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의 목적은 남한산성행궁을 중심으로 행궁의 역사와 풍수지리적 연구를 통해 조선 시대 행궁의 역사 문화적 가치를 고찰하는 데 있다. 남한산성행궁은 유사시 왕의 보장지로 건축되었지만, 평시에는 유수가 그 지방을 관리하였던 다목적 행궁이다. 최근까지 인근 도시민의 휴식처나 식당가로 인식되었지만, 남한산성은 백제, 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국가의 전략적 요충지였고 적의 침입 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천혜의 요새였다. 특히 산성 내에는 행궁과 함께 조상의 신주를 모실 수 있도록 좌전과 우실을 갖추고 있어 왕이 머물 때 조상도 함께 모시어 국가 정사를 계속할 수 있는 보장지 역할을 하였고 평상시에는 정2품 유수가 지역을 관리할 정도로 국가 통치 차원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남한산성행궁은 인조 때 청나라와 긴장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은 후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이후로도 숙종, 영조, 정조 등 여러 왕대에 걸쳐 증⦁개축을 하며 관리되어왔지만 일제 강점기에 광주부 읍치를 경안으로 이전하면서 행궁과 관아건물은 그 용도를 잃게 되었고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다. 현재의 행궁 건물은 1990년대 들어 국가유적지로서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행궁터의 정비와 행궁의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고 2011년까지 내행전, 외행전, 좌전, 한남루 등 주요건물을 복원하였다. 이런 노력으로 2014년 6월 우리나라에서 11번째로 ...
본 논문의 목적은 남한산성행궁을 중심으로 행궁의 역사와 풍수지리적 연구를 통해 조선 시대 행궁의 역사 문화적 가치를 고찰하는 데 있다. 남한산성행궁은 유사시 왕의 보장지로 건축되었지만, 평시에는 유수가 그 지방을 관리하였던 다목적 행궁이다. 최근까지 인근 도시민의 휴식처나 식당가로 인식되었지만, 남한산성은 백제, 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국가의 전략적 요충지였고 적의 침입 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천혜의 요새였다. 특히 산성 내에는 행궁과 함께 조상의 신주를 모실 수 있도록 좌전과 우실을 갖추고 있어 왕이 머물 때 조상도 함께 모시어 국가 정사를 계속할 수 있는 보장지 역할을 하였고 평상시에는 정2품 유수가 지역을 관리할 정도로 국가 통치 차원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남한산성행궁은 인조 때 청나라와 긴장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은 후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이후로도 숙종, 영조, 정조 등 여러 왕대에 걸쳐 증⦁개축을 하며 관리되어왔지만 일제 강점기에 광주부 읍치를 경안으로 이전하면서 행궁과 관아건물은 그 용도를 잃게 되었고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다. 현재의 행궁 건물은 1990년대 들어 국가유적지로서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행궁터의 정비와 행궁의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고 2011년까지 내행전, 외행전, 좌전, 한남루 등 주요건물을 복원하였다. 이런 노력으로 2014년 6월 우리나라에서 11번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정약용은『민보의(民堡議)』에서 산성을 축성하는데 제일 좋은 입지조건으로 사면이 높은 봉우리이고 가운데 오목하니 파여 있는 고로봉 형이 최고라 하였는데 남한산성이 이와 같다 하였다. 이렇게 나성(羅城)형으로 둘러싼 보국 안의 남한산성행궁은 검단지맥의 근간을 이루는 청량산의 주봉에서 내려오는 주맥 선상에 위치하여 청량산의 강한 기운을 받고 있다. 『금낭경(錦囊經)』에 “기는 바람을 타면 흩어진다.”라고 하는데 고로봉 형의 보국 안에 있는 남한산성행궁은 현무, 청룡, 백호, 주작이 기가 흩어지지 않도록 훌륭한 역할을 하는 용진혈적(龍眞穴的)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행궁 내 건물 중 신좌을향으로 자리한 외행전의 자리를 살펴보면 음래양수(陰來陽收)의 기울기 변화와 신입수한 용맥 중 가장 넓은 터와 외삼문 근처에서 용맥이 끝남을 알리는 전순을 근거로 보아 혈의 결지는 외행전에 자리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 또한 분지 내 여러 곳에서 나와 한 곳으로 모여 나가는 다득일파(多得一破) 형국에 서출동류로 빠져나가 길하다 할 수 있다. 또한, 가상의 3요소인 배산임수와 전저후고, 전착후관 측면에서 보아도 모두 원칙에 부합한다. 음양오행의 조화를 중시하는 이기론적으로 검토하면 팔십팔향법은 정묘향(正墓向)으로 길격이고 사국수법은 왕궁(旺宮)에서 득수하고 절궁(絶宮)으로 파구하는 길격이다. 선천산법은 입수룡이 탐랑(貪狼)으로 길격이고 사국용법은 신입수룡이 관대룡(冠帶龍)으로 길격에 해당한다. 남한산성행궁 축조 당시에 직접적인 풍수적 검토기록을 찾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이로 인해 축조 당시 시대적으로 급박한 상황으로 풍수적 검토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번 연구를 통하여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점검해 본 결과 남한산성행궁은 매우 좋은 자리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축조 당시의 풍수적 검토기록의 유무를 떠나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삶의 터전을 정하는 조상들의 지혜를 볼 수 있는 점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삼전도의 치욕으로 기억되던 남한산성이 이제 남한산성행궁의 생기를 받아 품격 있고 사랑받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남기를 기대한다.
주제어: 남한산성, 남한산성행궁, 행궁, 풍수, 풍수지리, 세계문화유산
본 논문의 목적은 남한산성행궁을 중심으로 행궁의 역사와 풍수지리적 연구를 통해 조선 시대 행궁의 역사 문화적 가치를 고찰하는 데 있다. 남한산성행궁은 유사시 왕의 보장지로 건축되었지만, 평시에는 유수가 그 지방을 관리하였던 다목적 행궁이다. 최근까지 인근 도시민의 휴식처나 식당가로 인식되었지만, 남한산성은 백제, 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국가의 전략적 요충지였고 적의 침입 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천혜의 요새였다. 특히 산성 내에는 행궁과 함께 조상의 신주를 모실 수 있도록 좌전과 우실을 갖추고 있어 왕이 머물 때 조상도 함께 모시어 국가 정사를 계속할 수 있는 보장지 역할을 하였고 평상시에는 정2품 유수가 지역을 관리할 정도로 국가 통치 차원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남한산성행궁은 인조 때 청나라와 긴장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은 후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이후로도 숙종, 영조, 정조 등 여러 왕대에 걸쳐 증⦁개축을 하며 관리되어왔지만 일제 강점기에 광주부 읍치를 경안으로 이전하면서 행궁과 관아건물은 그 용도를 잃게 되었고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다. 현재의 행궁 건물은 1990년대 들어 국가유적지로서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행궁터의 정비와 행궁의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고 2011년까지 내행전, 외행전, 좌전, 한남루 등 주요건물을 복원하였다. 이런 노력으로 2014년 6월 우리나라에서 11번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정약용은『민보의(民堡議)』에서 산성을 축성하는데 제일 좋은 입지조건으로 사면이 높은 봉우리이고 가운데 오목하니 파여 있는 고로봉 형이 최고라 하였는데 남한산성이 이와 같다 하였다. 이렇게 나성(羅城)형으로 둘러싼 보국 안의 남한산성행궁은 검단지맥의 근간을 이루는 청량산의 주봉에서 내려오는 주맥 선상에 위치하여 청량산의 강한 기운을 받고 있다. 『금낭경(錦囊經)』에 “기는 바람을 타면 흩어진다.”라고 하는데 고로봉 형의 보국 안에 있는 남한산성행궁은 현무, 청룡, 백호, 주작이 기가 흩어지지 않도록 훌륭한 역할을 하는 용진혈적(龍眞穴的)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행궁 내 건물 중 신좌을향으로 자리한 외행전의 자리를 살펴보면 음래양수(陰來陽收)의 기울기 변화와 신입수한 용맥 중 가장 넓은 터와 외삼문 근처에서 용맥이 끝남을 알리는 전순을 근거로 보아 혈의 결지는 외행전에 자리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 또한 분지 내 여러 곳에서 나와 한 곳으로 모여 나가는 다득일파(多得一破) 형국에 서출동류로 빠져나가 길하다 할 수 있다. 또한, 가상의 3요소인 배산임수와 전저후고, 전착후관 측면에서 보아도 모두 원칙에 부합한다. 음양오행의 조화를 중시하는 이기론적으로 검토하면 팔십팔향법은 정묘향(正墓向)으로 길격이고 사국수법은 왕궁(旺宮)에서 득수하고 절궁(絶宮)으로 파구하는 길격이다. 선천산법은 입수룡이 탐랑(貪狼)으로 길격이고 사국용법은 신입수룡이 관대룡(冠帶龍)으로 길격에 해당한다. 남한산성행궁 축조 당시에 직접적인 풍수적 검토기록을 찾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이로 인해 축조 당시 시대적으로 급박한 상황으로 풍수적 검토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번 연구를 통하여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점검해 본 결과 남한산성행궁은 매우 좋은 자리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축조 당시의 풍수적 검토기록의 유무를 떠나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삶의 터전을 정하는 조상들의 지혜를 볼 수 있는 점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삼전도의 치욕으로 기억되던 남한산성이 이제 남한산성행궁의 생기를 받아 품격 있고 사랑받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남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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