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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주민등록번호처럼, 개인의 면역 정보 담긴 ‘백과사전’ 만든다

2024-04-24

개정 전 주민등록번호는 단순한 13자리의 숫자가 아니었다. 앞의 6자리는 생년월일로 이뤄지고, 뒷부분 7자리는 성별, 지역코드, 검증번호로 이뤄졌었다. 2020년 지역 차별 문제 예방과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현재는 임의 번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개인의 특성 정보를 담았던 옛 주민등록번호처럼, 개인의 면역 정보를 모두 확인할 수 있는 ‘면역기억 백과사전(Human TCRome project)’ 구축 프로젝트가 한국에서 시작됐다.
신의철 기초과학연구원(IBS)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 바이러스 면역 연구센터장은 지난 21일 서울에서 열린 ‘IBS-한국과학기자협회 과학미디어아카데미’를 통해 프로젝트 시작 소식을 알렸다. 신 센터장은 “생물학에서의 기억은 뇌의 신경학적 기억과 몸의 면역적 기억 두 개뿐”이라며 “출생 이후 우리 몸이 겪은 모든 일이 면역기억에 기록되는 만큼, ‘백과사전’이 구축되면 활용을 상상할 수 있는 분야는 무척 다양하다”고 말했다.

우리 몸의 면역체계는 세포 표면의 특정 분자를 이용해 적과 아군을 판단한다. 백신을 접종하거나 바이러스와 같은 병원체에 감염되면 선천성 면역 체계가 먼저 작동한다. 대식세포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를 먹어 버리고, 수지상세포는 침입자에게 적군이라는 표식을 남긴다. 후천성 면역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후천성 면역 체계의 T세포는 수지상세포가 남긴 표식을 감지해 침입자를 죽인다. 이때 표식을 읽어내는 ‘바코드리더’ 역할을 하는 것이 T세포에 있는 T세포 수용체(TCR‧T Cell Receptor)다. 병이 치료된 후에도 TCR은 우리 몸속에 남는다. 가령, 코로나19를 앓았던 사람의 혈액에는 코로나바이러스의 표면 스파이크 단백질과 결합하는 TCR을 가진 T세포가 존재한다. 이것이 면역의 기억이다.
신 센터장은 “우리 연구는 ‘한 사람의 면역기억을 모두 파악할 수 있을까?’라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시작됐다”며 “사람의 혈액을 채취해 T세포를 분리하고, T세포 속의 TCR 유전자를 분석하면 그 사람이 가진 TCR의 종류를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IBS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 연구진은 이 연구에 ‘면역기억 백과사전(Human TCRome project)’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90년대에 진행됐던 ‘인간게놈 프로젝트(HGP, Human Genome Project)’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게놈의 모든 염기 서열을 해석하기 위해서였다면, 면역기억 백과사전은 한 사람의 모든 면역기억을 파헤치는 데 목적이 있다.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유전 정보에 대한 기록이라면, 면역기억 백과사전에는 인간이 태어난 이후 겪은 일에 대한 기록이 담긴다.
문제는 한 사람이 가진 T세포의 수는 4,000억 개고, TCR의 종류는 1,000만 ~ 1억 개에 달한다는 것이다. 다뤄야 하는 데이터가 방대한 만큼 단일 연구진 차원에서 진행하긴 어렵다. 신 센터장 연구팀은 우선 면역기억 백과사전 구축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한 파일럿 연구부터 시작했다. 성인 남녀 2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시작했으며, 현재 11% 정도 파악했다. 일차적 목표는 20%까지 파악하는 것이다.
신 센터장은 “어떤 질병이 어떤 T세포에 반응하는지는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면역기억 백과사전이 완성된다면 T세포와 질병을 매칭할 수 있다”며 “1,000명 이상의 많은 사람의 백과사전을 구축하고, 개인 간의 공통점을 찾아 질병과 T세포 활성화 간의 연관관계를 규명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면역기억 백과사전이 구축된다면 질병의 조기 진단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가령, 종양이에 관여하는 특정 T세포 그룹이 활성화된 것을 미리 확인한다면 조기 진단해 적시에 적절한 치료를 진행할 수 있다. 개인의 면역을 예측해 장기 이식 적합도를 가려내는 ‘정밀의학’도 가능해진다.

한편, 인간 면역 빅데이터를 학습한 AI를 만들려는 국제 공동 연구도 올해 본격 시작됐다. 비영리단체인 ‘Human Immunome Project(HIP)’ 연구진은 전 세계 수십만 명의 지원자로부터 면역 관련 대규모 데이터셋을 생성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지난 1월 밝혔다. 이 프로젝트의 최종 목표는 면역 빅데이터를 이용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고, 백신 접종 후 바이러스 방어력 생성 여부를 예측하는 등 의료 연구와 신약 개발을 가속화하는 데 있다.
HIP 연구진은 우선 아프리카, 호주, 동아시아, 유럽, 중동, 북미, 남미 등에 7개의 선도 사이트를 구축하고 각 지역별 500명의 지원자로부터 면역 데이터를 수집하는 데 있다. 1단계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사이트를 100개까지 확장하고, 사이트 당 지원자를 1만 명까지 증가시켜 더 큰 데이터를 구축할 예정이다. 더 나아가, 이 데이터를 활용해 특정 약물이나 병원체와 같은 스트레스에 면역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예측하는 AI 모델도 구축할 예정이다.
HIP 연구진은 “HIP를 통해 인간 면역 체계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더 잘 이해하고, 나아가 새로운 치료법과 약물 반응을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AI 기반 예측 모델이 구축되면 백신 개발, 감염병, 자가면역 질환, 암, 신경퇴행성 질환 등에서 면역을 최적화하여 인류의 건강을 개선하는 데 혁신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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