) 등이 있었다. 특히 - 行은 당대의 고승으로 그의 山河兩界說은 후세 풍수가들의 界水理論의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당 玄宗의 칙명으로 풍수경전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郭璞의'■錦囊經」을 僧 泓師 등과 주석하였다. 송대를거쳐 명대에는 目講僧과 非幻和尙이 풍수승으로 유명하였는데, 非幻和尙은 왕의 부름을 받아 창평 天壽山 의 왕릉지를 선택한 장본인으로 알려진다(高友謙, 1992, 195-196, 201-202).
풍수와 불교의 교섭사를 시기 구분하여 각 전개과정의 특징을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기존의 선행 연구와는 다른 학술적 의의를 둘 수 있다. 특히 나말려초의 시기에 풍수와 불교는 사회정치적 주도집단에 의해 비보사탑설로 형성되어 공간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선불교는 풍수의 지방 도입 및 확산에 기여하였고, 풍수는 사찰의 입지 경관 및 택지 방법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사찰의 사회문화적 내용 및 기능에도 풍수적 요소가 부가되었음을 중점적으로 논하였다. 본문의 골자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능/효과
그런데「삼* 국유사권3「황룡사구층탑」조에는 7세기 경 신라인들의 풍수와 불교 교섭의 초기적 인식이라고 할 만한 분명한 대목이 있는데' 산천의 흉한 형세로 빚어지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황룡사구층탑을 건립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3) 이렇게 산천의 형세에 대한 길흉이라는 풍수적 견지의 파악과 그 대처 방법으로서의 佛塔의 활용이라는 사유의 단초는 이후 나말려초에 비보사탑설의 공간적 정립 및 정치주도세력에 의한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활용으로 발전되었다.
마조 법맥의 사찰이 집중하여 있는 강서 지방은 당시 풍수 兩大 이론의 일파인 형세론이 매우 성행한 지역으로서, 그 영향으로 많은 선종 사찰들이 풍수적 입지를 하였다. 7)이렇듯 선불교와 풍수의 활발한 교섭은 선종사찰의 풍수적 입지 경관으로 구현되었고, 강서 지역을 선불교와 풍수 교섭의 확산과 전파에 있어 문화핵심지로 하는 문화지역의 형성을 촉진하였다.
μ> 이러한 택지법은 사굴산 선문의 개산조인 梵 日(810-889)에서도 나타나며, 범일은 간자를 이용해서 858년에 낙산사를 점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진표가 간자를 받았다는 740년을 시작으로, 心地와 梵日 이 간자로 택지하고 있는 9세기 중반에 걸쳐서 간자를 이용한 사찰 택지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풍수적인 사찰 택지 방법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시기도 이 무렵과 동시 대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 럼 풍수의 영향으로 불교 사찰의 입지경관과 사찰터 택지법에 변화가 생겼고, 사찰의 사회문화적 정체성과 기능 역시 비보사찰의 경우 불교적 기능에다 풍수비보적 기능을 겸하게 됨으로써 변용되었던 것이다.
형성하였다. 풍수와 불교가 만나 사상적으로 地 力思想과 佛力信仰이 결합하였으며, 자연과 마음의 만남의 미학을 창출하였다. 한국의 역사에서 풍수와 불교는 깊은 관계를 맺고 오늘에 이르렀는데, 한국풍수설의 시조가 승려 道読(827-898)이라는 역사적 인식도 그러하고, 대다수의 옛 불교 사찰은 풍수적 입지 경관을 보여주며, 특히 고려시대에서 풍수와 불교는 결합되어 사회적 -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후속연구
또한 위의 비문에 의거하면 8세기 말 이전에는 이미 鵠寺가 풍수적 길지에 입지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다만 최초에 鵠寺址가 풍수적 견지로 택지되었는지 아니면 우연히 풍수적 입지와 합치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이미 600년에 백제 法王이 짓기 시작한 王興寺 터의 입지지형이 배산임수(附山臨水片의 풍수적 경관을 보인다는 사실에서나, 원효(617-686)와 의상(625-702)이 창건한 사찰들 그리고 다수의 교종계사찰 들이 풍수적 입지와 부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7세기 초의 삼국시대 말기에 사찰입지를 둘러싼 풍수와 불교의 교섭 사실을 추정할 수 있겠다.
전자에 관해서는, 한국에서 풍수와 불교가 교섭한 시기는 언제부터이고, 풍수와 불교의 교섭을 담당한 사회 집단은 누구이고 그 계기는 무엇이며, 풍수와 불교의 교섭은 전환기의 신라사회에 어떠한 기능을 하였는지가 탐구될 것이다. 후자에 관해서는, 풍수의 확산과정에 불교는 어떠한 역할을 하였고, 풍수는 불교의 사찰입지를 어떻게 바꾸었으며, 사찰의 성격 및 기능에도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논구될 것이다.
전자에 관해서는, 한국에서 풍수와 불교가 교섭한 시기는 언제부터이고, 풍수와 불교의 교섭을 담당한 사회 집단은 누구이고 그 계기는 무엇이며, 풍수와 불교의 교섭은 전환기의 신라사회에 어떠한 기능을 하였는지가 탐구될 것이다. 후자에 관해서는, 풍수의 확산과정에 불교는 어떠한 역할을 하였고, 풍수는 불교의 사찰입지를 어떻게 바꾸었으며, 사찰의 성격 및 기능에도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논구될 것이다.
참고문헌 (21)
고익진, 1985, 한국고대불교사상사, 동국대출판부, 서울
서윤길, 1994, 한국밀교사상사 연구, 불광출판사, 서울
이몽일, 1991, 한국풍수사상사연구, 日馹社, 대구
조성호.성동환, 2000, '신라말 구산선문 사찰의 입지 연구,' 한국지역지리학회지, 6, 5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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