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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IS 바로가기한국정치학회보= Korean political science review, v.45 no.5, 2011년, pp.125 - 145, 405
박원곤
광주 민주화 항쟁을 전후하여 카터 행정부가 보여준 대응은 한반도의 안보와 안정에 비중을 둔 것으로 신군부와 공모 수준은 아니지만 신군부와 각을 세우면서 한국 민주화를 최우선한 것도 아니다. 카터 행정부는 사전에 신군부와 광주 항쟁 진압을 위한 군등원에 대해 협의하였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필요할 경우 매우 신중하게 군을 동원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군 동원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따라서 카터 행정부의 광주 항쟁시 대응은 신군부와의 “적극적인 공조” 또는 마지못한 “잠재적인 동의”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다.
광주 항쟁을 전후한 미국의 대한정책은 1979년 말 발생한 이란 인질사태와 소련의 아프간 침공이 한반도 안보상황과 연계되어 미국의 안보불안감을 실체적으로 자극한 것에 영향을 받았다. 또한 무력행사도 불사하는 전두환 신군부가 북한위협과 한미동맹 관계 전체를 걸고 미국을 압박한 것도 영향을 주었다. 이외에도 미국이 광주 항쟁을 민주화 항쟁보다는 지역 정서에 기초한 폭동으로 인식한 것과 당시 미국의 대선전이 외교정책의 보수화를 부추긴 것도 정책 결정의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The driving force of responding to the Kwangju Uprising by the Carter administration in May 1980 was security apprehension. The Carter administration did not closely collaborate with the South Korean military junta during the whole process, yet did not prioritize its policy on the democratiz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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