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 문 초 록
서울 메가스트럭처, 세운상가의 도시단면연구
2차 세계대전 후 세계적으로 도시 재건을 위한 큰 스케일의 그림을 필요로 했고, 1960년대 한국에도 ’크기‘에 대한 도시적 고민을 공유할만한 사건이 벌어진다. 이는 1966년 서울의 도심한복판에 폭50미터, 길이 1km의 ’소개공지(疏槪空地)‘와 개발독재 ’박정희‘, 서울시장 ’김현옥‘ 그리고 건축가 ’김수근‘의 만남이었다. 산업적 기반이 미비한 상황에서 가시적으로 산업적 근대화를 강조한 ’박정희‘와 입체도로계획을 이유로 서울을 개발의 밭으로 만들었던 ’김현옥‘,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를 통해 국가적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김수근‘은 조밀 조밀한 단층건물 속에 거대한 볼륨, 거대한 사건, 거대한 욕망을 집어넣었다.
이 논문은 크게는 각 ‘도시 속 1960년대 메가스트럭처’와의 비교와 작게는 ‘박정희, 김현옥, 김수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서울 메가스트럭처, 세운상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크기’에 대한 네 가지의 도시적 고민틀(기존도시조직과의 관계, 크기와 스케일, 구조, 프로그램과 순환체계)을 기준으로 두 연구는 연결되며, 그 틀 안에서 종로에서 퇴계로 구간, 세운상가의 다양한 단면을 만드는 것이 이 논문의 시나리오이다.
1967년 서울 세운상가는 소개공지라는 군사적 의도로 ...
국 문 초 록
서울 메가스트럭처, 세운상가의 도시단면연구
2차 세계대전 후 세계적으로 도시 재건을 위한 큰 스케일의 그림을 필요로 했고, 1960년대 한국에도 ’크기‘에 대한 도시적 고민을 공유할만한 사건이 벌어진다. 이는 1966년 서울의 도심한복판에 폭50미터, 길이 1km의 ’소개공지(疏槪空地)‘와 개발독재 ’박정희‘, 서울시장 ’김현옥‘ 그리고 건축가 ’김수근‘의 만남이었다. 산업적 기반이 미비한 상황에서 가시적으로 산업적 근대화를 강조한 ’박정희‘와 입체도로계획을 이유로 서울을 개발의 밭으로 만들었던 ’김현옥‘,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를 통해 국가적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김수근‘은 조밀 조밀한 단층건물 속에 거대한 볼륨, 거대한 사건, 거대한 욕망을 집어넣었다.
이 논문은 크게는 각 ‘도시 속 1960년대 메가스트럭처’와의 비교와 작게는 ‘박정희, 김현옥, 김수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서울 메가스트럭처, 세운상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크기’에 대한 네 가지의 도시적 고민틀(기존도시조직과의 관계, 크기와 스케일, 구조, 프로그램과 순환체계)을 기준으로 두 연구는 연결되며, 그 틀 안에서 종로에서 퇴계로 구간, 세운상가의 다양한 단면을 만드는 것이 이 논문의 시나리오이다.
1967년 서울 세운상가는 소개공지라는 군사적 의도로 컨텍스트가 지워진 장소에 지어지는데, 건축가는 이곳을 ‘오염지구’라 불렀고 행정가는 ‘음지’라 지칭했으며 정치가는 ‘사회정화’가 필요한 곳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곳에 실제 지어진 상가아파트는 무허가촌과 대비되는 ‘양지’로써 도시정화작업이란 이름으로 지어지게 된다. 이는 상당히 건축가와 행정가, 정치가의 계몽적인 제스처를 담고 있는 것이다. 건축을 통해 시민에게 국가적인 규모의 선전을 시도한 증거는 항공사진에서도 보여진다.
메가스트럭처와 그 주변 조직의 ‘상대적 크기’를 통해 베를린, 런던, 글러스고우, 프랑스, 몬트리올, 일본 등의 도시에서 실제 지어진 선례와 서울의 세운상가를 비교해보면, 약1000미터로 가장 길고, 넓은 면적을 가진다. 건물의 규모가 어느 정도 자본이 축적되었나를 보여주는 척도라면 세운상가는 다른 도시에 비해 작은 조밀조밀한 도시조직, 작은 자본들로 만들어진 도시이지만 이 가운데 세운상가는 상대적으로 더 큰 자본, 권력, 힘을 표현한다. 1967년 당시 고가도로와 함께 지어졌을 당시를 상상해 본다면 세운상가는 서울 도심에 강력한 랜드마크적 건축이며, 박정희의 ‘조국근대화’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고가도로와 짝을 이루는 정치적 볼륨으로 내부보다는 외부에서 보여지는 시선을 의도한 건축물이다.
1960년대 메가스트럭처 건축가들은 건축의 ‘구조’적 측면에서도 급속도로 진행되는 도시화에 대응하는 과감한 시도를 하였는데, 이는 프로그램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건축 단면상에서 수명이 짧은 단위 구조체(프리캐스트 구조)와 그 구조체의 변화를 수용하는 수명이 긴 고정구조체계(콘크리트, 철골구조)가 보여진다. 세운상가에도 인공대지라는 개념적인 흔적이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현실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3층 보행데크의 조립식 콘크리트구조 사용, 여유로운 공용 공간, 외벽의 캔틸레버 구조의 특성은 프로그램의 다양한 변화와 순환체계구조의 변경, 사용자의 자유로운 공간사용을 가능하게 했다.
건축가는 이 시기에 프로그램의 통제를 위해 구조뿐 아니라 순환체계에 대한 고민도 하게 된다. 왜 순환체계를 주목한 것일까? 도시공간의 역할로 존재하던 고전적인 레파토리, 공공영역(가로, 광장)이 더 이상 건물의 외부공간에서 해결할 수 없게 건물과 도로가 거대해졌기 때문이다. 수직적인 변화를 가져온 엘리베이터와 수평적인 변화를 만든 자동차의 발명으로 1960년 건축가들은 사회적 공간에 대한 다른 해결책이 필요했다. 세운상가는 도시의 주거기능보다는 상업기능의 연계를 위한 대지로 개발되면서 유니떼다비다시옹이나 골드레인 프로젝트의 개념은 변형된다. 공중가로는 주거가 아닌 상가의 보행몰로 적용되었고, 주거와 공공 프로그램을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별도의 주거 유닛을 연결하는 ‘순환체계’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했다. 집을 나오면 7.3미터의 폭을 가진 기다란 홀과 내부중정을 마주하게 되며 각 주거 동 사이에는 어린이 놀이터 같은 외부 공간이 배치된다.
서울 메가스트럭처가 탄생한 1960년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후 산업적 기반이 미비한 상황에서 도시화와 근대화가 이루어졌던 시기이다. 가장 시급한 도시문제가 전후 복구사업을 통한 교통과 주거문제였는데, 청계천을 50미터의 광로로 복개하고 고가도로 주변에 소개공지에 점유된 판자촌들을 ‘도시정화’의 이름으로 ‘상가아파트’로 재개발하는 사업을 수행한다. 개발방식 역시 지주조합을 만들어 스스로 건설하고 도로는 서울시에 기부 체납하고 점용료를 부과하는 방식 등을 취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산업근대화는 개발을 넘어 자연과 민중에 대한 착취로까지 이어지는 메커니즘 양향을 띈다. 세운상가는 도시의 밀도문제의 결과물이기보다는 정치적 볼륨이었으며, 도시상업기능의 선형적인 연계를 실현하고자한 자본적 볼륨이다. 또한 시민들에게 문화적 볼륨의 역할을 수행했었다. 이렇듯 1967년 세운상가는 모더니즘,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근대 건축물로 생명을 부여받았다. 시작과 마찬가지로 결말 역시 정치적인 시선 속에 사라져 가고 있다. 동양최대의 전자상가, 최호화 맨션에서 해적판 만화, 도청장치, 야동, 미대생의 졸업 작품 대리제작실까지 은밀한 목적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다. 역사 속에서 보듯 항상 새것/낡은 것, 양호/불량, 정상/비정상 이라는 이분법적이고 정치적인 시선 속에 존재해 온 서울 메가스트럭처 세운상가는 한국적 근대성의 역사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조국 근대성의 아이콘에서 지워져야할 불량건축으로 떨어지는 기이한 역사를 가진 건축물인 세운상가를 기록해본다.
주제어: 1960년대, 메가스트럭처, 세운상가, 크기, 박정희, 김현옥, 김수근
국 문 초 록
서울 메가스트럭처, 세운상가의 도시단면연구
2차 세계대전 후 세계적으로 도시 재건을 위한 큰 스케일의 그림을 필요로 했고, 1960년대 한국에도 ’크기‘에 대한 도시적 고민을 공유할만한 사건이 벌어진다. 이는 1966년 서울의 도심한복판에 폭50미터, 길이 1km의 ’소개공지(疏槪空地)‘와 개발독재 ’박정희‘, 서울시장 ’김현옥‘ 그리고 건축가 ’김수근‘의 만남이었다. 산업적 기반이 미비한 상황에서 가시적으로 산업적 근대화를 강조한 ’박정희‘와 입체도로계획을 이유로 서울을 개발의 밭으로 만들었던 ’김현옥‘,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를 통해 국가적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김수근‘은 조밀 조밀한 단층건물 속에 거대한 볼륨, 거대한 사건, 거대한 욕망을 집어넣었다.
이 논문은 크게는 각 ‘도시 속 1960년대 메가스트럭처’와의 비교와 작게는 ‘박정희, 김현옥, 김수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서울 메가스트럭처, 세운상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크기’에 대한 네 가지의 도시적 고민틀(기존도시조직과의 관계, 크기와 스케일, 구조, 프로그램과 순환체계)을 기준으로 두 연구는 연결되며, 그 틀 안에서 종로에서 퇴계로 구간, 세운상가의 다양한 단면을 만드는 것이 이 논문의 시나리오이다.
1967년 서울 세운상가는 소개공지라는 군사적 의도로 컨텍스트가 지워진 장소에 지어지는데, 건축가는 이곳을 ‘오염지구’라 불렀고 행정가는 ‘음지’라 지칭했으며 정치가는 ‘사회정화’가 필요한 곳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곳에 실제 지어진 상가아파트는 무허가촌과 대비되는 ‘양지’로써 도시정화작업이란 이름으로 지어지게 된다. 이는 상당히 건축가와 행정가, 정치가의 계몽적인 제스처를 담고 있는 것이다. 건축을 통해 시민에게 국가적인 규모의 선전을 시도한 증거는 항공사진에서도 보여진다.
메가스트럭처와 그 주변 조직의 ‘상대적 크기’를 통해 베를린, 런던, 글러스고우, 프랑스, 몬트리올, 일본 등의 도시에서 실제 지어진 선례와 서울의 세운상가를 비교해보면, 약1000미터로 가장 길고, 넓은 면적을 가진다. 건물의 규모가 어느 정도 자본이 축적되었나를 보여주는 척도라면 세운상가는 다른 도시에 비해 작은 조밀조밀한 도시조직, 작은 자본들로 만들어진 도시이지만 이 가운데 세운상가는 상대적으로 더 큰 자본, 권력, 힘을 표현한다. 1967년 당시 고가도로와 함께 지어졌을 당시를 상상해 본다면 세운상가는 서울 도심에 강력한 랜드마크적 건축이며, 박정희의 ‘조국근대화’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고가도로와 짝을 이루는 정치적 볼륨으로 내부보다는 외부에서 보여지는 시선을 의도한 건축물이다.
1960년대 메가스트럭처 건축가들은 건축의 ‘구조’적 측면에서도 급속도로 진행되는 도시화에 대응하는 과감한 시도를 하였는데, 이는 프로그램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건축 단면상에서 수명이 짧은 단위 구조체(프리캐스트 구조)와 그 구조체의 변화를 수용하는 수명이 긴 고정구조체계(콘크리트, 철골구조)가 보여진다. 세운상가에도 인공대지라는 개념적인 흔적이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현실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3층 보행데크의 조립식 콘크리트구조 사용, 여유로운 공용 공간, 외벽의 캔틸레버 구조의 특성은 프로그램의 다양한 변화와 순환체계구조의 변경, 사용자의 자유로운 공간사용을 가능하게 했다.
건축가는 이 시기에 프로그램의 통제를 위해 구조뿐 아니라 순환체계에 대한 고민도 하게 된다. 왜 순환체계를 주목한 것일까? 도시공간의 역할로 존재하던 고전적인 레파토리, 공공영역(가로, 광장)이 더 이상 건물의 외부공간에서 해결할 수 없게 건물과 도로가 거대해졌기 때문이다. 수직적인 변화를 가져온 엘리베이터와 수평적인 변화를 만든 자동차의 발명으로 1960년 건축가들은 사회적 공간에 대한 다른 해결책이 필요했다. 세운상가는 도시의 주거기능보다는 상업기능의 연계를 위한 대지로 개발되면서 유니떼다비다시옹이나 골드레인 프로젝트의 개념은 변형된다. 공중가로는 주거가 아닌 상가의 보행몰로 적용되었고, 주거와 공공 프로그램을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별도의 주거 유닛을 연결하는 ‘순환체계’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했다. 집을 나오면 7.3미터의 폭을 가진 기다란 홀과 내부중정을 마주하게 되며 각 주거 동 사이에는 어린이 놀이터 같은 외부 공간이 배치된다.
서울 메가스트럭처가 탄생한 1960년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후 산업적 기반이 미비한 상황에서 도시화와 근대화가 이루어졌던 시기이다. 가장 시급한 도시문제가 전후 복구사업을 통한 교통과 주거문제였는데, 청계천을 50미터의 광로로 복개하고 고가도로 주변에 소개공지에 점유된 판자촌들을 ‘도시정화’의 이름으로 ‘상가아파트’로 재개발하는 사업을 수행한다. 개발방식 역시 지주조합을 만들어 스스로 건설하고 도로는 서울시에 기부 체납하고 점용료를 부과하는 방식 등을 취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산업근대화는 개발을 넘어 자연과 민중에 대한 착취로까지 이어지는 메커니즘 양향을 띈다. 세운상가는 도시의 밀도문제의 결과물이기보다는 정치적 볼륨이었으며, 도시상업기능의 선형적인 연계를 실현하고자한 자본적 볼륨이다. 또한 시민들에게 문화적 볼륨의 역할을 수행했었다. 이렇듯 1967년 세운상가는 모더니즘,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근대 건축물로 생명을 부여받았다. 시작과 마찬가지로 결말 역시 정치적인 시선 속에 사라져 가고 있다. 동양최대의 전자상가, 최호화 맨션에서 해적판 만화, 도청장치, 야동, 미대생의 졸업 작품 대리제작실까지 은밀한 목적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다. 역사 속에서 보듯 항상 새것/낡은 것, 양호/불량, 정상/비정상 이라는 이분법적이고 정치적인 시선 속에 존재해 온 서울 메가스트럭처 세운상가는 한국적 근대성의 역사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조국 근대성의 아이콘에서 지워져야할 불량건축으로 떨어지는 기이한 역사를 가진 건축물인 세운상가를 기록해본다.
주제어: 1960년대, 메가스트럭처, 세운상가, 크기, 박정희, 김현옥, 김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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