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창덕궁 후원이 세계문화유산임에도 불구하고 물리적인 구조물로만 인지되고 있는 경향이 많아 진행하게 되었으며, 존덕정 일원을 대상으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존덕정의 올바른 조영배경을 밝히고 고찰을 통해 내재된 조성원리를 구명하고자 시도되었다. 요약된 결과는 아래와 같다. 1. 존덕정 권역에 그동안 후원에 조영되지 않은 형태인 죽정과 육각정, 팔각정 등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두, 세 차례 귀근과 귀국에 맞물려 조영된 점과 효종이 왕위를 계승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천향각, 망춘정, 척뇌당을 조영하는 등 존덕정 일원의 개발을 늦추지 않은 점, 심양에서 태어난 현종이 훗날 존덕정의 현판을 직접 편액한 점 등에서 존덕정의 조영배경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결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2. 심양고궁 대정전(1625년)은 존덕정(1644년)과 같이 두 겹의 지붕을 갖는 단층건축물로 국가의 큰 행사를 거행하는 정전의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궁에서 열린 조참이나 황제가 베푸는 연회에 참석하였을 당시 당면했던 건물이기 때문에 존덕정의 조영배경에 대정전이 결부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3. 존덕정과 대정전에서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는 특징을 고찰함으로써 두 건축물의 연관성을 증명하고 존덕정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첫째, 왕권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신수인 용이 형상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존덕정은 자연의 이치를 체득하여 수신하는 목적이외에도 치국안민의 뜻이 가미된 정원건축물로 판단하였다. 둘째, 일영대를 둔 점은 정확한 시간을 알기 위한 것 외에도 군왕의 당위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셋째, 주변에 태청문이 존재하는 점은 도교의 삼청과 연결되며 꽃담과 더불어 왕의 불로장생을 염원하는 현세적 행복성취에서 기인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넷째, 건축양식에 있어서 겹 지붕의 단층 정자이고 원기둥만을 사용하여 조영한 점은 왕이 봉천지정의 뜻을 구현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4. 존덕정과 대정전의 차이점을 살펴봄으로써 존덕정만의 특징을 고찰하였다. 첫째, 지당의 존재 유무에 따라 존덕정의 건축적 특징이 다르게 나타났는데, 이는 외래문화를 수용함에 있어서 정원 속에 조영되는 정자의 특성, 입지, 기능에 알맞도록 변용한 것이며 우리문화에 습합되어 구현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둘째, 존덕정에 표현된 지당의 모습을 상현달 형태의 반월지가 동쪽에 흐르는 계류에 의해서 만월이 되는 형국으로 보았다. 이는 지당의 형상과 물의 흐름을 통해 항시 변화하는 달의 운행을 도상학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써 당대의 상상적 조경 수법으로 판단하였다.
본 연구는 창덕궁 후원이 세계문화유산임에도 불구하고 물리적인 구조물로만 인지되고 있는 경향이 많아 진행하게 되었으며, 존덕정 일원을 대상으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존덕정의 올바른 조영배경을 밝히고 고찰을 통해 내재된 조성원리를 구명하고자 시도되었다. 요약된 결과는 아래와 같다. 1. 존덕정 권역에 그동안 후원에 조영되지 않은 형태인 죽정과 육각정, 팔각정 등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두, 세 차례 귀근과 귀국에 맞물려 조영된 점과 효종이 왕위를 계승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천향각, 망춘정, 척뇌당을 조영하는 등 존덕정 일원의 개발을 늦추지 않은 점, 심양에서 태어난 현종이 훗날 존덕정의 현판을 직접 편액한 점 등에서 존덕정의 조영배경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결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2. 심양고궁 대정전(1625년)은 존덕정(1644년)과 같이 두 겹의 지붕을 갖는 단층건축물로 국가의 큰 행사를 거행하는 정전의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궁에서 열린 조참이나 황제가 베푸는 연회에 참석하였을 당시 당면했던 건물이기 때문에 존덕정의 조영배경에 대정전이 결부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3. 존덕정과 대정전에서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는 특징을 고찰함으로써 두 건축물의 연관성을 증명하고 존덕정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첫째, 왕권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신수인 용이 형상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존덕정은 자연의 이치를 체득하여 수신하는 목적이외에도 치국안민의 뜻이 가미된 정원건축물로 판단하였다. 둘째, 일영대를 둔 점은 정확한 시간을 알기 위한 것 외에도 군왕의 당위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셋째, 주변에 태청문이 존재하는 점은 도교의 삼청과 연결되며 꽃담과 더불어 왕의 불로장생을 염원하는 현세적 행복성취에서 기인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넷째, 건축양식에 있어서 겹 지붕의 단층 정자이고 원기둥만을 사용하여 조영한 점은 왕이 봉천지정의 뜻을 구현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4. 존덕정과 대정전의 차이점을 살펴봄으로써 존덕정만의 특징을 고찰하였다. 첫째, 지당의 존재 유무에 따라 존덕정의 건축적 특징이 다르게 나타났는데, 이는 외래문화를 수용함에 있어서 정원 속에 조영되는 정자의 특성, 입지, 기능에 알맞도록 변용한 것이며 우리문화에 습합되어 구현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둘째, 존덕정에 표현된 지당의 모습을 상현달 형태의 반월지가 동쪽에 흐르는 계류에 의해서 만월이 되는 형국으로 보았다. 이는 지당의 형상과 물의 흐름을 통해 항시 변화하는 달의 운행을 도상학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써 당대의 상상적 조경 수법으로 판단하였다.
The purposes for this research were to find the correct building background of Jondeokjeong(尊德亭) in the rear garden of Changdeok Palace(昌德宮) based on the historical facts for the area of Jondeokjeong and investigate the internal theory of construction through the metaphysical consideration. The resu...
The purposes for this research were to find the correct building background of Jondeokjeong(尊德亭) in the rear garden of Changdeok Palace(昌德宮) based on the historical facts for the area of Jondeokjeong and investigate the internal theory of construction through the metaphysical consideration. The results were as follows. 1. Building background of Jondeokjeong was related to Sohyunseja(昭顯世子) and Bongrimdaegun(鳳林大君) as forms of rear garden where was not built in the area of Jondeokjeong, bamboo pavilion, hexagonal pavilion, octagonal pavilion, etc. They were built two or three times after returning of Sohyunseja and Bongrimdaegun from China, and the area of Jondeokjeong was continuously developed by building Chunhyanggak(天香閣), Mangchunjeong(望春亭) and Cheoknoidang(滌惱堂) after Hyojong(孝宗) succeeded the royal authority of Hyunjong(顯宗) who was born in Shenyang(瀋陽) and hung a signboard of Jondeokjeong after then, etc. 2. Dazhengjeon(大政殿) of Shenyang Palace(瀋陽故宮, 1625) played the roles of major hall, Jeongjeon(正殿) which held national big events as a one-storied building with two piles of roof similar with Jondeokjeong (1644). Also, it was the building encountered when Sohyunseja and Bongrimdaegun participated in breakfasts held in the palace or banquets supervised by a king, so building background of Jondeokjeong was judged to be related with Dazhengjeon. 3. In consideration of characteristics which are shown commonly in Jondeokjeong and Dazhengjeon, relations of two buildings were verified and characteristics of Jondeokjeong were examined. First, dragon which is representatively symbolizing royal authority was formed. Therefore, Jondeokjeong was judged as a garden building which purposes were to obtain and train natural reasons, govern the nation and let people comfortable. Second, the purposes of sun dial, Ilyoungdae(日影臺) were judged to examine the accurate time and express appropriateness of the king. Third, Taechungmun(太淸門) around there is related to Samcheong(三淸) of Taoism and judged to be caused by floral wall and secular happiness accomplishment for king's longevity without disease. Fourth, for building style, one-stories pavilion of duplicated roof and building with only cylinder were to king's embodiment of supporting the sky and governing the nation.4) 4. By examining the differences between Jondeokjeong and Dazhengjeon, Jondeokjeong's own characteristics were considered. First, constructive characteristics of Jondeokjeong were changed by existing of pond and it was changed for characteristics, location and function of pavilion built in the garden while accepting oversea culture and embodied by absorbing to Joseon culture. Second, the appearance of the pond in Jondeokjeong was shown as the situation that half moon typed pond with the form of young moon is full by stream to the East. It was to express movement of moon which was always changed through the form of pond and stream of water iconographycally and it was considered as an imaginary environment method of the period.
The purposes for this research were to find the correct building background of Jondeokjeong(尊德亭) in the rear garden of Changdeok Palace(昌德宮) based on the historical facts for the area of Jondeokjeong and investigate the internal theory of construction through the metaphysical consideration. The results were as follows. 1. Building background of Jondeokjeong was related to Sohyunseja(昭顯世子) and Bongrimdaegun(鳳林大君) as forms of rear garden where was not built in the area of Jondeokjeong, bamboo pavilion, hexagonal pavilion, octagonal pavilion, etc. They were built two or three times after returning of Sohyunseja and Bongrimdaegun from China, and the area of Jondeokjeong was continuously developed by building Chunhyanggak(天香閣), Mangchunjeong(望春亭) and Cheoknoidang(滌惱堂) after Hyojong(孝宗) succeeded the royal authority of Hyunjong(顯宗) who was born in Shenyang(瀋陽) and hung a signboard of Jondeokjeong after then, etc. 2. Dazhengjeon(大政殿) of Shenyang Palace(瀋陽故宮, 1625) played the roles of major hall, Jeongjeon(正殿) which held national big events as a one-storied building with two piles of roof similar with Jondeokjeong (1644). Also, it was the building encountered when Sohyunseja and Bongrimdaegun participated in breakfasts held in the palace or banquets supervised by a king, so building background of Jondeokjeong was judged to be related with Dazhengjeon. 3. In consideration of characteristics which are shown commonly in Jondeokjeong and Dazhengjeon, relations of two buildings were verified and characteristics of Jondeokjeong were examined. First, dragon which is representatively symbolizing royal authority was formed. Therefore, Jondeokjeong was judged as a garden building which purposes were to obtain and train natural reasons, govern the nation and let people comfortable. Second, the purposes of sun dial, Ilyoungdae(日影臺) were judged to examine the accurate time and express appropriateness of the king. Third, Taechungmun(太淸門) around there is related to Samcheong(三淸) of Taoism and judged to be caused by floral wall and secular happiness accomplishment for king's longevity without disease. Fourth, for building style, one-stories pavilion of duplicated roof and building with only cylinder were to king's embodiment of supporting the sky and governing the nation.4) 4. By examining the differences between Jondeokjeong and Dazhengjeon, Jondeokjeong's own characteristics were considered. First, constructive characteristics of Jondeokjeong were changed by existing of pond and it was changed for characteristics, location and function of pavilion built in the garden while accepting oversea culture and embodied by absorbing to Joseon culture. Second, the appearance of the pond in Jondeokjeong was shown as the situation that half moon typed pond with the form of young moon is full by stream to the East. It was to express movement of moon which was always changed through the form of pond and stream of water iconographycally and it was considered as an imaginary environment method of the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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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정의
본 연구는 창덕궁 후원의 존덕정을 대상으로 하며, 역사적 배경 중심에 있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행적을 따르는 방식으로 연구를 전개시켰다. 따라서 병자호란 이후 창덕궁 후원이 조성되어온 흐름과 두 왕자가 청나라에 끌려가 볼모생활을 했던 중국 심양고궁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특히 창덕궁 후원의 존덕정과 심양고궁의 대정전의 연관성을 증명하기 위해 두 건축물을 비교분석 하였으며, 그에 따른 결과를 가지고 존덕정이 가지는 특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창덕궁 후원의 존덕정이 왕의 정원 안에서 가지는 정체성과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해 조영사 정립과 내재된 특성을 구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존덕정의 역사적 배경이 우선적으로 고찰되었으며, 대정전과 차별화된 존덕정 일대의 상상적 환경을 함께 결부시켜 분석함으로써 존덕정이 가지는 조영사적 특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창덕궁 후원의 존덕정을 대상으로 하며, 역사적 배경 중심에 있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행적을 따르는 방식으로 연구를 전개시켰다. 따라서 병자호란 이후 창덕궁 후원이 조성되어온 흐름과 두 왕자가 청나라에 끌려가 볼모생활을 했던 중국 심양고궁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특히 창덕궁 후원의 존덕정과 심양고궁의 대정전의 연관성을 증명하기 위해 두 건축물을 비교분석 하였으며, 그에 따른 결과를 가지고 존덕정이 가지는 특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창덕궁 후원이 세계문화유산임에도 불구하고 형이하학적으로 인지되고 있는 경향이 많아 진행하게 되었으며, 존덕정 일원을 대상으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존덕정의 올바른 조영배경을 밝히고 형이상학적인 고찰을 통해 내재된 조성원리를 규명하고자 시도되었다. 요약된 결과는 아래와 같다.
이렇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두, 세 차례 귀근과 영구 귀국이 있을 당시 창덕궁 후원 존덕정 일원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러한 후원 조성의 변화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결부되었는지 문헌을 고찰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창덕궁 후원의 존덕정이 왕의 정원 안에서 가지는 정체성과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해 조영사 정립과 내재된 특성을 구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존덕정의 역사적 배경이 우선적으로 고찰되었으며, 대정전과 차별화된 존덕정 일대의 상상적 환경을 함께 결부시켜 분석함으로써 존덕정이 가지는 조영사적 특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귀근과 귀국이 후원 조성에 영향을 준 것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 존덕정 일원에 조영된 건축물에 대한 고찰을 해보았다. 우선 최초 귀근시점인 인조 18년(1640년)이 지나고 존덕정 일원에 가장 먼저 조영된(1643년) 심추정(深秋亭)은 처음에 대나무를 이용해 지은 죽정(竹亭)이었다4).
제안 방법
3. 존덕정과 대정전에서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는 특징을 고찰함으로써 두 건축물의 연관성을 증명하고 존덕정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첫째, 왕권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신수이며 천지사방의 중심인 용이 형상화되어 있는데, 존덕정은 대정전과 다르게 궁의 후원에 조영된 정자로 자연의 이치를 체득하여 수신하는 목적이외에도 치국안민의 뜻이 가미되어 임금의 정치적 위상과 권위를 동시에 표현한 정원건축물임을 알 수 있었다.
4. 존덕정과 대정전의 차이점을 살펴봄으로써 존덕정만의 특징을 고찰하였다. 첫째, 지당의 존재 유무에 따른 건축적 특징이 다르게 나타났다.
원손도 함께 오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이 출발하였다는 보고를 들은 뒤에야 세자를 출발시켜 봉황성(鳳凰城) 에서 서로 교체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세자가 떠나더라도 빈궁은 이곳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주지하였듯이 창덕궁 후원 존덕정의 조영배경에는 심양고궁의 대정전을 목도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존덕정과 대정전의 비교고찰을 통해두 건축물이 어느 정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그 특징은 무엇 인지 살펴보도록 하고 두 건축물의 차이점을 통해 존덕정만의 특성을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둘째, 존덕정은 반월지와 방지, 방지원도, 계류와 홍예교 등수공간 속에 조영된 특징을 보인다. 우선 존덕정과 홍예교의 공간구성은 속(俗)에서 성(聖)으로 넘어가는 상징적 의미로 볼 수 있는데, 의도적으로 계류의 흐름을 틀고 폭을 넓힌 후 홍예교를 놓아 건너게 한 것은 존덕정 일대가 신성한 공간임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본래 존덕정이 가지고 있던 위상을 한층 더 격상시키려는 당대의 상상적 조경 수법으로 보았다. 무엇보다도 존덕정에는 북쪽에 반원지, 방지가 있고 남쪽에 삼지(방지 둘과 하나의 원지원도)가 표현되어 있는데, 반원형의 지당은 반월(半月)을 형상화한 것으로 실제로 존재하나 잡을 수 없는 이상세계에 대한 표현이며, 지당이 가지는 여러 가지 역할 중 상징성을 부여하고 형태를 구현하여 관망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대상 데이터
본 연구에서는 존덕정의 조영사를 정립하고 내재된 특성을 밝히기 위해 고문헌과 도상자료 분석이 병행되었으며, 2012년 9월 5일부터 2013년 4월 5일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현지조사가 수행되었다2).
이층 8각 집을 대정전이라 하였고, 태청문 동쪽에는 신우궁이라는 건물이 있어서 삼청의 소상을 모셨는데, 강희 황제의 어필로 소격, 옹정 황제의 어필로 옥허진제라 써 붙였다.(『열하일기』 성경잡지)
존덕정은 청연각 동쪽에 있고 북에 반월지가 있다. 인조 22년에 세웠다. 처음에는 육면정이라 부르다가 뒤에 이름을 존덕정으로 바꾸었다.
성능/효과
1. 창덕궁 후원조성의 흐름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孝宗]의 조선 귀근시기를 기점으로 옥류천권역에서 존덕정 권역으로 넘어 간 것을 알 수 있었으며, 존덕정 권역에 그동안 후원에 조영되지 않은 형태인 죽정과 육면정, 팔각정 등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두, 세 차례 귀근과 귀국에 맞물려 조영된 점과 효종이 왕위를 계승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천향각, 망춘정, 척뇌당을 조영하는 등 존덕정 일원의 개발을 늦추지 않은 점, 심양에서 태어난 현종이 훗날 존덕정의 현판을 직접 편액한 점 등에서 존덕정의 조영배경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결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2. 창덕궁 후원 존덕정(1644년)과 같이 두 겹의 지붕을 갖는 청나라의 단층건축물로 심양고궁 대정전(1625년), 운남성 곤명 원통사 팔각정(1686년), 북경 이화원의 곽여정(1750년경) 등이 있으며, 이중에서 대정전은 존덕정보다 조영시기가 빠르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볼모생활과 결부된 심양고궁에 있는 점에서 자세하게 고찰해 보았다.
셋째, 주변에 태청문이 존재하는 점은 도교의 삼청과 연결되며 꽃담과 더불어 왕의 불로장생을 염원하는 현세적 행복성취에서 기인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넷째, 건축양식에 있어서 겹 지붕의 단층정자이고 원기둥만을 사용하여 조영한 점은 하늘을 받드는 상징체계의 표현으로 왕이 봉천지정의 뜻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며 이는 후원에 있는 정원건축물중에서도 그 의미와 위계가 대단히 크다고 하겠다.
넷째, 창덕궁 존덕정과 심양고궁 대정전은 건축양식에 있어서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두 건축물 모두 두 겹의 지붕을 가지는 단층건물이면서 사각기둥을 사용하지 않고 원기둥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하늘을 뜻하는 원기둥만을 이용해 여타의 다른 정원건축물과 차별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본다면, 존덕정의 조영배경에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청국경험 영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수용함에 있어서 정원 속에 조영되는 정자의 특성, 장소[立地], 기능에 알맞도록 변용하였고 우리 고유의 문화에 습합시켜 구현된 정원건축물로 사료된다. 둘째, 대정전이 국가의 큰 행사를 거행하기 위해 넓은 조정을 가진 정전인 반면에 존덕정은 반월지와 방지, 방지원도, 계류와 홍예교 등 수공간 속에 조영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첫째, 왕권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신수이며 천지사방의 중심인 용이 형상화되어 있는데, 존덕정은 대정전과 다르게 궁의 후원에 조영된 정자로 자연의 이치를 체득하여 수신하는 목적이외에도 치국안민의 뜻이 가미되어 임금의 정치적 위상과 권위를 동시에 표현한 정원건축물임을 알 수 있었다. 둘째, 유교 주자학에서는 관상수시를 왕의 첫째 임무로 꼽았는데, 건축물 앞에 하늘의 운행을 읽는 일영대를 둔 점은 정확한 시간을 알기 위한 것 외에도 군왕의 당위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셋째, 주변에 태청문이 존재하는 점은 도교의 삼청과 연결되며 꽃담과 더불어 왕의 불로장생을 염원하는 현세적 행복성취에서 기인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둘째, 조선후기 청나라 사행기를 담은 문헌기록과 『증보어제궁궐지』의 기록에서는 두 건축물 모두 일영대(日影臺)18)를 갖추고 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존덕정은 반월지와 방지, 방지원도, 계류와 홍예교 등수공간 속에 조영된 특징을 보인다. 우선 존덕정과 홍예교의 공간구성은 속(俗)에서 성(聖)으로 넘어가는 상징적 의미로 볼 수 있는데, 의도적으로 계류의 흐름을 틀고 폭을 넓힌 후 홍예교를 놓아 건너게 한 것은 존덕정 일대가 신성한 공간임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본래 존덕정이 가지고 있던 위상을 한층 더 격상시키려는 당대의 상상적 조경 수법으로 보았다.
우선 존덕정과 홍예교의 공간구성은 속(俗)에서 성(聖)으로 넘어가는 상징적 의미로 볼 수 있는데, 의도적으로 계류의 흐름을 틀고 폭을 넓힌 후 홍예교를 놓아 건너게 한 것은 존덕정 일대가 신성한 공간임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본래 존덕정이 가지고 있던 위상을 한층 더 격상시키려는 당대의 상상적 조경 수법으로 보았다. 무엇보다도 존덕정에는 북쪽에 반원지, 방지가 있고 남쪽에 삼지(방지 둘과 하나의 원지원도)가 표현되어 있는데, 반원형의 지당은 반월(半月)을 형상화한 것으로 실제로 존재하나 잡을 수 없는 이상세계에 대한 표현이며, 지당이 가지는 여러 가지 역할 중 상징성을 부여하고 형태를 구현하여 관망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둘째, 유교 주자학에서는 관상수시를 왕의 첫째 임무로 꼽았는데, 건축물 앞에 하늘의 운행을 읽는 일영대를 둔 점은 정확한 시간을 알기 위한 것 외에도 군왕의 당위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셋째, 주변에 태청문이 존재하는 점은 도교의 삼청과 연결되며 꽃담과 더불어 왕의 불로장생을 염원하는 현세적 행복성취에서 기인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넷째, 건축양식에 있어서 겹 지붕의 단층정자이고 원기둥만을 사용하여 조영한 점은 하늘을 받드는 상징체계의 표현으로 왕이 봉천지정의 뜻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며 이는 후원에 있는 정원건축물중에서도 그 의미와 위계가 대단히 크다고 하겠다.
셋째, 창덕궁의 존덕정 일원과 심양고궁의 대정전 일원에는 공통적으로 태청문(太淸門)20)이 존재하고 있다(그림 4 참조). 심양고궁의 태청문은 숭덕 1년(1636년)에 홍타이지[皇太極]가 중로권역을 완공할 시기에 조영되는데, 청나라 사행을 다녀온 박지원(朴趾源, 1737~1805)과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문헌을 보면 삼청(三淸)의 소상을 모신 신우궁(神祐宮)21)이태청문의 동쪽에 있고 ‘소격(昭格)’이라 편액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렇듯 봉림대군은 삼전도(三田渡)의 치욕과 청나라 볼모생활의 역경을 훗날 효종이 되어 북벌의지로 불태웠지만, 청나라에서 순치 2년(1645년)부터 사용했던 시헌력(時憲曆)을 효종 4년(1653년)에 반포하여 조선의 개력(改曆)을 단행했었던 사례와 그의 청국 경험 후에 조성된 존덕정 일원의 모습으로 보아 외래문화를 습합하는 과정은 어느 정도 관대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위의 주지한 내용들을 종합해본다면 인조에 의해서 조성되어 오던 후원조성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귀근시기를 기점으로 옥류천 권역에서 존덕정 권역으로 넘어 갔으며, 죽정과 육면정, 팔각정 등이 조영된 점과 효종[봉림대군]이 왕위를 계승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존덕정 일원을 개발한 점에서 존덕정의 조영배경에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청국 경험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지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존덕정과 대정전에서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는 특징을 고찰함으로써 두 건축물의 연관성을 증명하고 존덕정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첫째, 왕권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신수이며 천지사방의 중심인 용이 형상화되어 있는데, 존덕정은 대정전과 다르게 궁의 후원에 조영된 정자로 자연의 이치를 체득하여 수신하는 목적이외에도 치국안민의 뜻이 가미되어 임금의 정치적 위상과 권위를 동시에 표현한 정원건축물임을 알 수 있었다. 둘째, 유교 주자학에서는 관상수시를 왕의 첫째 임무로 꼽았는데, 건축물 앞에 하늘의 운행을 읽는 일영대를 둔 점은 정확한 시간을 알기 위한 것 외에도 군왕의 당위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첫째, 존덕정과 대정전의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바로 지당의 존재 유무에 따른 건축적 특징이다. 이와 같은 차이는 건물이 수행하는 역할이 다르기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존덕정이지당을 조망할 수 있는 정원속의 정자라면 대정전은 국가의 큰 행사를 거행하기 위해 조정(朝廷)을 가졌고(그림 2-b 참조) 월대위에 조성된 정전이었기 때문이다(그림 3-a, b 참조).
존덕정과 대정전의 차이점을 살펴봄으로써 존덕정만의 특징을 고찰하였다. 첫째, 지당의 존재 유무에 따른 건축적 특징이 다르게 나타났다. 대정전은 국가의 큰 행사를 거행하기 위해 조정을 가졌고 월대위에 조성된 정전이기에 지당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문을 둘러 외부와의 경계를 두었고, 상하지붕 모두 사각의 서까래와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로 구성되었다.
첫째, 창덕궁 존덕정과 심양고궁 대정전에는 공통적으로 용이 형상화 되어 있다(그림 6 참조). 용은 왕권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신수(神獸)인데 우리나라의 정자 중 천장에 쌍룡희주(雙龍戱珠)하는 모습이 형상화된 곳은 존덕정이 유일할 정도로 매우 독특한 정자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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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어
질문
논문에서 추출한 답변
지당의 존재 유무에 따라 존덕정의 건축적 특징이 다르게 나타난 점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존덕정과 대정전의 차이점을 살펴봄으로써 존덕정만의 특징을 고찰하였다. 첫째, 지당의 존재 유무에 따라 존덕정의 건축적 특징이 다르게 나타났는데, 이는 외래문화를 수용함에 있어서 정원 속에 조영되는 정자의 특성, 입지, 기능에 알맞도록 변용한 것이며 우리문화에 습합되어 구현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둘째, 존덕정에 표현된 지당의 모습을 상현달 형태의 반월지가 동쪽에 흐르는 계류에 의해서 만월이 되는 형국으로 보았다.
존덕정의 조영 배경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결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1. 존덕정 권역에 그동안 후원에 조영되지 않은 형태인 죽정과 육각정, 팔각정 등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두, 세 차례 귀근과 귀국에 맞물려 조영된 점과 효종이 왕위를 계승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천향각, 망춘정, 척뇌당을 조영하는 등 존덕정 일원의 개발을 늦추지 않은 점, 심양에서 태어난 현종이 훗날 존덕정의 현판을 직접 편액한 점 등에서 존덕정의 조영배경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결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2.
존덕정에 일영대를 둔 점은 무엇 때문인가?
그러므로 존덕정은 자연의 이치를 체득하여 수신하는 목적이외에도 치국안민의 뜻이 가미된 정원건축물로 판단하였다. 둘째, 일영대를 둔 점은 정확한 시간을 알기 위한 것 외에도 군왕의 당위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셋째, 주변에 태청문이 존재하는 점은 도교의 삼청과 연결되며 꽃담과 더불어 왕의 불로장생을 염원하는 현세적 행복성취에서 기인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참고문헌 (45)
樓慶西 저, 한동수 역(1996). 중국고대건축총서I궁궐건축. 서울 : 발언.
孟彭興 저, 김순림 역(2008). 중국을 말한다 14 석양의 노을. 서울 : 신원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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