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의 호위제도 고찰은 개항 이후의 고종의 친정, 그리고 대한제국시대의 국내외적으로 위기에 처한 시대의 왕실호위제도에 대한 고찰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호위제도를 이해하기 위하여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정하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60년간의 세도정치로 인하여 문란해진 왕권을 강화하고 국방력강화와 비변사를 폐지하며 종전의 삼군부로 부활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왕권 강화에 도움을 주었고 허약했던 중앙군을 강화하여 상비군을 늘리고 군기를 숙정하게 되었으며 신무기를 개발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대원군 실각 후 고종이 친정을 했다고 하나 대원군과 민비세력과의 불화로 인한 불안에 대처하여 궁궐 숙위를 전담하는 무위소를 설치한 이래, 2군영 제도 실시의 친군영, 용호영의 부활, 시위대 친위대 등으로 이어진 갑오개혁까지의 호위체제의 변화는 법제적인 것이 아니었고 일본, 청국, 러시아 등 외세의 변화상황에 따라 주체적으로 힘을 다한 것이었다. 일본이 침략경쟁에서 승리한 이후 독무대가 되는 상황의 변화로 인해 대내의 국가수호에 대한 노력의 효과가 약화되었으며, 더욱이 갑오개혁 이후 경무청 내에 왕실 업무를 담당하는 경무서를 둔 것과 대한제국시대의 경무서를 경위원과 황궁경위국으로 개편되었던 제도역시 일본의 영향 아래 들어가게 되어 무력화되었다. 그러나 역경에서 이루어진 그 노력과 분투의 과정은 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따라서 왕실을 호위하는 세력이 일본에 넘어간 대한 제국시대의 호위제도와 모든 상황전개는 제도가 아무리 완벽하게 수립되어 있을지라도 국력이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할 때 왕실의 호위제도는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확인할 수 있다.
구한말의 호위제도 고찰은 개항 이후의 고종의 친정, 그리고 대한제국시대의 국내외적으로 위기에 처한 시대의 왕실호위제도에 대한 고찰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호위제도를 이해하기 위하여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정하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60년간의 세도정치로 인하여 문란해진 왕권을 강화하고 국방력강화와 비변사를 폐지하며 종전의 삼군부로 부활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왕권 강화에 도움을 주었고 허약했던 중앙군을 강화하여 상비군을 늘리고 군기를 숙정하게 되었으며 신무기를 개발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대원군 실각 후 고종이 친정을 했다고 하나 대원군과 민비세력과의 불화로 인한 불안에 대처하여 궁궐 숙위를 전담하는 무위소를 설치한 이래, 2군영 제도 실시의 친군영, 용호영의 부활, 시위대 친위대 등으로 이어진 갑오개혁까지의 호위체제의 변화는 법제적인 것이 아니었고 일본, 청국, 러시아 등 외세의 변화상황에 따라 주체적으로 힘을 다한 것이었다. 일본이 침략경쟁에서 승리한 이후 독무대가 되는 상황의 변화로 인해 대내의 국가수호에 대한 노력의 효과가 약화되었으며, 더욱이 갑오개혁 이후 경무청 내에 왕실 업무를 담당하는 경무서를 둔 것과 대한제국시대의 경무서를 경위원과 황궁경위국으로 개편되었던 제도역시 일본의 영향 아래 들어가게 되어 무력화되었다. 그러나 역경에서 이루어진 그 노력과 분투의 과정은 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따라서 왕실을 호위하는 세력이 일본에 넘어간 대한 제국시대의 호위제도와 모든 상황전개는 제도가 아무리 완벽하게 수립되어 있을지라도 국력이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할 때 왕실의 호위제도는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확인할 수 있다.
The guard system in the last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established at the time of the struggle of invading world powers and the loss of the Dynasty rights, was strengthened to protect the Royal family and the Dynasty from the attacks of foreign powers. While investigating both the military syste...
The guard system in the last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established at the time of the struggle of invading world powers and the loss of the Dynasty rights, was strengthened to protect the Royal family and the Dynasty from the attacks of foreign powers. While investigating both the military system and the guard system from the beginning of King Gojong's direct royal governing to the time of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we realize that the Joseon Dynasty not only lost the support of the public but also had little power to cope with the aggression of foreign countries. The reformation and strengthening by Daewongun, King Gojong's father, was made in preparation for King Gojong's direct royal rule. Nevertheless, the intervention of foreign countries in the domestic affairs of the Joseon Dynasty got worse. As opposed to their intervention, Queen Minbi had engaged in politics, which resulted in murderous attempts on her. The Joseon Dynasty had tried to reform and intensify the guard system. New names such as Muwiso, Chingunyeong, and Siwidai, had been given respectively. Such reformation and intensification had little effect because of two successive victories at the Sino-Japanese War and the Russo-Japanese War of Japan. Japan occupied the Joseon Dynasty by force after all. The guard system of Daehan-jeguk(the Empire of Korea) was eventually incapacitated; an army in the cause of justice was raised instead. However, The state of things and the guard system at that incapacitated period gives a good lesson for the establishment of a modern guard system at the present day.
The guard system in the last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established at the time of the struggle of invading world powers and the loss of the Dynasty rights, was strengthened to protect the Royal family and the Dynasty from the attacks of foreign powers. While investigating both the military system and the guard system from the beginning of King Gojong's direct royal governing to the time of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we realize that the Joseon Dynasty not only lost the support of the public but also had little power to cope with the aggression of foreign countries. The reformation and strengthening by Daewongun, King Gojong's father, was made in preparation for King Gojong's direct royal rule. Nevertheless, the intervention of foreign countries in the domestic affairs of the Joseon Dynasty got worse. As opposed to their intervention, Queen Minbi had engaged in politics, which resulted in murderous attempts on her. The Joseon Dynasty had tried to reform and intensify the guard system. New names such as Muwiso, Chingunyeong, and Siwidai, had been given respectively. Such reformation and intensification had little effect because of two successive victories at the Sino-Japanese War and the Russo-Japanese War of Japan. Japan occupied the Joseon Dynasty by force after all. The guard system of Daehan-jeguk(the Empire of Korea) was eventually incapacitated; an army in the cause of justice was raised instead. However, The state of things and the guard system at that incapacitated period gives a good lesson for the establishment of a modern guard system at the present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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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정의
이 논문은 구한말 호위제도의 고찰로서 구한말의 개항 이후 한일합방으로 인한 국권을 상실할 때까지의 호위제도의 변천과 이에 대한 효과를 살펴 오늘날의 경호․경비의 학문 연구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개항 이후라고 하나 그 이전 10년간의 대원군 집정시대의 왕권 강화와 군사력 강화에 대한 언급이 없이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고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편의상 대원군 집정시대를 포함한다(김홍, 2003, 169-170).
군제사 자료 인용은 본문을 그대로 직접 인용하지 않고 간접인용을 함으로써 필자의 의견이 그 글에 함축되도록 하고 그 부분에 대한 인용의 표시는 내각주를 달았다. 인용에 있어서는 될수록 여러 저서나 논문을 두루 검토했고 제각기 상위한 점들을 비판하고 나름대로의 판단을 토대로 하여 기술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논문에서 주로 고찰한 대상은
가설 설정
2) 서원철폐와 지방 부패 일신.
구한말의 호위제도는 개항 이후 열강의 침략이 국권상실의 우려가 있는 가운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국가를 방전시켜보자는 개화와 수구의 양파가 세력을 다투는 국내사정 속에서 이루어진 임시변통적인 성격이 있었던 반면에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 세력을 물리치고 한국을 독점하려는 의도가 더 짙어진 시대에 대한 제국이 선포되고 제국의 군사제도를 수립하여 왕실 호위를 더욱 굳건히 하려고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개항 이전으로 10년 더 거슬러 올라가 1863년 고종의 즉위로부터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한 국권이 상실될 때까지의 제도를 가리킨다. 대원군 집정 10년 동안에는 세도정치가 물러나고 과감한 개혁정치와 군제개혁으로 왕권의 권위가 상승했다.
제안 방법
그 뒤 종래의 5군영 중 훈련도감ㆍ용호영ㆍ호위청을 합해 무위영으로 하고 나머지를 합해장어영으로 하여 2군영 제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밑에 각초관(各哨官)을 두어 군병을 통솔하였다.
이 논문의 연구는 문헌 연구의 방법으로 진행시켜 나갔다. 구한말에 있어서 그 상황을 고려하고 핵심 되는 내용을 주로 언급하면서 왕실과 황실의 여건에 맞추어 사료에 대한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친위대대도 1898년 5월 27일, 시위연대편제에 따라 친위연대로 편성되고, 1900년 12월 19일에는 친위연대에 공병 1개 중대와 치중병1개 중대를 배속시켰으며, 공병 1개 중대와 치중병 1개 중대는 각각 3소대로 편성되었다. 이러한 포병, 공병, 치중병 등을 신설 배속시켰고, 각 연대에 각각 1개 대대씩 가설하여 2개 연대로 편성하였다. 그리고 시위기병대대는 시위 제3대대로 개편하였으나 1907년에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됨으로써 국가와 종묘사직을 수호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해산된 군인들은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독립투쟁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대상 데이터
1896(건양 1)년에 친위대대 공병으로 편성된 친위 제3대대를 편성했다. 같은 해에 공병대의 군사로 친위 4대대와 5대대를 편성하여 친위연대를 조직했다.
이 시위대의 편성은 고종이 아관(俄館)에서 덕수궁으로 환어(還御)한 이후의 일이지만 이들의 임무가 왕실호위였기 때문에 고종은 이들이 호위에 의하여 환어가 가능했던 것이다. 1897년 1월 친위대 5개 대대로부터 하사관과 사병 800명을 선발하고 그 해 2월 8일까지 추가 선발하여 1,070명을 뽑아 200명씩 5개 중대를 1개 시위대대로 편성하였다. 아관에서 돌아온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독립협회 등의 강력한 뒷받침에 힘입어 근대적 제도에 대한 조치를 선포하고, 군통수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였다(서인한, 2000: 193).
같은 해에 공병대의 군사로 친위 4대대와 5대대를 편성하여 친위연대를 조직했다. 각 중대는 150명으로 4개 중대가 1개 대대를 구성하는 5개 대대에 약 300여명 규모의 군사력을 갖추었다. 이와 같은 군사 편제는 아관파천 중에 이루어졌으나, 일본군의 영향 하에 있었으므로 실용성에서 뿐만 아니라 재편성이 불가피했다.
1896(건양 1)년에 친위대대 공병으로 편성된 친위 제3대대를 편성했다. 같은 해에 공병대의 군사로 친위 4대대와 5대대를 편성하여 친위연대를 조직했다. 각 중대는 150명으로 4개 중대가 1개 대대를 구성하는 5개 대대에 약 300여명 규모의 군사력을 갖추었다.
무위소 병력은 무위소가 무위영으로 확대 개편되기 직전인 1880(고종 17)년에 총병력 4,399명에 이르는 큰 부대로 커졌다. 이들 중 장교가 356명, 장관이 32명이었다. 그 외 병사는 3,499명이었는데 유급(有給) 군인이 2,590명이었고 특수병사 일부를 제외한 정병만 계산해도 2,317명에 달하는 병력규모를 갖추게 되었다(배항섭, 1999: 148).
친위대(親衛隊)는 1895년 8월 20일에 있었던 을미사변 이후 김홍집 내각이 일본인이 조직한 훈련대를 폐지하고, 칙령(勅令) 제170호로 육군편제강령을 반포하여 친위군과 진위군으로 양분되어 친위군은 왕실에 주둔시켜 왕실호위를 전담하였다. 친위군과 진위군의 전술 단위를 대대로 하여 당일로 서울에 친위 1대대와 2대대를 조직 편성하고 친위 1대대장에는 참령 이범래를, 제2대대장에는 참령 이진호를 임명하고, 이어 평양부와 전주부에 각각 진위 1개 대대를 조직하였다. 친위는 1개 대대 총원은 880명에 장교가 85명이었고, 1896년에는 공병대 6대대 중에서 건강한 자를 선발하여 친위 제3대대를 편성하였고, 3월 4일에는 친위 제4대대, 제5대대가 편성됨으로써 이를 합하여 친위 연대를 편성하게 되었다.
성능/효과
대한제국의 외교ㆍ내정 그리고 군대마저 빼앗은 일제는 마지막으로 국가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황제마저 퇴위시킴으로써 대한제국을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키는 일에 나서게 되었다. 우리는 구한말의 호위제도를 고찰함에 있어 국력이 뒷받침하지 못하는 호위제도는 실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의 국력이란 단순히 무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후속연구
고려를 이은 조선이 500년간 왕실을 수호해온 것은 대내의 지배체제를 굳건히 하고 외세에 대비하여 왔기 때문일 것이다. 구한말이라 하면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국권을 상실한 시대이므로 이 시대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오늘날의 국가발전에 가장 좋은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경호․경비의 학문은 역사가 짧지만 오늘날 중요학문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현대사회의 특성과 국제사회의 상황 때문일 것이다.
질의응답
핵심어
질문
논문에서 추출한 답변
구한말의 호위제도 고찰은 무엇에 대한 고찰이라 할 수 있는가?
구한말의 호위제도 고찰은 개항 이후의 고종의 친정, 그리고 대한제국시대의 국내외적으로 위기에 처한 시대의 왕실호위제도에 대한 고찰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호위제도를 이해하기 위하여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정하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시대의 사회상과 아울러 당시의 삶에 대한 고려와 왕과 백성에 대한 위상을 재구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경호․경비의 역사적 연구에서 연구하는 시대적 상황이 오늘날과 다르기 때문에 그 연구에 있어서도 당시의 시대적 특성을 다각도로 고려하여 제도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사회상과 아울러 당시의 삶에 대한 고려와 왕과 백성에 대한 위상을 재구할 필요가 있다.
구한말 호위제도의 고찰로서 무엇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가?
이 논문은 구한말 호위제도의 고찰로서 구한말의 개항 이후 한일합방으로 인한 국권을 상실할 때까지의 호위제도의 변천과 이에 대한 효과를 살펴 오늘날의 경호․경비의 학문 연구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개항 이후라고 하나 그 이전 10년간의 대원군 집정시대의 왕권 강화와 군사력 강화에 대한 언급이 없이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고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편의상대원군 집정시대를 포함한다(김홍, 2003, 169-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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