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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禮訟은 조선후기 사림들의 정권장악 및 정국변동을 수반하여 당쟁이 초래되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큰 사건이었으며 또한 성리학의 발달로 17세기 예학의 성숙과 함께 서-남인간의 禮論을 토대로 한 이론투쟁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조선중기 이후 정치․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이러한 중요성에 비추어 본고는 당시 西人과 南人의 인식차이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냈던 송시열과 윤휴를 중심으로 兩者의 禮論 및 政治論과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17세기 禮訟이 정치사적으로 어떠한 意味를 지니는지를 재해석해 보고자 한다.
예론에서 우선 기년복을 주장한 송시열은 효종을 體而不正(庶子承重是也), 즉 인조와 부자관계로서 대통을 계승했으나 적장자는 아니다라 하여 기년복을 주장하였다. 正體의 개념에서 송시열은 정을 正長, 윤휴는 부부소생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체이부정에서 서자를 송시열은 衆子로 윤휴는 첩자로 이해하였다. 이에 윤휴는 제왕가에는 사종설을 적용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양자의 禮論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송시열은 士大夫禮를 보편적으로 적용하여 혈연상의 조건, 즉 적통을 중심으로 복제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윤휴는 대통을 계승하였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제왕가의 예와 사서인의 예를 엄격히 구분하고자 하였다. 특히 군신관계에 따른 예를 적용하여『周禮』의 “모든 신하들의 상복은 천왕을 위해 참최복을 입는다”는 내용을 근거로 참최삼년복을 주장하였다. 이에 모후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禮論에서의 차이점은 또한 그들의 정치체제에 대한 인식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17세기 兩亂의 과정을 거치면서 송시열은 무엇보다도 국난 극복의 처방을 당시 군주보다 ...
저자 | 김상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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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수여기관 | 中央大學校 敎育大學院 |
학위구분 | 국내석사 |
학과 | 교육학과 역사교육 |
발행연도 | 2003 |
총페이지 | vi, 70장 |
키워드 | 윤휴 송시열 |
언어 | kor |
원문 URL | http://www.riss.kr/link?id=T9232913&outLink=K |
정보원 |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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