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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時代 瓷器盞托 硏究 원문보기


이윤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국내석사)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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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도자사 연구에서 하나의 기종을 분석하여, 그릇으로서 기물이 사용되었던 사회, 문화적 배경과 제작 동기, 그리고 조형적 양식과 편년에 이르는 종합적 분석을 시도한 것이다. 논문의 주제인 盞托은 굽이 있는 접시형태로 잔을 받치는데 사용되었으며 잔과 함께 한 벌을 이룰 때에는 ‘托盞’이라 불린다. 잔탁은 지금까지 단독 주제로 연구된 바는 없지만, 삼국과 고려, 조선시대에 걸쳐 확인되는 기물로서 그것을 필요로 했던 사회적 배경과 사용계층의 취향, 제작기술, 나아가 음식문화의 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특히 고려시대 가마터에서 자기질의 잔탁이 본격적으로 생산되었는데, 이곳에서 생산된 잔탁은 잔이 놓이는 받침대인 ‘盞座’의 존재를 통해 그릇의 역할과 함께 다양한 조형적 특징이 파악된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 다루는 잔탁의 범위는 고려시대 본격적인 자기 생산과 함께 받침으로서의 사용이 확실한, 즉 잔좌가 형성되어 있는 기물로 설정하여 살펴보았다. 잔탁의 명칭은 중세 중국과 한국의 문헌기록과 명문자료를 통해 ‘茶托子’, ‘茶托’, ‘盤盞’, ‘盞盤’, ‘盞臺’, ‘臺盞’, ‘盞托’, ‘盞槖(橐)’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이들 명칭에는 ‘托’이나 ‘臺’, ‘盤’ 등과 같은 ‘받침’의 의미가 내포하고 있으며, 宋代 이후로 ‘盞托’이라는 명칭이 등장하여 정착한 것으로 생각된다. 잔탁의 시원적 형태는 남북조시대 유적의 출토품을 통해서 확인되며, 기본적인 조형은 唐代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그러나 당대 이후 차문화의 성행과 자기제작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다구로서 자기질 잔탁의 제작이 증가하였고, 飮茶法의 변화와 함께 송대에는 點茶法의 유행으로 금속, 칠기, 자기로의 제작량이 증가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송대 간행된 여러 다서의 기록과 회화자료를 통해서 차문화에 수반된 잔탁의 모습을 통해 살필 수 있었다. 동시기 고려에서도 중국의 오대시기 월주요의 제자기술이 이전되면서부터 국내 가마터에서도 자기질 잔탁의 제작이 이루어졌다. 이때 제작된 국내산의 잔탁은 오대 월주요의 것과 매우 유사하며, 이후 송대 여러 요장에서 제작되는 잔탁과 조형적인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잔탁의 제작은 명ㆍ청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으나, 이전시기에 비해 제작량이 현저하게 줄어들었으며, 기물의 형태와 문양도 이전과는 차이를 보인다. 국내에서도 粉靑沙器, 白磁 잔탁의 제작이 지속되었으나, 이 역시 고려의 것과는 구분되는 조형을 나타내고 있다. 고려시대 잔탁은 생산지와 소비지 출토의 여러 사례들을 통해 그 제작시기가 초기부터 확인되었으며, 대부분은 양질의 자기를 생산하던 가마터에서 출토되었다. 그러나 중기 이후 잔탁의 제작지는 여러 곳으로 확산되었고, 동시대 기물의 제작에 질적 분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잔탁은 고려시대 사지, 고분, 건물지, 그리고 해저인양품등에서 확인된다. 유적의 분포는 전국적이며, 각각 유적의 성격에 따른 잔탁의 사용에 대해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사지출토의 빈도가 가장 높은데, 이는 『禪院淸規』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 사원 내 의례행위에서 잔탁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출토 층위와 범위가 정해져있는 고분에서의 잔탁은 그것과 함께 세트를 이루는 잔이 출토되어 팽이형잔, 화형잔 등과의 조합양상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밖에 해저에서 출토되는 잔탁은 다른 유적에 비해 형태가 완전하게 남아있고, 함께 출토되는 다른 유물을 통해 편년 추정이 가능하였다. 특히 현재까지 가마터 발굴을 통해 확인되지 않은 고려시대 후기 잔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주목되었다. 여러 가지 문헌기록과 회화, 유적출토품과 전세품 등의 자료를 종합한 결과, 고려시대 잔탁은 제작의 시작부터 네 시기로 구분하여 각 시기의 양식과 변화를 알 수 있었다. Ⅰ기는 10세기 중반∼11세기 후반에 해당하며, 잔탁은 제작의 초기단계부터 五代 越州窯의 영향을 받아 한 요장 내에서 여러 가지의 형태로 제작되었다. Ⅱ기는 11세기 말∼12세기 전반에 해당하며, 고려청자 제작에 큰 변화와 함께 잔탁의 제작지가 강진과 ...

Abstract AI-Helper 아이콘AI-Helper

This study comprehensively analyzed one kind of ceramics produced in the past in terms of society where the ceramic was used, cultural background and production motives, and figurative form and chronicles. Jantak(盞托), the theme of the study, was shaped like a footed plate and used as a saucer. When ...

학위논문 정보

저자 이윤진
학위수여기관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학위구분 국내석사
학과 미술사학과
발행연도 2008
총페이지 x, 181 p.
언어 kor
원문 URL http://www.riss.kr/link?id=T11390211&outLink=K
정보원 한국교육학술정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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