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창세기 38장의 다말 설화를 분석해 보고 특별히 의(義)의 개념에 대하여 비중을 두고 살펴보았다.
창세기 38장 구조분석을 통하여서는 다말의 의(義)가 더 부각되는 구조로 분석하여 살펴보았고, 본문 주석의 과정을 통해서는 38장 자체에 관련한 성서적 지식을 제공하는 역할 수행과 다말이 살고 있는 시대의 사회상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얻는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다말의 행위가 유다에 비하여 왜 의로운 행위였는지에 대하여 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유다가 선택하였던 셀라의 생명을 보호하고자 했던 의로운 행위는 개인의 유익에 머무르는 행위였고, 이에 반해 다말이 선택한 유다의 아이를 갖기 위한 행위는 공동체의 유지와 확장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이어서 구약성서의 다른 본문을 통해 추가적으로 알 수 있었던 의의 개념은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당신의 약속을 지켜나가는 인간의 믿음까지도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있다는 것을 통해 규정되어 있는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고, 관계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본문의 동의평행적인 문장 분석으로 하나님의 의(義)의 행위가 곧 구원(救援) 행위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의(義)의 개념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의로운 과정을 선택한 다말의 행위는 곧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행위로 소급할 수 있다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폰라트와 아이히로트의 견해를 통해 정리한 의(義)는 공통적으로 크레머의 의(義)의 개념 정립에 동의하며 이렇다 정의(定意)할 수 있는 의(義)는 없다고 본다. 누군가의 행위는 공동체 관계개념에 의해서 그 행위가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지에 따라 의(義)가 될 수도 있고 불의(不義)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다말이라는 여인이 현재 2004년에 그 때의 그 모습 그대로 태어나 성서와 똑같이 행동한다면, 그의 행동을 의(□□□□)라고 평가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현재의 공동체 관계 속에서는 형제의 이름을 이어주기 위해 형수와 결혼해야하는 시형제 결혼법이나 고대의 관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형수와 남자형제가 성관계를 맺게 되면 간통으로 고소를 당해야 옳은 것이 지금 이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학이 현저하게 발달한 이 시대에 다말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으나 이와 유사하다고 여겨지는 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었다. 10월 말경에 KBS 2TV에서 방영하는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는데, 형의 불임으로 인해 형수가 아이를 갖지 못하자 대를 이어주기 위해 아우가 정자를 제공하여 인공수정을 하게 된 것이다 (본 프로그램은 실제 생활사를 소재로 한다고 한다.) 형이 죽은 것은 아니나, 대를 이을 수 없었고 대가 끊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부모들이 이러한 결정을 하고 실행 한 것이다. 이것을 과연 시형제 결혼법의 면형된 형태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하여는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한 신중한 문제 인 것 같다. 다만 고대에 형제의 이름을 이어 줄 남자형제의 의무가 있었듯이, 현대에서도 대를 이어갈 자식을 낳는 문제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고, 그렇다면 위와 같은 경우 그 남자 형제가 감당해야 할 의무는 어디까지일까? (인공수정을 통하여 형수는 딸을 낳게 되고, 형제의 부모는 아우가 결혼한 후에도 형수가 아들을 낳게끔 다시 한번 정자를 제공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아우의 부인은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가정이 깨질 위기에까지 놓이게 된다. 형의 가정 역시 아우의 정자를 통해 생긴 아이이므로 아우를 대하는데 껄끄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한다.) 현대의 공동체에서는 자녀를 입양하던가, 한 가정의 존립이 위기에 처할 정도라면 차라리 알지 못하는 이의 정자를 인공수정 하는 등 다른 방법들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기 집안의 씨를 통해 대를 잇고자 한다. 이와 같은 경우 하나님의 의로우신 뜻에 부합하는 의로운 행위는 과연 무엇일까? 필자가 본 논문에 비추어 내린 판단으로는 꼭 그 집안의 씨를 고집하여 두 형제간 사이에 불화를 촉발시키고 두 가정의 화목을 깨는 부모의 입장을 따르는 것 보다는 그 집안의 씨가 아니더라도 두 가정이 모두 화목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선택하여 형의 대를 이어나가는 것이 더 의로운 행위라고 여겨진다.
본고를 통하여 정리하게 된 의(義)의 개념은 현대사회에서 다시금 정립되어야 하는 중요한 개념임을 말하고 싶다. 현대 사회는 윤리적, 종교적인 형식과 틀에 사로 잡혀, 성서에서 말하는 '의(□□□□)'의 적극적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이 겉치레와 율법이라는 형식에 얽매였던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셨는데 지금도 바리새인들과 같이 형식의 잣대로 의(義)와 불의(不義)를 판단하는 일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요즘 한창 단속이 심한 성매매방지법. 이것은 성이 돈에 의해 매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의로운 의도를 가지고 있는 법임은 분명하다. 이 법에 의한 단속이 심화되자 성매매자들은 집단농성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농성자들 중에는 불의한 일인 줄 알면서도 계속적으로 고소득을 얻고자 하는 이익집단이 있을 것이고, 반면에 자의든 타의든 그 곳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더 이상 적응하여 ...
본 논문은 창세기 38장의 다말 설화를 분석해 보고 특별히 의(義)의 개념에 대하여 비중을 두고 살펴보았다.
창세기 38장 구조분석을 통하여서는 다말의 의(義)가 더 부각되는 구조로 분석하여 살펴보았고, 본문 주석의 과정을 통해서는 38장 자체에 관련한 성서적 지식을 제공하는 역할 수행과 다말이 살고 있는 시대의 사회상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얻는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다말의 행위가 유다에 비하여 왜 의로운 행위였는지에 대하여 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유다가 선택하였던 셀라의 생명을 보호하고자 했던 의로운 행위는 개인의 유익에 머무르는 행위였고, 이에 반해 다말이 선택한 유다의 아이를 갖기 위한 행위는 공동체의 유지와 확장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이어서 구약성서의 다른 본문을 통해 추가적으로 알 수 있었던 의의 개념은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당신의 약속을 지켜나가는 인간의 믿음까지도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있다는 것을 통해 규정되어 있는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고, 관계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본문의 동의평행적인 문장 분석으로 하나님의 의(義)의 행위가 곧 구원(救援) 행위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의(義)의 개념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의로운 과정을 선택한 다말의 행위는 곧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행위로 소급할 수 있다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폰라트와 아이히로트의 견해를 통해 정리한 의(義)는 공통적으로 크레머의 의(義)의 개념 정립에 동의하며 이렇다 정의(定意)할 수 있는 의(義)는 없다고 본다. 누군가의 행위는 공동체 관계개념에 의해서 그 행위가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지에 따라 의(義)가 될 수도 있고 불의(不義)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다말이라는 여인이 현재 2004년에 그 때의 그 모습 그대로 태어나 성서와 똑같이 행동한다면, 그의 행동을 의(□□□□)라고 평가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현재의 공동체 관계 속에서는 형제의 이름을 이어주기 위해 형수와 결혼해야하는 시형제 결혼법이나 고대의 관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형수와 남자형제가 성관계를 맺게 되면 간통으로 고소를 당해야 옳은 것이 지금 이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학이 현저하게 발달한 이 시대에 다말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으나 이와 유사하다고 여겨지는 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었다. 10월 말경에 KBS 2TV에서 방영하는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는데, 형의 불임으로 인해 형수가 아이를 갖지 못하자 대를 이어주기 위해 아우가 정자를 제공하여 인공수정을 하게 된 것이다 (본 프로그램은 실제 생활사를 소재로 한다고 한다.) 형이 죽은 것은 아니나, 대를 이을 수 없었고 대가 끊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부모들이 이러한 결정을 하고 실행 한 것이다. 이것을 과연 시형제 결혼법의 면형된 형태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하여는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한 신중한 문제 인 것 같다. 다만 고대에 형제의 이름을 이어 줄 남자형제의 의무가 있었듯이, 현대에서도 대를 이어갈 자식을 낳는 문제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고, 그렇다면 위와 같은 경우 그 남자 형제가 감당해야 할 의무는 어디까지일까? (인공수정을 통하여 형수는 딸을 낳게 되고, 형제의 부모는 아우가 결혼한 후에도 형수가 아들을 낳게끔 다시 한번 정자를 제공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아우의 부인은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가정이 깨질 위기에까지 놓이게 된다. 형의 가정 역시 아우의 정자를 통해 생긴 아이이므로 아우를 대하는데 껄끄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한다.) 현대의 공동체에서는 자녀를 입양하던가, 한 가정의 존립이 위기에 처할 정도라면 차라리 알지 못하는 이의 정자를 인공수정 하는 등 다른 방법들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기 집안의 씨를 통해 대를 잇고자 한다. 이와 같은 경우 하나님의 의로우신 뜻에 부합하는 의로운 행위는 과연 무엇일까? 필자가 본 논문에 비추어 내린 판단으로는 꼭 그 집안의 씨를 고집하여 두 형제간 사이에 불화를 촉발시키고 두 가정의 화목을 깨는 부모의 입장을 따르는 것 보다는 그 집안의 씨가 아니더라도 두 가정이 모두 화목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선택하여 형의 대를 이어나가는 것이 더 의로운 행위라고 여겨진다.
본고를 통하여 정리하게 된 의(義)의 개념은 현대사회에서 다시금 정립되어야 하는 중요한 개념임을 말하고 싶다. 현대 사회는 윤리적, 종교적인 형식과 틀에 사로 잡혀, 성서에서 말하는 '의(□□□□)'의 적극적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이 겉치레와 율법이라는 형식에 얽매였던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셨는데 지금도 바리새인들과 같이 형식의 잣대로 의(義)와 불의(不義)를 판단하는 일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요즘 한창 단속이 심한 성매매방지법. 이것은 성이 돈에 의해 매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의로운 의도를 가지고 있는 법임은 분명하다. 이 법에 의한 단속이 심화되자 성매매자들은 집단농성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농성자들 중에는 불의한 일인 줄 알면서도 계속적으로 고소득을 얻고자 하는 이익집단이 있을 것이고, 반면에 자의든 타의든 그 곳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더 이상 적응하여 살 수 없는 이들이 생계의 유지를 위해 농성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윤리적이고 형식적인 의(義)의 개념으로 이들을 정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성서가 선포하는 적극적인 의(義)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국가가 이들의 생계를 보장해 줄만한 제도도 매우 미미한 가운데 섣불리 이들의 농성을 불의하다고만 판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비단 이러한 새로운 공동체 관계를 통한 의(義)의 의미가 사회에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의 교회현장에서도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잣대에 의한 판단이 쉽게 이루어지고 있다. 정작 공동체 관계를 통한 의(義)의 의미를 앞서 깨달아야 할 대상은 기독교인들이라고 생각된다. 성서를 끊임없이 읽으면서도 성서의 의미를 오용하고 제대로 깨랄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창촌에 가서 그들을 전도하려는 많은 노력들이 있으나 그러한 노력들로 누군가가 어느 교회에 출석하려 했을 때 그들이 적응하고 기쁨으로 예배드릴 수 있도록 그 교회의 기독교인들은 얼마나 준비하고 있을까? 그들을 대우하는 행위와 마음이 한결같은가?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통하여 많은 형식들을 배우고 종교적인 이름으로 사람이나 행위를 더욱 쉽게 판단 짓게 된다. 이러한 경우는 성(性)에 관련된 경우에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의(義)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국가적으로 확대되어 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하는 이유를 정당화시키려 하면 미국이 전쟁을 일으키는 이유를 정당화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의(義)의 오용된 해석은 유대인들에게도 일어났는데 그것은 아이히로트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유대교 내부의 여러 집단들 간의 파괴적인 싸움의 와중에서 사람들은 이러한 이상(理想)을 보지 못하게 되었고 오직 계약 백성의 회복만을 생각하였다. 더욱이 이방과 관련해서는 외세의 강압적인 독재는 사람들이 이방 세계를 징벌할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의를 끌어들이는 것을 촉진시켰다. (시9:5; 43:1, 48:11; 76:10; 129:4 미 7:9) 성서에서 각 본문마다 나타내고자 하는 의(義)의 개념은 본문에 따라 차이가 있고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다. 창세기 38장에서 나타난 의(義)의 개념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위에서 제시한 몇 가지 경우가 현대 공동체의 관계개념을 통해서 혹은 하나님의 인간들에 대한 약속이나 계획에 있어서 타당하고 의로운 행위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 기독교인들, 국가 지도자들에게 창세기 38장의 다말이야기를 해 주고자 한다. 이 다말 이야기는 의로운 필자가 불의한 어느 대상에게 해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형식에 얽매여 성서가 밝히고자 하는 '의(□□□□)'를 분별하지 못하는 필자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들려져야 할 이야기인 것이다.
본고를 통한 '의(□□□□)'의 깨달음은 아주 작은 실천으로부터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해가 질 무렵에는 그 담보물을 반드시 그에게 되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가 담보로 잡혔던 그 겉옷을 덮고 잠자리에 들 것이며, 당신들에게 복을 빌어 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의로운) 일입니다.
-신명기 24장 13절-
본 논문은 창세기 38장의 다말 설화를 분석해 보고 특별히 의(義)의 개념에 대하여 비중을 두고 살펴보았다.
창세기 38장 구조분석을 통하여서는 다말의 의(義)가 더 부각되는 구조로 분석하여 살펴보았고, 본문 주석의 과정을 통해서는 38장 자체에 관련한 성서적 지식을 제공하는 역할 수행과 다말이 살고 있는 시대의 사회상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얻는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다말의 행위가 유다에 비하여 왜 의로운 행위였는지에 대하여 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유다가 선택하였던 셀라의 생명을 보호하고자 했던 의로운 행위는 개인의 유익에 머무르는 행위였고, 이에 반해 다말이 선택한 유다의 아이를 갖기 위한 행위는 공동체의 유지와 확장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이어서 구약성서의 다른 본문을 통해 추가적으로 알 수 있었던 의의 개념은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당신의 약속을 지켜나가는 인간의 믿음까지도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있다는 것을 통해 규정되어 있는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고, 관계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본문의 동의평행적인 문장 분석으로 하나님의 의(義)의 행위가 곧 구원(救援) 행위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의(義)의 개념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의로운 과정을 선택한 다말의 행위는 곧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행위로 소급할 수 있다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폰라트와 아이히로트의 견해를 통해 정리한 의(義)는 공통적으로 크레머의 의(義)의 개념 정립에 동의하며 이렇다 정의(定意)할 수 있는 의(義)는 없다고 본다. 누군가의 행위는 공동체 관계개념에 의해서 그 행위가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지에 따라 의(義)가 될 수도 있고 불의(不義)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다말이라는 여인이 현재 2004년에 그 때의 그 모습 그대로 태어나 성서와 똑같이 행동한다면, 그의 행동을 의(□□□□)라고 평가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현재의 공동체 관계 속에서는 형제의 이름을 이어주기 위해 형수와 결혼해야하는 시형제 결혼법이나 고대의 관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형수와 남자형제가 성관계를 맺게 되면 간통으로 고소를 당해야 옳은 것이 지금 이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학이 현저하게 발달한 이 시대에 다말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으나 이와 유사하다고 여겨지는 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었다. 10월 말경에 KBS 2TV에서 방영하는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는데, 형의 불임으로 인해 형수가 아이를 갖지 못하자 대를 이어주기 위해 아우가 정자를 제공하여 인공수정을 하게 된 것이다 (본 프로그램은 실제 생활사를 소재로 한다고 한다.) 형이 죽은 것은 아니나, 대를 이을 수 없었고 대가 끊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부모들이 이러한 결정을 하고 실행 한 것이다. 이것을 과연 시형제 결혼법의 면형된 형태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하여는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한 신중한 문제 인 것 같다. 다만 고대에 형제의 이름을 이어 줄 남자형제의 의무가 있었듯이, 현대에서도 대를 이어갈 자식을 낳는 문제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고, 그렇다면 위와 같은 경우 그 남자 형제가 감당해야 할 의무는 어디까지일까? (인공수정을 통하여 형수는 딸을 낳게 되고, 형제의 부모는 아우가 결혼한 후에도 형수가 아들을 낳게끔 다시 한번 정자를 제공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아우의 부인은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가정이 깨질 위기에까지 놓이게 된다. 형의 가정 역시 아우의 정자를 통해 생긴 아이이므로 아우를 대하는데 껄끄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한다.) 현대의 공동체에서는 자녀를 입양하던가, 한 가정의 존립이 위기에 처할 정도라면 차라리 알지 못하는 이의 정자를 인공수정 하는 등 다른 방법들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기 집안의 씨를 통해 대를 잇고자 한다. 이와 같은 경우 하나님의 의로우신 뜻에 부합하는 의로운 행위는 과연 무엇일까? 필자가 본 논문에 비추어 내린 판단으로는 꼭 그 집안의 씨를 고집하여 두 형제간 사이에 불화를 촉발시키고 두 가정의 화목을 깨는 부모의 입장을 따르는 것 보다는 그 집안의 씨가 아니더라도 두 가정이 모두 화목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선택하여 형의 대를 이어나가는 것이 더 의로운 행위라고 여겨진다.
본고를 통하여 정리하게 된 의(義)의 개념은 현대사회에서 다시금 정립되어야 하는 중요한 개념임을 말하고 싶다. 현대 사회는 윤리적, 종교적인 형식과 틀에 사로 잡혀, 성서에서 말하는 '의(□□□□)'의 적극적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이 겉치레와 율법이라는 형식에 얽매였던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셨는데 지금도 바리새인들과 같이 형식의 잣대로 의(義)와 불의(不義)를 판단하는 일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요즘 한창 단속이 심한 성매매방지법. 이것은 성이 돈에 의해 매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의로운 의도를 가지고 있는 법임은 분명하다. 이 법에 의한 단속이 심화되자 성매매자들은 집단농성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농성자들 중에는 불의한 일인 줄 알면서도 계속적으로 고소득을 얻고자 하는 이익집단이 있을 것이고, 반면에 자의든 타의든 그 곳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더 이상 적응하여 살 수 없는 이들이 생계의 유지를 위해 농성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윤리적이고 형식적인 의(義)의 개념으로 이들을 정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성서가 선포하는 적극적인 의(義)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국가가 이들의 생계를 보장해 줄만한 제도도 매우 미미한 가운데 섣불리 이들의 농성을 불의하다고만 판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비단 이러한 새로운 공동체 관계를 통한 의(義)의 의미가 사회에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의 교회현장에서도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잣대에 의한 판단이 쉽게 이루어지고 있다. 정작 공동체 관계를 통한 의(義)의 의미를 앞서 깨달아야 할 대상은 기독교인들이라고 생각된다. 성서를 끊임없이 읽으면서도 성서의 의미를 오용하고 제대로 깨랄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창촌에 가서 그들을 전도하려는 많은 노력들이 있으나 그러한 노력들로 누군가가 어느 교회에 출석하려 했을 때 그들이 적응하고 기쁨으로 예배드릴 수 있도록 그 교회의 기독교인들은 얼마나 준비하고 있을까? 그들을 대우하는 행위와 마음이 한결같은가?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통하여 많은 형식들을 배우고 종교적인 이름으로 사람이나 행위를 더욱 쉽게 판단 짓게 된다. 이러한 경우는 성(性)에 관련된 경우에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의(義)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국가적으로 확대되어 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하는 이유를 정당화시키려 하면 미국이 전쟁을 일으키는 이유를 정당화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의(義)의 오용된 해석은 유대인들에게도 일어났는데 그것은 아이히로트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유대교 내부의 여러 집단들 간의 파괴적인 싸움의 와중에서 사람들은 이러한 이상(理想)을 보지 못하게 되었고 오직 계약 백성의 회복만을 생각하였다. 더욱이 이방과 관련해서는 외세의 강압적인 독재는 사람들이 이방 세계를 징벌할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의를 끌어들이는 것을 촉진시켰다. (시9:5; 43:1, 48:11; 76:10; 129:4 미 7:9) 성서에서 각 본문마다 나타내고자 하는 의(義)의 개념은 본문에 따라 차이가 있고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다. 창세기 38장에서 나타난 의(義)의 개념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위에서 제시한 몇 가지 경우가 현대 공동체의 관계개념을 통해서 혹은 하나님의 인간들에 대한 약속이나 계획에 있어서 타당하고 의로운 행위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 기독교인들, 국가 지도자들에게 창세기 38장의 다말이야기를 해 주고자 한다. 이 다말 이야기는 의로운 필자가 불의한 어느 대상에게 해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형식에 얽매여 성서가 밝히고자 하는 '의(□□□□)'를 분별하지 못하는 필자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들려져야 할 이야기인 것이다.
본고를 통한 '의(□□□□)'의 깨달음은 아주 작은 실천으로부터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해가 질 무렵에는 그 담보물을 반드시 그에게 되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가 담보로 잡혔던 그 겉옷을 덮고 잠자리에 들 것이며, 당신들에게 복을 빌어 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의로운) 일입니다.
-신명기 24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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