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日帝에 합병된 한국은 식민지의 근대성을 지양한 국민국가의 수립을 위해 끊임없이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해방을 추구한 많은 한국인들은 해방된 근대국가의 전망을 서구의 근대사상에서 모색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일본에 유학해 서구의 근대문물과 새로운 사조를 흡수하였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적 근대국민국가를 이룩한 현실적 ‘모범’이었다. 동시에 한국을 병탄한 ‘저항’해야 할 제국주의 식민모국이었다. 日帝에 대한 이 ‘모방과 저항’의 딜레마에서 일단의 재일유학생들은 1916년 비밀리에 신아동맹당을 결성하고 저항의 움직임을 조직했다. 이들은 학우회 등을 통해 각종 반일운동을 전개하며, 민족의식과 민족해방의 열망을 모아나갔다. 그러면서 이들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근대국가를 구상하였다. 제국주의화한 서구적 근대국가, 그리고 그 시현인 日帝와는 차별화된 전망이었다. 그러나 신아동맹당의 구상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던 관념 속의 이상적 근대국가였다. 오히려 이상적이었기에 현실의 日帝와 대치할 수 있었다. 신아동맹당은 1917년 9월 30일 해산을 결정하였다. 해산결정은 학우회 장악이라는 유리한 정세를 감안하여 비합법에서 합법운동으로 전환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신아동맹당을 해체하였지만, 계속해서 각자 가담하고 있던 공개조직을 통해 반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3·1운동을 통해 신아동맹당 출신들은 국내 민족해방운동가들과 연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사회혁명당이라는 비밀독서회를 조직하였다. 사회혁명당은 식민지 극복과 근대국민국가의 수립을 위해 새로운 사조, 특히 사회주의를 학습하고 이론화하는 공간이었다. 이들은 신진사조의 학습과 함께 해외의 민족해방운동단체와 교류를 꾀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려공산당 창당을 준비하던 上海의 한인사회당과 연결되었다. 한인사회당과는 사회혁명당 결성 이전부터 인적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런 인적관련은 운동 초기에 조직을 결성하는 기본토대로 작용하였다. 이와 함께 현단계 한국의 민족해방을 우선시하던 한인사회당의 혁명노선도 사회혁명당과 일치점을 형성했다. 이에 따라 사회혁명당은 상해파 고려공산당 창당대회에 9명의 대표를 참가시켰다. 이로써 사회혁명당은 상해파 국내지부로 전환하였고, 독서회에서 공산당 지부로 위상을 격상시켰다. 그리고 자신들의 활동을 국내와 해외를 아우르는 전체적인 민족해방운동의 범주 속에 위치지울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사회혁명당은 사실상 고려공산당 창당대회를 공산당 보다는 민족해방운동단체의 결성이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런 인식 상의 차이는 창당대회에서 해소되었어야 했지만, 대회에서 민주주의적 절차는 생략되었다. 이는 이후 상해파가 다른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치명적인 비판을 받게 되고, 심각한 내분을 야기하는 결정적 갈등요인을 잠복시켰다. 상해파 국내지부의 활동은 사회혁명당을 통해 전개되었고, 이들은 동아일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들은 민족내부의 결집을 통해 실력을 모아내어 日帝를 자신들이 원하는 사회정책적 방책으로 추동해내기 위해 문화운동을 제창하였다. 사회혁명당 세력의 구상은 분배구조를 개선하여 ‘합리적’으로 통제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는 민주주의적인 자유정치의 근대국민국가를 전망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자칫 日帝의 근대적 조치들을 승인·방조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런 非마르크스주의적인 문화주의는 고려공산당 지부로 전환하여 활동하던 사회혁명당 세력에게 치명적인 ‘결함’으로 작용하였다. 이 때문에 고려공산당이라는 비합법적인 영역을 자신들의 본질로 내재하던 사회혁명당 세력은, 공산당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당하는 순간 타협적인 ‘부르주아 우파’의 문화운동론과 차별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적 경향과 달리 사회혁명당 내부에서는 학습을 통해 점차 ...
1910년 日帝에 합병된 한국은 식민지의 근대성을 지양한 국민국가의 수립을 위해 끊임없이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해방을 추구한 많은 한국인들은 해방된 근대국가의 전망을 서구의 근대사상에서 모색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일본에 유학해 서구의 근대문물과 새로운 사조를 흡수하였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적 근대국민국가를 이룩한 현실적 ‘모범’이었다. 동시에 한국을 병탄한 ‘저항’해야 할 제국주의 식민모국이었다. 日帝에 대한 이 ‘모방과 저항’의 딜레마에서 일단의 재일유학생들은 1916년 비밀리에 신아동맹당을 결성하고 저항의 움직임을 조직했다. 이들은 학우회 등을 통해 각종 반일운동을 전개하며, 민족의식과 민족해방의 열망을 모아나갔다. 그러면서 이들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근대국가를 구상하였다. 제국주의화한 서구적 근대국가, 그리고 그 시현인 日帝와는 차별화된 전망이었다. 그러나 신아동맹당의 구상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던 관념 속의 이상적 근대국가였다. 오히려 이상적이었기에 현실의 日帝와 대치할 수 있었다. 신아동맹당은 1917년 9월 30일 해산을 결정하였다. 해산결정은 학우회 장악이라는 유리한 정세를 감안하여 비합법에서 합법운동으로 전환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신아동맹당을 해체하였지만, 계속해서 각자 가담하고 있던 공개조직을 통해 반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3·1운동을 통해 신아동맹당 출신들은 국내 민족해방운동가들과 연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사회혁명당이라는 비밀독서회를 조직하였다. 사회혁명당은 식민지 극복과 근대국민국가의 수립을 위해 새로운 사조, 특히 사회주의를 학습하고 이론화하는 공간이었다. 이들은 신진사조의 학습과 함께 해외의 민족해방운동단체와 교류를 꾀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려공산당 창당을 준비하던 上海의 한인사회당과 연결되었다. 한인사회당과는 사회혁명당 결성 이전부터 인적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런 인적관련은 운동 초기에 조직을 결성하는 기본토대로 작용하였다. 이와 함께 현단계 한국의 민족해방을 우선시하던 한인사회당의 혁명노선도 사회혁명당과 일치점을 형성했다. 이에 따라 사회혁명당은 상해파 고려공산당 창당대회에 9명의 대표를 참가시켰다. 이로써 사회혁명당은 상해파 국내지부로 전환하였고, 독서회에서 공산당 지부로 위상을 격상시켰다. 그리고 자신들의 활동을 국내와 해외를 아우르는 전체적인 민족해방운동의 범주 속에 위치지울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사회혁명당은 사실상 고려공산당 창당대회를 공산당 보다는 민족해방운동단체의 결성이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런 인식 상의 차이는 창당대회에서 해소되었어야 했지만, 대회에서 민주주의적 절차는 생략되었다. 이는 이후 상해파가 다른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치명적인 비판을 받게 되고, 심각한 내분을 야기하는 결정적 갈등요인을 잠복시켰다. 상해파 국내지부의 활동은 사회혁명당을 통해 전개되었고, 이들은 동아일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들은 민족내부의 결집을 통해 실력을 모아내어 日帝를 자신들이 원하는 사회정책적 방책으로 추동해내기 위해 문화운동을 제창하였다. 사회혁명당 세력의 구상은 분배구조를 개선하여 ‘합리적’으로 통제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는 민주주의적인 자유정치의 근대국민국가를 전망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자칫 日帝의 근대적 조치들을 승인·방조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런 非마르크스주의적인 문화주의는 고려공산당 지부로 전환하여 활동하던 사회혁명당 세력에게 치명적인 ‘결함’으로 작용하였다. 이 때문에 고려공산당이라는 비합법적인 영역을 자신들의 본질로 내재하던 사회혁명당 세력은, 공산당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당하는 순간 타협적인 ‘부르주아 우파’의 문화운동론과 차별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적 경향과 달리 사회혁명당 내부에서는 학습을 통해 점차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는 인물들이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김명식과 유진희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의 사상적 궤적은 1910년대 (신)자유주의의 범주에서 벗어나 1920년대 마르크스주의로 전화되는 신지식층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이들은 윤리적 이상주의·신자유주의와 역사학파 경제학 등에 대한 이해를 넘어 아나키즘과 역사적 유물론을 비롯해 카우츠키의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일정하게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마르크스주의는 ‘해방과 자유’의 담론으로 상징되는 이상적인 新思想이었다. 그래서 김명식은 러시아혁명이 인류의 해방과 인간의 자유를 위한 신사상을 실현하는 새로운 역사를 창도하리라 전망했다. 유진희도 자본주의체제의 계급모순은 도시와 농촌, 제국주의와 식민지를 불문하고 공산사회를 지향하는 세계적으로 동일한 방향으로 해결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들은 공산주의 전망으로 러시아를 주목했다. 한국 사회혁명의 복선이 농촌에 있다고 확신했기에 러시아 농촌문제의 始末에서 그 현실적 답안을 찾으려고 하였다. 러시아의 공산주의국가 건설을 모범으로 한국의 식민지적 상황을 극복하고 근대국민국가를 건설하려했던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산주의적 대안으로 한국혁명의 필연성을 세계사적 차원에서 확보할 수 있었다. 더욱이 공산주의는 이들에게 자본주의 근대문명의 추구가 日帝를 포함해 제국주의화한 ‘서구적 기획’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역설적 상황을 모면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식민지의 중첩된 모순을 자칫 단순화시킬 우려를 동시에 함유하고 있었다. 이처럼 사회혁명당 세력은 상해파 국내지부로 전환되어 공산당 지부로서 활동하였으나, 내부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로 사상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사회혁명당 세력은 민족해방을 위해 (신)자유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가 공산당이라는 한 조직에 동승하고 있던 형세였다. 곧, 개량적인 중도우파에서 공산주의 좌파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이념적 지평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점에서 사회혁명당 세력은 고려공산당 국내지부라는 조직위상과 그 부원들의 의식이 전면적으로 조응하지 못하고 괴리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국제공산주의운동의 흐름은 黨內의 개량적 경향을 일소하고 공산주의자들만의 정당을 지향하는 추세였다. 이런 흐름을 인식했던 아니던 한국의 공산주의운동도 자체적인 ‘내부 정화’를 시도했다. 국내 ‘신흥’공산주의자들은 ‘김윤식사회장’과 ‘사기공산당 사건’을 통해 사회혁명당 세력의 非마르크스주의적 요소를 공산주의운동 선상에서 배제시키려 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에 부합하는 측면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전혀 민주적이거나 합리적이지 못한 채 윤리적, 도덕적 멍에를 씌우는 극단적인 형태로 전개되었다. 공산주의운동의 자기 영역 확보라는 원칙이 강조되어, 민족해방을 위한 통일전선이라는 활동방침은 부차적인 전술로 밀려났던 것이다. 반면에 상해파 중앙은 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이라는 과업에 압도되어 통일전선을 당의 조직방침으로 혼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들은 식민지라는 조건이 초기 한국공산주의운동을 굴절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사회혁명당 세력은 분열하게 되고, 또 일부는 공산주의운동선상에서 완전히 이탈하게 되었다. 사회혁명당 세력의 등장과 부침의 과정은 한국 민족해방운동이 이론적 실천의 장 속에 편입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민족해방운동이 특정한 이론 하에 전개되면서 두가지 과업이 공존하게 되었다. 민족의 자주성 회복과 함께 식민지의 근대성을 극복하려는 이론적 목표의 달성이었다. 그런데 이론적 실천의 방법이 민족내부를 계급적으로 구분하면서 출발하기 때문에 민족을 전체상으로 상징화하는 민족자주의 이데올로기와 상충되었다. 이런 모습은 좌우를 막론하고 동일하게 나타났다. 좌파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이익에 복무했다면, 우파는 부르주아계급의 이익에 충실한 자본주의 근대국가체제를 전망하였다. 이런 모순은 민족해방운동이 자주성 회복과 아울러 식민지의 근대성을 지양한 특정 근대국가체제를 전망하는 것이었기에 불가피한 과정이었다. 오히려 이 이중과업은 각각의 가치와 영역을 가지면서도 분리될 수 없는 상호 규정하는 과제로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상충하는 두 원칙을 식민지 현실 속에서 적절하게 중첩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이는 민족자주와 이론적 실천 양자의 가치를 상호승인하는 것을 전제로 식민지라는 구조를 타파할 전술을 각각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구사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좌우파 모두 각자 이론적 실천의 기반을 마련한 위에 민족자주의 현실적 목표에 따라 타협과 경쟁, 때로는 일탈행위에 대한 견제와 견인의 상승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민족자주의 목표로 이론적 실천의 향방을 재단할 수도, 이데올로기적 전망이 민족의 해방을 등한시 할 수도 없었다. 공간적으로는 합법과 비합법 영역을 交互하며, 계급간 결정구도를 초월할 가능성과 소통구조를 확보해야 한다. 이로써 제국주의의 이해와 요구에 저항하고 식민지 민족의 그것으로 왜곡시키며, 민족해방의 이중적 과업을 달성해 나가야 한다. 사회혁명당 세력은 고려공산당 국내지부가 되면서 이 이론적 실천의 장 속에 본격적으로 편입되었다. 좌우를 아우르는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 사회혁명당은 민족해방을 위한 단체로서는 적절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특정한 근대국가체제를 지향하는 이론적 실천의 공간으로서는 부적절했다. 이 때문에 사회혁명당 세력은 사상투쟁에 휘말리고 헤게모니를 상실한 채 분열하였다. 자기의 고유한 영역을 구축해 가고 이 과정에서 배제와 분열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배제되고 분열된 다른 쌍은 민족해방을 위한 또다른 세력으로서 자신들의 영역을 재구축해야 한다. 이를 통해 각각의 영역은 식민지 구조 속에서 대안세력으로 길항관계를 이룰 수 있다. 이로써 민족해방운동의 영역은 확대되고 저항의 지점을 다각도로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사회혁명당 세력을 배제한 국내 공산주의 세력들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멍에를 덧씌움으로써 배제된 영역이 재구축될 여지를 협소하게 만들었다. 확고한 원칙과 유연한 방법론의 구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사회혁명당 세력 또한 자체적으로 내부의 이념적 차이를 극복할 적절한 해결책을 모색하지 못한 채 민족단결의 원칙적 강조에 매몰되어 자신들의 정체성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이러한 모습은 민족해방운동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 반면에 운동 노선의 혼탁함과 일관된 방향성의 부재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고려공산당 국내지부로서 사회혁명당 세력이 지향하는 근대국가의 이론적 전망과 운동노선의 타당성을 실천적으로 검증하는 과정이 요구되었고, 이론과 노선이 불일치했던 사회혁명당 세력은 배척당하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사회혁명당 세력의 부침은 한국 민족해방운동이 이론적 실천의 영역에 구조화되는 과정의 일면이었으며, 이후 치열하게 전개될 사상운동의 양상을 예시해주는 실례였다.
1910년 日帝에 합병된 한국은 식민지의 근대성을 지양한 국민국가의 수립을 위해 끊임없이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해방을 추구한 많은 한국인들은 해방된 근대국가의 전망을 서구의 근대사상에서 모색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일본에 유학해 서구의 근대문물과 새로운 사조를 흡수하였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적 근대국민국가를 이룩한 현실적 ‘모범’이었다. 동시에 한국을 병탄한 ‘저항’해야 할 제국주의 식민모국이었다. 日帝에 대한 이 ‘모방과 저항’의 딜레마에서 일단의 재일유학생들은 1916년 비밀리에 신아동맹당을 결성하고 저항의 움직임을 조직했다. 이들은 학우회 등을 통해 각종 반일운동을 전개하며, 민족의식과 민족해방의 열망을 모아나갔다. 그러면서 이들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근대국가를 구상하였다. 제국주의화한 서구적 근대국가, 그리고 그 시현인 日帝와는 차별화된 전망이었다. 그러나 신아동맹당의 구상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던 관념 속의 이상적 근대국가였다. 오히려 이상적이었기에 현실의 日帝와 대치할 수 있었다. 신아동맹당은 1917년 9월 30일 해산을 결정하였다. 해산결정은 학우회 장악이라는 유리한 정세를 감안하여 비합법에서 합법운동으로 전환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신아동맹당을 해체하였지만, 계속해서 각자 가담하고 있던 공개조직을 통해 반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3·1운동을 통해 신아동맹당 출신들은 국내 민족해방운동가들과 연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사회혁명당이라는 비밀독서회를 조직하였다. 사회혁명당은 식민지 극복과 근대국민국가의 수립을 위해 새로운 사조, 특히 사회주의를 학습하고 이론화하는 공간이었다. 이들은 신진사조의 학습과 함께 해외의 민족해방운동단체와 교류를 꾀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려공산당 창당을 준비하던 上海의 한인사회당과 연결되었다. 한인사회당과는 사회혁명당 결성 이전부터 인적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런 인적관련은 운동 초기에 조직을 결성하는 기본토대로 작용하였다. 이와 함께 현단계 한국의 민족해방을 우선시하던 한인사회당의 혁명노선도 사회혁명당과 일치점을 형성했다. 이에 따라 사회혁명당은 상해파 고려공산당 창당대회에 9명의 대표를 참가시켰다. 이로써 사회혁명당은 상해파 국내지부로 전환하였고, 독서회에서 공산당 지부로 위상을 격상시켰다. 그리고 자신들의 활동을 국내와 해외를 아우르는 전체적인 민족해방운동의 범주 속에 위치지울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사회혁명당은 사실상 고려공산당 창당대회를 공산당 보다는 민족해방운동단체의 결성이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런 인식 상의 차이는 창당대회에서 해소되었어야 했지만, 대회에서 민주주의적 절차는 생략되었다. 이는 이후 상해파가 다른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치명적인 비판을 받게 되고, 심각한 내분을 야기하는 결정적 갈등요인을 잠복시켰다. 상해파 국내지부의 활동은 사회혁명당을 통해 전개되었고, 이들은 동아일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들은 민족내부의 결집을 통해 실력을 모아내어 日帝를 자신들이 원하는 사회정책적 방책으로 추동해내기 위해 문화운동을 제창하였다. 사회혁명당 세력의 구상은 분배구조를 개선하여 ‘합리적’으로 통제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는 민주주의적인 자유정치의 근대국민국가를 전망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자칫 日帝의 근대적 조치들을 승인·방조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런 非마르크스주의적인 문화주의는 고려공산당 지부로 전환하여 활동하던 사회혁명당 세력에게 치명적인 ‘결함’으로 작용하였다. 이 때문에 고려공산당이라는 비합법적인 영역을 자신들의 본질로 내재하던 사회혁명당 세력은, 공산당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당하는 순간 타협적인 ‘부르주아 우파’의 문화운동론과 차별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적 경향과 달리 사회혁명당 내부에서는 학습을 통해 점차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는 인물들이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김명식과 유진희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의 사상적 궤적은 1910년대 (신)자유주의의 범주에서 벗어나 1920년대 마르크스주의로 전화되는 신지식층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이들은 윤리적 이상주의·신자유주의와 역사학파 경제학 등에 대한 이해를 넘어 아나키즘과 역사적 유물론을 비롯해 카우츠키의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일정하게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마르크스주의는 ‘해방과 자유’의 담론으로 상징되는 이상적인 新思想이었다. 그래서 김명식은 러시아혁명이 인류의 해방과 인간의 자유를 위한 신사상을 실현하는 새로운 역사를 창도하리라 전망했다. 유진희도 자본주의체제의 계급모순은 도시와 농촌, 제국주의와 식민지를 불문하고 공산사회를 지향하는 세계적으로 동일한 방향으로 해결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들은 공산주의 전망으로 러시아를 주목했다. 한국 사회혁명의 복선이 농촌에 있다고 확신했기에 러시아 농촌문제의 始末에서 그 현실적 답안을 찾으려고 하였다. 러시아의 공산주의국가 건설을 모범으로 한국의 식민지적 상황을 극복하고 근대국민국가를 건설하려했던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산주의적 대안으로 한국혁명의 필연성을 세계사적 차원에서 확보할 수 있었다. 더욱이 공산주의는 이들에게 자본주의 근대문명의 추구가 日帝를 포함해 제국주의화한 ‘서구적 기획’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역설적 상황을 모면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식민지의 중첩된 모순을 자칫 단순화시킬 우려를 동시에 함유하고 있었다. 이처럼 사회혁명당 세력은 상해파 국내지부로 전환되어 공산당 지부로서 활동하였으나, 내부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로 사상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사회혁명당 세력은 민족해방을 위해 (신)자유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가 공산당이라는 한 조직에 동승하고 있던 형세였다. 곧, 개량적인 중도우파에서 공산주의 좌파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이념적 지평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점에서 사회혁명당 세력은 고려공산당 국내지부라는 조직위상과 그 부원들의 의식이 전면적으로 조응하지 못하고 괴리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국제공산주의운동의 흐름은 黨內의 개량적 경향을 일소하고 공산주의자들만의 정당을 지향하는 추세였다. 이런 흐름을 인식했던 아니던 한국의 공산주의운동도 자체적인 ‘내부 정화’를 시도했다. 국내 ‘신흥’공산주의자들은 ‘김윤식사회장’과 ‘사기공산당 사건’을 통해 사회혁명당 세력의 非마르크스주의적 요소를 공산주의운동 선상에서 배제시키려 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에 부합하는 측면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전혀 민주적이거나 합리적이지 못한 채 윤리적, 도덕적 멍에를 씌우는 극단적인 형태로 전개되었다. 공산주의운동의 자기 영역 확보라는 원칙이 강조되어, 민족해방을 위한 통일전선이라는 활동방침은 부차적인 전술로 밀려났던 것이다. 반면에 상해파 중앙은 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이라는 과업에 압도되어 통일전선을 당의 조직방침으로 혼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들은 식민지라는 조건이 초기 한국공산주의운동을 굴절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사회혁명당 세력은 분열하게 되고, 또 일부는 공산주의운동선상에서 완전히 이탈하게 되었다. 사회혁명당 세력의 등장과 부침의 과정은 한국 민족해방운동이 이론적 실천의 장 속에 편입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민족해방운동이 특정한 이론 하에 전개되면서 두가지 과업이 공존하게 되었다. 민족의 자주성 회복과 함께 식민지의 근대성을 극복하려는 이론적 목표의 달성이었다. 그런데 이론적 실천의 방법이 민족내부를 계급적으로 구분하면서 출발하기 때문에 민족을 전체상으로 상징화하는 민족자주의 이데올로기와 상충되었다. 이런 모습은 좌우를 막론하고 동일하게 나타났다. 좌파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이익에 복무했다면, 우파는 부르주아계급의 이익에 충실한 자본주의 근대국가체제를 전망하였다. 이런 모순은 민족해방운동이 자주성 회복과 아울러 식민지의 근대성을 지양한 특정 근대국가체제를 전망하는 것이었기에 불가피한 과정이었다. 오히려 이 이중과업은 각각의 가치와 영역을 가지면서도 분리될 수 없는 상호 규정하는 과제로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상충하는 두 원칙을 식민지 현실 속에서 적절하게 중첩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이는 민족자주와 이론적 실천 양자의 가치를 상호승인하는 것을 전제로 식민지라는 구조를 타파할 전술을 각각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구사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좌우파 모두 각자 이론적 실천의 기반을 마련한 위에 민족자주의 현실적 목표에 따라 타협과 경쟁, 때로는 일탈행위에 대한 견제와 견인의 상승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민족자주의 목표로 이론적 실천의 향방을 재단할 수도, 이데올로기적 전망이 민족의 해방을 등한시 할 수도 없었다. 공간적으로는 합법과 비합법 영역을 交互하며, 계급간 결정구도를 초월할 가능성과 소통구조를 확보해야 한다. 이로써 제국주의의 이해와 요구에 저항하고 식민지 민족의 그것으로 왜곡시키며, 민족해방의 이중적 과업을 달성해 나가야 한다. 사회혁명당 세력은 고려공산당 국내지부가 되면서 이 이론적 실천의 장 속에 본격적으로 편입되었다. 좌우를 아우르는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 사회혁명당은 민족해방을 위한 단체로서는 적절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특정한 근대국가체제를 지향하는 이론적 실천의 공간으로서는 부적절했다. 이 때문에 사회혁명당 세력은 사상투쟁에 휘말리고 헤게모니를 상실한 채 분열하였다. 자기의 고유한 영역을 구축해 가고 이 과정에서 배제와 분열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배제되고 분열된 다른 쌍은 민족해방을 위한 또다른 세력으로서 자신들의 영역을 재구축해야 한다. 이를 통해 각각의 영역은 식민지 구조 속에서 대안세력으로 길항관계를 이룰 수 있다. 이로써 민족해방운동의 영역은 확대되고 저항의 지점을 다각도로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사회혁명당 세력을 배제한 국내 공산주의 세력들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멍에를 덧씌움으로써 배제된 영역이 재구축될 여지를 협소하게 만들었다. 확고한 원칙과 유연한 방법론의 구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사회혁명당 세력 또한 자체적으로 내부의 이념적 차이를 극복할 적절한 해결책을 모색하지 못한 채 민족단결의 원칙적 강조에 매몰되어 자신들의 정체성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이러한 모습은 민족해방운동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 반면에 운동 노선의 혼탁함과 일관된 방향성의 부재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고려공산당 국내지부로서 사회혁명당 세력이 지향하는 근대국가의 이론적 전망과 운동노선의 타당성을 실천적으로 검증하는 과정이 요구되었고, 이론과 노선이 불일치했던 사회혁명당 세력은 배척당하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사회혁명당 세력의 부침은 한국 민족해방운동이 이론적 실천의 영역에 구조화되는 과정의 일면이었으며, 이후 치열하게 전개될 사상운동의 양상을 예시해주는 실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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