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에서 본 연구자는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선교의 기초와 원리 및 방식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았다. 서론에서도 밝혔지만, 본 연구자는 본 연구를 통하여 선교에 있어서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본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왜 선교를 하여야 하는지? 어떤 내용을 가지고 전해야 하는지? 어떤 대상들에게 전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전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우리의 생각이나 이해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하심과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에서 드러나는 동일한 은혜가 현채의 우리에게까지 흐르고 있음에 우리는 다만 그 은혜를 받아 누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엡 1:7)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그 안에서 기업이 되어(엡 1:11)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엡 1:19)하시는 일을 이 시대에 있어서 '선교'라는 수단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의 풍부한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볼 때, 현재 선교지의 선교사역의 특성은 선교지 상황과 정서를 고려한 선교지의 필요와 선교지 현실에 적합한 사역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추세는 복음을 전해야할 대상에 대한 이해와 선교지의 현장화 된 전략이라는 이유가 있음을 안다. 하지만 선교사가 이를 위해 파송 받았으나 전파되어야할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의 뜻이 무시되고 인간이 중심이 되어 가는 사역은 경계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또한 지금까지 내용을 근거하여 본다면, 선교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모으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수단으로 교회를 세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개혁주의 교회에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기억하여야 할 것은 교회의 통일성, 구원의 성취와 그 서정의 뿌리를 예정론에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의 이신칭의론이 종교 사회적 부패들을 제거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신칭의 핵심은 구원의 길로서 믿음의 방식에 있다. 즉 그 방식은 사회계층들을 상대화하였고 각 개인의 가치를 크게 하였으며, 정치 ...
이상에서 본 연구자는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선교의 기초와 원리 및 방식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았다. 서론에서도 밝혔지만, 본 연구자는 본 연구를 통하여 선교에 있어서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본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왜 선교를 하여야 하는지? 어떤 내용을 가지고 전해야 하는지? 어떤 대상들에게 전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전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우리의 생각이나 이해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하심과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에서 드러나는 동일한 은혜가 현채의 우리에게까지 흐르고 있음에 우리는 다만 그 은혜를 받아 누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엡 1:7)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그 안에서 기업이 되어(엡 1:11)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엡 1:19)하시는 일을 이 시대에 있어서 '선교'라는 수단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의 풍부한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볼 때, 현재 선교지의 선교사역의 특성은 선교지 상황과 정서를 고려한 선교지의 필요와 선교지 현실에 적합한 사역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추세는 복음을 전해야할 대상에 대한 이해와 선교지의 현장화 된 전략이라는 이유가 있음을 안다. 하지만 선교사가 이를 위해 파송 받았으나 전파되어야할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의 뜻이 무시되고 인간이 중심이 되어 가는 사역은 경계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또한 지금까지 내용을 근거하여 본다면, 선교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모으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수단으로 교회를 세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개혁주의 교회에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기억하여야 할 것은 교회의 통일성, 구원의 성취와 그 서정의 뿌리를 예정론에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의 이신칭의론이 종교 사회적 부패들을 제거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신칭의 핵심은 구원의 길로서 믿음의 방식에 있다. 즉 그 방식은 사회계층들을 상대화하였고 각 개인의 가치를 크게 하였으며, 정치 사회적 가치 기준들을 변경시켰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영원한 구원의 핵심이 인간론 중심으로 바뀌어지고 거기에 강조가 있게 되었다. 이런 현상을 현대 교회와 선교에 있어서도 복음주의라는 이름 하에 전혀 장로교회적이지 않고, 더욱이 개혁주의 적이지 않는 다양한 선교 이론들의 등장에서도 쉽게 발견되어지는 내용이다. 그러나 예정론에 구원이 기초하면,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는 것 때문에, 전적인 은혜로 인한 감사의 생활을 하게 하고 인간론 중심에서 벗어나 자신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극히 겸손케 한다. 그런 구원론은 성도에게 견인과 강한 인내를 가져다주고, 정치 사회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도 이신칭의론보다 훨씬 더 엄밀하게 비판할 수 있다. 특별히 이방인들에 대한 사랑과 정치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에 대한 강한 신뢰를 요구하고 선교에 있어서도 인간론적으로 흔들리지 않게 하고 선교지에서도 한 사람람의 구원이 없더라도 선교에 대한 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인내하며 순교까지 할 수 있는 정신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이렇듯 개혁주의에 입각한 신학의 풍성한 내용들은 선교사상의 풍성한 수원지가 되며, 진정한 근거가 되고 있다. 이것은 교회와 선교사에게 선교지에서 삶의 지침과 의미를 부여해 준다. 또한 불신자들에 대한 그들의 자세와 선교적 의미를 성경적으로 파악케 하여 무엇을 전해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그리하여 믿지 않는 일반 시민에 대해서도 진정한 인간존중의 기틀이 되며, 가난하고 무시 받는 자들에 대해서도 강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하고, 교회와 사회에 대한 비판과 혁명정신의 원동력이 되며, 복음의 순교자와 나그네를 변명하며, 또한 개척교회의 신실과 정성을 제공하며, 개척 된 교회의 내적 성숙을 제공한다. 교회가 흔들리지 않도록 권징의 의미가 된다. 따라서 선교의 대상을 알게 하고 선교의 효과나 결과에 대한 원인은 제공받게 한다. 그리고 선교지와 교회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서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또 한가지는, 개혁주의 신학에 저항의 개념으로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 ad resistendum)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무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선교지의 다양한 상황들로 인하여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기가 어렵고 힘이 드는 상황이라도 진리와 비(非)진리를 타협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영적인 무기로서 흑은 저항의 무기로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아주 실천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저항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는 것은 보다 큰 저항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운동이다. 진리에 대한 고집 자체가 사회로 하여금 진리를 추구하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 한계를 정확하게 긋는 것도 진리 자체만을 사랑한다는 선포인 것이다. 때로 우리는 이런 일에도 처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버리고 진리 때문에 친구들도 나를 버리고 가족들도 나를 버리며 가까운 신앙의 동지들도 나를 버려 진리 때문에 홀로 서 있고 하나님만이 그 증인으로 있을 때(solus primo eram, me unum fuisse, Deum ipsum tester) 이럴 때, 우리는 인간의 의지로 홀로 서 있어서는 안되고, 루터처럼 성경과 더불어 아직 이성 혹은 양심으로 홀로 서 있어서는 안되며, 오직 성경을 가지고 그 성경과 함께 오직 성경에 의해서 생각하고 말하는 자로서 홀로 서 있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그런 오직 성경으로 홀로 서 있는 일에 다양한 종교개혁자들도 참여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독특한 고백 안에서 저항하는 자로서, 그 안에서 오직 성경으로 생각하며 말하는 자로서 홀로 서 있어야 한다. 여기에 바로 정통개혁주의 신학으로 무장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 이제 이와 같은 논의의 끝으로 우리의 사역 현장에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가 무엇을 행하며, 무엇을 남길 것인가? 에 우리의 눈과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유일한 상급이 되시는 하나님께 눈과 마음을 돌리며 그 분의 뜻하심을 따라서 무엇을 행하며, 그 분 앞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에 우리의 전 생애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걸음을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이상에서 본 연구자는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선교의 기초와 원리 및 방식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았다. 서론에서도 밝혔지만, 본 연구자는 본 연구를 통하여 선교에 있어서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본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왜 선교를 하여야 하는지? 어떤 내용을 가지고 전해야 하는지? 어떤 대상들에게 전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전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우리의 생각이나 이해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하심과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에서 드러나는 동일한 은혜가 현채의 우리에게까지 흐르고 있음에 우리는 다만 그 은혜를 받아 누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엡 1:7)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그 안에서 기업이 되어(엡 1:11)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엡 1:19)하시는 일을 이 시대에 있어서 '선교'라는 수단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의 풍부한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볼 때, 현재 선교지의 선교사역의 특성은 선교지 상황과 정서를 고려한 선교지의 필요와 선교지 현실에 적합한 사역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추세는 복음을 전해야할 대상에 대한 이해와 선교지의 현장화 된 전략이라는 이유가 있음을 안다. 하지만 선교사가 이를 위해 파송 받았으나 전파되어야할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의 뜻이 무시되고 인간이 중심이 되어 가는 사역은 경계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또한 지금까지 내용을 근거하여 본다면, 선교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모으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수단으로 교회를 세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개혁주의 교회에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기억하여야 할 것은 교회의 통일성, 구원의 성취와 그 서정의 뿌리를 예정론에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의 이신칭의론이 종교 사회적 부패들을 제거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신칭의 핵심은 구원의 길로서 믿음의 방식에 있다. 즉 그 방식은 사회계층들을 상대화하였고 각 개인의 가치를 크게 하였으며, 정치 사회적 가치 기준들을 변경시켰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영원한 구원의 핵심이 인간론 중심으로 바뀌어지고 거기에 강조가 있게 되었다. 이런 현상을 현대 교회와 선교에 있어서도 복음주의라는 이름 하에 전혀 장로교회적이지 않고, 더욱이 개혁주의 적이지 않는 다양한 선교 이론들의 등장에서도 쉽게 발견되어지는 내용이다. 그러나 예정론에 구원이 기초하면,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는 것 때문에, 전적인 은혜로 인한 감사의 생활을 하게 하고 인간론 중심에서 벗어나 자신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극히 겸손케 한다. 그런 구원론은 성도에게 견인과 강한 인내를 가져다주고, 정치 사회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도 이신칭의론보다 훨씬 더 엄밀하게 비판할 수 있다. 특별히 이방인들에 대한 사랑과 정치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에 대한 강한 신뢰를 요구하고 선교에 있어서도 인간론적으로 흔들리지 않게 하고 선교지에서도 한 사람람의 구원이 없더라도 선교에 대한 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인내하며 순교까지 할 수 있는 정신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이렇듯 개혁주의에 입각한 신학의 풍성한 내용들은 선교사상의 풍성한 수원지가 되며, 진정한 근거가 되고 있다. 이것은 교회와 선교사에게 선교지에서 삶의 지침과 의미를 부여해 준다. 또한 불신자들에 대한 그들의 자세와 선교적 의미를 성경적으로 파악케 하여 무엇을 전해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그리하여 믿지 않는 일반 시민에 대해서도 진정한 인간존중의 기틀이 되며, 가난하고 무시 받는 자들에 대해서도 강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하고, 교회와 사회에 대한 비판과 혁명정신의 원동력이 되며, 복음의 순교자와 나그네를 변명하며, 또한 개척교회의 신실과 정성을 제공하며, 개척 된 교회의 내적 성숙을 제공한다. 교회가 흔들리지 않도록 권징의 의미가 된다. 따라서 선교의 대상을 알게 하고 선교의 효과나 결과에 대한 원인은 제공받게 한다. 그리고 선교지와 교회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서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또 한가지는, 개혁주의 신학에 저항의 개념으로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 ad resistendum)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무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선교지의 다양한 상황들로 인하여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기가 어렵고 힘이 드는 상황이라도 진리와 비(非)진리를 타협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영적인 무기로서 흑은 저항의 무기로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아주 실천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저항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는 것은 보다 큰 저항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운동이다. 진리에 대한 고집 자체가 사회로 하여금 진리를 추구하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 한계를 정확하게 긋는 것도 진리 자체만을 사랑한다는 선포인 것이다. 때로 우리는 이런 일에도 처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버리고 진리 때문에 친구들도 나를 버리고 가족들도 나를 버리며 가까운 신앙의 동지들도 나를 버려 진리 때문에 홀로 서 있고 하나님만이 그 증인으로 있을 때(solus primo eram, me unum fuisse, Deum ipsum tester) 이럴 때, 우리는 인간의 의지로 홀로 서 있어서는 안되고, 루터처럼 성경과 더불어 아직 이성 혹은 양심으로 홀로 서 있어서는 안되며, 오직 성경을 가지고 그 성경과 함께 오직 성경에 의해서 생각하고 말하는 자로서 홀로 서 있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그런 오직 성경으로 홀로 서 있는 일에 다양한 종교개혁자들도 참여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독특한 고백 안에서 저항하는 자로서, 그 안에서 오직 성경으로 생각하며 말하는 자로서 홀로 서 있어야 한다. 여기에 바로 정통개혁주의 신학으로 무장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 이제 이와 같은 논의의 끝으로 우리의 사역 현장에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가 무엇을 행하며, 무엇을 남길 것인가? 에 우리의 눈과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유일한 상급이 되시는 하나님께 눈과 마음을 돌리며 그 분의 뜻하심을 따라서 무엇을 행하며, 그 분 앞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에 우리의 전 생애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걸음을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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