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시대의 궁궐은 그 나라의 문화와 예술을 대표할 수 있는 집합체이며, 궁궐은 왕과 그 일가족들의 신분과 안전을 보장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공간과 한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왕들은 그들의 사상적 배경인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들 사상을 되새기고자 방지와 원도 등을 조성하였고, 이 방지는 조선시대 궁궐조경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이러한 조선궁궐 내 지당(池塘)의 형태를 파악하고 그 변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원형의 복원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지당조성에 깃든 철학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본 연구는 조선시대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昌德宮)을 대상으로 이전의 특정기록을 시점으로 하여 원형이 보존된 지당, 변형이 된 지당, 그리고 멸실된 지당을 찾거나 그 위치를 추정하기 위해 수행되었다. 그리고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지당, 형태가 변형된 지당, 멸실된 지당의 위치추정, 후대에 발견된 지당 등으로 구분하여 고찰하였다. 동궐도(東闕圖)상에 나타난 지당의 총 개수는 17개소이며,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지당은 4개소, 형태가 변형된 지당은 5개소, 멸실된 지당은 8개소이며, 새로 나타난 지당은 2개소로 고찰하였다. 그리고 도출된 결과로 복원 및 복구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오늘날처럼 지식과 정보가 순간 이동되고 문화와 국경의 구분까지도 모호하게 혼합되어 가는 상황에서 우리의 마음속에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이어지는 전통 문화의 하나인 방형 지당을 현 시점에서 점검하고자 본 연구가 수행되었다.
왕조시대의 궁궐은 그 나라의 문화와 예술을 대표할 수 있는 집합체이며, 궁궐은 왕과 그 일가족들의 신분과 안전을 보장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공간과 한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왕들은 그들의 사상적 배경인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들 사상을 되새기고자 방지와 원도 등을 조성하였고, 이 방지는 조선시대 궁궐조경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이러한 조선궁궐 내 지당(池塘)의 형태를 파악하고 그 변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원형의 복원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지당조성에 깃든 철학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본 연구는 조선시대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昌德宮)을 대상으로 이전의 특정기록을 시점으로 하여 원형이 보존된 지당, 변형이 된 지당, 그리고 멸실된 지당을 찾거나 그 위치를 추정하기 위해 수행되었다. 그리고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지당, 형태가 변형된 지당, 멸실된 지당의 위치추정, 후대에 발견된 지당 등으로 구분하여 고찰하였다. 동궐도(東闕圖)상에 나타난 지당의 총 개수는 17개소이며,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지당은 4개소, 형태가 변형된 지당은 5개소, 멸실된 지당은 8개소이며, 새로 나타난 지당은 2개소로 고찰하였다. 그리고 도출된 결과로 복원 및 복구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오늘날처럼 지식과 정보가 순간 이동되고 문화와 국경의 구분까지도 모호하게 혼합되어 가는 상황에서 우리의 마음속에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이어지는 전통 문화의 하나인 방형 지당을 현 시점에서 점검하고자 본 연구가 수행되었다.
Palaces of a country can be representative aggregate of the culture and arts of the country. Palaces were used not only as a living place to protect kings and royal families and to live cultural lives, but also a political place to govern the country. Kings in Choseon founded the country on the Sung...
Palaces of a country can be representative aggregate of the culture and arts of the country. Palaces were used not only as a living place to protect kings and royal families and to live cultural lives, but also a political place to govern the country. Kings in Choseon founded the country on the Sung Confucianism, their philosophical background. They built Bangji and Wondo as constant reminders of their philosophy. Bangji is the most apparent characteristic in the palace gardens of the Choseon Dynasty. Finding out the original form of Jidang, restoring the original and passing it on to future generations can be passing on the spiritual culture of our ancestors. This study is done to find out or locate well preserved Jidang, transformed Jidang and lost Jidang in Changdeokgung, which is the best conserved palace of Choseon. This study is composed of Jidang which has been kept in its original state, transformed Jidang, locating lost Jidang and Jidnang which has been unearthed. The total number of Donggwoldo's Jidangs is 17; those that are kept in their original state, 4; transformed Jidangs, 5; Jidangs that were lost and have been located, 8; and newly appeared Jidangs, 2. From the results, opinions on restoration are presented. This study can be a small drop in the thin stream of tradition passing onto future generations in this world where knowledge and information are transported momentarily and the classification of culture and border is mixed, yielding vagueness.
Palaces of a country can be representative aggregate of the culture and arts of the country. Palaces were used not only as a living place to protect kings and royal families and to live cultural lives, but also a political place to govern the country. Kings in Choseon founded the country on the Sung Confucianism, their philosophical background. They built Bangji and Wondo as constant reminders of their philosophy. Bangji is the most apparent characteristic in the palace gardens of the Choseon Dynasty. Finding out the original form of Jidang, restoring the original and passing it on to future generations can be passing on the spiritual culture of our ancestors. This study is done to find out or locate well preserved Jidang, transformed Jidang and lost Jidang in Changdeokgung, which is the best conserved palace of Choseon. This study is composed of Jidang which has been kept in its original state, transformed Jidang, locating lost Jidang and Jidnang which has been unearthed. The total number of Donggwoldo's Jidangs is 17; those that are kept in their original state, 4; transformed Jidangs, 5; Jidangs that were lost and have been located, 8; and newly appeared Jidangs, 2. From the results, opinions on restoration are presented. This study can be a small drop in the thin stream of tradition passing onto future generations in this world where knowledge and information are transported momentarily and the classification of culture and border is mixed, yielding vagu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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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정의
본 연구는 궁궐지, 동궐도", 동궐도형", 조선고적도보의 경복궁 배치도气 창덕궁 비원 배치도m 현대의 항공사진U)등 6개의 자료를 토대로 창덕궁 내의 지당의 변화에 대해 고찰하였다. 조선말기 오랜 정치적 격변기를 겪으며 훼손되고 방치되면서 건축물뿐만 아니라 궁궐의 정원까지도 변형 훼손되었으며, 근래에 들어 복원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 형태가 보존된 지당, 변형이 된 지당, 그리고 멸실된 지당을 찾거나 그 위치를 추정하여 조선궁궐의 특징 중의 하나인 지당의 변화 과정을 고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출된 연구 결과로 차후의 타 연구자들의 검증 과정을 거쳐 궁궐 지당의 복원(復元) 및 복구(復舊) 시 참고 의견으로 제시하고자 수행되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문자로 남겨지지 않은 고건축의 복원에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방법이며, 조성 당시의 가장 가까운 형태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동궐도'를 창덕궁 지당변천(池塘變遷) 의 원형으로 삼고자 한다. 원형의 시간적 기준은 동궐도가 제작되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1827년경이며, 공간적 원형은 동궐도 상의 지당의 형태로 지정하였다.
형태가 변한 지당의 변형 시기는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이전의 선행연구에 비해 변형의 연대를 더 세밀히 예측할 수 있었다. 본 연구는 2010년 현재 연구자가 수집한 자료를 분석하여 창덕궁 지당의 변형시기와 멸실된 위치를 추정하여 제시하였다. 이러한 위치와 변형의 명확한 사실들은 차후 관련 문헌 발굴을 통하여 더욱 논의되고 검증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우리 궁궐만의 독특한 조경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본 연구는 조선궁궐 중 그 보존이 가장 잘 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창덕궁의 지당 변화과정을 고찰하여 보았다. 고찰은 18的년경에 제작된 동궐도 1907년경에 제작된 동궐도형, 1912년경에 제작된 조선고적도보의 창덕궁 배치도 그리고 1970년대 말에 측량한 창덕궁 후원 배치도와 현재의 항공사진으로 지당의 변화를 살펴보고 그 변화의 종류를 파악한 결과.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본 연구는 조선의 왕과 지배층들에게 성리학적 사고를 일깨워 주도록 상징적 의미로 조성한 방형 지당의 형태에 관한 고찰로 우리 문화의 전통과 문화적 독창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당의 조성도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길을 이용하여 자연형 호안을 축조하지 않고 방형의 지당을 축조한 이유도 지당의 조성에 성리학적 가치관을 부여하였다고 생각된다.
본 연구의 목적은 창덕궁을 대상으로 조선시대 궁궐의 지당에 대한 최고(最古)의 조감도인 동궐도를 원형으로 정하고. 그 형태가 보존된 지당, 변형이 된 지당, 그리고 멸실된 지당을 찾거나 그 위치를 추정하여 조선궁궐의 특징 중의 하나인 지당의 변화 과정을 고찰하는 것이다.
변천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이 연구에서 경복궁은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의 규범을 적용시켜 도성계획을 하였으며, 그 이유는 유교적 군주관을 정치의 이상적인 것으로 여겼던 주나라 시대의 궁궐건축을 받아들인 것이라 밝히고 궁궐의 복원에 관한 제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오현진(2005)은 조선 시대 궁궐 정전 일곽의 공간비례와 구성기법에 관한 연구에서 조선 궁궐의 정전영역(正殿營域)에 대한 비례 체계를 분석하여 법궁과 이궁의 정전영역이 유사한 공간 비례 체계를 가지고 있음을 규명하였다.
배수체계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이 연구에서 궁궐의 수공간의 배치원리는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수의 개념을 적용하였다는 것을 연구하였으며, 18, 19세기 궁궐의 고지도를 바탕으로 각 궁궐의 지당형태, 숫자, 배수의 방향 등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이상민 등(2001)은 조선시대 궁궐의 대표 적지당 9곳의 축조재료와 방법 등에 관한 연구에서 호안의 축 석은 주로 장대석을 이용한 바른층 쌓기 수법으로 3단에서 6단 정도로 축조하고 수심을 150cm 이하로 조성한 것을 밝히고 있다.
이상과 같이 조선 궁궐 중 창덕궁 지당의 변천과정에 대한 고찰을 하였다. 시대적 변화에 따라 원형이 유지되거나 변형 멸실된 지당들은 표 2에 다시 정리하였다.
가설 설정
동궐도의 제작연대는 대략 1827년에서 18的년 사이 3부가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气 궁궐지, 기타의 영건도감의궤(營建都監儀觥) 등에서는 지당이나 후원 등의 형태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현 시점에서 외형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인 동궐도를 본 연구에서는 원형으로 판단하는 기준으로 정한다. 또한 지당의 경우, 궁궐건축의 가장 큰 변하를 주는 화재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인위적인 형태의 변형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동궐도상의 지당의 형태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초의 형태라고 하는 것도 어느 장소, 어느 시간을 최초로 볼 것인지에 대한 시공간적 기준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본 연구에서의 원형은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을 원형으로 가정하고자 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문자로 남겨지지 않은 고건축의 복원에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방법이며, 조성 당시의 가장 가까운 형태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안 방법
또한 각 지당에 면하고 있는 애련정, 부용정 등의 정자나 규장각, 영화당 등의 중요한 건물들의 배산임수형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그 형태가 유지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관람자로 하여금 물 위로 배를 탄 듯한 효과를 만들기 위해 정자의 일부분을 지당에 들여 축조하여 지당과 정자가 하나의 조성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변형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지당의 조성도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길을 이용하여 자연형 호안을 축조하지 않고 방형의 지당을 축조한 이유도 지당의 조성에 성리학적 가치관을 부여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본 연구는 기존의 연구들과는 달리 도면의 캐드화로 현재의 지형과 과거 도면과의 직접적인 비교를 통한 지당의 변화과정을 살펴보3, 그 이유를 추론하였다.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동궐도에 표현된 각 지당의 위치와 형태를 개략적으로 파악하고 동궐도형을 캐드 도면화하여 현재의 지형과 대조하였다. 그 결과, 현재는 존재하지 않은 것과 동궐도 및 동궐도형에는 존재하지 않으나, 조선 고적도보 부터는 나타나 현재도 존재하는 지당이 있다.
이 중 1803년 인정전의 소실과 1811년 예문관과 향실의 화재로 궁궐 내 많은 기록물들과 서적이 소실되자 궁궐의 건축물에 대한 형태적 기록의 필요성으로 동궐도를 제작하였을 것이다. 동궐도의 제작연대는 대략 1827년에서 18的년 사이 3부가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气 궁궐지, 기타의 영건도감의궤(營建都監儀觥) 등에서는 지당이나 후원 등의 형태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현 시점에서 외형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인 동궐도를 본 연구에서는 원형으로 판단하는 기준으로 정한다. 또한 지당의 경우, 궁궐건축의 가장 큰 변하를 주는 화재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인위적인 형태의 변형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동궐도상의 지당의 형태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의 지형과 조감도 형식의 세밀화의 일종인 동궐도를 바로 비교하기는 불가능하여 동궐도형과 창덕궁배치도를 현재의 형태과 비교, 고찰하였다. 동궐도형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의 마이크로필름을 활용하여 AUTO CAD 2006(Autodesk, 2006)^1 백터라이징 (vectorizing) 작업을 거쳐 지당의 형태와 주위 전각의 위치 등을 세밀히 작업하여 현재의 지형과 비교분석하여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지당, 변형된 지당, 멸실된 지당을 구분하여 개략적인 위치를 파악하고자 한다. 동궐도와 동궐도형의 제작 시기는 약 80년 정도 차이가 나지만 동궐도상에서 위치하고 있는 지당은 동궐도형에서 모두 발견되고 있으며, 그 위치 또한 건물의 명칭과 형태를 비교한 결과, 모두 정확함을 확인하였다.
다만 관람정과 존덕정지만 그 형태가 변한 것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연구의 정확성과 효율성을 위하여 동궐도형의 캐드 도면을 위주로 현재의 지형과 비교하였다; 그리고 '궁궐지(宮闕志)'를 참조하여 그 위치 등을 다시 확인하는 작업으로 정확성을 담보하였으며, 1970년대 말 기록된 창덕궁 비원 배치도로 중간 변화 과정으로 참고하였다.
셋째, 동궐도와 동궐도형에 기록되었던 멸실된 지당들에 대한 위치를 관련서적과 자료를 참고하여 추정하였다. 멸실된 지당들은 1번 청의정 앞 지당.
연구의 큰 틀은 원형으로 지정한 동궐도를 기준으로 현재의 형태와 비교 분석하는 것이다. 현재의 지형과 조감도 형식의 세밀화의 일종인 동궐도를 바로 비교하기는 불가능하여 동궐도형과 창덕궁배치도를 현재의 형태과 비교, 고찰하였다.
이상과 같이 우리 궁궐의 고유한 지당형태의 변화에 대해서 동궐도를 그 원형으로 하여 고찰하여 보았다. 조상들의 세심한 기록 정신이 있어 궁궐지, 동궐도 동궐도형들의 소중한 자료로 지당의 변화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멸실된 지당의 위치도 파악할 수 있었다.
창덕궁의 지당은 그림 1의 동궐도를 기준으로 창덕궁(昌德 宮) 영역 중 인정전(仁政殿) 영역, 낙선재(樂善齋) 영역’ 후원 (後苑) 영역으로 구분하여 파악하였다. 그 결과, 동궐 도상에서의 지당은 그림 1에서처럼 창덕궁 영역으로는 14개소 17곳의 지당을 파악할 수 있었다'I 이러한 지당 17개소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고자 편의상 각 지당의 번호를 1번부터 14번까지 부여하여 표 1과 같이 정리하였다
현장조사방법으로는 문헌상 기록되어 있는 지당을 중심으로 2008년 12월 2009년 6월과 7월 3회에 걸쳐 현장답사하였다. 관람객의 출입이 제한되어 직접 현장을 볼 수 없었던 집춘문과 건무문사이 최북단의 2번 지당은 창덕궁 관리사무소에 문의하여 현재 지당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비교 분석하는 것이다. 현재의 지형과 조감도 형식의 세밀화의 일종인 동궐도를 바로 비교하기는 불가능하여 동궐도형과 창덕궁배치도를 현재의 형태과 비교, 고찰하였다. 동궐도형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의 마이크로필름을 활용하여 AUTO CAD 2006(Autodesk, 2006)^1 백터라이징 (vectorizing) 작업을 거쳐 지당의 형태와 주위 전각의 위치 등을 세밀히 작업하여 현재의 지형과 비교분석하여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지당, 변형된 지당, 멸실된 지당을 구분하여 개략적인 위치를 파악하고자 한다.
대상 데이터
각각의 궁궐은 전란, 화재 정치적 이유 등으로 변형, 소실, 멸실과 중건 등을 거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본 연구는 조선시대 궁궐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 3)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 이유는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은 한때 궁궐터만 남을 정도로 화재에 의한 소실이 있었고”, 일제강점기와 전란을 거치면서 궁궐의 훼손과 자료의 멸실 등으로 원형이라고 지정할 만한 사료가 없는 경우 등이 있어서 연구 대상지로 선정하기 곤란하여 본 연구에서는 제외하였다. 이에 반해 창덕궁은 동궐도 동궐도형, 궁궐지,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跡圖譜)의 창덕궁배치도 등 관련 자료가 비교적 풍부하고 보전이 비교적 잘 되고 있기 때문에 연구 대상지로 선정하였다 5). 창덕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은 583, 516.
자료: 니마건축연구소. 1978.
성능/효과
현장답사하였다. 관람객의 출입이 제한되어 직접 현장을 볼 수 없었던 집춘문과 건무문사이 최북단의 2번 지당은 창덕궁 관리사무소에 문의하여 현재 지당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하, 좌, 우 트리 밍(trimiin効 작업을 하였다. 그 결과, 현재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지당은 청심정(淸心亭) 앞의 빙옥지(氷 玉池)인 3번 석연지, 어수당(魚水堂) 좌측편에 위치하고 있는 6번 지당, 애련정지(愛蓮亭池)인 7번 지^; 부용지(芙蓉池)인 9번지당 등이다. 위의 4개 지당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를 주측해 보면 지당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큰 편에 속하며 지당 호안(湖岸)을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를 하여 붕괴나 토사로 인한 지형의 변형이 적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들 중 8번 불로문 앞 불로지와 10번 춘당대 앞지당, 12번 낙선재 남쪽 지당은 궁궐 지당 복원공사 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할 대상으로 판단하였다. 그 이유는 세 곳 지당들 모두 관람객이 많이 이용하는 동선상의 평지에 위치하고 있어서 복원의 경제성과 효과 면에서 타 지당들보다 우선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넷째, 동궐도 동궐도형에는 기록되지 않으나, 현재는 존재하고 있는 지당이다 이는 신선원전의 몽답정이며 영조시대 때 축조하였으나 그 위치가 북영에 있어서 궁궐내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고적도보의 경복궁 배치도부터 기록된 것으로 판단된다.
동궐도형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의 마이크로필름을 활용하여 AUTO CAD 2006(Autodesk, 2006)^1 백터라이징 (vectorizing) 작업을 거쳐 지당의 형태와 주위 전각의 위치 등을 세밀히 작업하여 현재의 지형과 비교분석하여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지당, 변형된 지당, 멸실된 지당을 구분하여 개략적인 위치를 파악하고자 한다. 동궐도와 동궐도형의 제작 시기는 약 80년 정도 차이가 나지만 동궐도상에서 위치하고 있는 지당은 동궐도형에서 모두 발견되고 있으며, 그 위치 또한 건물의 명칭과 형태를 비교한 결과, 모두 정확함을 확인하였다. 다만 관람정과 존덕정지만 그 형태가 변한 것을 확인하였다.
첫째, 동궐도상의 창덕궁 지당의 개소는 17개소이며,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지당은 3번 청심정 앞의 빙옥지 6번 어수당 좌측 지당, 7번 애련정지, 9번 부용정지 등이다 이들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를 추측해 보면 지당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큰 편에 속하며, 지당 호안을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를 하여 붕괴나 토사로 인한 지형의 변형이 적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또한 각 지당에 면하고 있는 애련정, 부용정 등의 정자나 규장각, 영화당 등의 중요한 건물들의 배산임수형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그 형태가 유지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후속연구
순간 이동되는 정보, 경계가 허물어져 가는 나라간의 이동 등 문화의 융합이 가속화 되는 시기에 면면이 이어져가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가꾸어 가는 일은 개방과 융합 못지 않게 소중하다고 판단되며, 우리의 독특한 조경문화인 방지의 개념과 복원의 기초자료로서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본 연구에서 명확히 밝히지 못한 존덕정지와 관람 정지의 변형의 시기에 대한 추가적인 문헌 연구와 고찰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비록 본 연구에서는 변형의 시기를 1892년에서 1902년 사이로 압축할 수 있었지만 누구에 의해서 어떠한 계획으로 시행되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차후의 문헌 발굴 조사로 더 자세히 밝혀져야 할 부분이며, 본 연구를 통한 지당의 변화 과정 또한 차후 연구를 통한 재검증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멸실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보전, 복원 등의 결정을 위한 참고 자료로도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은 한때 궁궐터만 남을 정도로 화재에 의한 소실이 있었고”, 일제강점기와 전란을 거치면서 궁궐의 훼손과 자료의 멸실 등으로 원형이라고 지정할 만한 사료가 없는 경우 등이 있어서 연구 대상지로 선정하기 곤란하여 본 연구에서는 제외하였다. 이에 반해 창덕궁은 동궐도 동궐도형, 궁궐지,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跡圖譜)의 창덕궁배치도 등 관련 자료가 비교적 풍부하고 보전이 비교적 잘 되고 있기 때문에 연구 대상지로 선정하였다 5).
그리고 본 연구에서 명확히 밝히지 못한 존덕정지와 관람 정지의 변형의 시기에 대한 추가적인 문헌 연구와 고찰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비록 본 연구에서는 변형의 시기를 1892년에서 1902년 사이로 압축할 수 있었지만 누구에 의해서 어떠한 계획으로 시행되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차후의 문헌 발굴 조사로 더 자세히 밝혀져야 할 부분이며, 본 연구를 통한 지당의 변화 과정 또한 차후 연구를 통한 재검증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조상들의 세심한 기록 정신이 있어 궁궐지, 동궐도 동궐도형들의 소중한 자료로 지당의 변화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멸실된 지당의 위치도 파악할 수 있었다. 순간 이동되는 정보, 경계가 허물어져 가는 나라간의 이동 등 문화의 융합이 가속화 되는 시기에 면면이 이어져가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가꾸어 가는 일은 개방과 융합 못지 않게 소중하다고 판단되며, 우리의 독특한 조경문화인 방지의 개념과 복원의 기초자료로서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본 연구에서 명확히 밝히지 못한 존덕정지와 관람 정지의 변형의 시기에 대한 추가적인 문헌 연구와 고찰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본 연구는 2010년 현재 연구자가 수집한 자료를 분석하여 창덕궁 지당의 변형시기와 멸실된 위치를 추정하여 제시하였다. 이러한 위치와 변형의 명확한 사실들은 차후 관련 문헌 발굴을 통하여 더욱 논의되고 검증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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