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선조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극단적인 부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이러한 사실들은 후대에 덧씌워진 측면도 존재한다는 문제의식하에, 선조시대를 일방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이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실과 올바른 역사인식을 판단하고자 거기에 대한 덧씌워진 악평을 걷어내야 한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하였다.
조선시대 여려 왕들 중에서도 선조에 대한 평가는 일방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이 다수를 차지하는 실정이고, 선조의 재위기간 동안 치적을 살필 때 부정적인 면을 부인 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선조가 역사적으로 저평가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주로 ...
본 논문은 선조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극단적인 부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이러한 사실들은 후대에 덧씌워진 측면도 존재한다는 문제의식하에, 선조시대를 일방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이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실과 올바른 역사인식을 판단하고자 거기에 대한 덧씌워진 악평을 걷어내야 한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하였다.
조선시대 여려 왕들 중에서도 선조에 대한 평가는 일방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이 다수를 차지하는 실정이고, 선조의 재위기간 동안 치적을 살필 때 부정적인 면을 부인 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선조가 역사적으로 저평가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주로 임진왜란 전후의 소극적인 대처와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적 병폐로 일컬어지는 ‘붕당정치’가 선조 때 발생되었던 점을 들어, 이 시기를 정쟁(政爭)이 시작된 혼란한 시기로 이해하기 때문이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점이 선조가 훌륭하지 못한 국왕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그렇게 때문에 비판받아 마땅한지에 대해서는 좀 더 고려를 해 보아야 한다. 임진왜란 전까지 선조의 왕권은 상당히 견고했으며 조정에서 주축이 되는 대신들을 다양한 인사등용을 통하여 왕권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한편, 붕당이라는 정치체제를 통해 적절한 견제로 활용하여 급격한 정치적 혼란을 겪지 않도록 하였다. 만약 임진왜란이 발생하지 않았었다면 선조의 왕권은 안정적인 상태로 지속되었을 것이다.
한편 선조 대에 많은 인물들이 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뛰어난 인재들이 선조 때 다수 나타났다는 사실을 그저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 치부할 것이 아니라 선조의 정치적 개혁과 그의 남다른 인재관으로 인해 나타났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조에게서는 과거(科擧) 성적에만 의존하지 않고 학행(學行)이 뛰어난 사람을 중용하려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선조의 인재등용 정책은 일회성적인 전교(傳敎)로 끝나지 않고 일관되게 지속되었고 사림집권기 인재등용에 대한 문제 또한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는지 알 수 있다.
여기에 천거제의 활성화는 많은 인재등용의 한 축인 것은 분명하다. 천거제는 사림세력이 훈구파에 의해 장악된 권력 집중을 타개하고 신진 사림의 관계 진출을 용이하기 위한 조치였으며, 집권이후에도 정당성 확보라는 명분으로 확대되었지만, 기존의 과거제도와 문음제도와 달리 전국에 방방곡곡 퍼져있는 인재들을 폭넓고 다양한 분야에서 등용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서얼층의 허통(許通)과 공천·사천의 양민화도 영향을 주었다. 서얼에게의 과거 응시 허용과 공천·사천의 양민화 개혁은 조선의 신분질서체제의 근간을 변화시키는 파격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서얼과 공천·사천에게 등용의 기회가 확대된 것이었다. 또한 니탕개의 난이 진압되어진 후에도 이러한 정책은 임진왜란 때 확대되어져 계속해서 나타나게 된다. 그 결과 서얼 허통이 다시 금지되기까지 일정기간 이들은 등용될 수 있었으며 후 대에 서얼 허통의 사례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인재를 선발하는 여러 제도와 다양한 신분에서 등용은 다방면에서 수많은 인재들을 등용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결정들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결국 국왕에 의해서이다. 많은 인재들이 선발되더라도 왕이 이를 거부한다면 어떠한 의미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선조 대에 수많은 인재들의 등장은 그의 인재관에 대한 영향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본 논문은 선조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극단적인 부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이러한 사실들은 후대에 덧씌워진 측면도 존재한다는 문제의식하에, 선조시대를 일방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이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실과 올바른 역사인식을 판단하고자 거기에 대한 덧씌워진 악평을 걷어내야 한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하였다.
조선시대 여려 왕들 중에서도 선조에 대한 평가는 일방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이 다수를 차지하는 실정이고, 선조의 재위기간 동안 치적을 살필 때 부정적인 면을 부인 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선조가 역사적으로 저평가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주로 임진왜란 전후의 소극적인 대처와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적 병폐로 일컬어지는 ‘붕당정치’가 선조 때 발생되었던 점을 들어, 이 시기를 정쟁(政爭)이 시작된 혼란한 시기로 이해하기 때문이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점이 선조가 훌륭하지 못한 국왕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그렇게 때문에 비판받아 마땅한지에 대해서는 좀 더 고려를 해 보아야 한다. 임진왜란 전까지 선조의 왕권은 상당히 견고했으며 조정에서 주축이 되는 대신들을 다양한 인사등용을 통하여 왕권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한편, 붕당이라는 정치체제를 통해 적절한 견제로 활용하여 급격한 정치적 혼란을 겪지 않도록 하였다. 만약 임진왜란이 발생하지 않았었다면 선조의 왕권은 안정적인 상태로 지속되었을 것이다.
한편 선조 대에 많은 인물들이 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뛰어난 인재들이 선조 때 다수 나타났다는 사실을 그저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 치부할 것이 아니라 선조의 정치적 개혁과 그의 남다른 인재관으로 인해 나타났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조에게서는 과거(科擧) 성적에만 의존하지 않고 학행(學行)이 뛰어난 사람을 중용하려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선조의 인재등용 정책은 일회성적인 전교(傳敎)로 끝나지 않고 일관되게 지속되었고 사림집권기 인재등용에 대한 문제 또한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는지 알 수 있다.
여기에 천거제의 활성화는 많은 인재등용의 한 축인 것은 분명하다. 천거제는 사림세력이 훈구파에 의해 장악된 권력 집중을 타개하고 신진 사림의 관계 진출을 용이하기 위한 조치였으며, 집권이후에도 정당성 확보라는 명분으로 확대되었지만, 기존의 과거제도와 문음제도와 달리 전국에 방방곡곡 퍼져있는 인재들을 폭넓고 다양한 분야에서 등용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서얼층의 허통(許通)과 공천·사천의 양민화도 영향을 주었다. 서얼에게의 과거 응시 허용과 공천·사천의 양민화 개혁은 조선의 신분질서체제의 근간을 변화시키는 파격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서얼과 공천·사천에게 등용의 기회가 확대된 것이었다. 또한 니탕개의 난이 진압되어진 후에도 이러한 정책은 임진왜란 때 확대되어져 계속해서 나타나게 된다. 그 결과 서얼 허통이 다시 금지되기까지 일정기간 이들은 등용될 수 있었으며 후 대에 서얼 허통의 사례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인재를 선발하는 여러 제도와 다양한 신분에서 등용은 다방면에서 수많은 인재들을 등용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결정들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결국 국왕에 의해서이다. 많은 인재들이 선발되더라도 왕이 이를 거부한다면 어떠한 의미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선조 대에 수많은 인재들의 등장은 그의 인재관에 대한 영향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This study, under a critical mind that there are noticeably extreme parts in the existing perception of Seonjo, and these facts were overlaid in later generations, would reveal the fact that harsh criticism overlaid on that should be removed, in order to judge historical facts and correct perception...
This study, under a critical mind that there are noticeably extreme parts in the existing perception of Seonjo, and these facts were overlaid in later generations, would reveal the fact that harsh criticism overlaid on that should be removed, in order to judge historical facts and correct perception of history, breaking away from the situation in which negative aspects of the time of Seonjo form a large majority.
Of many kings during the Joseon dynasty, one-sided and negative evaluations form a large majority of the evaluations of Seonjo, and it is in fact also undeniable that there are negative aspects when achievements during the period of Seonjo’s reign are considered. There are several reasons why Seonjo was underestimated historically, and of them, mostly, with the grounds, including his passive actions around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nd the fact that ‘faction politics’ called political, social evil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began during his time, this period was understood as a chaotic period when political strife began.
However, it is necessary to further consider if this proves that Seonjo was not a great king and accordingly, he deserved criticism. Seonjo’s royal authority had been considerably strong till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He checked so that ministers pivotal in the court could not exceed the royal authority through the appointment of a variety of personnel while he prevented rapid political confusion, utilizing appropriate check through the political system of faction. If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did not occur, Seonjo’s royal authority would have been maintained stable.
In the meantime, it is noted that many figures appeared in the reign of Seonjo. It should be considered the fact that a number of excellent, talented persons appeared in the time of Seonjo because of his political reform and unique view of talented persons instead of just a coincidence. It is noted that Seonjo would appoint persons with excellent learning and virtue, not just depending on the records of Gwageo (The highest-level state examination to recruit ranking officials). In addition, it is noted that Seonjo’s policy for the appointment of talented persons did not end with a one-time royal edict, but consistently continued, and it is also found, how important the way in which he dealt with the issue of the appointment of talented persons during the period in which Confucian scholars seized power
In addition, it is clear that the vitalization of recommendation system was one axis of the appointment of a lot of talented persons. The recommendation system was an action of the group of Confucian scholars to resolve the concentration of power seized by Hungu-pa and ease the rising Confucian scholars’ entry into officialdom, and it expanded to a cause of securing justification even after the time when they seized power, but unlike the existing Gwageo system and Muneum system, talented persons spread in every corner of the country were appointed in wide and diverse fields. The permission of the appointment of the sons of concubines and official and private nomination of civilians, too, affected this. The permission of the sons of concubines to take Gwageo toand the reform for the civilianization of official and private nomination might be unprecedented, which would change the foundation of the system of the order of social status in Joseon. These changes expanded the opportunities of appointment for the sons of concubines and persons officially and privately nominated. In addition, even after the suppression of Nitanggae’s Rebellion, this policy continues to appear, expand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Consequently, they could be appointed for a certain period till the permission of the appointment of the sons of concubines was prohibited again, which provided a case of the permission of the appointment of the sons of concubines for the future generations.
Various systems of selecting talented persons and appointment from various ranks could recruit a number of talented persons in many fields. However, these decisions are finally confirmed by the king. Even if a lot of talented persons were selected, it would be meaningless if the king refused them. Therefore, there could not but be an impact of his view of talented persons on the appearance of numerous talented persons during the reign of Seonjo.
This study, under a critical mind that there are noticeably extreme parts in the existing perception of Seonjo, and these facts were overlaid in later generations, would reveal the fact that harsh criticism overlaid on that should be removed, in order to judge historical facts and correct perception of history, breaking away from the situation in which negative aspects of the time of Seonjo form a large majority.
Of many kings during the Joseon dynasty, one-sided and negative evaluations form a large majority of the evaluations of Seonjo, and it is in fact also undeniable that there are negative aspects when achievements during the period of Seonjo’s reign are considered. There are several reasons why Seonjo was underestimated historically, and of them, mostly, with the grounds, including his passive actions around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nd the fact that ‘faction politics’ called political, social evil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began during his time, this period was understood as a chaotic period when political strife began.
However, it is necessary to further consider if this proves that Seonjo was not a great king and accordingly, he deserved criticism. Seonjo’s royal authority had been considerably strong till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He checked so that ministers pivotal in the court could not exceed the royal authority through the appointment of a variety of personnel while he prevented rapid political confusion, utilizing appropriate check through the political system of faction. If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did not occur, Seonjo’s royal authority would have been maintained stable.
In the meantime, it is noted that many figures appeared in the reign of Seonjo. It should be considered the fact that a number of excellent, talented persons appeared in the time of Seonjo because of his political reform and unique view of talented persons instead of just a coincidence. It is noted that Seonjo would appoint persons with excellent learning and virtue, not just depending on the records of Gwageo (The highest-level state examination to recruit ranking officials). In addition, it is noted that Seonjo’s policy for the appointment of talented persons did not end with a one-time royal edict, but consistently continued, and it is also found, how important the way in which he dealt with the issue of the appointment of talented persons during the period in which Confucian scholars seized power
In addition, it is clear that the vitalization of recommendation system was one axis of the appointment of a lot of talented persons. The recommendation system was an action of the group of Confucian scholars to resolve the concentration of power seized by Hungu-pa and ease the rising Confucian scholars’ entry into officialdom, and it expanded to a cause of securing justification even after the time when they seized power, but unlike the existing Gwageo system and Muneum system, talented persons spread in every corner of the country were appointed in wide and diverse fields. The permission of the appointment of the sons of concubines and official and private nomination of civilians, too, affected this. The permission of the sons of concubines to take Gwageo toand the reform for the civilianization of official and private nomination might be unprecedented, which would change the foundation of the system of the order of social status in Joseon. These changes expanded the opportunities of appointment for the sons of concubines and persons officially and privately nominated. In addition, even after the suppression of Nitanggae’s Rebellion, this policy continues to appear, expand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Consequently, they could be appointed for a certain period till the permission of the appointment of the sons of concubines was prohibited again, which provided a case of the permission of the appointment of the sons of concubines for the future generations.
Various systems of selecting talented persons and appointment from various ranks could recruit a number of talented persons in many fields. However, these decisions are finally confirmed by the king. Even if a lot of talented persons were selected, it would be meaningless if the king refused them. Therefore, there could not but be an impact of his view of talented persons on the appearance of numerous talented persons during the reign of Seon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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