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도상자료를 통한 불국사의 경관변화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hange of Landscape in Bulguksa Temple through a Iconographic Materials in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원문보기
불국사(佛國寺)는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로서 임진왜란으로 완전 소실된 이후 1805년까지 중수와 중건을 거듭하였다. 그 이후의 기록은 없다가 재정상태가 어려워지면서 불국사의 중수는 중단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한 수리공사가 크게 2차에 걸쳐 나누어 시행되었다. 해방이후,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설립되고 발굴조사 후 1970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973년에 준공되었다. 본 연구는 현재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불국사의 일제강점기 건축도면과 1902년 불국사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 세키노 타다시(關野 貞)의 자료, 1973년에 발간된 불국사복원공사보고서를 통해 고찰하였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이후의 불국사의 경관의 변화를 확인하여 향후 복원이나 재정비 사업의 진행시 기초자료로 활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불국사는 19세기 초까지 유지되어 왔으나 그 후 사세가 약해졌고 그 후 일제강점기의 일본의 우월함을 표출하려는 무분별한 수리공사와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자료와 연구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공사를 진행하여 많은 경관 변화가 있었다. 둘째, 구품연지(九品蓮池)는 고문헌에서 구품연지의 의미와 영지(影池)의 기능이 함께 언급되어 있어 그 명칭을 확정할 수 없고 실제로 발굴조사된 위치가 극락전이 아닌 대웅전 아래 공간이었기 때문에 구품연지의 교리적 의미와 발굴위치가 맞지 않는 의문점을 남기고 있었다. 구품연지는 창건초기부터 영지(影池)로서 역할을 하다가 시간이 흐르며 불국사의 사세가 약해짐에 따라 연지(蓮池)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어 극락전의 존재와 교리상 알맞은 구품연지(九品蓮池)로 불리게 된 것으로 추측하였다. 셋째, 대웅전 남회랑의 경관을 촬영한 1902년 세키노 타다시의 사진을 확인할 결과 당시 남회랑의 벽체가 없었고 1918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제강점기 도면에서도 벽이 없는 회랑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1970년대 복원공사 뒤의 남회랑의 모습과는 다른데 불국사의 전체적인 경관과 함께 탑이 비추면서 아래쪽 지당이 영지로서의 기능을 했다는 근거 자료였다. 넷째, 48계단은 계단 숫자와 관련하여 정토불교와 관련된 48대원, 16관법, 대웅전의 관점에서의 승가시 3도로로 해석되고 있었다. 국가기록원에서 보관중인 일제강점기의 불국사 도면과 사진, 발굴조사자료를 확인한 결과 원래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어 48계단에 대한 올바른 스토리를 알릴 필요가 있다.
불국사(佛國寺)는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로서 임진왜란으로 완전 소실된 이후 1805년까지 중수와 중건을 거듭하였다. 그 이후의 기록은 없다가 재정상태가 어려워지면서 불국사의 중수는 중단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한 수리공사가 크게 2차에 걸쳐 나누어 시행되었다. 해방이후,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설립되고 발굴조사 후 1970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973년에 준공되었다. 본 연구는 현재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불국사의 일제강점기 건축도면과 1902년 불국사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 세키노 타다시(關野 貞)의 자료, 1973년에 발간된 불국사복원공사보고서를 통해 고찰하였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이후의 불국사의 경관의 변화를 확인하여 향후 복원이나 재정비 사업의 진행시 기초자료로 활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불국사는 19세기 초까지 유지되어 왔으나 그 후 사세가 약해졌고 그 후 일제강점기의 일본의 우월함을 표출하려는 무분별한 수리공사와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자료와 연구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공사를 진행하여 많은 경관 변화가 있었다. 둘째, 구품연지(九品蓮池)는 고문헌에서 구품연지의 의미와 영지(影池)의 기능이 함께 언급되어 있어 그 명칭을 확정할 수 없고 실제로 발굴조사된 위치가 극락전이 아닌 대웅전 아래 공간이었기 때문에 구품연지의 교리적 의미와 발굴위치가 맞지 않는 의문점을 남기고 있었다. 구품연지는 창건초기부터 영지(影池)로서 역할을 하다가 시간이 흐르며 불국사의 사세가 약해짐에 따라 연지(蓮池)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어 극락전의 존재와 교리상 알맞은 구품연지(九品蓮池)로 불리게 된 것으로 추측하였다. 셋째, 대웅전 남회랑의 경관을 촬영한 1902년 세키노 타다시의 사진을 확인할 결과 당시 남회랑의 벽체가 없었고 1918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제강점기 도면에서도 벽이 없는 회랑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1970년대 복원공사 뒤의 남회랑의 모습과는 다른데 불국사의 전체적인 경관과 함께 탑이 비추면서 아래쪽 지당이 영지로서의 기능을 했다는 근거 자료였다. 넷째, 48계단은 계단 숫자와 관련하여 정토불교와 관련된 48대원, 16관법, 대웅전의 관점에서의 승가시 3도로로 해석되고 있었다. 국가기록원에서 보관중인 일제강점기의 불국사 도면과 사진, 발굴조사자료를 확인한 결과 원래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어 48계단에 대한 올바른 스토리를 알릴 필요가 있다.
Bulguksa Temple, a typical temple of Silla was lost during Japanese Invasion of Korea and there are records of reconstructing in its record, Bulguksa Sajeok. There is no record after that. And reconstructing was stopped due to lack of money and repair works were conducted for two times in Japanese c...
Bulguksa Temple, a typical temple of Silla was lost during Japanese Invasion of Korea and there are records of reconstructing in its record, Bulguksa Sajeok. There is no record after that. And reconstructing was stopped due to lack of money and repair works were conducted for two times in Japanese colonial era. First repair work was from 1989 to 1919 and second repair work was conducted from 1922 to 1925. After Liberation, Bulguksa Temple Restoration Committee was established in 1969 and the construction has started since 1970 after excavation investigation to complete in 1973. The shape of south arcade without walls in the main temple of Bulguksa was found in a blue print of Bulguksa in Japanese colonial era in National Archives of Korea now and a picture of Bulguksa in 1902 taken by Sekino Tadashi. It verified the correlation between Gupumyeonji which was discovered in restoration work in 1970s and a legend of Muyoungtap. And a stair from the hall of Paradise to the main temple was introduced as a stair including Pure Land Buddhism doctrine in many literature materials, but a blue print of Bulguksa in Japanese colonial era and reports of excavation investigation in 1970s verified that it was a temporary stair built by Japan and its meaning was given later. This research checked the scenery of Bulguksa Temple before Japanese colonial era and it is intended for basic data to conduct restoration or reconstruction project in the future.
Bulguksa Temple, a typical temple of Silla was lost during Japanese Invasion of Korea and there are records of reconstructing in its record, Bulguksa Sajeok. There is no record after that. And reconstructing was stopped due to lack of money and repair works were conducted for two times in Japanese colonial era. First repair work was from 1989 to 1919 and second repair work was conducted from 1922 to 1925. After Liberation, Bulguksa Temple Restoration Committee was established in 1969 and the construction has started since 1970 after excavation investigation to complete in 1973. The shape of south arcade without walls in the main temple of Bulguksa was found in a blue print of Bulguksa in Japanese colonial era in National Archives of Korea now and a picture of Bulguksa in 1902 taken by Sekino Tadashi. It verified the correlation between Gupumyeonji which was discovered in restoration work in 1970s and a legend of Muyoungtap. And a stair from the hall of Paradise to the main temple was introduced as a stair including Pure Land Buddhism doctrine in many literature materials, but a blue print of Bulguksa in Japanese colonial era and reports of excavation investigation in 1970s verified that it was a temporary stair built by Japan and its meaning was given later. This research checked the scenery of Bulguksa Temple before Japanese colonial era and it is intended for basic data to conduct restoration or reconstruction project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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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정의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자료를 통하여 불국사의 경관요소 변화를 고찰해보고자 수행하였으며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의 사진과 도면을 통해 변화과정의 확인이 가능한 불국사 대웅전(大雄殿)의 남회랑(南回廊)의 변화와 관련한 구품연지(九品蓮池)와의 의미관계, 극락전(極樂殿)에서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48계단의 진위를 고찰하고자 한다(Figure 1 참조). 연구방법은 첫째, 불국사의 창건당시 모습은 석단, 석교 일부를 제외하고 남아있는 것이 없으므로 현재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일제강점기의 건축도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Kim(1999)은 불국사복원공사로 진행된 불전의 설계를 검토하여 문제점을 제기하고 연구결과의 지속적인 축적이 바탕이 된 신중한 복원이 필요함을 언급하였다[2]. 본 연구를 통하여 일제강점기 이후의 불국사 경관의 변화를 확인하고 그 문제점을 파악하여 향후 복원이나 재정비 사업의 진행시 기초자료로 활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안 방법
· 극락전에서 법화경의 영산불국을 상징하는 대웅전으로 통하여 올라가는 길에는 3열을 지어 계단을 쌓았다.
특히 8월 18일부터 시작된 경주지역 조사에서는 불국사, 분황사 등의 불교유적지들을 직접 다니면서 이와 관련된 유적유물들을 함께 조사하였다. 당시 세키노 타다시의 조사성과물은 1904년에 발간한 「한국건축조사보고(韓國建築調査報告)」[10]에 정리되어 있어 1976년 문화공보부(文化公報部) 문화재관리국(文化財管理局)에서 발간된 「불국사복원공사보고서(佛國寺復元工事報告書)」 [11]와 함께 비교 고찰하였다.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의 사진과 도면을 통해 변화과정의 확인이 가능한 불국사 대웅전(大雄殿)의 남회랑(南回廊)의 변화와 관련한 구품연지(九品蓮池)와의 의미관계, 극락전(極樂殿)에서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48계단의 진위를 고찰하고자 한다(Figure 1 참조). 연구방법은 첫째, 불국사의 창건당시 모습은 석단, 석교 일부를 제외하고 남아있는 것이 없으므로 현재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일제강점기의 건축도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시기에 남겨진 도면은 총 36매로, 1918년의 건축도면이 18매이며, 1923년의 도면이 2매, 1924년의 도면이 16매이다.
둘째, 경주지역의 불교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20세기 초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실시되었는데, 1902년 6월 동경제국대학교수였던 세키노 타다시(關野 貞)는 62일간 한국에 머물면서 경주 개성 서울 주변에 분포한 건축물을 중심으로 문화유적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특히 8월 18일부터 시작된 경주지역 조사에서는 불국사, 분황사 등의 불교유적지들을 직접 다니면서 이와 관련된 유적유물들을 함께 조사하였다. 당시 세키노 타다시의 조사성과물은 1904년에 발간한 「한국건축조사보고(韓國建築調査報告)」[10]에 정리되어 있어 1976년 문화공보부(文化公報部) 문화재관리국(文化財管理局)에서 발간된 「불국사복원공사보고서(佛國寺復元工事報告書)」 [11]와 함께 비교 고찰하였다.
대상 데이터
이후 1969년 5월 12일에 호국정신의 함양과 관광자원으로서의 활용을 명분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와 함께 불국사의 복원공사가 시작되었다. 1969년 8월 29일부터 10월 30일까지 64일간에 걸친 불국사 사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1970년 1월 23일 설계안이 마련되어, 7월 6일 복원고증위원회를 통과하여 확정되었다. 무설전, 관음전,비로전의 공사는 1970년 7월 29일 착공되어 1971년 5월 31일 준공되었다.
1969년 8월 29일부터 10월 30일까지 64일간에 걸친 불국사 사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1970년 1월 23일 설계안이 마련되어, 7월 6일 복원고증위원회를 통과하여 확정되었다. 무설전, 관음전,비로전의 공사는 1970년 7월 29일 착공되어 1971년 5월 31일 준공되었다. 구품연지는 1971년 3월 8일 제9차 불국사 복원 고증위원회가 개최되고 구품연지의 발굴결과를 보고하였으나 불국사 광장의 수목과 유구의 교란과 관람객 수용의 기능을 감안하여 복원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론/모형
또한 영지의 축조는 석조(石造)에 의해 이루어지며 사물의 투영을 위해 잔잔한 수면을 유지해야하므로 물고기나 식물을 기르지 않고 잔잔한 수면을 유지하기 위해 복류수(伏流水)로 입수한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종교적 상징인 불(佛,) 탑(塔), 산봉우리(山) 등을 끌어들여 수면에 비추는 기능을 하는 인경법(引景法)을 사용한다[22]. 이는 불국사의 지당의 특징과 모두 일치하는데 1970년 10월의 발굴조사 결과에서 지당은 후대에 교란이 있었지만 축조방식이 풍화된 사질 생토층을 인위적으로 깎고 길이 0.
성능/효과
넷째, 48계단은 계단 숫자와 관련하여 정토불교와 관련된 48대원, 16관법, 대웅전의 관점에서의 승가시 3도로로 해석되고 있었다. 국가기록원에서 보관중인 일제강점기의 불국사 도면과 사진, 발굴조사자료를 확인한 결과 원래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어 앞으로 48계단에 대한 올바른 스토리를 알릴 필요가 있다.
둘째, 구품연지는 고문헌에서 구품연지의 의미와 영지의 기능이 함께 언급되어 있어 그 명칭을 구품연지로 확정할 수 없고 실제로 발굴조사된 위치가 극락전이 아닌 대웅전 아래 공간이었기 때문에 구품연지의 교리적 의미와 발굴위치가 맞지 않는 의문점을 남기고 있었다. 구품연지는 원래 창건초기에 영지로 조영되었으나 시간이 흐르고 불국사의 사세가 약해짐에 따라 연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어 극락전, 안양문, 연화·칠보교와 교리적 해석에 알맞은 구품연지로 불리게 된 것으로 추측하였다.
셋째, 대웅전 남회랑의 경관을 촬영한 1902년 세키노 타다시의 사진을 확인할 결과 남회랑의 벽체가 없었고 1918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제강점기 도면에서도 벽이 없는 회랑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불국사의 전체적인 경관과 함께 석가탑이 비추면서 아래쪽 지당이 탑영지로서의 기능을 했다는 근거 자료이다.
첫째, 불국사는 19세기 초까지 유지되어 왔으나 그 후 사세가 약해졌고 그 후 일제강점기의 일본의 우월함을 표출하려는 무분별한 수리공사와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자료와 연구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공사를 진행하여 많은 경관 변화가 있었다.
후속연구
넷째, 48계단은 계단 숫자와 관련하여 정토불교와 관련된 48대원, 16관법, 대웅전의 관점에서의 승가시 3도로로 해석되고 있었다. 국가기록원에서 보관중인 일제강점기의 불국사 도면과 사진, 발굴조사자료를 확인한 결과 원래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어 앞으로 48계단에 대한 올바른 스토리를 알릴 필요가 있다.
따라서 현재 48계단은 원래의 경관이 아닐 것으로 판단되고 이와 관련된 교리적 해석 또한 무리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앞으로 48계단이 관람동선에서 중요한 위치이므로 계속 이용은 하겠지만 48대원과 16관법, 승가시 3도로와 같은 내용 보다는 당시 사진이나 발굴내용에 근거하여 현재 경관에 대한 올바른 스토리를 알릴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이 연구의 한계는 대웅전 남회랑과 구품연지와의 관계, 48계단에 한정하여 고찰한 관계로 일제강점기 불국사의 전체적인 경관변화에 대한 검토를 하지 못하였고 다양한 모습이 담긴 사진자료가 많지 않아 일부 문헌에 공개되어 있는 자료를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추후 더 많은 자료가 공개되고 발굴하면 더욱 다양한 경관요소의 변화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추후 더 많은 자료가 공개되고 발굴하면 더욱 다양한 경관요소의 변화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최근에 신라왕경에 대한 발굴조사와 복원사업이 시작되고 있는데 이번 연구를 계기로 불국사의 전체적인 경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이 연구의 한계는 대웅전 남회랑과 구품연지와의 관계, 48계단에 한정하여 고찰한 관계로 일제강점기 불국사의 전체적인 경관변화에 대한 검토를 하지 못하였고 다양한 모습이 담긴 사진자료가 많지 않아 일부 문헌에 공개되어 있는 자료를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추후 더 많은 자료가 공개되고 발굴하면 더욱 다양한 경관요소의 변화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최근에 신라왕경에 대한 발굴조사와 복원사업이 시작되고 있는데 이번 연구를 계기로 불국사의 전체적인 경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질의응답
핵심어
질문
논문에서 추출한 답변
불국사 복원위원회는 언제 설립되었는가?
그 이후의 기록은 없다가 재정상태가 어려워지면서 불국사의 중수는 중단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한 수리공사가 크게 2차에 걸쳐 나누어 시행되었다. 해방이후,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설립되고 발굴조사 후 1970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973년에 준공되었다. 본 연구는 현재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불국사의 일제강점기 건축도면과 1902년 불국사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 세키노 타다시(關野 貞)의 자료, 1973년에 발간된 불국사복원공사보고서를 통해 고찰하였다.
1924년 불국사의 주요 건물에 대한 정비공사 시 어떤 것들을 중수했는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1905년경에 발생한 자하문 회랑의 붕괴와 1910년 경 무설전의 도괴로 불국사의 주요 건물에 대한 정비공사를 1919년에 실시하였고 1924년경에는 전체적인 대규모 정비를 실시하였다(Figure 1 참조). 이 기간 동안 사원전면의 석교, 석단 등의 복원, 다보탑의 완전해체와 법당의 중수가 있었다. 또한 1934년과 1935년 사이에는 대석축의 수리가 있었다[1].
불국사란 무엇인가?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10년(751년) 김대성(金大城, 700-754)에 의해 창건된 여러 불교사상이 종합적으로 구현되어 있는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임진왜란에 왜병의 방화로 석탑과 석교 등을 제외한 2,000여칸의 전각이 모두 전소 되었고 불국사의 재건은 임진왜란 종전 직후부터 시작되어 약 100여년 만인 1659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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