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정보
주관연구기관 |
한국교육개발원 Korean Educational Development Institude |
연구책임자 |
신효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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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유형 | 최종보고서 |
발행국가 | 대한민국 |
언어 |
한국어
|
발행년월 | 2007-12 |
주관부처 |
국무조정실 The Office for Government Policy Coordination |
등록번호 |
TRKO201700002128 |
DB 구축일자 |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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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I |
https://doi.org/10.23000/TRKO201700002128 |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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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적 변천과 사회변동
우즈베키스탄의 교육과 학문의 현황은 중앙아시아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의 전체 역사 과정 속에서 나타났던 정치적, 사회문화적 사건들에 의해 많은 부분이 결정되었다. 고대에는 페르시아의 아케메니드 왕국, 그 후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그리고 아랍인들과 러시아 제국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의 점령세력들은 제각기 이곳의 문화와 교육 형성에 있어서 나름대로 일정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가. 러시아 편입이전 우즈베키스탄의 역사적·사회적 변천 과정
페르시아의 아케메니드 왕국의
1, 역사적 변천과 사회변동
우즈베키스탄의 교육과 학문의 현황은 중앙아시아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의 전체 역사 과정 속에서 나타났던 정치적, 사회문화적 사건들에 의해 많은 부분이 결정되었다. 고대에는 페르시아의 아케메니드 왕국, 그 후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그리고 아랍인들과 러시아 제국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의 점령세력들은 제각기 이곳의 문화와 교육 형성에 있어서 나름대로 일정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가. 러시아 편입이전 우즈베키스탄의 역사적·사회적 변천 과정
페르시아의 아케메니드 왕국의 지배권 안으로 중앙아시아가 들어온 것은 교육의 형성과 발전에 있어 그 근간이 되는 요소인 문자가 만들어진 것과 관련이 있다. 여러 민족들을 통일했던 아케메니드 왕국에서는 페니키아 알파벳에서 나온 아랍어를 공식 문자로 사용했다. 이 문자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호레즘과 소그드 문자의 기초가 되었다. 호레즘 문자의 모형은 우즈베키스탄에서 기원전 3세기의 것으로 잡고 있다. 소그드 문자의 가장 초기 모형은 기원전 1세기 경의 것으로 본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한 점령과 함께 중앙아시아의 그리스화가 시작되었다. 그리스- 박트리아 왕국에서는 인도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카로슈티 문자가 아랍문자와 함께 폭넓게 사용되었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형성된 고대 국가들, 예를 들어, 쿠산 제국에서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문자들이 공존했다. 아랍문자, 호레즘 문자, 소그드 문자, 그리스 문자, 쿠샨 문자 그리고 카로슈티 문자.
기원 후 4~5세기 경에 고대 혹은 이교의 철학과 역사, 그리고 네스토리우스파(고대 문명에 대한 지향성을 가졌던 기독교 유파)로 비잔틴(동로마 제국)의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비잔틴의 문화·학문·교육·철학 등의 중심부가 동쪽(이란의 사산 왕조)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유명한 아테네 아카데미, 에데사 아카데미, 그리고 많은 수의 네스토리우스파의 교사들과 학생들이 이란으로 이주했다. 이 당시 그들은 비잔틴에서는 이단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무시되었던 고대문학의 방대한 양을 가져왔다.
그리스·로마의 교육과 학문의 체계들이 이렇게 재형성된 중심부에서 부활되어서, 아리스토텔레스, 포르피리오스, 히포크라테스, 갈레노스,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 등의 저술들이 그리스어에서 시리아어와 페르시아어로 번역되고, 그것들에 대한 주석들이 쓰여졌다.
아랍인들이 중앙아시아를 점령하자(7~8세기) 이 지역에 회교가 확고히 세워졌다.
중앙아시아는 세계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던 아랍의 칼리프 통치지역의 일부가 된 것이다. 칼리프 통치지역에서는 그리스어, 페르시아어, 시리아어, 인도어로 쓰여졌던 철학, 수학, 천문학, 의학 등에 관한 책들이 아랍어로 번역되었고, 성경과 복음서 또한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이러한 번역뿐만이 아니라, 그 책들에 대한 주석까지도 이루어졌다. 칼리프 통치지역에서는 그리스 합리주의를 추구하는 일군의 학파와 사상가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9세기 말에 아바스조의 칼리프가 멸망하자,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독립 국가들이 형성되었다. 이때부터 철학과 학문의 중심부는 더욱 더 동쪽으로 이동하여, 근동으로부터 중앙아시아와 이란으로 그 자리가 옮겨갔다. 여기서 그리스(인도와 중국) 문화유산과 새롭게 주어진 자연과학에 기반한 철학과 학문의 유파들이 발전하게 된다. 이들을 대표하는 인물들로는 알-코와리즈미(783~850), 알-파라비(870~950), 알비루니(973~1048), 이븐-시나(980~1037) 등과 같은 박식한 학자들을 들 수 있는데, 그들의 저서들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의 기독교 문화권으로도 전해졌다.
알-카라즈미는 대수학의 창시자였으며, 아라비아식 산수법 이론의 전제들을 만들었다('대수학 algebra' 와 '산수법 algorithm' 이란 용어는 알-코와리즈미의 이름과 그의 주요 저서인 '알-자브르'에서 나온 것이다).
알-파라비는 그리스 철학의 전파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학자로서, 그는 '둘째 선생', 즉 '아리스토텔레스 다음에 위치한 두 번째'라는 지위를 부여 받았다.
비루니는 '지나간 세대들의 기념비'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동서 민간 지역의 역법체계와 축제들을 분석하여 비교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비루니의 또 다른 뛰어난 저서로는 '인도'가 있는데, 베. 로젠(B. P03eH) 은 “이것은 독창적이고 유일한 기념비적인 것으로, 동과 서의 고대 전체와 중세에 나온 그 어떤 학술문헌과 비견될 수 없다. 이것으로부터 진정한 학문의 정신이 불어오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비루니는 인도에 머물면서 그리스와 아랍어권 사상가들의 학문을 인도에 널리 알렸다.
그는 유클리드의 '원론'과 자신의 천문학 저서들을 산스크리트어로 옮겼고, 또한 그 역으로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인도의 학문 이론들을 자신의 고국에 전파시켰다.
동양과 유럽 국가들의 철학과 학문, 특히 의학에 지대한 영양을 끼친 사람은 저명한 의사이자 학자이고 동시에 철학자이기도 했던 이븐-시나로서 그는 '학자들의 수장'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유럽에서는 아비센나(Avicenna) 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이븐-시나는 280여개 이상이나 되는 저서들을 저술했는데, 1493년에 베네치아에서 4부(논리학, 물리학, 형이상학 그리고 수학)로 구성된 총 18권짜리 백과전서인 '치유의 서(書)' 일부분이 라틴어로 발간되었고, 1593년에는 로마에서 '구원의 서(書)'의 요약본이 라틴어로 발간되었다. 그의 유명한 '의학 정전'은 12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1473 년 밀라노에서 출판되었으며, 17세기 전반기까지 30 회 재판될 정도로, 유럽의 의과대학에서는 이 책이 의사들을 위한 주요 기본서가 되었다.
학문적 내용과 함께 위에서 거론된 사상가들의 저술들 속에서 교육학과 관련된 논의- 수용, 기억, 사고, 효과적인 학습방법, 지식습득의 특성- 들을 찾아낼 수 있다.
선구적인 학문이 보급되는 데 있어서 실크로드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세기부터 중앙아시아는 몽고 지배에 의해 암흑기를 맞게 된다. 대도시들은 폐허가 되었으며 유명 도서관들이 파괴되었고, 이 지역의 철학과 학문은 쇠퇴되었다.
14세기에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강력한 티무르 왕조가 나타나, 점령된 국가들로부터 마베란나흐르(Maverannahr)와 제국의 수도인 사마르칸트로 신학자들, 학자들, 예술가들, 회교 교육기관(마드라사)을 위한 인재들, 건축가들, 숙련된 수공업자들이 옮겨왔다.
15세기에 사마르칸트의 지배자는 티무르의 손자이며 천문학자로도 유명한 울루그베그가 되었다. 이 시기에 마베란나흐르에서 문화와 지성의 발달은 그 절정에 이르렀다. 울루그베그가 세운 천문대는 이 시기 그 어떤 것과도 비견될 수 없는 거대한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다. 이 천문대에서는 10187개의 별들을 넣은 천문표와 여러 가지 수학 도식들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1499년에 베스코 다가마(Vasco da Gama)에 의해 인도와 중국으로 가는 해상로가 열리게 되자, 15~20년이 지나서 유럽과 이들 지역 간의 모든 무역은 이 해상로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캐러밴이 오가던 실크로드는 그 기능을 상실하고, 중앙아시아는 그들의 주요 수입원을 잃게 되었으며, 수공업 또한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중앙아시아의 학문과 교육 또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들은 그리스 합리주의 전통으로부터는 완전히 멀어진 반면, 이슬람 신학에는 더욱더 강하게 묶이게 되었다. 탐색, 개방, 비판, 혁신 등의 정신은 사라져 갔다. 중앙아시아 지역에 잔존해 있던 칸 지배 세력들은 불화하고 서로 전쟁을 일으키며 싸웠다. 중앙아시아는 이제 구식의 정치시스템 속에서 학술 기관이 부재하며 국민 교육수준이 낮은 낙후된 농업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나. 러시아제국 점령 후 우즈베키스탄 영토에서의 역사적·사회적 변화
러시아 제국이 중앙아시아를 점령한 19세기의 60~70년대에 이 지역에서는 새로운 역사적 단계가 시작된다. 점령지역에는 투르케스탄 총독부가 설치되었다. 이전의 농업 중심의 변방들은 러시아의 공업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의 이러한 연합은 변방에 다음과 같은 중대한 변화들을 가져왔다.
첫 번째 “투르케스탄 총독부의 지배에 들어간 광대한 지역에는 경제 활동의 법제화, 무역로에서의 안전성의 확보가 이루어지는 등 어느 정도 질서가 확립됨으로써, 생산관계의 단일한 경제시장과 단일한 시스템을 모든 지역에서 강화하도록 했다. 지방 세력과 정부 간의 불화와 끊임없는 갈등으로 인해 일어났던 무질서는 이제 끝나게 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 러시아 정권에 의해 건설된 철도는 변방의 경제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원면 처리, 버터 제조, 포도주 양조, 맥주 제조, 담배 생산 등을 하는 공장들이 건설되어 산업이 발전되었으며, 유용 광물이 채굴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세 번째, 점령지로 이주민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1910 년경에 투르케스탄 총독부 지배하에 있던 현재 우즈베키스탄 영토에는 124개의 러시아인 마을에 7만 명의 이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도시에 거주했던 이주민을 합친다면 이곳에 거주했던 러시아인은 20만 명 이상이 되었다. 그들 중에는 철도노동자, 건설노동자, 공장노동자, 기술자, 상업-산업자본가, 교육에 종사하는 평범한 중산층 등이 있었다.
이 지역에서 생산력이 발전되자 이전에는 주로 종교적 성격이 강했던 교육에 대해 혁신적 요구가 생겨났다. 이 변방의 발전을 위해서는 원주민 가운데 교육 받은 인구가 늘어나야만 했는데, 이를 위한 교육 발전에 러시아 이주민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70년대 초부터 투르케스탄에서 행해진 러시아 제국의 교육정책은 변방의 식민화 과제를 해결하고, 공조할 수 있는 교육체계를 세우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이 시기 교육정책의 기본 테제는 그 당시 교육부장관이었던 데. 아. 똘스또이에 의해 1879 년에 마련되었다. “교육은 우리 조국의 영토 안에 거주하는 모든 다른 민족들을 러시아인으로 동화시키는 데 그 목적을 두어야만 한다." 투르케스탄 총독이었던 카우프만이 1873년에 내놓은 '투르케스탄 지역에서의 교육시설의 설립과 민중교육을 위한 계획'에는 다음과 같은 점이 강조되고 있다: “변방에서 민중교육의 발전은 반드시 러시아의 이익과 부합되는 방향으로 추진되면서, 그 지역의 경제, 국가체제, 단결성, 러시아 체제와의 연합 등에 있어서의 발전을 이루어야만 한다". 키우프만은 특히 투르케스탄 원주민의 아동교육이 러시아 아동들과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을 함께 교육시키는 것은 다른 민족의 아동들이 갖게 될 사고의 차이를 없앨 수 있고, 점령지를 러시아로 동화시키는 데 있어 유리하게 작용한다."
변방에서는 그 지역 원주민(정착민과 유목민)과 러시아인을 위한 여러 형태의 학교들이 식민지 행정기관에 의해 설립되어 전통적인 이슬람 교육기관들과 나란히 존재하게 된다.
다. 소비에트 시기의 역사적·사회적 변화들
우즈베키스탄에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근본적인 변화들이 일어난다. 교육에 민족 교육시스템을 도입하게 된 주요사건은 1926년에 소연방의 틀 안에서 우즈베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민족국가들의 창설이었다.
모든 교육시설들이 국영화(종교 교육기관을 제외하고)되었고, 국고에 의해 그 재정이 운영되었다.
'막스-레닌주의'가 국가의 중심사상이 되었으며, 공산당이 정치체제에서 핵심이 되었다. 무신론이 교육시스템에서 추구하는 주요 국가 이데올로기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1930년대 스탈린의 탄압은 우즈베키스탄 문화 발전에 악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우즈베키스탄 지식계급의 장점을 손상시켰던 것이다.
세계의 양분화, 냉전, 그리고 미국과 나토에 대항하는 소연방의 세계 리더로서의 역할은 우즈베키스탄의 경제, 정치제도, 정신문화, 교육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소연방의 일부로서의 우즈베키스탄은 농공업중심의 공화국이 되었다. 이 지역에서 비행기와 자동차 생산, 채취공업, 경공업 등이 발전했고, 핵물리학 연구소와 사이버네틱스 연구소 등 학술연구기관의 지부들이 세워졌던 것이다.
국가의 의무와 보장(노동권, 무상 중등 및 고등 교육, 생리유급휴가 무상의료혜택, 연금혜택, 요양원 시설 사용료 할인 등)으로서 규정된 사회보장제도(사회적 그리고 개인적)가 확립되었다. 여러 면에서 사회정의의 원칙들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비록 그 안에 심각한 문제점들이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는 사회보장과 보호에 있어 세계적으로 다른 국기들과 비교할 때 높은 수준의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안정감과 점차적으로 삶이 개선될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갖게 했다.
이러한 성과들과 더불어 공화국 내에는 특히 변화의 독점과 같은 자원 의존적 경제 성격, 교육시스템을 포함한 사회제도 전반에서 나타나는 높은 부패 수준, 수도와 다른 지역들, 특히 농촌 지역과의 생활수준 격차 등의 문제들도 함께 커져갔다.
라. 독립시기의 역사적, 사회적 변화들
우즈베키스탄이 정치적, 사상적으로 독립하면서 모든 것이 소비에트의 가치 체계로부터 멀어졌다. 사회보장제도도 사실상 허물어졌다. 공식적인 것 혹은 비공식적인 것 할 것 없이 많은 부분들이 상업화되었다.
소연방 해체까지 우즈베키스탄은 연방 내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에 속해 있었는데, 이 지역 인구의 45% 이상이 소비에트 시대에 책정되었던 최하 급여액에도 못 미치는 수입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소연방 해체 후에 발생한 많은 수의 경제 협력관계의 단절, 국제업무 경험의 부재, 많은 전문가들의 유출 등 이 모든 것이 이 지역 경제가 쇠퇴하는 원인이 되었다.
1992 년 GDP 성장률은 전년도 대비 -11.1 %였고, 1993년에는 -2.3%에 이른다.
그러나 1995년부터는 점차적으로 플러스 GDP 성장이 이뤄졌다.
이것을 금액으로 나타내면, 1995년에 GDP는 3,028억 숨, 1996년 5,551억 숨, 1997년 9768억 숨, 1998년 1조4162 억 숨, 1999년 2조1287억 숨, 2000년 3조2556억 숨, 2001년 4조.9253억 숨, 2002년 7조4693억 숨, 2003년 9조6641억 숨, 2004년 12조1895억 숨, 2005년 15조2104억 숨으로 성장했다.
실제 1 인당 GDP(구매력 평가에 따라 미화($)로 환산된)는 해마다 다음과 같이 성장했다.
1991년 전문가의 평가에 따르면 75% 인구가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개인수입을 갖고 있었고, 1994년 2만 가구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44.5 %가 최저임금보다 낮은 개인수입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1 년에 많은 수의 사람들이 - 세계은행의 자료에 따르면 약 27.5 %가,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자료에 따르면 16 %가 - 빈곤에 처해 있었다. 그들의 한 달 평균임금은 미화 40-50달러를 넘지 않는다. 빈민의 대부분은 연금생활자, 불구자 그리고 실직한 젊은 층 등이다. 이 빈민들의 많은 수(약70 %)가 농촌에 거주하고 있다.
최근에는 근근이 겨우 먹고만 살아가는 극빈자 층이 나타났다. 빈곤이 사회의 거의 모든 주요 계층들에 만연해있다. 특히 경제능력이 취약한 사회 계층이나 집단들이 가난으로 인해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증가하고 있는 실업률과 인력 과잉상태에 있는 노동시장은 향후 빈곤 및 청년실업 문제와 직결된 요소들이다. 현재 상황에서 젊은 층들에게 실업은 장기적으로 지속될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학교 졸업생들은 매년 실업자들의 대열에 끼게 되는 것이다.
교육이 갖는 위상도 실추되고 있다. 다음의 2002년도 세계 은행 자료는 교육정도와 빈곤 간의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새 헌법에서는 민주주의적 자유를 공고히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 안에서는 아직 언론의 자유가 부재하고, 검열이 행해지고 있으며, 정치 지배는 권력만능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반대자들에 대한 박해가 행해지고 있다. 소비에트 사상이 '민족독립사상'으로 대치되어 소비에트 식으로 사회에 정착되기 시작했다(교육기관에서 필수과목으로 채택, 거리와 기관들에 수많은 구호를 내걸음, 대중정보매 체에서 사상과 부합하는 방향성 제시 등).
독립사상의 수용과 더불어 국내정치의 사상적 경향을 대표하게 된 것이 절대 다수 민족에게 우월권을 부여하는 민족주의이다. 소수민족의 권리, 자유, 능력들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원심화 과정들에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1989년 10월 21일에 제정되고 1995년 12월 21일 개정되어 현재까지 유효한 '국가 언어에 관한' 법령의 채택이다. 민족정책과 민족들 관계의 일반적 특성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모든 공화국에서 국가기관, 산업체, 교육계, 고위 군관리층으로부터 골수 민족주의자들을 계획적으로 배제시키는 정책과 러시아어 또한 단계적으로 배제시키는 정책이 행해지기 시작했다... 러시아어 사용 국민의 사회적 지위의 급격한 하락과 증가된 경제적 문제들, 게다가 보편화된 민족주의, 직장과 자녀 교육에서 받는 압박, 출국 시에 재산에 대한 차별대우, 사법당국의 전횡 등까지 더해졌다. 이런 모든 상황들은 러시아어 사용 주민들의 이주하려는 분위기를 자극할 수밖에 없었다.
우즈베 키스탄의 공식 통계 자료에 따르변, 80년대에 해마다 평균 5만 명, 90년대에는 8만~9만 명의 인구 감소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독일인, 크림지역의 따따르인, 유태인, 투르크-메스헤틴인은 거의가 모두 떠났다. 러시아인과 백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들의 이주도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1989~1999년 사이에 우즈베키스탄의 유출 인구수는 모두 1,400,000명인데 비해, 우즈베키스탄으로 유입된 인구수는 571,000명으로 829,000명이 감소되었다.
교육 개혁을 시작하면서 개혁의 주창자들은 사회 경제 변화와 교육 개혁과의 관계를 밝힐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인재 양성에 관한 국가계획은 교육제도 개혁의 사회·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전제를 명시하고 있다. 특별히 이 계획에 따르면 인재 양성 제도의 근본적 개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제가 되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합법적인 민주주의 국가와 개방적인 시민사회 건설을 향한 공화국의 역동적인 전진
• 국가 경제의 급진적 변화의 실현, 원료생산중심으로부터 경쟁력 있는 최종 단계의 제품 생산으로 공화국 경제의 단계적 전환
• 국가 사회정책에서 개인의 이익과 교육에 대한 우선권 보장
• 민족 정체성의 성장, 애국심과 조국에 대한 자부심의 고취, 풍부한 문화역사적 전통과 민중의 정신문화 유산에 대한 존경
• 우즈베키스탄의 세계사회로의 편입, 세계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위상과 권위의 공고화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국가계획에서 열거된 많은 사항들이 실제론 거의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합법적인 민주주의 국가와 개방적인 시민사회 건설을 횡t한 공화국의 역동적인 전진”과 관련된 사회들이 그 예가 된다. 시장개혁은 어중간한 성격을 띠고 있으며, 경제 주체들의 활동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지나치게 심하고 관료주의 및 중앙 통제와 공무원의 부패는 심각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출처 : 본문 I. 사회의 성격과 교육의 발전과정 12p)
목차 Contents
- 표지 ... 1
- 목차 ... 4
- 표목차 ... 6
- 그림목차 ... 8
- I. 사회의 성격과 교육의 발전과정 ... 10
- 1. 역사적 변천과 사회변동 ... 12
- 2. 교육의 발전 과정 ... 22
- 3. 교육에 미치는 사회·문화적 요인 ... 64
- II. 교육제도와 인프라 현황 ... 68
- 1. 학교제도의 개관 ... 70
- 2. 취학 전 교육 ... 73
- 3. 초등 및 중등교육 ... 77
- 4. 직업기술교육 ... 91
- 5. 고등교육 ... 93
- 6. 교육 행·재정 정책 ... 113
- 7. 교원 정책 ... 124
- III. 최근 교육개혁과 그 동향 ... 134
- 1. 교육개혁 동향 ... 136
- 2. 교육발전의 과제와 교육협력 요구 ... 144
- 참고문헌 ... 150
- 별첨 ... 158
- 별첨 1. 2004~2006년과 2010년까지 우즈베키스탄의 삶의 수준 향상 전략과 정책 모형 ... 160
- 별첨 2. 우즈베키스탄 국가 인재 양성 프로그램 ... 166
- 끝페이지 ...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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