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 中期에 간행된 士林의 대표적 文集으로는 李滉의 『退溪集』ㆍ曺植의 『南冥集』ㆍ李珥의 『栗谷集』이 있다. 宣祖 33년(1600)에 陶山書院에서 간행된 『退溪集』을 시작으로 宣祖 35년(1602)에는 陜川에서 『南冥集』이, 그리고 光海君 3년(1611)에는 海州 石潭에서 『栗谷集』이 그들의 門徒들에 의해서 간행되었다. 이들 文集의 撰者들은 모두 朝鮮 中期 士林을 대표하는 學者이자 政治家였다. 이들의 門徒들은 中央 政治와 鄕村 敎化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 士林들이었다. 대개 李滉의 門徒들은 南人으로. 曺植의 門徒들은 北人으로, 그리고 李珥의 門徒들은 西人으로 활동하고 있어 門徒와 政派 사이에는 깊은 관련성을 보인다. 이들 門徒들이 先師의 文集을 編刊 하면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갈등은 향촌 士林의 內部 構造를 잘 보여준다. 나아가 그 과정에서 형성된 門派는 향촌의 독립된 정치단위가 되어서 중앙 정치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退溪集』의 간행은 趙穆에 의해서 主導되었다. 趙穆과 柳成龍은 모두 李滉의 가장 중요한 弟子이다. 趙穆은 향촌에서 士林을 領導하였고, 역시 柳成龍은 중앙 정치에 참여하여 壬辰倭亂 때 국정을 수행하였다. 柳成龍은 편찬에 있어서 士林의 政治思想이 명료하게 표현되도록 과감한 刪節을 주장하였다. 그는 『退溪集』을 士林文集의 典範으로 만들려 하였고, 꾸준히 朝廷에서 간행하려 하였다. 이는 곧 중앙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官僚 士林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이에 반해 趙穆은 全稿收錄原則을 견지하였다. 모든 저작을 빠짐없이 수록해야 한다는 이 원칙은 鄕村 士林의 입장에서 수립된 것이다. 이들의 대립은 趙穆의 柳成龍批判運動을 전개하면서 정치문제화 되었고, 곧 중앙에서 北人 彈劾에 의한 柳成龍 실각으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趙穆은 도산서원에서 『退溪集』을 간행하는데 강좌 향촌의 인적 물적 자원을 충분히 지원받아 완성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趙穆의 門徒와 그를 圍繞한 士林들은 月川門派를 형성하였고, 柳成龍 등은 西厓門派로 형성되었다. 향촌에서 門派의 對立은 중앙의 정치와도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月川門派의 趙穆 陶山從享은 北人政權의 협조로 추진된 것이다. 月川門派들은 江右 향촌의 寒岡門派와도 연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북인정권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는 등 西厓門派와는 많은 차이점을 드러내었다. 『南冥集』의 간행은 鄭仁弘이 주도하였다. 1602년 海印寺에서 간행된 《壬寅初刊本》이 화재로 燒失된 이후 1604년에 《甲辰重刊本》이, 그리고 1609년에는 《己酉追刻本》이 나왔다. 曺植의 實踐的 학풍은 著述不必論을 낳았고, 따라서 著作의 생산이 극히 저조하였으며, 門徒들도 遺文의 정리에 유의하지 않았다. 따라서 『南횻集』은 분량이 210여 판 정도로 적다. 이런 物理的 條件은 문집편간에 있어서 鄭仁弘의 獨占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였다. 鄭仁弘은 《甲辰重刊本》을 편찬하면서 君子論에 바탕한 「跋南冥集說」을 편입하였고, 이는 鄭逑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퇴계의 남명비판 운동에 대한 反駁에서 출발한 君子論은 南冥出處에 대한 논리적 해석이자 退溪出處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리고 鄭仁弘 자신의 政治論理로 體化된 것으로서 來庵門派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에 鄭逑의 高風正脈論은 서로 현격하게 다른 南冥과 退溪의 學風쎄 대한 새로운 ...
朝鮮 中期에 간행된 士林의 대표적 文集으로는 李滉의 『退溪集』ㆍ曺植의 『南冥集』ㆍ李珥의 『栗谷集』이 있다. 宣祖 33년(1600)에 陶山書院에서 간행된 『退溪集』을 시작으로 宣祖 35년(1602)에는 陜川에서 『南冥集』이, 그리고 光海君 3년(1611)에는 海州 石潭에서 『栗谷集』이 그들의 門徒들에 의해서 간행되었다. 이들 文集의 撰者들은 모두 朝鮮 中期 士林을 대표하는 學者이자 政治家였다. 이들의 門徒들은 中央 政治와 鄕村 敎化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 士林들이었다. 대개 李滉의 門徒들은 南人으로. 曺植의 門徒들은 北人으로, 그리고 李珥의 門徒들은 西人으로 활동하고 있어 門徒와 政派 사이에는 깊은 관련성을 보인다. 이들 門徒들이 先師의 文集을 編刊 하면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갈등은 향촌 士林의 內部 構造를 잘 보여준다. 나아가 그 과정에서 형성된 門派는 향촌의 독립된 정치단위가 되어서 중앙 정치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退溪集』의 간행은 趙穆에 의해서 主導되었다. 趙穆과 柳成龍은 모두 李滉의 가장 중요한 弟子이다. 趙穆은 향촌에서 士林을 領導하였고, 역시 柳成龍은 중앙 정치에 참여하여 壬辰倭亂 때 국정을 수행하였다. 柳成龍은 편찬에 있어서 士林의 政治思想이 명료하게 표현되도록 과감한 刪節을 주장하였다. 그는 『退溪集』을 士林文集의 典範으로 만들려 하였고, 꾸준히 朝廷에서 간행하려 하였다. 이는 곧 중앙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官僚 士林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이에 반해 趙穆은 全稿收錄原則을 견지하였다. 모든 저작을 빠짐없이 수록해야 한다는 이 원칙은 鄕村 士林의 입장에서 수립된 것이다. 이들의 대립은 趙穆의 柳成龍批判運動을 전개하면서 정치문제화 되었고, 곧 중앙에서 北人 彈劾에 의한 柳成龍 실각으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趙穆은 도산서원에서 『退溪集』을 간행하는데 강좌 향촌의 인적 물적 자원을 충분히 지원받아 완성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趙穆의 門徒와 그를 圍繞한 士林들은 月川門派를 형성하였고, 柳成龍 등은 西厓門派로 형성되었다. 향촌에서 門派의 對立은 중앙의 정치와도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月川門派의 趙穆 陶山從享은 北人政權의 협조로 추진된 것이다. 月川門派들은 江右 향촌의 寒岡門派와도 연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북인정권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는 등 西厓門派와는 많은 차이점을 드러내었다. 『南冥集』의 간행은 鄭仁弘이 주도하였다. 1602년 海印寺에서 간행된 《壬寅初刊本》이 화재로 燒失된 이후 1604년에 《甲辰重刊本》이, 그리고 1609년에는 《己酉追刻本》이 나왔다. 曺植의 實踐的 학풍은 著述不必論을 낳았고, 따라서 著作의 생산이 극히 저조하였으며, 門徒들도 遺文의 정리에 유의하지 않았다. 따라서 『南횻集』은 분량이 210여 판 정도로 적다. 이런 物理的 條件은 문집편간에 있어서 鄭仁弘의 獨占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였다. 鄭仁弘은 《甲辰重刊本》을 편찬하면서 君子論에 바탕한 「跋南冥集說」을 편입하였고, 이는 鄭逑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퇴계의 남명비판 운동에 대한 反駁에서 출발한 君子論은 南冥出處에 대한 논리적 해석이자 退溪出處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리고 鄭仁弘 자신의 政治論理로 體化된 것으로서 來庵門派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에 鄭逑의 高風正脈論은 서로 현격하게 다른 南冥과 退溪의 學風쎄 대한 새로운 융합방식의 모색이며, 현실적 功效를 再解釋한 것이다. 따라서 鄭仁弘의 대립적 관점과는 다른 통합적 관점을 가진 것이었다. 鄭仁弘과 鄭逑는 광해군 1년 朴而立사건을 계기로 분기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들 門徒와 鄕村 士林이 이는 곧 寒岡門派와 來庵門派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栗谷集』의 편찬은 成渾이 주관하였다. 편찬의 주체는 朴汝龍을 비롯한 石潭門徒와 金長生을 비롯한 在京門徒였지만, 이 밖에도 朴枝華, 高敬命, 權擘, 鄭澈 등 西人內 다양한 인물들이 참여하였다. 이는 『栗谷集』의 編纂이 단순히 門徒내의 일로 국한되지 않은 것으로서 外延이 西人으로 확장된 것이다. 朴汝龍은 海州 石潭의 향촌을 대표하는 제자였고, 金長生은 連山 출신으로서 정치에 참여하고 있었다. 地域的 根據는 물론이고 政治的 性向도 매우 달랐던 石潭門徒와 在京門徒가 커다란 갈등 없이 문집의 편찬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成渾이라는 共同의 스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이 『栗谷集』의 刊行地를 두고 갈등을 일으켰다. 즉 편찬이 완료되어 가던 선조 24년(1591)에 중앙에서 간행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기축옥사 이후 金長生은 西人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宣祖의 乙覽을 추진한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石潭門徒 朴汝龍의 반대에 부딪혔다. 뿐만 아니라 西人의 중요인물인 鄭澈이 실각하였다. 따라서 중앙에서 간행하려던 의도는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湖南에서 간행이 추진되었다. 물론 金長生등 재경문도가 추진한 것이다. 편찬에서는 커다란 이견을 노출하지 않았던 李珥의 門徒들이 간행주체를 놓고 갈등한 것은 文集 刊行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嫡傳의 繼承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石潭門徒에 의해 광해군 3년(1611) 『율곡집』이 간행될 때 재경문도들은 전혀 참여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在京門徒와 石潭門徒는 分岐되었다. 在京門徒는 李珥의 成渾의 제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둘의 관계는 "道義之交" 라는 특별한 개념으로 규정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제자를 共有했으며, 제자들 역시 그들의 스승을 共有하였다. 이런 共有意識은 開放性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런 開放性은 문집의 편찬과정에서 이미 드러난 것이다. 각각의 문도들 간에 개방성이 없다면 공유의식은 發露할 수 없기 때문이다. 栗谷神道碑를 둘러싼 논란은 이들의 개방성이 정치적 유연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 초 牛溪伸寃運動은 坡山문파의 正體性을 드러낸 것으로 連山門派와 대립되었지만, 동류의식과 정치적 유연성으로 保合되었다. 따라서 이후 진행되는 『栗牛合譜』의 편찬은 保合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볼 때 文集의 編刊의 士林의 중요한 정치활동이었으며, 이를 통해 士林 은 자신의 正體性을 확립해 나갔다. 이런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분기는 士林의 내적 구조를 드러낸 것으로서 門派 成立의 계기가 되었다. 즉 退溪門徒는 月川門派와 西厓門派가 성립되었으며, 南冥門徒는 來庵門派와 寒岡門派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栗牛門徒는 본래부터 坡山門派와 連山門派가 융합된 형태로 출발한 것이었다. 이들 門派의 특징은 士林의 독립적인 정치 단위였다. 이 문파 중 月川ㆍ來庵ㆍ坡山門派는 嶺南 士林派의 節義 精神을 계승한 先輩士林의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았으며, 西厓ㆍ寒岡ㆍ連山門派는 선조 초년 간 진출한 新進士類 의 정치의식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朝鮮 中期에 간행된 士林의 대표적 文集으로는 李滉의 『退溪集』ㆍ曺植의 『南冥集』ㆍ李珥의 『栗谷集』이 있다. 宣祖 33년(1600)에 陶山書院에서 간행된 『退溪集』을 시작으로 宣祖 35년(1602)에는 陜川에서 『南冥集』이, 그리고 光海君 3년(1611)에는 海州 石潭에서 『栗谷集』이 그들의 門徒들에 의해서 간행되었다. 이들 文集의 撰者들은 모두 朝鮮 中期 士林을 대표하는 學者이자 政治家였다. 이들의 門徒들은 中央 政治와 鄕村 敎化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 士林들이었다. 대개 李滉의 門徒들은 南人으로. 曺植의 門徒들은 北人으로, 그리고 李珥의 門徒들은 西人으로 활동하고 있어 門徒와 政派 사이에는 깊은 관련성을 보인다. 이들 門徒들이 先師의 文集을 編刊 하면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갈등은 향촌 士林의 內部 構造를 잘 보여준다. 나아가 그 과정에서 형성된 門派는 향촌의 독립된 정치단위가 되어서 중앙 정치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退溪集』의 간행은 趙穆에 의해서 主導되었다. 趙穆과 柳成龍은 모두 李滉의 가장 중요한 弟子이다. 趙穆은 향촌에서 士林을 領導하였고, 역시 柳成龍은 중앙 정치에 참여하여 壬辰倭亂 때 국정을 수행하였다. 柳成龍은 편찬에 있어서 士林의 政治思想이 명료하게 표현되도록 과감한 刪節을 주장하였다. 그는 『退溪集』을 士林文集의 典範으로 만들려 하였고, 꾸준히 朝廷에서 간행하려 하였다. 이는 곧 중앙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官僚 士林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이에 반해 趙穆은 全稿收錄原則을 견지하였다. 모든 저작을 빠짐없이 수록해야 한다는 이 원칙은 鄕村 士林의 입장에서 수립된 것이다. 이들의 대립은 趙穆의 柳成龍批判運動을 전개하면서 정치문제화 되었고, 곧 중앙에서 北人 彈劾에 의한 柳成龍 실각으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趙穆은 도산서원에서 『退溪集』을 간행하는데 강좌 향촌의 인적 물적 자원을 충분히 지원받아 완성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趙穆의 門徒와 그를 圍繞한 士林들은 月川門派를 형성하였고, 柳成龍 등은 西厓門派로 형성되었다. 향촌에서 門派의 對立은 중앙의 정치와도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月川門派의 趙穆 陶山從享은 北人政權의 협조로 추진된 것이다. 月川門派들은 江右 향촌의 寒岡門派와도 연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북인정권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는 등 西厓門派와는 많은 차이점을 드러내었다. 『南冥集』의 간행은 鄭仁弘이 주도하였다. 1602년 海印寺에서 간행된 《壬寅初刊本》이 화재로 燒失된 이후 1604년에 《甲辰重刊本》이, 그리고 1609년에는 《己酉追刻本》이 나왔다. 曺植의 實踐的 학풍은 著述不必論을 낳았고, 따라서 著作의 생산이 극히 저조하였으며, 門徒들도 遺文의 정리에 유의하지 않았다. 따라서 『南횻集』은 분량이 210여 판 정도로 적다. 이런 物理的 條件은 문집편간에 있어서 鄭仁弘의 獨占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였다. 鄭仁弘은 《甲辰重刊本》을 편찬하면서 君子論에 바탕한 「跋南冥集說」을 편입하였고, 이는 鄭逑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퇴계의 남명비판 운동에 대한 反駁에서 출발한 君子論은 南冥出處에 대한 논리적 해석이자 退溪出處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리고 鄭仁弘 자신의 政治論理로 體化된 것으로서 來庵門派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에 鄭逑의 高風正脈論은 서로 현격하게 다른 南冥과 退溪의 學風쎄 대한 새로운 융합방식의 모색이며, 현실적 功效를 再解釋한 것이다. 따라서 鄭仁弘의 대립적 관점과는 다른 통합적 관점을 가진 것이었다. 鄭仁弘과 鄭逑는 광해군 1년 朴而立사건을 계기로 분기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들 門徒와 鄕村 士林이 이는 곧 寒岡門派와 來庵門派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栗谷集』의 편찬은 成渾이 주관하였다. 편찬의 주체는 朴汝龍을 비롯한 石潭門徒와 金長生을 비롯한 在京門徒였지만, 이 밖에도 朴枝華, 高敬命, 權擘, 鄭澈 등 西人內 다양한 인물들이 참여하였다. 이는 『栗谷集』의 編纂이 단순히 門徒내의 일로 국한되지 않은 것으로서 外延이 西人으로 확장된 것이다. 朴汝龍은 海州 石潭의 향촌을 대표하는 제자였고, 金長生은 連山 출신으로서 정치에 참여하고 있었다. 地域的 根據는 물론이고 政治的 性向도 매우 달랐던 石潭門徒와 在京門徒가 커다란 갈등 없이 문집의 편찬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成渾이라는 共同의 스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이 『栗谷集』의 刊行地를 두고 갈등을 일으켰다. 즉 편찬이 완료되어 가던 선조 24년(1591)에 중앙에서 간행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기축옥사 이후 金長生은 西人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宣祖의 乙覽을 추진한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石潭門徒 朴汝龍의 반대에 부딪혔다. 뿐만 아니라 西人의 중요인물인 鄭澈이 실각하였다. 따라서 중앙에서 간행하려던 의도는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湖南에서 간행이 추진되었다. 물론 金長生등 재경문도가 추진한 것이다. 편찬에서는 커다란 이견을 노출하지 않았던 李珥의 門徒들이 간행주체를 놓고 갈등한 것은 文集 刊行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嫡傳의 繼承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石潭門徒에 의해 광해군 3년(1611) 『율곡집』이 간행될 때 재경문도들은 전혀 참여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在京門徒와 石潭門徒는 分岐되었다. 在京門徒는 李珥의 成渾의 제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둘의 관계는 "道義之交" 라는 특별한 개념으로 규정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제자를 共有했으며, 제자들 역시 그들의 스승을 共有하였다. 이런 共有意識은 開放性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런 開放性은 문집의 편찬과정에서 이미 드러난 것이다. 각각의 문도들 간에 개방성이 없다면 공유의식은 發露할 수 없기 때문이다. 栗谷神道碑를 둘러싼 논란은 이들의 개방성이 정치적 유연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 초 牛溪伸寃運動은 坡山문파의 正體性을 드러낸 것으로 連山門派와 대립되었지만, 동류의식과 정치적 유연성으로 保合되었다. 따라서 이후 진행되는 『栗牛合譜』의 편찬은 保合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볼 때 文集의 編刊의 士林의 중요한 정치활동이었으며, 이를 통해 士林 은 자신의 正體性을 확립해 나갔다. 이런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분기는 士林의 내적 구조를 드러낸 것으로서 門派 成立의 계기가 되었다. 즉 退溪門徒는 月川門派와 西厓門派가 성립되었으며, 南冥門徒는 來庵門派와 寒岡門派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栗牛門徒는 본래부터 坡山門派와 連山門派가 융합된 형태로 출발한 것이었다. 이들 門派의 특징은 士林의 독립적인 정치 단위였다. 이 문파 중 月川ㆍ來庵ㆍ坡山門派는 嶺南 士林派의 節義 精神을 계승한 先輩士林의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았으며, 西厓ㆍ寒岡ㆍ連山門派는 선조 초년 간 진출한 新進士類 의 정치의식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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