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의 목적은, 한국에 있어서 일본 대중문화개방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나에 관해 고찰하는 것이다. 일본 대중문화개방이라는 것은, 상호교류로서 한국으로서는 굉장히 의의 깊은 행동이었다. 1965년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체결한 시점부터 일본에서는 끊임없이 일본 대중문화개방을 요구해 왔는데, 한국에서는 식민지지배하의 기억 에 의한 대일 감정 증폭, 국민정서의 혼란, 국민고유 문화까지도 해칠 우려가 있고, 국민문화산업까지 압박될 가능성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일반국민에게 대중문화개방을 규제 해 왔다. 그러나, 정권별로 조사한 결과, ...
이 논문의 목적은, 한국에 있어서 일본 대중문화개방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나에 관해 고찰하는 것이다. 일본 대중문화개방이라는 것은, 상호교류로서 한국으로서는 굉장히 의의 깊은 행동이었다. 1965년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체결한 시점부터 일본에서는 끊임없이 일본 대중문화개방을 요구해 왔는데, 한국에서는 식민지지배하의 기억 에 의한 대일 감정 증폭, 국민정서의 혼란, 국민고유 문화까지도 해칠 우려가 있고, 국민문화산업까지 압박될 가능성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일반국민에게 대중문화개방을 규제 해 왔다. 그러나, 정권별로 조사한 결과, 일본 대중문화를 규제하는 정책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국민사이에서 어느 정도 용인 해 나가는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또한, 노태우 정권에서는, 정부 레벨에서도 개방에 대한 찬반양론이 나오기 시작해서, 김영삼 정권에서는, 한층 더 격렬하게 되었다. 그 후 1997년 12월, 대한민국헌정사상, 여·야당의 수평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한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대중문화개방을 단행했다. 한국정부에서는, 국민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일본 대중 문화개방을 심의하는 「한일문화교류자문위원회」를 결성했다. 일본과 의 과거역사에 유래하는 특수한 국민감정을 배려해서, 전면개방은 피 하고, 단계적·점진적으로 개방할 것을 기본원칙으로서, 국민 각층의 의견을 받아들이면서 개방을 실시해 갔다. 김대통령이 일본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개방한 이유로서,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투표를 통해 여·야당의 정권교체가 되었 다는 점, 그것에 의한 국민들의 심한 반대 없이 대통령에 대한 신뢰와 개방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월드컵 공최를 목전 에 두고 일본 천황이 방한하기 쉽도록 환경을 조성하기 위함이었다고 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국제사회에 있어서의 한국의 입장에서 보더 라도 대중문화를 용인하는 분위기가 되어갔기 때문에, 이번에 개방을 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북한과의 화해·협력조성에 초점을 맞추어 강조하고 싶다. 이제까지의 정책과는 반대로, 일본과의 과거 청산, 화해와 협력, 미 래를 향한 파트너관계를 성립시킨 김대통령은, 이것을 토대로 세계 각 국 과의 우호관계를 만들고, 나아가서는 국제사회로의 지지를 얻어, 2000년 6월에는, 남북수뇌회담을 열고, 8월에는, 이산가족 상호방문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제부터야말로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된 다. 과거와의 청산, 미래를 향한 파트너관계를 결성해 관계가 호전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반일 감정이 남아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러나, 양국정부·국민은 열린 마음으로 꾸준히 양국의 우호관계를 추 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사려된다.
이 논문의 목적은, 한국에 있어서 일본 대중문화개방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나에 관해 고찰하는 것이다. 일본 대중문화개방이라는 것은, 상호교류로서 한국으로서는 굉장히 의의 깊은 행동이었다. 1965년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체결한 시점부터 일본에서는 끊임없이 일본 대중문화개방을 요구해 왔는데, 한국에서는 식민지지배하의 기억 에 의한 대일 감정 증폭, 국민정서의 혼란, 국민고유 문화까지도 해칠 우려가 있고, 국민문화산업까지 압박될 가능성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일반국민에게 대중문화개방을 규제 해 왔다. 그러나, 정권별로 조사한 결과, 일본 대중문화를 규제하는 정책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국민사이에서 어느 정도 용인 해 나가는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또한, 노태우 정권에서는, 정부 레벨에서도 개방에 대한 찬반양론이 나오기 시작해서, 김영삼 정권에서는, 한층 더 격렬하게 되었다. 그 후 1997년 12월, 대한민국헌정사상, 여·야당의 수평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한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대중문화개방을 단행했다. 한국정부에서는, 국민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일본 대중 문화개방을 심의하는 「한일문화교류자문위원회」를 결성했다. 일본과 의 과거역사에 유래하는 특수한 국민감정을 배려해서, 전면개방은 피 하고, 단계적·점진적으로 개방할 것을 기본원칙으로서, 국민 각층의 의견을 받아들이면서 개방을 실시해 갔다. 김대통령이 일본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개방한 이유로서,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투표를 통해 여·야당의 정권교체가 되었 다는 점, 그것에 의한 국민들의 심한 반대 없이 대통령에 대한 신뢰와 개방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월드컵 공최를 목전 에 두고 일본 천황이 방한하기 쉽도록 환경을 조성하기 위함이었다고 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국제사회에 있어서의 한국의 입장에서 보더 라도 대중문화를 용인하는 분위기가 되어갔기 때문에, 이번에 개방을 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북한과의 화해·협력조성에 초점을 맞추어 강조하고 싶다. 이제까지의 정책과는 반대로, 일본과의 과거 청산, 화해와 협력, 미 래를 향한 파트너관계를 성립시킨 김대통령은, 이것을 토대로 세계 각 국 과의 우호관계를 만들고, 나아가서는 국제사회로의 지지를 얻어, 2000년 6월에는, 남북수뇌회담을 열고, 8월에는, 이산가족 상호방문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제부터야말로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된 다. 과거와의 청산, 미래를 향한 파트너관계를 결성해 관계가 호전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반일 감정이 남아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러나, 양국정부·국민은 열린 마음으로 꾸준히 양국의 우호관계를 추 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사려된다.
本論文の目的は, 韓國における日本の大衆文化開放はどのようになされたかを考察することである. 日本の大衆文化開放というのは, 韓國の相互交流として, 韓國にとっては大變意義深いものであった. 1965年, 日本との國交正常化以來, 日本側からは日本の大衆文化開放を要求され續けていたが, 韓國では, 植民地支配當時の記憶による對日感情の增幅, 國民感情の混亂, さらに民族固有の文化の侵略の恐れのほか文化産業部門まで壓迫される可能性を懸念し, 一般國民に大衆文化の開放を規制してきた. しかし, 政權別に調査した結果, 日本の大衆文化を規制する政策には變りはなかったが國民レベルではある程度の容認ム-...
本論文の目的は, 韓國における日本の大衆文化開放はどのようになされたかを考察することである. 日本の大衆文化開放というのは, 韓國の相互交流として, 韓國にとっては大變意義深いものであった. 1965年, 日本との國交正常化以來, 日本側からは日本の大衆文化開放を要求され續けていたが, 韓國では, 植民地支配當時の記憶による對日感情の增幅, 國民感情の混亂, さらに民族固有の文化の侵略の恐れのほか文化産業部門まで壓迫される可能性を懸念し, 一般國民に大衆文化の開放を規制してきた. しかし, 政權別に調査した結果, 日本の大衆文化を規制する政策には變りはなかったが國民レベルではある程度の容認ム-ドが樹立しつつあった. また, 盧泰愚政權になってかは政府レベルでも開放に對する贊否兩論が交され始め, 金泳三政權になってからは, より一層激しくなった. その後, 1997年12月, 大韓民國憲政史上初めの與·野 政權交替を實現した金大中大統領は, ついに日本の大衆文化開放に踏み切った. 韓國政府では, 國民の反對を買うことを逃けるために, 日本の大衆文化開放のあり方を審議する「韓日文化交流諮問委員會」を結成した. 日本との過去の歷史に基づく國民感情を配慮して卽次全面開放は避け, 段階的に開放をしていくことを基本原則として, 國民各層の意見を取り上げつつ開放に踏み切った. 金大統領が日本の大衆文化を積極的に開放した理由として, 大韓民國憲政史上初めの國民投票を通しての與·野 政權交替が實現し, つまり國民が大統領への信賴感を持っていたことが, 開放對策をスム-ズの受け入れられる要因となったのであろう. また, ワ-ルドカップ共催を目前にして日本國天皇の訪韓を容易たらしめる環境づくりのためであるということが考えられる. また, 國際社會における韓國の立場という點においても大衆文化開放ム-ドが高まってきたため, 今回の開放に踏み切ったということが擧げられる. 最後に日本の大衆文化開放は北朝鮮との和解ム-ドづくりであることを强調したい. これまでの政策とはうって交わって, 日本との過去の淸算, 和解と協力, 未來へのパ-トナ-シップを成立させてきた金大統領は, これを土臺に世界各國との友好關係を築きひいては國際社會の支持を得て, 2000年の6月には, 南北朝鮮首腦會談を行い, 8月には離散家族の相互訪問が實現する運びとなった. これから, 國民個人レベルでの對話が必要となってくるであろう. 過去の淸算, 未來へのパ-トナ-シップを成立し關係が好轉されてきたとはいえ, 已然反日感情が殘っているのも事實である. しかし, 兩國政府·國民は今後互いに心を開き兩國の友好を推進していく姿勢が求められてくるであろう.
本論文の目的は, 韓國における日本の大衆文化開放はどのようになされたかを考察することである. 日本の大衆文化開放というのは, 韓國の相互交流として, 韓國にとっては大變意義深いものであった. 1965年, 日本との國交正常化以來, 日本側からは日本の大衆文化開放を要求され續けていたが, 韓國では, 植民地支配當時の記憶による對日感情の增幅, 國民感情の混亂, さらに民族固有の文化の侵略の恐れのほか文化産業部門まで壓迫される可能性を懸念し, 一般國民に大衆文化の開放を規制してきた. しかし, 政權別に調査した結果, 日本の大衆文化を規制する政策には變りはなかったが國民レベルではある程度の容認ム-ドが樹立しつつあった. また, 盧泰愚政權になってかは政府レベルでも開放に對する贊否兩論が交され始め, 金泳三政權になってからは, より一層激しくなった. その後, 1997年12月, 大韓民國憲政史上初めの與·野 政權交替を實現した金大中大統領は, ついに日本の大衆文化開放に踏み切った. 韓國政府では, 國民の反對を買うことを逃けるために, 日本の大衆文化開放のあり方を審議する「韓日文化交流諮問委員會」を結成した. 日本との過去の歷史に基づく國民感情を配慮して卽次全面開放は避け, 段階的に開放をしていくことを基本原則として, 國民各層の意見を取り上げつつ開放に踏み切った. 金大統領が日本の大衆文化を積極的に開放した理由として, 大韓民國憲政史上初めの國民投票を通しての與·野 政權交替が實現し, つまり國民が大統領への信賴感を持っていたことが, 開放對策をスム-ズの受け入れられる要因となったのであろう. また, ワ-ルドカップ共催を目前にして日本國天皇の訪韓を容易たらしめる環境づくりのためであるということが考えられる. また, 國際社會における韓國の立場という點においても大衆文化開放ム-ドが高まってきたため, 今回の開放に踏み切ったということが擧げられる. 最後に日本の大衆文化開放は北朝鮮との和解ム-ドづくりであることを强調したい. これまでの政策とはうって交わって, 日本との過去の淸算, 和解と協力, 未來へのパ-トナ-シップを成立させてきた金大統領は, これを土臺に世界各國との友好關係を築きひいては國際社會の支持を得て, 2000年の6月には, 南北朝鮮首腦會談を行い, 8月には離散家族の相互訪問が實現する運びとなった. これから, 國民個人レベルでの對話が必要となってくるであろう. 過去の淸算, 未來へのパ-トナ-シップを成立し關係が好轉されてきたとはいえ, 已然反日感情が殘っているのも事實である. しかし, 兩國政府·國民は今後互いに心を開き兩國の友好を推進していく姿勢が求められてくるであ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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