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국 시 영조된 사직단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직공원으로 고착화되었고, 최근 복원에 대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통시적으로 분석된 사직단의 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 나라의 중요 국가제사를 지내던 장소로의 입지를 확보하고 강화되었던 조선시대 태조에서 일제강점기 이전까지의 시기이다. 태조대에 인왕산 자락에 축조했으며 임진왜란 시 소실된 후 영조 대에 제례시설이 완비되었다. 그러나 1908년 일제의 간섭이본격화되자 공간 멸실과 제사가 폐지되었다. 둘째, 일제에 의해 공원화가 진행되어 고착화된 1910년부터 1944년까지이다. 공원 관련 시설과 경계부에 이질적인 건축물이 들어섰고, 단 영역 재실 사직단문이 고적과 보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셋째, 해방 이후 1984년까지 이질적 성격의 동상과 기념비, 건축물이 축조되어 혼재된 장소성을 지니게 된 시기이다. 사직터널의 개설로 사직단 문이 2번에 걸쳐서 이축되기도 하였다. 넷째, 사직단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는 1985년부터 현재까지이다. 사직단 권역의 복원 계획이 진행되고 있으나 주민에 대한 반발로 난항을 겪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향후, 사직단의 원형 회복을 위한 복원을 위해서는 발굴조사를 통한 면밀한 고증과 주민의 이해가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조선 개국 시 영조된 사직단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직공원으로 고착화되었고, 최근 복원에 대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통시적으로 분석된 사직단의 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 나라의 중요 국가제사를 지내던 장소로의 입지를 확보하고 강화되었던 조선시대 태조에서 일제강점기 이전까지의 시기이다. 태조대에 인왕산 자락에 축조했으며 임진왜란 시 소실된 후 영조 대에 제례시설이 완비되었다. 그러나 1908년 일제의 간섭이본격화되자 공간 멸실과 제사가 폐지되었다. 둘째, 일제에 의해 공원화가 진행되어 고착화된 1910년부터 1944년까지이다. 공원 관련 시설과 경계부에 이질적인 건축물이 들어섰고, 단 영역 재실 사직단문이 고적과 보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셋째, 해방 이후 1984년까지 이질적 성격의 동상과 기념비, 건축물이 축조되어 혼재된 장소성을 지니게 된 시기이다. 사직터널의 개설로 사직단 문이 2번에 걸쳐서 이축되기도 하였다. 넷째, 사직단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는 1985년부터 현재까지이다. 사직단 권역의 복원 계획이 진행되고 있으나 주민에 대한 반발로 난항을 겪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향후, 사직단의 원형 회복을 위한 복원을 위해서는 발굴조사를 통한 면밀한 고증과 주민의 이해가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Sajikdan(a sort of national shrine in Korea) built at the time of foundation of Joseon was entrenched into Sajik Park going through Japanese colonial era and recently the efforts to restore it is in progress. The details of change in Sajikdan in terms of diachronic analysis are as follows: Firstly, ...
Sajikdan(a sort of national shrine in Korea) built at the time of foundation of Joseon was entrenched into Sajik Park going through Japanese colonial era and recently the efforts to restore it is in progress. The details of change in Sajikdan in terms of diachronic analysis are as follows: Firstly, the first period refers to one prior to Japanese colonial era from the first king (also named as "Taejo" in Korean) of the Joseon Dynasty, during which it secured and strengthened the presence as a place for performing important national rites in a nation. It was built on the foot of Inwangsan Mt. at the time of the first king in Joseon Dynasty at first, was destroyed fully by fire during a Japanese Invasion period to Korea(1592-98) and afterward its ancestral ritual facilities were completed under the regime of Youngjo. However, as Japanese intervention coming to the fore, its place was destroyed and then ancestral rites were also abolished in 1908. Secondly, next period falls on 1910 to 1944 when it was transformed and entrenched into a park by the Japanese Empire. While facilities related to a park and an heterogeneous building around the part of boundary were set up, the area of altar, a ritual house and d door of Sajikdan were also designated as historical remains and treasures. Thirdly, this period refers to one from Korea's liberation year from Japanese colony(1945) to the year of 1984 when it had a mixed placeness with the statues, monuments and buildings with heterogeneous nature built. Furthermore, a door of Sajikdan was removed and reconstructed over twice due to opening of Sajik Tunnel. Fourthly, a final period falls on 1985 to the present when efforts are in progress to restore the historicity and symbolism of Sajikdan. A plan for restoration is promoted but now is a difficult time suffering from troubles caused by residents' resistance. Scrutinized historical researches through excavation investigation and residents' understanding are required altogether for restoration of Sajikdan.
Sajikdan(a sort of national shrine in Korea) built at the time of foundation of Joseon was entrenched into Sajik Park going through Japanese colonial era and recently the efforts to restore it is in progress. The details of change in Sajikdan in terms of diachronic analysis are as follows: Firstly, the first period refers to one prior to Japanese colonial era from the first king (also named as "Taejo" in Korean) of the Joseon Dynasty, during which it secured and strengthened the presence as a place for performing important national rites in a nation. It was built on the foot of Inwangsan Mt. at the time of the first king in Joseon Dynasty at first, was destroyed fully by fire during a Japanese Invasion period to Korea(1592-98) and afterward its ancestral ritual facilities were completed under the regime of Youngjo. However, as Japanese intervention coming to the fore, its place was destroyed and then ancestral rites were also abolished in 1908. Secondly, next period falls on 1910 to 1944 when it was transformed and entrenched into a park by the Japanese Empire. While facilities related to a park and an heterogeneous building around the part of boundary were set up, the area of altar, a ritual house and d door of Sajikdan were also designated as historical remains and treasures. Thirdly, this period refers to one from Korea's liberation year from Japanese colony(1945) to the year of 1984 when it had a mixed placeness with the statues, monuments and buildings with heterogeneous nature built. Furthermore, a door of Sajikdan was removed and reconstructed over twice due to opening of Sajik Tunnel. Fourthly, a final period falls on 1985 to the present when efforts are in progress to restore the historicity and symbolism of Sajikdan. A plan for restoration is promoted but now is a difficult time suffering from troubles caused by residents' resistance. Scrutinized historical researches through excavation investigation and residents' understanding are required altogether for restoration of Sajikd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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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정의
본 연구는 사직단의 조성부터 현재까지 선행연구와 문헌분석의 바탕 위에 실증적 자료인 일제강점기 지도와 수치지도를 대입하여 공간 변화를 통시적으로 도출한 후 시기별 구별짓기를 하였다. 이는 기존 문헌 위주의 연구가 지닌 추상적인 영역 검토의 한계를 극복한 실증적인 공간 구성요소와 영역 변천 도출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도출된 사직단 권역에 투영된 시간 층위의 구별짓기는 향후 진행될 사직단 복원 시점의 당위성 확보에 대한 기초자료로 활용 가능하며, 분석에 사용된 문헌과 작성된 도면은 기존에 밝혀지지 않은 자료 발굴로 의의를 지닌다.
제안 방법
본 연구는 고문헌과 신문 기사를 통해 사직단과 그 부속 시설의 건립과 멸실, 중건 과정을 분석했다. 공간 변화에 따른 도상 작업은 고지도ㆍ일제 강점기 지도ㆍ위성사진 그리고 현재의 지형도를 바탕으로 작성했다. 이때 과정적 공간 변천을 분석하기 위해 사용된 문헌과 도상자료에 대한 목록은 Table 1과 같다.
본 연구는 고문헌과 신문 기사를 통해 사직단과 그 부속 시설의 건립과 멸실, 중건 과정을 분석했다. 공간 변화에 따른 도상 작업은 고지도ㆍ일제 강점기 지도ㆍ위성사진 그리고 현재의 지형도를 바탕으로 작성했다.
본 연구는 사직단의 조성부터 현재까지 선행연구와 문헌분석의 바탕 위에 실증적 자료인 일제강점기 지도와 수치지도를 대입하여 공간 변화를 통시적으로 도출한 후 시기별 구별짓기를 하였다. 이는 기존 문헌 위주의 연구가 지닌 추상적인 영역 검토의 한계를 극복한 실증적인 공간 구성요소와 영역 변천 도출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본 연구에서 도출된 사직단에 대한 과정적 변천의 구별짓기는 장소의 성격이 변모한 변이점을 기준으로 하였다. 이때 장소성의 변화를 당시의 사회적 배경 하에 공간에 도입된 물리적 요소와 이용자의 인식을 기준으로 구분하였다.
설계도에는 공원 경계, 산책로, 화단처럼 형태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과 도입된 건축물, 점경물이 표시되어 있다. 사직공원 관련 도면은 명칭 상 설계예정도와 실시설계도가 미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 공간의 조영 여부는 당시 사진으로 비교 분석하여 검증했다.
사직공원의 공간 변화를 초래한 시대적인 배경은 당시에 발간된 신문기사·잡지·공문서를 분석했다.
, 2012). 선행연구에서 사직단의 공간 분석 시 활용된 도면은 측량에 의해서 작도된 지도가 아닌 개념적으로 그려진 조선시대의 지도를 연구 자료로 활용하였다. 이를 현재의 공간에 적용 시 불합리한 부분과 오류가 발생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본 연구에서 도출된 사직단에 대한 과정적 변천의 구별짓기는 장소의 성격이 변모한 변이점을 기준으로 하였다. 이때 장소성의 변화를 당시의 사회적 배경 하에 공간에 도입된 물리적 요소와 이용자의 인식을 기준으로 구분하였다.
조선 개국 시 영조된 사직단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직공원으로 고착화되었고, 최근 복원에 대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으나 원형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인근 주민과의 협의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로 진행되고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사직단의 조성 시기부터 현재까지 통시적인 변천의 분석을 위해 고지도와 근대지도, 수치지도를 중첩시켜 각 공간요소와 사직단의 경계부의 변화를 실질적으로 도출하였으며, 공간 인식에 대한 변천은 신문가 잡지 기사를 활용했다. 이에 시기별로 구분한 사직단의 과정적 변천 해석은 다음과 같다.
개설 도로 선형에 사직단 정문이 저촉되자 이축계획을 세웠고, 문화재위원회의 반대가 있었지만 공사는 그대로 진행되었다(The Dong-A Ilbo, 24 January, 1967). 이후 이축된 사직단 정문 전면에 보행로 미확보가 문제로 제기되자 1973년 인도 조성을 위해서 정문을 10m 정도 뒤로 이축했다(The Kyunghyang Shinmun, 25 September, 1973).
대상 데이터
그러나 1985년에 작성된 보고서에는 오류가 내재되어 있다. 김정희의 [사직단도]를 참고하였다고 했지만, 실제 첨부된 도상은 근대 역사풍속화가인 김학수의 [사직단]이다.『국조오례의』의 [사직단도(1474년)]과 비교시 대문 위치와 환장 영역이 좁게 표현되었다.
사직단 대문 우측의 인보관(隣保館)은 해방 이후 1958년까지 고아와 부랑아를 보호하기 위한 시립중앙보호소로 사용되었다(The City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of Seoul, 1965:437). 1956년에는 단 영역 북쪽에 시립아동보건병원 건립이 추진되었고(The Dong-A Ilbo, 11 February, 1956), ‘시립아동병원(1969년)’으로 개칭 후 1977년 강남구 내곡동으로 이전하자 남겨진 건물은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도서관으로 개관했다(MK Business News, 4 May, 1979).
성능/효과
셋째, 사직공원으로 해방 이후 1984년까지 이질적 성격의 동상과 기념비, 건축물이 축조되어 혼재된 장소성을 갖게 되는 시기이다. 사직공원 경계부 북측과 우측에 시립중앙보호소·시립아동병원·어린이도서관·사직동사무소·종로도서관·단군전·사직기념관이 들어섰다.
첫째, 사직단이 한 나라의 중요 국가 제사를 지내던 장소로의 입지를 확보하고 강화했던 조선 태조에서 일제강점기 이전까지의 시기이다. 사직단은 태조 대 경복궁의 왼쪽인 인왕산자락에 양단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후속연구
이는 기존 문헌 위주의 연구가 지닌 추상적인 영역 검토의 한계를 극복한 실증적인 공간 구성요소와 영역 변천 도출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도출된 사직단 권역에 투영된 시간 층위의 구별짓기는 향후 진행될 사직단 복원 시점의 당위성 확보에 대한 기초자료로 활용 가능하며, 분석에 사용된 문헌과 작성된 도면은 기존에 밝혀지지 않은 자료 발굴로 의의를 지닌다.
질의응답
핵심어
질문
논문에서 추출한 답변
조선 태조 4년(1395년) 한양에 축조된 사직단은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가?
종묘와 사직단의 배치는『주례(周禮)』의 「고공기(考工記)」에 ‘左廟右社面朝後市’를 준거로 하였고, 각 지방 읍성에는 사직단을 세우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Ju, 2006: 237). 조선 태조 4년(1395년) 한양에 축조된 사직단은 나라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매년 4번의 대사(大祀)와 중사(中祀), 기우제(祈雨祭)와 기곡제(祈穀祭) 등을 지내는 국가의 중요한 제례 장소(Kong, 2009: 148) 역할을 담당했다.
일제의 강점으로 제례 공간은 어떻게 변모하였는가?
일제의 강점이 시작되자 아무나 출입할 수 없었던 엄숙함과 위엄을 지닌 제례 공간은 경성시민의 일상적인 방문이 가능한 열린 공원으로 변모했다. 해방 이후에도 도시계획의 요구와 급변하는 사회적 배경의 영향으로 이질적 요소의 도입은 지속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공원의 발생의 세 가지 유형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우리나라에서 근대공원의 발생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자주적인 입장에서 조성된 이왕직 소유의 탑골공원과 국민의 성금이 바탕이 된 독립공원, 두 번째 유형은 일본 거류민이 주축이 된 신사 조성 후 공원으로 변모한 용두산공원과 달성공원 등, 세 번째 유형은 자연경관이 수려하며 위엄이 있던 조선의 전통공간을 위락공원으로 활용한 장충단공원과 훈련원공원 등이다. 이중 사직공원은 전통공간이 변모한 공원의 형태이다. 사직공원이 현재의 모습을 지니게 된 배경에는 사회적 상황에 따른 공간 변화의 요구도가 원인이 되어 반영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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