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quire{mediawiki-texvc}$

연합인증

연합인증 가입 기관의 연구자들은 소속기관의 인증정보(ID와 암호)를 이용해 다른 대학, 연구기관, 서비스 공급자의 다양한 온라인 자원과 연구 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는 여행자가 자국에서 발행 받은 여권으로 세계 각국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연합인증으로 이용이 가능한 서비스는 NTIS, DataON, Edison, Kafe, Webinar 등이 있습니다.

한번의 인증절차만으로 연합인증 가입 서비스에 추가 로그인 없이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연합인증을 위해서는 최초 1회만 인증 절차가 필요합니다. (회원이 아닐 경우 회원 가입이 필요합니다.)

연합인증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최초이용시에는
ScienceON에 로그인 → 연합인증 서비스 접속 → 로그인 (본인 확인 또는 회원가입) → 서비스 이용

그 이후에는
ScienceON 로그인 → 연합인증 서비스 접속 → 서비스 이용

연합인증을 활용하시면 KISTI가 제공하는 다양한 서비스를 편리하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구한말의 호위제도 고찰
A Study on the Guard System in the Last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원문보기

한국경호경비학회지 = Korean security science review, no.21, 2009년, pp.35 - 52  

이성진 (호서대학교 경호학과)

초록

구한말의 호위제도 고찰은 개항 이후의 고종의 친정, 그리고 대한제국시대의 국내외적으로 위기에 처한 시대의 왕실호위제도에 대한 고찰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호위제도를 이해하기 위하여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정하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60년간의 세도정치로 인하여 문란해진 왕권을 강화하고 국방력강화와 비변사를 폐지하며 종전의 삼군부로 부활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왕권 강화에 도움을 주었고 허약했던 중앙군을 강화하여 상비군을 늘리고 군기를 숙정하게 되었으며 신무기를 개발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대원군 실각 후 고종이 친정을 했다고 하나 대원군과 민비세력과의 불화로 인한 불안에 대처하여 궁궐 숙위를 전담하는 무위소를 설치한 이래, 2군영 제도 실시의 친군영, 용호영의 부활, 시위대 친위대 등으로 이어진 갑오개혁까지의 호위체제의 변화는 법제적인 것이 아니었고 일본, 청국, 러시아 등 외세의 변화상황에 따라 주체적으로 힘을 다한 것이었다. 일본이 침략경쟁에서 승리한 이후 독무대가 되는 상황의 변화로 인해 대내의 국가수호에 대한 노력의 효과가 약화되었으며, 더욱이 갑오개혁 이후 경무청 내에 왕실 업무를 담당하는 경무서를 둔 것과 대한제국시대의 경무서를 경위원과 황궁경위국으로 개편되었던 제도역시 일본의 영향 아래 들어가게 되어 무력화되었다. 그러나 역경에서 이루어진 그 노력과 분투의 과정은 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따라서 왕실을 호위하는 세력이 일본에 넘어간 대한 제국시대의 호위제도와 모든 상황전개는 제도가 아무리 완벽하게 수립되어 있을지라도 국력이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할 때 왕실의 호위제도는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확인할 수 있다.

Abstract AI-Helper 아이콘AI-Helper

The guard system in the last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established at the time of the struggle of invading world powers and the loss of the Dynasty rights, was strengthened to protect the Royal family and the Dynasty from the attacks of foreign powers. While investigating both the military syste...

주제어

AI 본문요약
AI-Helper 아이콘 AI-Helper

* AI 자동 식별 결과로 적합하지 않은 문장이 있을 수 있으니, 이용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문제 정의

  • 이 논문은 구한말 호위제도의 고찰로서 구한말의 개항 이후 한일합방으로 인한 국권을 상실할 때까지의 호위제도의 변천과 이에 대한 효과를 살펴 오늘날의 경호․경비의 학문 연구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개항 이후라고 하나 그 이전 10년간의 대원군 집정시대의 왕권 강화와 군사력 강화에 대한 언급이 없이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고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편의상 대원군 집정시대를 포함한다(김홍, 2003, 169-170).
  • 군제사 자료 인용은 본문을 그대로 직접 인용하지 않고 간접인용을 함으로써 필자의 의견이 그 글에 함축되도록 하고 그 부분에 대한 인용의 표시는 내각주를 달았다. 인용에 있어서는 될수록 여러 저서나 논문을 두루 검토했고 제각기 상위한 점들을 비판하고 나름대로의 판단을 토대로 하여 기술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논문에서 주로 고찰한 대상은

가설 설정

  • 2) 서원철폐와 지방 부패 일신.
  • 구한말의 호위제도는 개항 이후 열강의 침략이 국권상실의 우려가 있는 가운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국가를 방전시켜보자는 개화와 수구의 양파가 세력을 다투는 국내사정 속에서 이루어진 임시변통적인 성격이 있었던 반면에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 세력을 물리치고 한국을 독점하려는 의도가 더 짙어진 시대에 대한 제국이 선포되고 제국의 군사제도를 수립하여 왕실 호위를 더욱 굳건히 하려고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개항 이전으로 10년 더 거슬러 올라가 1863년 고종의 즉위로부터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한 국권이 상실될 때까지의 제도를 가리킨다. 대원군 집정 10년 동안에는 세도정치가 물러나고 과감한 개혁정치와 군제개혁으로 왕권의 권위가 상승했다.
본문요약 정보가 도움이 되었나요?

질의응답

핵심어 질문 논문에서 추출한 답변
구한말의 호위제도 고찰은 무엇에 대한 고찰이라 할 수 있는가? 구한말의 호위제도 고찰은 개항 이후의 고종의 친정, 그리고 대한제국시대의 국내외적으로 위기에 처한 시대의 왕실호위제도에 대한 고찰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호위제도를 이해하기 위하여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정하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시대의 사회상과 아울러 당시의 삶에 대한 고려와 왕과 백성에 대한 위상을 재구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경호․경비의 역사적 연구에서 연구하는 시대적 상황이 오늘날과 다르기 때문에 그 연구에 있어서도 당시의 시대적 특성을 다각도로 고려하여 제도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사회상과 아울러 당시의 삶에 대한 고려와 왕과 백성에 대한 위상을 재구할 필요가 있다.
구한말 호위제도의 고찰로서 무엇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가? 이 논문은 구한말 호위제도의 고찰로서 구한말의 개항 이후 한일합방으로 인한 국권을 상실할 때까지의 호위제도의 변천과 이에 대한 효과를 살펴 오늘날의 경호․경비의 학문 연구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개항 이후라고 하나 그 이전 10년간의 대원군 집정시대의 왕권 강화와 군사력 강화에 대한 언급이 없이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고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편의상대원군 집정시대를 포함한다(김홍, 2003, 169-170).
질의응답 정보가 도움이 되었나요?

저자의 다른 논문 :

관련 콘텐츠

섹션별 컨텐츠 바로가기

AI-Helper ※ AI-Helper는 오픈소스 모델을 사용합니다.

AI-Helper 아이콘
AI-Helper
안녕하세요, AI-Helper입니다. 좌측 "선택된 텍스트"에서 텍스트를 선택하여 요약, 번역, 용어설명을 실행하세요.
※ AI-Helper는 부적절한 답변을 할 수 있습니다.

선택된 텍스트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